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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神父의 - 외줄위를 걷는 人生
6. 총장사퇴 결의안
졸업식이다! 온 가족이 다 모여 사각모를 식구대로 돌아가며 쓰고 사진을 찍고 또 찍으며 집안의 첫 대학 졸업식을 나름대로 즐겼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기대와 꿈은 많이 축소되어 버렸지만 연극반 선후배들 법대 친구들 이런 저런 인연의 기념사진 찍고 싶어 하는 선후배들이 대거 와서 아버지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었고 초등학교 동창들까지 찾아와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사교적인 부모의 영향 탓인지 나도 친구가 많았다.
한참 정신없이 사진을 찍는데 문득 아버지가 몹시 추위를 타면서 언뜻 보기에도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아쉬워하는 지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아버지는 겁이 날 정도로 안색이 좋지 않았다.
자식의 대학원 입학에 짓눌려 버린 것이다.
어젯밤 대학원에 필히 다녀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무거운 한숨을 내 쉬며 한 말씀 하셨다.
“경일아! 연년생인 세 여동생들 다 아직 시집도 못 보내고 있다.
아들만 자식이고 딸자식은 자식이 아니냐?
대학원은 네 마음대로 간 것이니 나는 학비 밖에 못 대준다.”
도저히 철이 들지 않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화를 낼 기력조차 없는 것 같았다.
자식 잘못 키웠다고 탄식 만 할 뿐.
아버지의 새까맣게 탄 얼굴은 속에서부터 불이 붙어 탄 것이지 햇빛에 탄 게 아니란 것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불효에 대한 죄책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발길이 어느새 성당 문 앞에 다다랐다.
대학생회 학생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사실 내용을 들어보면 성경공부를 빙자한 의식화교육 즉 사회과학공부에 가까웠다.
공부가 끝나자 모두들 일어나 광화문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싼 고등어구이를 안주로 한잔하고 이차로 인근에 있는 인삼주 집으로 갔다.
사십대 초반의 술집주인은 온 집안이 금산에서 인삼재배를 하고 있다며 내가 가면 소주에 인삼가루를 꼭 넣어주었다.
몇 번 갔더니 그는 내가 참석하는 술자리의 술값은 안 받겠다고 했다.
돈은 벌만큼 벌었다며. 그 대신 가끔 와서 얘기상대가 되어달라고 했다.
나는 공짜는 부담스럽다고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만큼 내겠다고 덕담을 했지만 못 주는 날도 많았다.
당시 대학생회는 서울농대 학생들이 와서 농활세미나를 지원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학생운동의 커리큘럼을 대하며 내용이 일방적이라 설득력이 오히려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하튼 군필의 복학생이었던 나는 나이 때문에 선배대접을 받았다.
대학생회의 술자리는 항상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열정으로 가득 찼고 가난한 지방출신 자취생들은 술자리가 파해도 집에 갈 생각이 없었다.
가 보았자 썰렁한 방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니.
버스를 타기 위해 세종문화회관 앞에 우루루 몰려 서 있는데 누군가가 제안을 했다.
주머니를 털어서 술 한잔 더 먹자고. 일제히 있는 돈을 다 꺼내보았으나 동전 몇 닢 뿐.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그들에게 건달경력이 풍부한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흩어져 나름대로 실력을 발휘해 돈을 만들어서 오분 뒤에 다시 모이자고.
내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정류장에 서 있는 아가씨들 중 느낌이 오는 한사람을 찍어 무용하듯 스텝을 밟으며 다가가서 최대한 우호적인 미소를 지으며 크고 과장된 목소리로 ‘한푼 줍쇼’하고 차비를 구걸하니 그녀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친구들과 내기하는 거예요?’ 하더니 선뜻 천원을 주었다.
두어명의 인정 많은 후원자를 만나 주머니를 그런 대로 채워 돌아가니 다들 머리를 맞대고 희희낙락 동전을 세는 모습이 꽤 수입이 괜찮은 모양이었다.
특히 눈동자가 밤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하다는 평을 듣는 외대에 다니는 남학생이 돈을 가장 많이 얻어 왔다.
구걸하는 것도 얼굴이 도와주어야 하는 모양이다.
세종문화회관 돌계단에 앉아서 막차시간에 쫓기며 새우깡을 안주로 마시는 소주도 독특하고 짜릿한 맛이 있다.
심형이 자취방에 놀러왔다.
대학선배이자 내가 술친구 노릇도 해 주고 몸도 풀 겸 다니는 합기도도장 사범이다.
그는 대뜸 “너 이 동네 연못시장에 사는 연영과 선배에게 얻어 맞았다며?”
“어떻게 알았어요?”
“동네에 소문 다 났지.”
“벌써 다 지나간 일인데요?”
“아니야. 내 수제자가 얻어 맞았다는데 스승이 가만있어서는 안되지.”
“기술도 안 가르쳐주고 술만 먹이면서 무슨 선생이야 선생이.”
“허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난번에 가르쳐 준 것도 특수부대에서 가르치는 살수 중의 살수야. 알아 몰라?
힘과 속도. 그게 관건이야. 알아?
어쨌든 그래서 오늘 저녁에 중간보스들 불러 모았어. 정식으로 사과를 받아야지.”
“다 알아. 형이 내 핑계 대고 또 술판 벌린 다는 걸.”
흑석동에는 자유당 시절부터 내려오는 정치깡패를 비롯해 사창가를 주무르는 주먹들이 있었다.
연영과 선배 중에도 흑석동 새끼주먹이 한 사람 있었다.
당시 우리 연극반과 연극영화과는 서로를 향해 아마추어니 프로니 하면서 서로 돕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그런 사이였다.
한번은 우리가 정기공연을 하는데 성질 나쁜 연영과 선배가 학교 변전실에 들어가 대학극장 전원을 내리는 통에 궁여지책으로 무대 정면에 촛불을 켜 놓고 공연을 하는 해프닝을 벌인 적이 있었다.
연락을 받고 극장에 올라가 보니 배우들과 스텝들이 울분을 못 참아 땅을 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술 취한 연영과 선배가 지나가다 와서 술주정까지 하는 통에 성질 못된 나와 시비가 붙었는데 상대의 주먹이 얼마나 빠른지 변변히 상대도 못해 보고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돈을 주고 연영과 학생을 고용해 조명을 맡기는 것으로 해결을 보았는데 그 사건을 누구에게 들은 모양이다.
건이 터지고 시간이 한참 지난 일이라 김 빠진 맥주 격이 된 셈인데 판 벌려놓은 거 거절하기도 어려워서 형과 함께 술자리에 나갔다.
약속된 술집에는 이미 나이 들어 얼굴만 험한 세 명의 늙은 주먹들이 인근 방석집 아가씨들을 옆구리에 꿰차고 기분을 내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앉아 통성명을 나누니 상대를 만났다는 듯 과거 무용담을 느물거리며 흉물을 떨기 시작했다.
무슨 파에 누구를 주먹으로 슬쩍 쳤는데도 광대뼈가 부러져나갔다는 둥 꿀밤을 때렸는데 머리뼈가 내려앉았다는 식의 수호지 양산박 산채에서나 들을 혼자만 신나는 얘기가 한참 계속되었다.
격파시범대회의 단골 출연자인 형님이 장기자랑을 하려는 듯 손 날로 병 모가지를 날릴 태세를 취하자 끝날 것 같지 않던 얘기가 뭉텅 꼬리가 잘리더니 이번에는 동석한 아가씨 괴롭히기 시간으로 분위기를 바꿨다.
여인 앞에서는 유난히 수줍음을 타며 약해지는 형님을 골탕먹이려는 작전인 것 같았다.
갑자기 일행 중에 제일 인상 더럽게 생긴 사나이가 아가씨들에게 한 사람씩 자기 이름을 대면서 젖을 꺼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모두들 인생 포기한 얼굴로 옷 단추를 푸는데 한 아가씨가 저는 ‘짝젖’이라 죽어도 내놓을 수 없다고 버텼다.
짐승 같은 놈들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파장이 난 분위기를 추스르려고 아무리 을러대도 그녀는 맞아죽을 각오를 했다는 듯 막무가내 어금니를 꽉 물고 탁자 위에 엎드려 버렸다.
술잔을 얼굴에 끼얹고 주먹이 날라 갈 즈음 결국 형님이 말려서 일이 더 커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단호한 태도와 용기가 인상적이었다.
짝젖과 내가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그 뒤에도 짝젖은 내 이웃이 되어 살면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인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해 주는 내 인생의 선생 같은 여자였다.
술자리가 파하고 형님이 자기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데 같이 동행하자고 내 손목을 잡았다.
이 형에게 한번 붙들리면 그걸로 끝이다.
빠져나갈 수가 없다.
깊은 밤에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한참 가서 쪽방 문을 두드리니 웬 젊은 여자가 아기를 업고 나와 우리를 맞이한다.
형님은 푸석 푸석한 얼굴의 그녀 앞에서 할 말을 잊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였다.
“형! 할 말 없으면 그냥 가지. 통금시간도 다 되어가고.”
“응 그래. 그러지 뭐. 그러면 다음에 또....”
문제의 그녀는 사랑한다고 통사정하는 형님을 차버리고 독일에 간호사로 갔다가 떠돌이 놈팡이에게 걸려들어 애만 하나 덜렁 낳아 가지고 홀로 귀국한 딱한 처지의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 알고 있을까?
학교에서 형님이 얼마나 유명한 인물인지.
여름이고 겨울이고 학교 잔디밭에서 혼자 술 마시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자는 철의 사나이.
우리는 가끔 학교교정의 눈밭에 소처럼 누워 있는 형님을 목격하고 무술인이 초능력을 자랑하려고 일부러 그러고 있는 줄 알았다.
발바닥이 운동화 밑창만큼 두꺼워 사시사철 늘 맨발로 다니는 괴짜이자 격파기술과 함께 무술의 대가이지만 첫사랑 여인을 못내 잊지 못해 가슴속 심화가 도무지 꺼지지 않는 순정파 사나이다.
내 문제는 그 연영과 선배가 며칠 뒤에 나를 찾아와 사과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신문학과 대학원 입학생들이 한자리에 처음 모여 상견례를 하였다.
면면을 살펴보면 현재 경제신문사 간부로 계신 분을 비롯해 동아일보 현직기자 '새마을'이라는 잘 나가는 잡지편집책임자 등 평범하게 대학졸업하고 들어온 학생은 반도 안 되었다.
교수진도 정년은퇴 하신 원로교수 독일에서 학위 받고 막 돌아오신 분 교육방송국 간부 등 다양하였다.
안국동 뒷골목의 어느 고급 요리 집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불필요한 시중을 불편하게 들어주는 묵직한 점심 식사를 반주와 함께 곁들여 하며 걸판지게 개강파티를 하였다.
나는 하나마나한 체면치레용 시간 때우기 식 대화가 인내심 경진대회 형식으로 진행되는 한증탕 분위기에 먹은 게 체했는지 두통이 심하게 오고 하품이 계속 되더니 사래가 들려 기침을 요란하게 하고 급기야 딸꾹질까지 함으로써 동석한 분들께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에는 교수들이 내 이름은 모두 다 외우고 있었다.
파티가 끝나고 학생신분의 아랫것들은 따로 모여 뒷 풀이를 하였다.
나는 여전히 속이 불편해 찻집 여주인을 불러 빌린 바늘로 손가락 끝을 찔러 시커먼 피를 뽑았다.
새마을운동을 주도하는 관변잡지를 내던 분은 갑자기 양지에서 음지로 바뀐 시국의 급변에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고 다시는 정치색을 띤 직업을 갖지 않겠다고 얼이 빠진 사람처럼 혼잣말로 되뇌곤 했다.
동아일보 기자는 아예 사표를 품에 넣고 다닌다며 기사를 만들어 올려도 편집에서 다 잘려 버린다고 했다.
기자생활을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사연을 들으니 무언가 위험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었다.
냄새 맡는 데는 귀신인 사냥개의 후각을 가진 기자들이 무얼 보았는지 지레 겁을 먹고 있는 데다 누군가 기자들이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도록 철사 줄로 재갈을 물려 놓은 게 분명했다.
학교로 돌아오니 긴급조치 복학생들이 종전으로 귀환한 병사들처럼 환영을 받으며 교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문득 법대 과대표였던 최경상이 생각났다.
유신 시절에 데모를 주동하다 군에 강제입대를 당했고 제대 직전에 군대에서 석연치 않은 교통사고로 숨진 같은 과 친구였다.
그저 순진한데다 술 먹으면 불행한 조국의 현실에 비분강개해 울기 잘하는 평범한 친구였는데 과 친구들은 군바리들이 죽였을 거라고 했다.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우리 앞에서 춤추며 돌아다닐 텐데.
저녁나절 학교 교정에서 누가 내 손을 꼭 잡고는 "자네가 몇 년째 감옥 산다는 백남기 아닌가?" 라고 반색을 했다.
법대 선배 중에 나와 똑 닮은 빵잡이 민주투사가 있다더니 착각을 일으킨 모양이다.
며칠 뒤 대학원 첫 수업을 들어가니 은퇴교수님이 사회정의에 대한 신문기자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 가슴이 뛸 정도로 열정적인 강의를 해 주셨다.
그는 일제시절 아사히신문사 기자를 지낸 동아일보 원로 중의 한 사람이었다.
교수님은 신간으로 나온 책 한 권을 소개했다.
이화여대 출신 소장학자의 저술인데 일제식민통치시대 동아조선일보의 반민족적 친일기사만 뽑아서 본격적으로 비판한 최초의 역작이었다.
책의 서문에는 저자의 서너살 된 어린 딸이 엄마가 저술에 몰두하느라 함께 놀아주기 어려운 탓에 혼자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 놀다 떨어져 죽은 가슴 찢어지는 사연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저자로서는 어린 딸의 생명과 맞바꾼 저작이었던 것이다.
운동권 학생 식으로 표현하면 금수강산을 지옥의 아비규환으로 이끄는데 다대한 공을 세우고 아세곡필 차원을 넘어 일제의 침략전쟁에 이 땅의 젊은이들을 총알받이로 내 몰은 당시의 언론이 초래한 조국인민의 억울한 죽음 또한 이루 셀 수 없는 것일 터인즉 진정한 민족해방과 친일청산의 민족적 과업은 여전히 기득권세력인 친일잔재들과의 목숨을 건 투쟁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저자의 뜻이 노골적이고 폭로적인 서술과 함께 아픔으로 전해져 왔다.
저자는 딸아이의 이름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아 민주로 지었다는데. 자식의 이름으로 짓기에는 피 냄새가 너무 짙게 배어있는 부담스럽고 어두운 이름이다.
교수님은 논조가 너무 감정적이고 편향적이라고 불만을 표시하였다.
동아일보 입장에서는 날벼락을 맞은 것이라고 하겠지만 발행된 신문의 기사라는 것은 시퍼렇게 살아있는 지울 수 없는 역사이니 부정할 수도 없는 일.
노교수님은 신문학이 얼마나 치열하고 준엄한 학문인지 게다가 위험하기까지 한 학문인가를 책 한 권을 소개하는 것으로 드러내 보여준 셈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노교수는 대학원 강의를 위해 연구실 한 구석을 특별히 허락해 준 현직 교수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깍듯하게 예의를 표했다.
각박한 교수세계에서 쉽지 않은 배려였기 때문이다.
은퇴한 교수는 어디에 앉아 있어도 불편하고 앉을 자리를 찾는 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공부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의 치열한 자리다툼은 살 떨리게 처절하였던 것이다.
집에 돌아가니 서울대학에 다니는 어릴 적 죽마고우가 내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별명도 아랑 드롱인 친구는 우리 집을 몇 번 드나들더니 맞은 편 방의 '서울언니'를 눈여겨보았는지 그녀에게 마음이 붙들려있다고 자리주선을 부탁했다.
'서울언니'는 이 집의 물주이자 의리 그 자체라 불리는 불같은 성격의 화끈한 여자이다.
자신의 제일 친한 친구가 자신의 남편과 눈이 맞아 아들을 낳는 통에 남편과 헤어지고 술집여자로 떠도는 서울 부잣집 딸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외모는 운동선수를 연상시키는 굵은 얼굴선에 목소리도 남자 같은데 내 친구는 일본의 탐미주의적 작가이자 천황제 부활을 부르짖으며 자위대 옥상에서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끼오의 동성애애인을 닮았기 때문에 반했다는 이상하고 복잡한 이유를 들었다.
자신이 미시마 유끼오를 흠모한다는 건지 아니면 미시마의 성적 취향을 닮았다는 건지 명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친구의 어려운 부탁이니 노력해 보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이 집의 이웃들과 별 인간적 교류가 없는 데다 이웃여자들을 이런 식으로 접근했다가 나중에 뒷감당을 할 자신도 없다는 것이지만.
고심 끝에 '서울언니'의 방문을 두드리고 친구의 교제의사를 뒤로 빼는 태도로 어렵사리 전했다.
뜻밖에 그녀는 매우 흥미 있어 하면서 자기 방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그녀는 방안에 굴러다니는 과자봉지를 뜯더니 개다리밥상에 올려놓고 소주 한 병을 기울여 각자 하나씩 앞에 놓인 맥주 컵에 똑같이 따르더니 눈짓을 하며 단숨에 들이켰다.
우리도 말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는 과자하나를 집어먹고는 다시 소주 한 병을 기울여 맥주 컵에 똑같이 따랐다.
두 잔을 연거푸 마셨을 때 우리는 눈치를 챘다.
좁은 방구석에 쌓인 소주상자 숫자를 계산해 볼 때 우리가 기절할 때까지 마셔도 끝나지 않을 술자리라는 것을.
친구는 눈치 빠르게 얼른 용건을 말했다.
몇 번 만나지는 않았지만 당신을 사랑하게 됐노라고.
그녀는 말 울음소리 같은 웃음을 한번 웃더니 말없이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는 불을 붙여 맛있게 한 모금 빨고 나서 혓바닥을 쭉 뽑아 빨갛게 타는 담뱃불을 혓바닥 한 가운데에 사납게 비벼 껐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그 긴 담배를 입안에 삼켜버렸다.
“이것 봐요! 대학생들!
미안하지만 나 남자보다 술이 더 좋아.
나 남자 때문에 인생 망가진 사람이야.”
나는 담배가 식도를 넘어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술 먹은 게 다 넘어 올 것처럼 구역질이 났고 친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방을 나가서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
나는 과자 하나를 더 집어먹고 내 잔의 술을 마저 마시고 일어섰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그녀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방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녀가 우는 소리를 듣는 것은 이 집에 와서 처음인지라 의외였다.
며칠 뒤 그녀는 내방에 대낮부터 술이 취해 들어 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대학생! 그 친구 나 사랑한대?
진짜 사랑할 자신 있대? 사랑하면 나중에 결혼할거야? 결혼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구?
왜 잔잔한 가슴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냐고?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더 이상 상처받기 싫다고요.
나도 이쁜 남자 좋아요.
해필 그 친구! 배신하고 도망간 내 남편하고 어찌 그리 똑 같이 생겼을까?
가슴 아파. 너무 가슴 아파.
나 나쁜 사람 아닌 거 알죠?
친구에게 잘 얘기해요. 나도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또 다시 괴로움 당하고 싶지 않아요.
마음은 아프지만 여기서 끝내요. 끝! 알았죠?”
민주화를 위한 대학원생 전체모임에 갔다가 복도에서 법대 과대표의 소개로 긴급조치 복학생 선배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성명서를 빨리 쓰기로 유명한 작가 ‘송기원’ 나와 얼굴이 닮았다는 ‘백남기’ 등 꽤 여러 명의 복학생들과 그 날 저녁 신문학과 졸업선배의 집에서 약혼식 피로연을 가졌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각자 자신의 사상적 노선을 밝히는 대목에서 무정부주의자가 있는가하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선배도 있어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케 했고 노래도 심수봉이 대통령이 총 맞아 죽는 술자리에서 불렀다는 ‘그때 그 사람’을 개사해서 부르는데 노래 중간에 ‘총 맞았지’하는 부분에서 빼놓지 않고 ‘땅 땅 땅 땅’하며 반드시 총 쏘는 소리를 목청껏 질러 절정감과 함께 통쾌하다는 느낌을 마음껏 표출했다.
그 뒤 긴급조치 복학생들과는 여러 명목의 모임에서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삼월도 다 지난 어느 날 서울대학교 학생대표들이 관악산을 넘어 와 송기원 선배님을 찾았다.
구멍가게 앞 양지바른 곳에 평상을 옮겨놓고 김치 한보시기에 막걸리 한잔을 걸치면서 시야가 불분명한 시국을 걱정하는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봄은 왔지만 여전히 추위가 가시지 않는 차가운 날씨처럼 민주화의 봄도 얼음산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었다.
학교는 다시 활화산의 용암처럼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수업을 듣고 점심식사를 하려고 나오는데 학교정문에서 법대 과대표를 만났다.
각 단과대 대표들이 학내 민주화를 위한 총장면담을 신청했는데 총장은 내 어머니가 설립한 학교이고 내가 총장인데 건방지게 무슨 면담이냐며 대표가 바뀌었으면 신고를 하라고 하는 통에 진퇴양난에 빠졌다며 지금 법대에서 학원 민주화와 총장면담을 실현하기 위한 공청회를 열고 있으니 선배님이 참석해서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과대표와 공청회가 열리는 법대 대강의실에 들어서니 억압된 대학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신입생이 가장 발언을 격렬하게 많이 하고 있었고 유신정권에 소처럼 길들여진 재학생들은 눈치만 보면서 마지못해 의례적인 발언만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녹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재학생들의 미온적이고 방어적인 태도에 참지 못한 내가 결국 손을 들고 앞에 나가 강단에 서서 내 가슴속에 있던 말을 쏟아 붓듯이 토해 내었다.
그 동안 연극이 너무 좋아 연극반 활동을 하며 겪은 학교행정의 불합리한 부분과 재정지원을 받을 때마다 학교 직원과 돈을 나누어야 했던 일.
돈 받는 날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옛날 정치깡패 출신의 담당교직원이 요구하는 배우를 술자리에 앉혀서 술을 따르게 해야 했던 아픔.
교직원들이 술자리에서 술이 취하면 털어놓는 학교내부의 비리나 모순을 들은 대로 얘기하였다.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부분은 여러분의 선배인 죽은 경상이의 경우처럼 학생처 직원들이 사복형사나 되는 것처럼 데모감시를 하며 학생들을 예사로 폭행하고 문제학생 리스트를 만들어 정보기관에 보고하여 강제징집을 당하도록 조치한다든가 아예 기관원이나 형사를 상주시켜 학생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철저히 통제하게 했다는 것이고 이 모든 부끄러운 일들이 교육책임자인 총장의 허락 하에 자행되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총장은 본인이 의도했던 안 했던 학생들의 희생에 대해 역사적이고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도 사퇴를 해야 한다.
그러니 신고를 하니 못하니 총장과 실갱이를 할 게 아니라 총장사퇴결의안을 통과시켜 정식으로 총장사퇴를 법대 학생회의 이름으로 요구하면 당연히 입장표명을 위해서도 학생들을 만나 줄 것 아니냐.
이제 제가 할 말은 다했다.
여러분의 현명하고 정직한 판단과 동의를 구한다고 말하고 강단에서 내려왔다.
총장사퇴결의안은 단숨에 통과되었다.
다음 날 아침 약속했던 대학 본관 앞마당에 법대생들이 모이니 놀라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어느새 결의안 통과 소식을 접한 각 단과대학 대표들은 더 격렬한 어조로 총장사퇴를 요구하는 플랭카드를 경쟁적으로 내걸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표정으로 총장실에서 나와 학생들 앞에 선 총장은 모든 학생대표들의 의견이 그러하고 학생들 역시 이에 동의하고 있다면 나는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다며 의외로 선선하게 사퇴를 수락하였고 학생들은 총장의 결단에 사의를 표하고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의미에서 일제히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각 단과대학은 총학생회 대표를 뽑는 일정에 들어갔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비슷한 요구를 받은 타 대학 총장들의 경우 체육과 학생들을 동원해 야구방망이를 휘두름으로서 학생들의 요구를 깔아 뭉갰다는 것이다.
내 인생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