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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매체 읽기>
난폭하고 순수한 마음속 야생들, 영화 <괴물들이 사는 나라>
백희원
우리는 어떤 때에 환상의 공간을 꿈꿀까? 그러니까, 자신만의 세계 같은 것. 아마 타인들로부터, 그들과 공유하는 세계로부터 나의 욕망을 거절당했을 때가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아직 세상의 규칙을 익히지 못한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환상의 공간에 이끌리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아이들이 이런 환상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슬픔과 분노를 해소하는 과정을 잘 보여 주는 그림책이다. 잘 알려진 대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심술이 덕지덕지, 한눈에도 짓궂어 보이는 주인공 맥스는 집 안을 엉망으로 해 놓은 뒤, 저녁밥은 없다는 엄마의 호통 소리와 함께 방에 갇히는 벌을 받는다. 하지만 방 안은 점차 맥스와 괴물들의 왕국으로 변하고 그곳에서 한바탕 놀고 집에 돌아오자 엄마의 따뜻한 저녁밥이 기다리고 있다. 맥스의 방이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되는 과정에서 그림은 처음에 설정해 둔 테두리를 점점 벗어나며 현실에서 환상으로의 확장과 해방감을 보여 준다. 이는 한정된 종이 위에서 오히려 무한한 공간감을 선사한다. 몇 줄의 글과 그림으로 만들어진 이 단출하고 무한한 세계가 구체적인 실사 영화, 그것도 장편으로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평면의 이미지가 주는 풍부한 감정과 함의들이 오히려 3차원의 세계에서 흔한 서사로 편입되며 범박해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행여 CG에 너무 기대어 (이를 테면 팀 버튼의 근작들처럼) 알루미늄 풍선처럼 매끈하고 경박한 이미지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스테디셀러 앞에서는 이런저런 걱정부터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우려들에도 불구하고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이미 2009년 실사 영화화 되었다. 감독은 바로 <존 말코비치 되기>(1999)로 기발한 감수성과 위악적 유머를 선보였던 스파이크 존즈다. 잠시 의아해지지만, 원작 역시 순 착한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책은 아니었음을 떠올려 보면 나름 기대가 되는 조합이다. 그리고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wild[waɪld] ―a) 2. 야생의, 자연 그대로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원제는 <Where the wild things are>이다. 여기서 괴물이라고 번역된 'wild thing'은 그보다 넓은 의미를 품고 있다. 괴물은 인간에 대치되는, 말 그대로 괴이한 물체로 대상화된 존재이지만, ‘야생의 것’이라고 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존재를 의미할 수도 있다. 원작이 자기 방에 남겨진 맥스가 방 안의 왕국에서 괴물들과 축제를 벌이는 이야기임을 고려했을 때, 과연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아이의 마음 속 환상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이 그림책이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 괴물들이 우리 내부의 보편적인 폭력성을 형상화 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구체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인간 본연의 이 야생적인 감정들을 괴물들로 구체화 하는 데 더욱 공을 들인다. ‘보편적인 폭력성’이라고 했지만 선천적인 악 같은 것을 칭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폭력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구태의연한 사실 하나. 우리는 결코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원하기 때문에 별수 없이 상처 입고야 만다. 이렇게 상처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폭력은 다양한 감정들로 발생한다. 내면을 향할 때는 슬픔과 자기 연민, 열등감 등으로, 외부를 향할 때는 분노로 표출되는 식이다. 시기, 질투, 서운함 같은 감정들은 이 두 방향 사이에서 줄을 탄다. 영화는 어린이들도 겪을 수밖에 없는 이 생래적 감정들을 예민하고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를 테면, 원작에서 우리는 맥스가 왜 그렇게 심술을 부리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여리고 말간 볼을 가진 영화 속 맥스를 변호해 주는 장면들을 잊지 않는다. 아이는 아직 관계들을 조망하기엔 너무 낮은 시선을 지녀서 분노와 슬픔의 영문을 알 수 없지만, 관객은 그것이 사춘기 누나와 피로한 엄마의 무관심이 맥스에게 입힌 상처 탓임을 알 수 있다. 학교 과학 수업에서는 언젠가 태양이 소멸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아직 세계와 분리된 자아가 미숙한 어린이들은 그런 사실에도 어떤 순수한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낄 때 아이는 자신만의 요새를 짓는다. 자기보다 작은 세계.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들은 이 세계에 함께해 줄 여유가 없다. 그래서 맥스는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괴물들의 섬으로 떠난다. 그곳에는 원작과 달리 제각기 이름을 지닌 괴물들이 있다. 감독은 이들에게 이름과 함께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감정들도 성격으로 부여했다. 앞서 말했듯 이 괴물들 자체가 우리 내부의 ‘wild thing'이 구체화된 것이다. 영화의 기승전결은 맥스가 이 괴물들과 하나하나 마주하며 관계를 맺고 헤어지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이는 미시적인 관계들에서 폭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직관적이고도 통찰력 있게 보여 준다.
wild[waɪld] ―a) 5. 거친, 7. 난폭한
첫 장면. 영화사 로고가 사라지고 나면, 늑대 옷을 입은 맥스가 개 한 마리와 집 안에서 거침없이 뒹굴기 시작한다. 오로지 개를 쫓는 데만 혈안이 되어 으르렁대며 계단을 구르는 아이와 거칠게 움직이며 이를 담아내는 카메라의 난폭함은 인디영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역동성이지만 홈드라마에서는 다소 당혹스러운 것이다. 표현적 측면에서 영화는 원작과 완전히 달라지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환상의 공간보다는 현실에서 전 방향으로 돌아다니기를 택한 것이다. 이는 그림책을 영화라는 매체로 옮기고자 결심한 순간 이미 필연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흔히 우리가 ‘동화적’이라고 여기는 아기자기한 요소들에 괘념치 않고 원작이 전하려던 에너지에 순수하게 접근하여 현실과 맞부딪치는 이 영화의 표현법은 개성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까닭은 이 난폭함이 이야기를 순수하고 명료하게,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실사영화로서의 미덕이 바로 이러한 특징에서 드러난다. 괴물들의 표정 연기에 CG가 사용되었을 뿐,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기본적으로 실사 인형 탈들과 진짜 자연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그림책과 달리 맥스는 정말로 용감하게 진짜 바다와 절벽을 거쳐야만 괴물들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 나무를 때려 부수는 괴물들의 힘은 충분히 아이를 위협할 만큼 강하게 표현된다. (그리고 맥스는 충분히 위협당할 만큼 연약하다.) 이는 영화에 내내 현실감과 긴장감을 제공하여 관객을 몰입시키며, 이야기를 유아적 상상을 넘어선 위대한 모험으로 거듭나게 한다. 무엇보다도 앞서 이야기한 사랑과 폭력의 모순이 지리한 언어적 설명이 아니라, 영상과 소리를 통해 눈앞에서 벌어질 때, 즉 함께 세계를 구축하고, 다시 그것을 파괴하고, 마침내 서로 포옹할 때, 이는 원작의 그림들이 그러했듯이 마음에 어떤 직접적인 울림을 준다. “사랑해”와 “잡아먹어 버릴 거야”가 꼭 같은 마음에서 발화될 수 있음을, 논리가 아닌 감각으로 납득시키는 것이다.
wild[waɪld] ―a) 9.《구어》즐거운
완전히 다른 매체로 재탄생했지만, 영화는 샌닥이 인정했을 만큼 원작과 핵심을 공유하고 있다. 교훈이나 일방적 가르침 없이 어린이의 위치에서 상상과 놀이를 통하여 이뤄 내는 치유와 따뜻한 화해가 바로 그것이다. 결국 폭력이 필연적이라면 이를 어떻게든 타인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해소해야 할 텐데, 원작에서 그 역할을 맡는 것은 숲과 정글을 배경으로 한 신나는 카니발이다. 한편 영화에는 두 가지 방식의 놀이가 그만큼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한다. 하나는 이글루나 요새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반대로 뭔가를 마구 파괴하는 것이다(이 편이 동화와 더 가깝다). 맥스는 이러한 일련의 놀이들을 통해서 괴물들과 가까워지고, 갈등하고, 마침내는 그들과 헤어져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불안이 있음을 이해한다. 이러한 과정들에는 음악이 빠지지 않는다. 오리지널사운드트랙에는 개러지록 밴드 예예예스의 보컬로 유명한 카렌 오가 참여했는데, 그녀의 목소리와 파격적이고 화려한 콘셉트, 그리고 날카로운 기타와 드럼이 만들어 내는 예예예스의 소리를 떠올려 보면, 이는 과연 스파이크 존즈와 어린이 그림책만큼이나 기이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이 난폭하고 순수한 동화에 꼭 들어맞는다. 휘파람과 허밍, 괴성과 고함이 공존하는 수록 곡들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All is love>는 어린이들과 카렌 오가 모두가 사랑이라며 곡 제목을 마구 외쳐 대는 것으로 끝난다. 이 노래에는 아이들의 뜀박질과 구르기에 꼭 맞는 호흡과 즐거움의 기운이 가득하다. 그러나 현실과 환상을 억지로 봉합시키지도 분리하지도 않는 이 영화가 어린이들에게 진짜로 즐거우리라고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규정짓고 싶지도 않다. 어쩌면 아이들에게는 영화 속의 공포와 슬픔이 너무 거대하고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지만, 이 역시 어른의 기우일지도 모를 일이다. 모리스 샌닥의 원작 또한 처음 출판된 1963년에는 지나치게 난폭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도서관들에 거부당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두 작품이 전하려는 의미가 같은 만큼, 결국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그래서 두려움을 느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영화와 교감할 수 있지 않을까?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안타깝게도 흥행성이 낮다고 판단되어 국내 극장 개봉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DVD는 정식 출시되었으니 어른은 어른대로 이해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감각하며 함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적어도 바다와 모래언덕, 숲을 오가는 감각적인 영상과, 연기파 배우들이 목소리를 맡아 호연한 친근한 모습의 괴물들은 꽤 사랑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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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원 대학에서 불어불문학과 언론정보학을 공부했다. 정처 없이 옮겨 다니며 그저 보고 듣고 읽고 쓰는 일과 꾸준히 밀고 당기는 중. 빛과 시간은 좋아하지만 시계는 괴롭다. 더 이상 나이 핑계 대기도 위태로운 87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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