태극의 중심인 선바위와 남이포
꽃과 빛의 고장이며 문향인 영양,
선바위와 남이포에 오면 산자수명한 자연경관이
있다.
선바위의 기상과 호연지기와 해와 달의 정기가 서려
있는 '선바위와 남이포'는 자연이 만든 하나의 작품이다.
이 곳의 위치는 행정구역상으로 경북 영양군 입암면
신사리 선바위마을이며 울산 신고산선인 국도 31번과
입암면에서 청기면으로 가는 군도옆 석문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환경적으로는 경북내에서 최고 높으며 영산인
일월산에서 내려온 흥림산,대박산을 거처 내려온
자양산 산록인 자금병(병풍절벽)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일월산 동쪽과 남쪽에서 발원해 흐르는 반변천과 일월산
서쪽에 발원하여 정족리까지 동천으로 와서 청기면 소재지에
있는 청계정을 지나 청계천이 되어 입암면 연당마을의 서석지
앞을 지나 반변천에 합류하는 지점에 남이포가 위치하고
있다.
유학의 경전인 논어에 요산요수樂山樂水,
인자일산仁者一山하고
지자 일수智者一水라고 했다.
군자의 덕을 쌓는 어질인仁을 산에서 얻고,
사람의 슬기와 지혜를 물에서 얻는다는 뜻이다.
바로 이 곳에 깨끗한 물과 아름다운 산이 있으니,
어진 마음을,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선바위는 바위가 촛대처럼 서 있어서 선바위라고하며
한자로는 설립(立), 바위암(巖), 바로 입암이며,
행정구역 이름, 입암면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남이포는 남이 장군이 민란을 일으킨 아룡과 자룡의
형제들을 토벌하고 상징물을 남겼다는 내용의 전설과 관련
되어 남이포라고하며 자금병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남이정'
아래 물속에 있다.
자연경관이 아름다워서 조선시대 산수화의 거장인
'겸제 정선'선생님의 '진경산수화'에 '쌍계 입암'이라는
제목하에 그려진 선바위풍경산수화가 있으며,
서석지를 만든 석문 정영방 선생님의
문집과 서석지 기문에 산수의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한
기록이 있다.
또한 일월산정기와 일월성신의 보살핌으로 뼈를 다친거나
골다공증 치료에 약효가 뛰어난 '산골'이 자금병(병풍바위)
석벽속에 있기도하다.
옛날에는 이 것을 채취해서 한방치료 약재로 사용했으며
당시에 채취를 했던 장소가 뚜렷이 남아 있다.
한편 기복신앙을 믿는 사람들은 현재에도 여기에 와서 소원을
기원하며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그 흔적 또한 많이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자연의 향기,호연지기,
해와 달의 정기를 받아 가려고 소원 비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 남이포와 선바위 전설
남이포는 조선 세조 때,남이 장군이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룡,자룡 형제를 토벌한 곳이라 하여 이름이 남이포 또는
남이개라고 한다.
옛날 석백리(지금의 신사리)에 있는 운룡지에 있는 지룡의
아들로 아룡,자룡 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역모를 꾀하여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원래 이들은 용의 아들이라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재주를
가졌으므로 감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이리하여 조정에서 무용이 뛰어 난 남이 장군에게 토벌할
것을 명하여, 이 곳 반변천 강변에서 양군이대치하여 싸우게
되었다.
먼저 양군의 대장인 남이 장군과 아룡,자룡이 치열한 칼싸움이
시작되었다. 남이 장군의 뛰어난 검술에 아룡,자룡이 몰리게
되자,
이들은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랐고, 남이 장군도 영마의 힘을
빌려 함께 날아 올랐다.
대치하고 있던 양군은 함성을 지르다가 그만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잠시후 공중에서 남이 장군의 기합소리와 함께 아룡,자룡의
목이 땅으로 떨어 지니,관군의 함성이 진동하였다.
역도의 괴수를 물리친 남이 장군이 용마를 타고 유유히 내려
오다가 높이 솟은 석벽에 자기 얼굴 초상을 검끝으로 새기고
강변에 내려 오니
반란을 꾀하던 무리들 까지도 장군의 뛰어난 무용에 감탄하여
앞을 다투어 항복하였으며, 이에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남이포라 불러 왔다.
당시 남이 장군이 부근 지형을 살펴보니 청계천 물길을
돌리지 않으면 도적의 무리가 다시 일어 날 것 같아서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다
하는데, 마지막 칼질을 한 흔적이 지금의 선바위라 전해
오고 있다.
이곳 선바위 아래 남이포와 자양산끝 석벽 앞에
10여년전에 남이정을 지어서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있으며
매년 3~4월에 남이 장군을 모시는 무속인들이 찾아와서
소원을 빌기도 한다.
*자연과지명에 담긴 문화
0.돌배기ㆍ석백(石百)
원래 생부리의 일부로서 임천(臨泉) 북쪽애 있는
마을이다.
마을과 뒷산에 흰 돌이 많이 박혀 있다는 뜻으로
돌배길 불리어지고 있다.
돌배기의 큰 돌을 사현암(四賢岩)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영방(鄭榮邦)ㆍ이준(李峻)ㆍ김시온(金是ㆍ)
ㆍ오익(吳瀷) 선생이 때때로 모여 천렵(川獵)을 하고
글모임을 가졌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김구서(65) 제보).
석백이라 함은 돌배기를 한자로 뒤쳐서 적은 것으로
보이며 석(石)은 한자의 뜻을, 백(百)은 소리를 빌려다
적은 것이다.
0.연당(蓮塘)
조선 초기 생부동(生部洞)이라 하여 범위는 연당ㆍ임천ㆍ
돌배기ㆍ선바위ㆍ주역(駐易) 일대이며 광해군(1613) 때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선생이 은거한 후 이 일대를
임천(臨泉)이라 하였는데 그 후 지금의 연당에 경정(敬亭)
과 주일재(主一齋)를 짓고,
서석지(瑞石池 민속자료 106 호)를 만들고 못 가운데
부용화를 심었으므로 연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정위상(75) 제보).
연당의 연(蓮)은 부용화를 뜻하는 것이요,
주일재를 생각해 보면 한 임금을 섬기겠다는
석문(石門) 선생의 올곧은 신념이 드러나 있다.
0.임천(臨泉ㆍ林川)
주선 초기까지 생부동이 었으며 조선조 광해군 때
연당ㆍ임천ㆍ돌배기 일대를 임천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연당에 속한 자연 촌락이다.
0.주역(注易ㆍ駐易)
선바우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이 곳에 역이 있었다고 전하나 이는 근거가 희박하며
약 200년 전 경상감사가 쉬어 간 곳이라는 설과
옛날 장사꾼들이 물건을 바꾸던 곳이었다는 말이
어울려져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오윤달(75) 제보).
주역이란 한자를 풀이하면 말을 갈아 탄다고
함이니 간이역 정도의 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0.운용지(雲龍池) (상게서)
입암면 대천리(大泉里)에 있는 못 이름.
여기에는 원래 신라 시대에 큰 절이 있었는데,
부처가 노하여 용의 입을 막자 용이 꼬리를 치며
벼락을 떨어뜨려 절이 파괴되고 연못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0.소나무 제단(상게서)
입암면 아래 신사리에 있는 소나무.
부자집 조씨의 며느리가 손님이 오는 것을 싫어하여,
스님에게 손님이 오지 않도록 하여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스님이 마을 앞 용두산 줄기를 끊으라고 하매,
그대로 실천한 결과 손님은 오지 않았으나
결국 조씨 가문도 망하게 되었다.
이에 동민이 화가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소나무 두 그루를 심고 제단을 조성하여,
정월 15일에 고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하는 행복영양'이 영양군의
행정슬로건이다.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며 자연속에서 문화를 꽃피우고
역사의 발전을 이루며 살아간다고 한다.
인간의 행복은 자연에서 찾을 수 있고,자연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유일한 준거이다.
이 곳에는 자연의 맛이 있고,전통의 멋이 있으며,고향의
정이 있는 곳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자연과 하나 되는 과정을 통해서 건강한 삶을 위한
슬로우라이프의 여유를 느껴보는데 도움이될 것이라
사료 된다.
선바위와 남이포 주변에 '분재수석 야생화전시관'
'영양고추홍보전시관' '동굴형 민물고기전시관'
'석문교와 음악분수' '산책로 등산로 자연탐방로'
'남이정'이 있다.
편의 시설로 '특산물 판매장''산채요리 전문식당'
목공예와 정원수를 키우는 '연풍농원'이 있으며 조금
떨어져 1키로미터 정도 지점에 '산촌생활박물관'이
있고, 2키로미터 정도 지점에 '서석지'가 있으며
3키로미터 정도 지점에 국보187호인
'봉감모전5층석탑'이 있다.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노래를 되새겨 본다.
반소사음수飯蔬食飮水 - 나물 먹고 물마시고
곡괭이침지曲肱而枕之 - 팔을 베고 누웠으니
악역재기중의樂亦在己中矣 - 나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구나.
불의이부차귀不義而富且貴 - 의롭지 아니한 부자와
귀함은
어아여부운於我如浮雲 - 나에게는 하늘의 뜬구름어라.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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