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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래시조 2021년 가을호]
〈대상〉과 〈진술〉 간의 등식 관계 또는 그 텍스트와 교접하며
노 창 수
아니, 불꽃은 조금도 없었다.
이제 물에 빠질 것이다.
그는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에서 커다란 공포를 보았다.
그게 마지막 그가 본 것이었다.
-밀란 쿤데라의 『삶은 다른 곳에』 마지막 부분
1
아주 소박하게 말한다면 시를 읽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지 싶다. 첫 번째 그냥 읽는 것, 두 번째 체계적으로 읽는 것이 그것이다. 한 편의 시를 텍스트로 정하고 주어진 관점에 의해 분석적으로 읽어 내는 게 두 번째 읽기일 터이다. 무작위로 ‘읽는 건’ 처음의 단계이지만, 목적을 가지고 ‘읽어내는 것’은 그 다음의 단계이다. ‘읽는 것’과 ‘읽어 내는 것’은 다르다. 어떤 기준과 관점을 두고 읽느냐와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이다. 독해의 조건 아래 텍스트 접하기란, 여러 작품 가운데에서 관심 주제를 ‘읽어 내는 것’ 즉 선별적으로 읽는 방법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텍스트 속의 화자가 〈대상〉을 〈진술〉하는 이미지에 대하여 하나의 〈등식〉 관계로 ‘읽어 내기’를 하려고 한다. 하면, 오롯 필자만의 의도일 뿐이다. 골라 읽은 작품을 ‘텍스트’라 가정하고 거기 대상과 진술의 등식 관계를 밝힌다는 뜻이겠다. 화자가 의도한 두 층위의 연관 관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관계를 어떤 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지 살피는 일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뭐 좀 고급스럽게 말한다면 ‘이미지 간 등식을 차용한 텍스트의 체계적 분석’ 같은 거라 할 수 있다. 작품에 활용한 상징적 이미지는 〈대상&진술〉에 대한 [A=B] 또는 [A'=B']의 경향성이라고 해도 좋을듯한데, 적당한 틀이 없어 이를 묵시적으로 인정해 둔다.
2
필자가 처음부터 이 조건을 달고 쓰리라 생각한 건 물론 아니다. 인용한 작품은 모두 텍스트적 조건에 합당한 것도 아니다. 시조를 읽으면서, 시인의 텍스트의 경향성, 즉 시적 〈대상〉과 시인, 이에 대한 화자의 〈진술〉에 대한 관점들이 조금은 흥미 있다고 여겼을 뿐이다. 그래, 두 층위가 시조를 횡단하는 어떤 (변)곡점이 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관찰해 보자는 내심이 팀구력을 작동시킨 것이다. 굳이 그 효과를 따져본다면, 등식의 도구로 사용한 이미지가 작품을 연금술(Alchemy)처럼 금빛 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독자에게 시인과 화자가 사용한 등식을 유추해 보이려면, 필자의 어떤 ‘변호성 논증(辯護性 論證)’도 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데에 필이 유혹했다. 아니면, 참 터무니 있는 비교로, 그런 글쓰기를 하는 동안만이라도 읽는 행복을 누려 볼 참이라는, 약간은 돌발적인 마음이 이 같은 독해력을 뽑아낸 것인지도 몰랐다. 하여튼 그랬다.
빛이 고픈 땅거미가 초저녁부터 보챈다
화색 흠씬 들 때까지 외짝 젖을 내 주느라
한잠도 못 잔 저 어미, 눈이 쾡한 새벽녘
-최화수 「외등」 전문
“외등”과 “외짝 젖”, 그러니까 ‘가로등’과 ‘어미젖’의 이질성(異質性)이 어떤 동류적 관점에 묶일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일단 시적 성공을 예견하는 것도 같다. 화자는 〈외등〉에 대해 〈외짝 젖〉을 선택하고, 〈외등=외짝 젖〉이란 등식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서로의 공통점을 기표화 한다. 이의 촉매제로 ‘보채다’, ‘내 주다’, ‘한 잠도 못 자다’, ‘어미이다’, ‘눈이 쾡하다’와 같은 갈급 현상들을 동원한다. 진술은 “한잠도 못 잔” 〈외등〉이 마치 배고파 보채는 아이에게 젖을 주는 〈어미〉로 대체하여 나타난다. 사실 길가의 희미한 빛 “외등”(어미)은, 겨우 나오는 빛(젖)을 뿌려(짜)줄 뿐이다. 그것도 양편의 빛이 아닌, 길 안쪽만(절전을 위한 방편)의 가로등(외짝 젖)으로, 사람들(아이)에게 밤새 희미하게 비춰(잠을 못 자며 부족한 젖을 물려) 주고 있다. 이처럼 밤길의 등빛(젖)은 희미해(배고파) 퇴근 후 귀가를 서두르는 노동자들(아이)이 더욱 피로(배고픔)를 겪게 됨을 상징화한다. “외등”은 스스로가 “화색”이 돌만큼 “흠씬” 밝아지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먼지 끼고 날벌레들이 속으로 들어가 흐릿하기 짝이 없다. 심리구조로 보면, ‘외등’은 〈이드(id)〉이고 ‘외짝 젖’은 〈리비도(libido)〉일 법하다. ‘젖’을 묶는 건 ‘외(外)’와 ‘고(孤)’로 일종의 ‘언어적 펀(langustic fun)’이다. 둘은 결핍의 콤플렉스를 함께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일견 두 현실 즉 “외등”과 “외짝 젖”은 서로의 안타까움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여타의 시처럼 ‘외등’을 ‘사위어 가는 빛’, ‘쓸쓸한 빛’과 같이 관념적으로 설정하는 바와는 사뭇 다른 감각이겠다. “외등”과 “외짝 젖”의 알레고리에 접두사격 ‘외’를 붙임으로써 〈심리적 펀(psychological pun)〉도 부린다. 이 시조를 두고 가난한 현실을 적시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보려는 텍스트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이념성 또는 그 교훈성이다.
거품 일다 골똘하네 세면대 거북이 비누
등딱지에 새겨 넣은 갑골문자 막 풀어지고
자기를 연신 덜어내는 이 여름날 밤낮 없네
씻기고 미끄러져 그 누구에게 녹아들고파
닳고 닳아 여위어서 제 몸피 부풀리고파
야청빛 깊은 바다 향 천리만리 들여놓네
-조성문 「푸른바다 거북 비누」 전문
“비누”와 “푸른바다”를 연결할 때 무엇이 필요할까. 여기에서는 “거북”을 든다. 해서, 시는 ‘비누-거북-바다’라는 세 요소를 꿰어볼 눈을 요한다. ‘비누’는 생필품으로써 극히 일상적인 사물이다. 하지만 화자는 비누를 “천리만리”의 “바다 향”을 맡아가는 “거북”으로 상징하여 사유에의 깊이를 보여준다. 하여, 이 시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흔한 비누에 대하여 새로이 존재가치를 숙고해 보게도 한다. 화자는 욕실과 화장실이나 샤워장에 놓인 비누가 “거북” 모양임에 착안한다. 그는 비누 거품으로 몸을 씻으며 〈비누=푸른바다거북〉임을 연유해 낸다. 사실 ‘바다와 거북’의 관계는 「해가사」, 「구지가」, 「별주부전」 등과 같은 우리의 옛 설화와도 관련이 깊다. 여기 화자가 인과를 맺어준 ‘비누’와 ‘거북’의 역할은 시인이 시도한 한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 시조에서처럼 거북은 천만리 깊은 바다 속에서 신화만큼 오래 살아왔다. 한데, 이제는 그게 화자의 세면대에 누워 있게 된다. 몸을 씻을 때마다 그의 “등딱지”에 파인 “갑골문자”는 “풀어”져 지워진다. 거품과 더불어 사라져가는 ‘비누거북’은 자신의 살을 누군가가 ‘문지름’에, 스스로가 생각하기를 어떤 수행과정이라고도 여긴다. ‘비누거북’, 그 ‘거북비누’가 남을 위해 제 실존을 지워가는 이 봉행(奉行)으로부터 빚어낸 한 생태적 생각이 이 시조이겠다. 여기엔 두 목적이 내재된다. 하나는, 점차 제 몸을 없어지게 함으로써 다른 몸의 현존을 빛나게 한다는 점, 두 번째는 그 몸 구석구석에 거품을 끼치면서 언젠가는 “야청빛 깊은 바다”로 나아가리라는 미래적 상상을 갖는다는 점이 그것이다. 시조는 이 두 가지, 즉 ‘현존’과 ‘미래’가 인간의 심신과 비누의 자존감 사이를 갈마들도록 장치한다. 비누가 향하는 바는 자기 존재를 지워가며 결국 ‘바다거북’으로의 귀환을 꿈꾸는 것이다. 닳아지고 사라지는 일상의 비누를 ‘바다거북’으로 환생시키는 영원한 존재, 그걸 극대하고 미화해 보인다. 해서, 앞에 설명한 바, 작품은 생의 근원과 이를 탈환해가는 원형질적 탐구로 등식화해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면
다 볼 수 있는 거다
아무도 밟지 않은
미지의 아늑처럼
뭐든지
와락 그러안는
어머니의 환한 감옥
-정상미 「안개의 공식」 전문
「안개의 공식」은 “안개”를 “어머니의 감옥”에 비유한 독특함이 있다. ‘감옥’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어머니’라는 정한(情恨)에서 출발하도록 맞대어 놓기도 한다. 상이한 두 요소에 작용하는 매개적 언어가 곧 “미지의 아늑”함이다. 해서 시조는 〈안개=감옥〉이란 등식으로 구현된다. 특히 “어머니의 환한 감옥”이 “안개”와 같다는 표현은 화자만의 명제이지만 일견 역설적 전환법이기도 하다. 이때, “안개”를 어머니의 품으로 규정한 ‘안개-어머니’ 사이의 〈공식〉은 서로에게 밀월과 같은 역할을 한다. 오랫동안 자식을 포용해 온 어머니 품속이 아늑한 안개로 묘사된 이유가 거기 있다. 이 분위기를 “감옥”과 같다고 보는 것은, 감옥에 갇힌 자식을 위해 어머니가 그 품을 연다는 의미와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그건 ‘인간극장’ 류의 시리즈에서나 볼 수 있는 바 이야기의 전개와는 구별된다. 사실 가장 안전한 품속에서는 거기 안겨 있는 자가 자아의 세계까지도 환히 볼 수 있게 된다. 해서, 어머니는 “환한 감옥”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회의 감옥처럼 어두운 게 아니라, 화자에 의해 “환한” 이미지로 리모델링된 어머니 품이기 때문이다. 하면서도 따뜻한 감옥이다. 〈안개-어머니-품-감옥〉 사이를 기능적으로 전환해 가는 이 시조는 닫혀있는 방을 연다. ‘어머니’에 대해, ‘따스한 보금자리’라는 흔한 것들을 떼어내고 이질적인 “감옥”으로 치환한 게 시가 바로 돋보여지는 지점이겠다. 〈어머니=감옥〉, 이 낯선 등식은 시인이 사물을 특이하게 보려는 정수(精髓)이지 않을까도 싶다.
토닥토닥 두드리면 앙알앙알 대꾸하다
조물조물 주무르면 삐질삐질 삐지다가
치거니 받거니 하며
새 생명을 빚는 성소
-김선호 「공방」 전문
작품을 만드는 ‘공방은 곧 성소’이다. 예술품을 빚는 공력(功力)의 과정이 공방을 통해 내공화되고 구체화되었다. 제목은 「공방」이지만 주제의 구심점을 종장의 “성소”에다 집약해 보인다. 공방에선 공방답게 “토닥토닥”, “조물조물”, “앙알앙알”, “삐질삐질” 등 첩어들이 쉬지 않고 들려온다. 도자기를 빚는 모습과 그 소리를 성유법(Onomatapoeia)으로 대체함으로써 현장감을 높인다. 해서 조용한 “성소”가 아닌 분주하게 노동하는 성소가 곧 공방임을 말한다. 결국 화자는 〈공방=성소〉 즉 “생명을 빚는” 장소로서의 대상을 재정의해 보인다. 성유법(聲喩法)이란 규칙적인 음성에서 비롯되지만 사실 발화의 리듬을 감지하는 현장에 더 구체화되는 수사법(修辭法)이다. 찰흙은 “두드리면 대꾸하”고 “주무르면 삐지”고 “치면 받”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세련된 자기(瓷器)로 바뀌게 된다. 이를 반복하면 명품이 생산될 수 있다. 시조는 도자기를 빚는 과정에 ‘노동요’의 호응을 원용함으로써 그 규칙과 반복성을 강조한다. 우리 주변엔 대체로 공방에 대한 보편적 일을 다룬 시가 많다. 그러나 이처럼 ‘성소’라는 미학적 극점을 향한 예는 드문 편이다. 다만, 종장의 첫구, “치거니 받거니”는 ‘하나의 관용구’로 연결되는 말인데 이를 분리하여 ‘치거니’의 3자로 취급한 게 좀 아쉽다. ‘독립어’로 쓰일 적합한 말을 찾아 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허리 휘는 소리가 저음으로 들려오는
마당 넓은 정원에 솔잎이 지고 있다
보굿이 툭, 툭, 터지는 여운만을 남긴 채
-김동관 「소나무 첼로」 전문
첼로는 ‘파토스(Pathos)’, 즉 비감(悲感)을 깊게 연주하는 악기이다. 오래 된 소나무는 그만큼 지나온 풍파와 함께 제 나이테를 흔들며 운다. 이 두 풍경과 연민이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융숭함을 첼로의 활로 발라내 보인다. 소나무에 스치는 바람을 첼로의 “저음”으로 변환시키는 건 화자만의 기법이겠다. 또 ‘소나무’ 사이의 바람과 그때 “휘는 소리”를 ‘첼로’의 허리에 활을 그어 화답하는 것으로 보는 건 미학의 정점이기도 하다. 소나무는 화자가 〈대상〉으로 삼았지만 시인은 이를 첼로로 〈진술〉한다. “허리 휘는 소리”, “저음”, “솔잎 지”는 소리, “툭 툭, 터지는 여운” 등은 분리되면서도 융합하는 소리이다. 그건 먼 옛날 숲속 나무에 스치는 바람결이 첼로의 통속에 숨었다가 연주 때에 맞춰 나오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첼로가 스스로 소나무가 됐는지도…. 시조 종장의 첫구 “보굿”이란 말에 특히 눈길이 머문다. ‘보굿’은 굵은 나무줄기에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나는 용의 비늘처럼 우둘투둘해진 껍질 층을 일컫는다. 억측 같긴 하지만, 오래된 ‘소나무’ 등피에 묵직한 ‘첼로 음’을 대입함으로 ‘전통’과 ‘현대’ 사이를 메우려는 병치미도 보인다. “마당 넓은 정원”의 적막감이 “솔잎” 지는 소리에 덮이고, 그와 함께 첼로가 연주되는 장면을 떠올리는 영상미가 보일 듯이 잡힌다. 현을 “툭, 툭” 꺾어 치듯이 스타카토로 듣는, 그 갈라 터진 등피의 소나무 결[像]을 시의 리듬[韻]으로 변주시킨 점에서 〈소나무=첼로〉의 등식을 재확인해 본다.
마스크 채운 뜻을 아직도 모르는지
헛바람 든 입들이 쑥덕쑥덕 모여들어
오늘도 바스락대다 새빨갛게 물든다
-손증호 「가짜뉴스」 전문
‘코로나19’는 사람들 입에 재갈처럼 마스크를 채웠다. 그게 벌써 3년 세월 동안이다. 이제 마스크는 외출 때마다 걸치는 필수 행위의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날은 깜빡 잊고 대문을 나섰다가 다시 들어가 입을 채우고 나오기도 한다. 마스크는 전염병 예방에 긴요하지만, 화자의 지적처럼 “헛바람 든 입들”을 막아주는 효과도 크다. 이 ‘반면(反面)의 거울’이 덤이라고 해야 할까. “가짜 뉴스”로 사람들이 “쑥덕쑥덕 모여들”고 투덜대는 걸 막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이유 없이 “헛바람 든”이들이 모일 땐 마스크 착용의 당위는 설득력을 얻는다. 시조에서는 〈마스크=가짜 뉴스〉로 대상과 진술 등식이 자연스럽게 교류된다. 마스크를 채운 입에서는 뭐든 말하려고 근질대기 때문에 연신 “바스락”댄다는 풍자가 실감이 난다. 믿거나 말거나 하던 거짓말, 이를 뱉지 못해 “새빨갛게 물드”는 얼굴이 거리마다 보인다. 마스크는 이처럼 거짓말을 참게 하는 효과 외에도, 성미 급한 자가 나서서 참견하지 못하게 하는 그 제동력도 있다. 기막히게 효과를 나타낸 건 욕심 부리는 국회의원들로부터이다. 그 동안 소리치고 멱살 잡을 일이 많은데 마스크 때문에 제어되는 모양 세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펜데믹 시대’를 대표하는 마스크란, 보아하니 많이 말하고, 많이 먹고, 많이 행동하지 않게 하는, 부수적인 그 ‘절제 효과’도 본다. 혼돈과 혼란의 시대에 군자 상을 심어주는 그 어떤 ‘사서삼경식 강의’보다 마스크 착용은 유효하다 할 수 있다. 비록 실물경제에는 손해를 보지만 정신 수련엔 두터워지는 이점도 있다는 그 메시지이겠다.
이상의 평설에서, 각 텍스트에 드러난 시적 〈대상〉과 화자의 〈진술〉에 대하여 관련된 등식을 부여함으로써 시인의 미학적 추동력, 사물의 확장력, 사회의 풍자력 등의 의미화를 살폈다. 텍스트 관점이란 사실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만큼 〈대상=진술〉에의 등식을 다양하게 본다는 것이겠다. 따라서 현대시조가 입체적이고 깊어진다는 반증도 있다. 앞으로 눈여겨 볼 일은 〈대상〉에 대한 관념적 〈진술〉이 아니라, 생경한 것을 등식으로 묶는 그 방향성에 있다고 본다. 예컨대, 앞에 거론한 최하수의 〈외등=외짝 젖〉, 조성문의 〈비누=바다거북〉, 정상미의 〈안개=감옥〉, 김선호의 〈공방=성소〉, 김동관의 〈소나무=첼로〉, 손증호의 〈마스크=가짜뉴스〉 등과 같은 경우이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동질적 진술 보다는 이질적인 것을 징험화(徵驗化)함으로써 시조가 더 다양해질 것으로 내다본다.
비슷한 〈대상〉에 대해 비슷한 〈진술〉을 하는 건 시를 단조롭게 한다. 뿐만 아니라 상징적 알레고리가 참신하지 않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아가 읽는 재미 또한 적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난 자식도 경우에 따라 착하게 그리고 밉게 보이는 때가 있다. 밉게 보일 땐, 하지 말라는 행위를 ‘반복’할 때이다. 자식 보는 다르기가 이럴진대, 하물며 대상과 진술에 대한 등식이 뻔하고, 형식적으로만 흐른다면 독자가 그를 ‘관념적 시인’, ‘타성화된 시인’으로 인식해버리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시인이 보는 〈대상〉에 대한 시적 〈진술〉은 위의 작품 사례 외에도 더 많다. 예컨대, 김광균의 「데생」에서 ‘구름=장미’, 정지용의 「바다·2」에서 ‘바다=푸른 도마뱀’, 이정록의 「의자」에서 ‘의자=큰애’, 이우걸의 「어머니」에서 ‘어머니=주거래 은행’, 서정화의 「다트 신화」에서 ‘다트=검은 숲의 판’, 김문억의 「성냥」에서 ‘성냥=휴화산’, 서연정의 「문」에서 ‘문=실핏줄·갈비뼈·손가락·아킬레스건·혀·달팽이관·염통·쓸개’, 선안영의 「연밭을 지나며」에서 ‘연밭=시름’, 그리고 민병도의 「북」에서 ‘북=검은 소’, 이승은의 「시계」에서 ‘시계=인화지’ 등, 거론하자면 한이 없다. 해서, 시인이 내놓은 작품이란 소박하게 말해, 〈대상〉에 대한 〈진술〉을 하기 위해서 ‘등식’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게 그리 큰 오해는 아닐 것이다.
3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1929~1949)의 성장소설인 『삶은 다른 곳에』에서는 ‘아로밀’과 그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바쳐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이런 어머니의 품에서 시인이 되기 위해 삶과 꿈, 그리고 일상 너머에 있는 막연한 행복을 바라보며 성장해 간다. 그는 선택된 존재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너무도 여성스러운 외모 때문에 대중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괴감으로 떨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하여 몰래 분노를 품을 때가 많게 된다. 하지만 그의 엄마는 그럴수록 그에게 여성의 자질을 강화한다. 아로밀은 새장과 같은 그의 삶을 지겨워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는 어머니로부터 도망치려고 여러 획책을 꾀한다. 하지만 얼마 못가 다시 어머니 곁으로 오고 만다. 사회의 풍랑을 헤쳐 나갈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후에도 어머니의 태도는 바뀌지 않는다. 그는 다시 가출을 하고 또다른 세상에 뛰어든다. 그게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소설의 제목처럼 스스로를 구하는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는 아로밀의 생이 파괴되어가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양육된 ‘여성화’ 즉 〈아로밀=어머니의 삶〉이란 등식을 거부하는 대신 〈아로밀=자신의 삶〉, 또는 〈아로밀=혁명의 삶〉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럼에도 그녀가 가둔 우리에서 그는 탈출하지 못한다. 결국 그에게 삶의 불꽃은 사라지게 된다. 그가 물에 뛰어들기 직전 거기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본다. 순간 커다란 공포가 떠오르고, 공포는 곧 유혹으로 바뀐다. 그는 ‘나르시스’처럼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의 생은 잠시 흔들리다 없는 일처럼 지워진다. 나약하지만 한 편의 시(詩)마저 시작도 않은 때에.
소설에서, 생은 결국 〈자기=자신〉이란 갇힌 데에선 창의적 세상에 한발도 나아가지 못함을 적시한다. 논픽션이나 수기는 〈자기=자신〉의 공식이 유용하겠지만 창작품은 될 수 없다. 우물에 비친 게 자기가 아니란 걸 알았더라면 아로밀은 자신을 던지지는 않았을 터이다. 우물 안 모습으로 〈대상=자기〉로 귀결 짓는 건 나르시스처럼 위험하다. 우리가 흔히 알 듯 ‘자화상’은 자기 모습이 아니다. 그냥 비쳐 있는 그림자를 ‘자화상’이라고 착시한 걸 화자가 대변할 뿐이다. ‘좋은시’란 자기의 벽을 탈출하는 것, 아니 파괴에서 나온다. 헤르만 헷세(Hermann Hesse,1877~1962)가 『데미안』에서 말한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때는 제 껍질을 깨야 하는 것과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아직도 ‘국화=누님’, ‘가을꽃=오상고절’, ‘어머니=가난’ 등과 같이, 〈대상〉을 〈진술〉함에 자신이 겪어온 과거의 자화상적인 의식에다 선배들이 써먹은 사고(思考)를 보약인양 재탕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이 폐기처분된 대상과 진술 간의 등식을 징험(徵驗)하지 않은 채 검증 없이 쓰는 시인은 더더욱 많다. 그게 ‘가관의 자기 시판’을 넘은 ‘시판의 자기 가관’이다. 새 ‘시판’을 뺨치는 헌 ‘가관’이 갓 쓰고 다그치는 격이다. 극기의 시, 그건 가관과 시판의 ‘제로섬’의 우물에서 헤어 나오는 일이다. 남이 우려먹은 노루뼈를 삼탕까지 고아 먹는 ‘나’는 쉽지만, 읽는 ‘너’는 지겹다는 사실이다. 거듭될 진술들을 죽이고서야 나는 ‘제로섬’에서 이길 수 있다. 예컨대 ‘국화=위기일발’, ‘국화=증권시장’, ‘국화=인공위성’, ‘국화=총’이라는, 이른바 말도 안 되는, 광인(狂人)이나 말할 법한 등식에의 창조적 도전이 왜 없을까. 밤벌레가 파먹을 유년의 ‘회상’만이 주렁거리고, 미래를 지탱할 ‘상상’과 ‘공상’이 다 져버린 나무에선 시(씨조차)가 죽어가기 마련이다.
그래, 더 진전시켜 보자. 상상과 공상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보통의 생은 그것을 ‘무’라고 지칭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가 프레데릭 그로(Frederic Gros,1965~ )에 의하면, 그건 ‘광기(狂氣)’이다. 문학은 언어로하여금 정서를 정돈하게 하는 게 아니다. 미치광이처럼 만들고 부수고 창조하도록 선언하게 한다. 그러니, 프레데릭 그로의 〈문학=광기〉란 등식은 예술 창조의 궁극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이제, 내 스스로 좋다는 ‘등식의 길’도 그만 벗어날 시간이다. ‘뭐 그러건 말건 아무렇게나 쓰면 되지’ 누군가 구시렁대는 어느 문단계의 광장을 지난다. 그래, 간섭은 질색이니까. ‘잘난 척 해봤자’의 사회니까, 시가 깊지 않아도 해는 또 뜨니까. 그 소리에 난 얼른 마스크를 쓴다. 한데 참, 귀에다 둘렀다,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