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암면 연당리蓮塘里 유래
마을 입구에 가늘고 길게 솟아 있는 바위가 있으니 이름하여 선바위.입암이요, 입암에서 청기로 넘어 가는 길목이 된다. 마을과 뒷산에 흰 돌이 많다고 하여 돌배기라고도 한다.본래 진보현 북면의 지역으로서 연못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생부동과 주역동, 그리고 입암동을 합하여 연당리라 하여 입암에 들게 했다.
[마을의 특징]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선바위-일명 남이 장군 석상과 연당 석불좌상이 있으며 서석지와 석문을 들 수 있다. 선바위에 관한 것은 앞에서 풀이한 바와 같으며, 연당 석불좌상은 연당 앞에 있는 미륵불을 이른다. 마을을 위하여 매년 정월 보름이면 고사를 올린다.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왼손에 둥근 약호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약사여래불이 분명한데 목부분이 잘려 나갔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11호(1979)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입암면 연당 1리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돌배기ㆍ석백(石百)원래 생부동의 일부로서 임천(臨泉) 북쪽애 있는 마을이다. 마을과 뒷산에 흰 돌이 많이 박혀 있다는 뜻으로 돌배길 불리어지고 있다. 돌배기의 큰 돌을 사현암(四賢岩)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영방(鄭榮邦)ㆍ이준(李峻)ㆍ김시온(金是ㆍ)ㆍ오익(吳瀷) 선생이 때때로 모여 천렵(川獵)을 차고 글모임을 가졌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김구서(65) 제보).석백이라 함은 돌배기를 한자로 뒤쳐서 적은 것으로 보이며 석(石)은 한자의 뜻을, 백(百)은 소리를 빌려다 적은 것이다.
*선바위ㆍ선바우ㆍ입암(立岩)연당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입구에 가늘고 길게 솟은 바위가 있어서 선바위라 부른다(오윤달(75) 제보). 선바위를 한자로 뒤치면 입암이 된다.
*연당(蓮塘)
조선 초기 생부동(生部洞)이라 하여 범위는 연당ㆍ임천ㆍ돌배기ㆍ선바위ㆍ주역(駐易) 일대이며 광해군(1613) 때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선생이 은거한 후 이 일대를 임천(臨泉)이라 하였는데 그 후 지금의 연당에 경정(敬亭)과 주일재(主一齋)를 짓고 서석지(瑞石池 민속자료 106 호 지정)를 만들고 못 가운데 부용화를 심었으므로 연당이라 불리게 되었다(정위상(75) 제보).연당의 연(蓮)은 부용화를 뜻하는 것이요, 주일재를 생각해 보면 한 임금을 섬기겠다는 석문(石門) 선생의 올곧은 신념이 드러나 있다.
*임천(臨泉ㆍ林川)주선 초기까지 생부동이 었으며 조선조 광해군 때 연당ㆍ임천ㆍ돌배기 일대를 임천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연당에 속한 자연 촌락이다. 마을 앞으로 내가 흐르고 수풀이 울창하여 지명을 임천이라 하였다(정상위(59) 제보).
*주역(注易ㆍ駐易)선바우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이 곳에 역이 있었다고 전하나 이는 근거가 희박하며 약 200년 전 경상감사가 쉬어 간 곳이라는 설과 옛날 장사꾼들이 물건을 바꾸던 곳이었다는 말이 어울려져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오윤달(75) 제보). 주역이란 한자를 풀이하면 말을 갈아 탄다고 함이니 간이역 정도의 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석문선생 문집과 임천산수기 및 영양군지의 기록을 종합해서 정리한 의견]
1.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마을
연당리(蓮塘里)마을 입구에 가늘고 길게 솟아 있는 바위가 있으니 이름하여 입암이요, 입암에서 청기로 넘어 가는 길목이 됩니다. 마을과 뒷산에 흰 돌이 많다고 하여 돌배기라고도 합니다.
본래 진보현 북면(현재 청송군 진보면)의 지역으로서 연못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생부동과 주역동, 그리고 입암동(선바위마을)을 합하여 연당리라 하여 입암면에 들게 하였습니다.
2.마을의 특징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선바위와 일명 남이 장군 석상과 연당 석불좌상이 있으며 서석지와 석문을 들 수 있습니다. 선바위에 관한 것은 앞에서 풀이한 바와 같으며, 연당 석불좌상은 연당 앞에 있는 미륵불을 말합니다. 마을을 위하여 매년 정월 보름이면 고사를 올립니다. 이러하여 축원당이라고도 합니다.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왼 손에 둥근 약호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약사여래불이 분명한데 목부분이 잘려 나갔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11호(1979)로 지정 되어 있습니다.
3.마을이름과 유래
돌배기(석백石百), 선바위, 임천,주역마실을 합하여 연당리라고 합니다.
돌배기는 원래 생부동의 일부로서 임천(臨泉) 북쪽에 있는 자연부락입니다. 마을과 뒷산에 흰 돌이 많이 박혀 있다는 뜻으로 돌배기라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돌배기의 큰 돌을 사현암(四賢岩)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영방(鄭榮邦)ㆍ이준(李峻)ㆍ김시온(金是榲)ㆍ오익(吳瀷) 선생이 때때로 모여 천렵(川獵)을 하고 글모임을 가졌다하여 이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석백이라함은 돌배기를 한자로 뒤쳐서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선바위(立岩)마실은 연당의 남서쪽 부용봉 아래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입구에 촛대 같이 높고 길게 솟은 바위가 있어서 선바위라 부릅니다. 높이가 70여미터 정도 됩니다. 선바위를 한자로 표기하면 立巖이 됩니다.
연당(蓮塘)은 서석지가 있는 곳으로 조선 초기 생부동(生部洞)이라 하였습니다. 광해군(1613) 때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선생이 은거한 후 이 일대를 임천(臨泉)이라 하다가 그 후 지금의 연당에 경정(敬亭)과 주일재(主一齋)를 짓고 서석지(瑞石池 국가민속문화재108 호 지정)를 만들고 못 가운데 연꽃을 심었으 므로 연당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연당의 연(蓮)은 부용화를 뜻하는 것이요, 주일재는 유학(도학)에서 주일무적과 관련이되고 경정은 거경궁리와 관련됩니다. 유학 도학에서 敬공부를 위한 석문(石門) 선생의 올곧은 신념이 드러나 있습니다.
임천(臨泉)은 조선 초기까지 생부동이 었으며 조선조 광해군 때 연당ㆍ임천ㆍ돌배기 일대를 임천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연당에 속한 자연 촌락입니다. 마을 앞으로 내가 흐르고 수풀이 울창하여 지명을 임천이라 하였습니다.
주역(駐易)은 선바우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이 곳에 역이 있었다고 전하며 약 200년 전 경상감사가 쉬어 간 곳이라는 설과 옛날 장사꾼들이 물건을 바꾸던 곳이었다는 말이 어울려져 주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4. 국가민속문화재 영양서석지
영양 서석지는 조선 광해군 5년(1613) 성균관 진사를 지낸 석문 정영방 선생이 서기1613년부터 1643년까지 30년간 연면적 45만평에 조성한 조선시대 민가 정원의 백미로 전남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과 더불어 천혜의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한국3대 전통 정원의 하나입니다.
서석지 정원은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되는데, 내원은 정관, 사고, 독서 등 사생활을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공간으로 각 건물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외원은 자금병(병풍바위) 문암, 골립암, 입석 등 바위로 되어 있어 두 공간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며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습니다.
내원과 외원을 1:3의 비율로 조성하여 공간미의 아름다움을 강조했고, 화려한 꽃보다는 청풍명월을 즐겨하는 선비의 기질에 어울리는 청초한 식물을 가꾸었습니다. 안과 밖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외부와의 시계(視界)를 차단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서석지를 둘러싸고 경정, 주일재, 정문 등의 민가 사대부의 전통적인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주일재 앞 사우단에는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를 심어 선비의 지조와 의기를 일상 속에서 늘 가까이 하게 했고, 금작화, 자형화, 석죽화를 심어 겸손과 우애와 순수한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는 사우단의 노송은 공자를 상징하는 행단의 4백년 된 은행나무와 조화를 이루며 이곳 정원의 품격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 서석지의 특별함을 더해주는 것이 연못 속에 숨은 듯 드러나는 돌들입니다. 가로 13.4m 세로 11.2m, 깊이 1.3~ 1.7m인 연못 안에 상경석 등 물 위에 나타난 것이 60여개, 물에 침수된 돌이 30여 개 등 90여 개의 서석이 물속에 잠기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면서 못 가운데 연꽃의 향기와 함께 정원에 색다른 정취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정자 마루 위에는 당시 대명절의로 이름 난 명사들의 시가 보존되어 있어 정자의 품격을 더하며 당대 선비들의 학문교류와 풍류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또한 서석지 안과 밖에 심어진 소박한 수목들은 조선시대 민간 정원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석지에는 유교의 질서, 유학의 경전 사서육경(四書六經)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서석지 입구 오른쪽에는 은행나무를 심고 행단을 만들어 공자님을 기리며 학문연찬에소홀함이 없어야 함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유학 성학의 경지인 거경궁리(居敬窮理)를 가르치는 정자인 경정(敬亭), 주일무적(主一無敵)을 배우게 하는 주일재(主一齋)가 있습니다. 또한 경정, 주일재, 자양재의 기와지붕에는 앙와가 없습니다. 이는 미완의 건물임을 강조하며, 미완성은 겸손을 뜻한다고 합니다.
수水, 목木, 석石, 화花, 정원 안 사물 하나하나에 그 의미와 뜻을 새기고 있습니다.
연못 안에 서식하고 있는 연꽃은 군자를 뜻하며 잉어는 선비를 상징합니다. 안빈낙도를 의미하는 영귀제, 관어를 의미하는 어상석, 선비정신을 강조하는 의금상경의 상경석, 학문하는 자세를 가르치는 관란의 관란석, 출처지의 탁영을 가르치는 탁영반, 공자의 정신과 어질 인을 가르치는 분수석, 노자의 도덕경 신선세계를 의미하는 통진교, 기평석, 상운석, 조천촉 등이 있습니다.
서석지는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경지, 즉 잠시나마 신선이 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옥대, 옥계척, 통진교, 상운석, 구포암, 나월엄, 옥선대, 몽선대, 연당동천이 그것입니다.
정자 안에 걸려 있는 임천산수경에는 지주중류석(백이·숙제와 백세청풍 상징바위)인 문암, 마천벽, 골립암, 초선도, 입석, 자금병, 집승정, 유종정, 부용봉, 자양산, 대박산이 있습니다.
수려한 산수경관과 한시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서석지는 이 세상 다하도록 바위와 나무와 꽃과 함께 즐기리라고 노래한 옛 선인들의 시정을 느끼며 한번쯤 거닐어 보기를 권하고 싶은 오래된 전통 정원입니다.
서석지를 만든‘석문 정영방’선생님이 쓴바위와 나무와 꽃을 노래한 한시 470여 수가 기록으로 함께 전해지고 있습나다.
과거를 이해하지 못하면 현재를 가늠할 수 없고, 현재를 깨닫지 못하면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선조들의 정신이 스며있는 우리의 전통 정원 서석지에서 삶의 지혜와 여유를 느껴보기를 권유해 봅니다.
[참고문헌:석문선생 문집, 임천산수기, 임장세고,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정원의 세계 / 허균 지음]
5. 항일독립운동 사부령전적지 유적
1896년 6월 22일(음 5. 12) 벽산 김도현(金道鉉) 의병부대에서 활약하던 정성첨(鄭聖瞻, 1853-1896) 은 의병 30명을 이끌고 사부령(思夫嶺)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일본군이 진보 쪽에서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해 사부령 고개로 이동하다가 접전을 펼치게 된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영양의병은 화기의 열세로 패전하였고, 정성첨을 비롯한 의병 11명이 전사하였습니다.
6.선바위 진경산수화‘쌍계입암도’
겸재 정선이 그린 쌍계입암도(雙溪立巖圖)는 경북 영양군 입암면 선바위의 진경을 그린 그림입니다.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과 청기천을 가르며 뻗어 나오다 돌연 치솟아 오르며 멈추서서 아찔한 절벽을 만들어냈으니, 자줏빛 비단 병풍, 자금병(紫錦屛)입니다. 자금병 아래서 반변천과 청기천 두 물길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남이포이며, 남이포 앞에 있는 정자가 남이정이고, 立巖(선바위)은 자금병과 남이포,남이정이 한눈에 들어오는 부용봉 아래에 우뚝 서 있는 바위입니다. 보기에 따라 벌떡 일어선 곰 형상 같기도 합니다. 정선은 청하현감으로 포항에 내려와 있을 당시인 1734년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7. 석문 정영방 선생
정영방(鄭榮邦, 1577~1650)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 홍문시독(弘文侍讀) 정환(鄭渙)의 현손으로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입암면 연당리로 이주하였습니다.
1599년(선조 32년) 정경세(鄭經世)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 예천에서 강학으로 소일할 때 그가 먼저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으며 이후 학문정진하여 용학(庸學)과 경전에 통달했습니다. 1605년(선조 38)에 성균 진사가 되었으며, 정경세가 그의 학문을 아깝게 여겨 천거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이후 국사가 어지러워 입압면 연당리로 이주하여 산자수명한 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소요자적하였습니다.
그는 이 곳 연당마을에 연못을 파고 서석지(瑞石池)를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습니다. 이 연못을 오늘날 영양서석지(英陽瑞石池)라하며 국가중요민속문화재 제108호입니다. 그는 영양이 폐현되었을 때 1633년에 복현을 위한 상소를 올려 영양현이 복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8. 영양서석지를 노래한 詩
* 敬亭 / 鄭榮邦(1577~1650)
有事無忘助 항시 힘 쓰되 잊지도 말고 조장도하지 말며
臨深益戰兢 깊은 연못에 임한 듯 더욱 두려워하고 조심하네
惺惺蕦照管 깨어 있으면서 모름지기 사물을 밝게 비추어야하니
毋若瑞巖僧 승려 서암처럼 깨어 있기만 하면 안되네.
< 해설 >
첫 구절은 맹자가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을 설명한 것인데 성리학자들은 이를 敬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다.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항시 힘쓰되 잊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조장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助'는 '모苗를 빨리 키우기 위해서 억지로 뽑아서 다 죽게 만든다'는 '맹자' 공손추 상편 제2장 '여조묘장야(予助苗長也)와 같이 인위적인 억지작용으로 일을 망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구절은 일을 처리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위해 항시 두려워하고 조심해야함을 말한다.
셋째 구절은 유학의 거경은 궁리와 짝이 되어 궁극적으로 지선과 중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넷째 마지막 구절은 궁리의 실천 없이 선정禪靜에만 머물러선 안됨을 강조하고 있다.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가르친 불교의 수양법을 비교한 것이다.
*주일재主一齋 / 鄭榮邦 (1577 ~ 1650)
爲學須要敬 학문을 하려면 모름지기 敬을 해야하며
行身莫近名 몸으로 행동할 때는 명예를 가까이 말아야한다
吾衰無自得 나는 늙고 자득한 것이 없어
聞汝讀書聲 그대가 독서하는 소리를 들으려고 한다.
<해설>
학문을 하려면 敬을 실천하고 명예를 가까이하지 말아야한다는 가르침을 후손들에게 내리고 있다.
또 나는 늙도록 자득함이 없지만 자손들은 부지런히 독서하여 道를 자득하라고 격려하고 있다.
"나는 늘 여러분들의 독서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 자손에 대한 사랑과 정이 넘치는 말이 아닌가?
[*자료정리 ; 문화관광해설사 박원양.]
----------------------------------
(영양말캉 역사 알고 가시더/창태125, 202) 입암면 연당리(蓮塘里)가 궁금니껴?
※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여불때기, 게락, 가닐다란, 질따라케, 뭉텅, 마떡은.
----------------------------------
연당리(蓮塘里)는 청기면으로 가는 길맥이며,
본새 진보군(북면) 땅이었꼬
과거 진보군 북면의 중심지 였니더.
마실 입구에는 가닐다란하면서(가늘며)
질따라케 우(위)로 솟은
선바위(立岩)라는 방구가 서 있니더.
조선 초기의 연당은
임천, 돌배기, 선바위, 주역(駐易) 일때를
엄체가 생부(生部)라꼬 카기도 했꼬
마실 뒷 산에, 하얀 돌삐가 천지빼까리로
박혔 있따꼬 돌배기(石百)라꼬도 겠니더.
1914년 행정구역 바낄때
생부(연당)캉 주역까지 엄첸 뒤
마실 중심에 연못이 있따꼬
연당(蓮塘)이라 카면서
새로 맹글어진 입암면에 속하게 된니더.
(연당)
조선 초기에는 생부(生部)라꼬 켔니더.
그후, 광해군(1613)때 와가꼬는
임천(臨泉)이라꼬 바까 부러다가
마실 앞에 마떡은 그랑물이 흐르고
숲이 수두룩빽빽 하다꼬
임천(林川)이라꼬도 켔니더.
그뒤, 1600년경 서석지(瑞石池)가
맹글어진 후 못에 연꽃을 심꼬부터는
연당(蓮塘)이라 바까 부르게 된니더.
(남이포)
반변천 그랑캉, 청기천 그랑이
엄체지는 데로
풍광이 댁낄이시더.
조선초기 남이장군이 반란군을 처단후
물낄을 바꿀라꼬 칼로 산을 잘랐는데.
그 흔적이 남이포 여불때기에 있는
선바위라는 전설이 내려 오니더.
(돌배기ㆍ석백)
본새 생부에 속한 쬐메한 마실로
임천(臨泉) 북쪼구에 있니더.
마실 뒷산에 하얀돌삐가
게락으로 박혀있따고 돌배기라꼬
카게 된니더.
석백(石百)은 돌배기를 한자로 쓴거시더.
(선바위ㆍ선바우)
연당 남동쪼구에 있꼬
마실입구에 질따라케 솟은 방구를
선바위(立岩)라 카니더.
1914년 입암면이 처음 맹글어 질때
가장 대표적 상징물이 선바위라꼬
면의 이름을 "입암면"이라 카게 된니더.
글코, 선바위(선방구)를 한자로 쓰면
입암(立岩)이 되니더.
(주역)
선방구(선바우) 북동쪼게 있는 마실로.
옛날에 장사꾼들이
물건을 서로 바꾸턴 데라 케가
주역(注易)이라꼬 카기도 켔꼬.
말을 바까 타고 가던데라 케가
주역(駐易)이라꼬도 카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