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칼럼-길을 걷다] 더러 이런 여행을 -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비극의 현장
2001년 개항 당시 인천국제공항 취항 국내외 항공사는 29개였는데 올해 안에 100개사를 훨씬 넘어설 전망이다. 취항 항공사가 늘어날수록 입, 출국 승객은 늘어날 것이고 해외로 떠나는 내국인 규모도 증가한다. 몇 년 뒤 해외여행 자유화 40년이 되는데 글로벌 시대에 해외문물 습득과 교류를 넘어 여행, 관광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개념 확산이 필요할 때에 이르렀다.
이미 오래 전 자유여행객 숫자가 패키지여행을 넘어섰다지만 고령사회가 진행될수록 패키지 수요 역시 늘고 있다. 예전에 비하여 여행지역이 크게 확대되어 남극 근처,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중동 국가까지 상품이 개발되어도 내용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유명 관광지를 바삐 돌고 선택 관광과 쇼핑으로 진행되는 단체관광 패턴은 소비자들의 취향이 다양해지고 안목이 높아져도 여전히 구태의연하다.
종전과 차별되는 개념의 관광, 단순히 즐기며 돌아보는 구성에 새로운 형식을 확산시키면 어떨까. 한때 관심을 모았다가 잠잠해진 ‘공정관광’이 그 하나인데 ‘공정무역’처럼 현지 주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짜여 진다. 항공편은 우리 국적기로, 가급적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숙박업소, 식당을 이용하고 그들의 삶의 현장을 보다 깊숙이 보고 느끼는 상품으로 제3국 재벌기업들이 대주주인 호텔, 식당, 관광서비스를 가급적 배제한다. 결국 환경을 보호하고 현지인들의 소득을 최대한 높여주자는 취지인데 호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접근할 만하다.
다른 하나는 다크(블랙, 그리프)투어리즘으로 어두운 역사의 현장, 재난과 고통의 연대기를 살펴보면서 전통적인 관광의 즐거움과 차별화하여 역사의 교훈, 인간과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도모하는 취지이다. 이 역시 단기간에 대규모 확산은 어렵겠지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여행패턴의 하나가 될 만하다. 킬링필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구치터널, 히로시마 평화공원, 9.11 테러현장, 하얼빈 731생체실험부대 등 이미 기존 관광코스에 일부 포함되어 있는 현장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 산재한 어두웠던 역사, 지도자의 오판이 불러왔던 불행과 재앙의 현장을 비중있게 탐사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평화와 행복의 본질을 생각해보는 다크 투어리즘은 21세기 의미 있는 여행 콘텐츠의 하나가 될 만하다.
멀리 갈 것 없이 다크 투어리즘의 현장은 국내 곳곳에 있다. 대전 골령골, 영동 노근리, 제주 4.3현장, 서대문 형무소 등이 대표적이다. 1950년 7월 충북 영동 노근리 경부선 철로, 쌍굴 등지에서 피난민을 향해 미군이 기관총 등을 발사하여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참사였다. 50여년이 지나서야 미국 정부의 인정과 클린턴 전 대통령의 유감표명이 있었지만 후속조치는 답보상태다. 대전 골령골에서는 1950년 6월∼7월 사이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비롯한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사살되었다. 고광률 작가가 장편소설 ‘붉은 그늘’에서 노근리 비극을 추적하였고 골령골 학살은 최근 대전지역 젊은이들로 구성된 극단 아인에서 ‘골령’이라는 연극 공연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모처럼의 관광, 여행길에서 어두운 역사를 살펴보며 굳이 우울해질 필요가 있을까, 책에서나 다른 경로로 이미 알고 있는 비극을 다시 들춰봐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여행을 생애 단 한번 간다면 모쪼록 즐겁고 유쾌해야겠지만 여러 번 떠나는 나들이에서 더러 생각하는 관광, 오늘의 내가 누리는 평온한 일상이 있기까지 역사의 뒤안길에서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아픈 자취를 돌아보며 인간과 삶, 사회에 대하여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유익할 듯싶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