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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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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이야기) 스크랩 신천서원 이야기
관보 추천 0 조회 72 11.12.15 19: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신천서원(新川書院)
소 재 지 :  예천읍 왕신리 412-2
(원소재지 : 예천군 예천읍 왕신리 412-2)
건 축 주 :  의성김씨 문중
건축시기 :  1945년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9호, 1985년 08월 5일 지정

건축 배경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1643년(인조 21)에 전남 장성면 옥천리에 처음 영당(影堂)을 세우고 봉향하다 1718년(숙종 44) 학림서원(鶴林書院)으로 승격시켰는데,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이 서원은 맹암의 후손이 왕신리 ‘새터마을’에 기지를 잡아 단서각(丹書閣) 1동을 세운 것인데, 점차 규모를 확대하여 서원으로 복원하고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건축 구성
서원은 왕신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송림 가운데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방형의 토석 담장 내에 강당과 사당, 남덕문(覽德門), 사주문이 있다. 사주문을 들어서면 강당이 가로막듯 서 있고, 뒤쪽 조금 높은 곳에 토석 담장이 둘러쳐진 곳에 내삼문인 남덕문을 지나면 사당인 경훈사가 가운데에 배치되어 있어 전학후묘의 공간 구성을 이루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대청을 이룬다. 대청의 뒤쪽으로는 반칸 툇마루를 깔았고, 좌우에는 각각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온돌방은 뒤쪽으로 반칸 물려 1칸 반의 크기를 이룬다. 온돌방 앞쪽으로는 마루를 깔아 전면은 4칸 모두 개방된 누각 모습을 이룬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고, 전면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으로, 기둥 사이에는 두짝 살문을 내었다. 앞쪽으로 반칸의 툇간을 두었으며, 자연석 기단과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내력과 기능

관련이야기
- 신천서원
신천서원(新川書院)은 예천읍 왕신리에 있다. 예천읍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 하나로 군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이곳은 본래 예천군 소재지로 동서남북의 4개 면으로 나뉜다. 군청이 북쪽이 되므로 북읍면이라 하였는데, 노상, 노하, 백전, 용산, 효동, 나평, 생천, 정산, 구산 등으로 이루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예천면이라 하였고, 1937년 7월 1일에 예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예천읍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보문면, 서쪽으로는 유천면과 용문면, 남쪽으로는 호명면과 개포면, 북쪽으로는 용문면과 감천면에 접한다.

왕신리는 예천읍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예천군 남읍면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왕신’과 ‘신기’의 이름을 따서 왕신리라 하고 예천면에 편입되었다. 왕신리는 ‘신기’, ‘외암’, ‘방아실’, ‘왕산곡’, ‘갓명골’ 등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원이 위치한 곳은 ‘신기’다. 신기는 ‘새터’ 또는 ‘신천’이라고도 한다. 왕신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옛날 어느 난리에 피란을 떠난 의성김씨가 고향인 의성이 가까운 이곳에 정착하여 새로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새터’라고 하였다.

관련인물

관련인물
- 김영렬
김영렬(金英烈, 1370~1422)은 본관은 의성, 호는 맹암(孟巖)이다. 의성부원군 김굉(金紘)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이 탁월하였다. 1394년에 전서(典書)로 있던 중 그해 경기우도수군첨절제사가 되었다. 그때 연해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계책을 올려, 1395년에 수군절제사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실책을 범하여 1397년 파직되어 옹진으로 유배, 수군에 충군되었다 이듬해 풀려났다.

1400년(정종 2)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있을 때, 이저(李佇), 하륜(河崙) 등과 더불어 제2차 왕자의 난을 토벌하여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에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04년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있을 때 왜선 1척을 노획하고 왜병을 포로로 잡은 공으로, 태종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으며 사후 우의정에 증직되고 양소(良昭)라는 시호를 받았다.

마을이야기

예천 > 예천호명권 > 왕신리
- 왕신리.
왕신리는 예천읍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예천군 남읍면(南邑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왕신’과 ‘신기’의 이름을 따서 왕신리라 하고 예천면에 편입되었다. 왕신리는 ‘신기’, ‘외암’, ‘방아실’, ‘왕산곡’, ‘갓명골’ 등의 자연촌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원이 위치한 곳은 ‘신기’이다.

신기(新基)는 ‘새터’ 또는 ‘신천(新川)’이라고도 불린다. 왕신(旺新)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옛날 어느 난리에 피란을 떠났던 의성김씨(義城金氏)가 고향인 의성이 가까운 이곳에 정착하여 새로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새터’라고 하였다.

외암(畏岩)은 ‘무심바우[無心岩]’라고도 불린다. 마을 앞에 있는 큰 바위가 무서운 느낌이 들 만큼 컸으나, 그 바위 뒷골에 ‘무서운 생각도 없이 무심히 개척한 마을’이라 하여 ‘무심바우’라 했다고 한다.

방아실은 ‘방화실(芳花實)’이라고도 불린다. 지형이 키[箕] 모양으로 생기고, 뒷산이 디딜방아 형국이라고 하여 ‘방아실’이라 했다고 한다. 방앗간에 키가 있어 의식이 넉넉한 마을이라고 구전한다.

왕산곡[王山洞]은 ‘왕상곡(王相谷)’이라고도 불린다. 마을 앞 어봉산(魚鳳山) 아래 생긴 동내이고, 그 산세가 왕(王)자 모양이라고 하여 ‘왕산골’이라 하던 것이 ‘왕산동’이 되었다고 한다.

갓명골은 ‘외암’마을 아래쪽에 생긴 마을이다. 이곳은 마을 주위가 들머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햇볕이 잘 안드는 곳이다.

맹암 김영렬선생

성명 : 김영렬(金英烈) , 1370년 ~ 1421년
본관 : 의성
: 열지(烈之)
: 맹암(孟巖)
시호 : 양소(良昭)
공시호 : 추충분의익대공신(追忠奮義翊大功臣)
입사경로 : 태조 을해 문과급제
내관직 : 병조참판, 좌찬성
외관직 : 수군절제사, 참판승추부사,
증직및기타 : 우의정
김영렬
김영렬(金英烈)의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맹암(孟巖)이요, 시호는 양소(襄昭)다. 얼굴이 준수하였으며 재질이 뛰어났다. 천성이 효성스러웠으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 겸 무신으로 고려 전서로 태조 을해에 문과 등제하여 수군절제사, 안무사, 병조참판을 지내었고, 추충분의익대공신(追忠奮義翊大功臣)으로 녹훈되고 좌찬성을 지냈다.

1394년(태조 3) 경기우도수군 첨절제사로 재직 중 연해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계책을 올려 이듬해 수군절제사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실책을 범하여 1397년 파직되어 옹진으로 유배, 수군에 충군되었다 이듬해 풀려났다. 1400년(정종 2)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있을 때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04년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있을 때 왜선 1척을 노획하고 왜병을 포로로 잡은 공으로 태종대왕으로부터 표리(表裏: 겉과 속의 옷감)를 하사받았다. 이후 은퇴하여 장단(長湍)의 맹동(孟洞)에 은거하다 죽었다. 의성군(義城君)으로 봉작되었고, 박포(朴苞)의 난 때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호위한 공으로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전라도 장성(長城)의 학림서원(鶴林書院)에 배향되었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 문집으로『맹암집(孟巖集)』이 전한다.

가족이야기

: 김룡비(金龍庇)
생부 : 김굉(金紘)
김룡비
할아버지 김룡비(金龍庇)는 고려 항몽기에 중서성 참지정사로 번다한 국난에 유공하여 추절보절공신(推節保節功臣)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으며, 의성군 백성이 공의 공덕을 기리는 진민사(鎭民祠)를 세워 오늘에 전한다. 후손이 오토산 묘하에 오토제와 진민사를 이건하고 춘추로 제향하는 의성김씨의 중조이다.
김굉
아버지 김굉(金紘)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복야(尙書僕射)를 지내고 의성부원군(義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문호가 융성해지고 터전이 튼실하게 잡혔다.
김영
숙부인 김영(金英)은 전객시(典客寺)의 판사(정3품)겸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 정1품) 문하시랑(門下侍郞)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김경복
셋째 아들 김경복(金慶復)은 문과에 급제하여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냈다.

학문이야기

향사 : 학림서원,옥산서원, 신천서원.
학파 : 퇴계 학파
『소학』한 편을 평생토록 처신의 규범으로 삼다.
집안의 영향으로 공부에 독실하여 일찍이 경전의 묘리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특히 『소학(小學)』
한 편을 평생 처신의 규범으로 삼아 아주 작은 행동도 그 교훈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일찍이 눈 내리는 밤에 부친과 함께 앉았다가 설야음(雪夜吟)을 읊어보라 명하니, 즉석에서 지어 올리기를, ‘소슬한 겨울밤은 깊어가는데 눈빛, 달빛이 온누리에 가득하다. 유달리 높은 기개가 있기에 저 뜰 앞 소나무는 의연히 서 있도다’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10여 세였으므로 부친이 그에게 충정의 기풍이 있음을 기특하게 여기었다.
그 후에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방문하여서 그의 생김이 출중하고, 시의 기특함을 보고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참으로 훌륭한 사나이다”고 하였다.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도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경서를 논란해보고는 아들 이래(李來)를 맹암에게 보내 함께 강학하게 하였다. 20세 전후에 학문이 통달하고 문장이 뛰어나자 부친이 과거 보기를 권하자 대답하기를 “소년등과는 사실 좋지 못한 일이고, 공자도 나라에 도가 없으면 숨는다 하였으니, 지금 어찌 진취할 때라 여기겠습니까?” 하며 문을 걸고는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문달을 구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그의 성명을 듣고 누차 사람을 보내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나, 26세 때 부친의 간곡한 설득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하륜(河崙), 조영무(趙英茂) 등과 협력하며 국정을 운영하였다

저작이야기

『맹암집(孟巖集)』
『맹암집(孟巖集)』은 조선 초기 무신이자 학자인 김영렬의 시문집이다. 2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원래 조선 전기에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없어졌고, 뒤에 후손 백상(百祥)과 익중(翊中)이 집안에 전해온 몇 편의 글과 박광일(朴光一)의 집안에서 구한 공신 기록 등을 기초로 하여 새로이 간행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1805년(순조 5)에 후손 세약(世躍)이 백상 등이 모은 원고로 문집을 간행하였고, 1844년(헌종 10)에 후손 재복(載福) 등이 중간하였다.

그 뒤 1969년에 후손 정모(正模)와 응환(應煥) 등이 다시 『실록 』등에서 김영렬과 관계된 기록을 찾는 등 몇 개의 글을 더 추가하여 새로이 간행하였다. 구성으로는 조선 후기에 처음 『맹암집』을 간행할 때 사헌부지평이던 김수조(金壽祖)가 쓴 서문에는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 지은 묘비문을 기초로 김영렬의 행적을 서술하였고, 자신의 조상인 김은(金穩)이 김영렬과 함께 학림서원(鶴林書院)에 배향된 인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권 1에서는 약간의 시와 서, 태종이 개국? 정사? 좌명공신과 함께 공신회맹제 (功臣會盟祭)를 열었을 때에 작성된 회맹록(會盟錄)과 태종이 그리게 한 김영렬의 화상에 대해 심덕부(沈德符), 이원(李原) 등이 쓴 찬문, 묘비문, 행장과 『맹암집』을 간행하면서 간행을 주관한 후손 김세약(金世躍)이 쓴 발문에는, 김백상과 김익중 등이 박광일의 집 등에서 수집한 글이 주된 자료였음과, 김영렬의 이름을 적을 때 ‘英’을 ‘永’으로 적은 곳이 있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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