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청나라 때입니다.
명나라 때가 보이차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하는 꽃봉오리라고 한다면 청나라 때는
무럭무럭 자라서 활짝 만개하는 시기입니다.
청나라 시기는 그야말로 전성기입니다.

정확한 시간대로 본다면 청순치 18년(1661년)에 청 정부는 지금의 용생현에 차 시장을 건립합니다.
용생현은 운남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에게 익숙한 여강, 대리가 있는 지역입니다.
서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티베트가 있으니 주 수출 지역과 인접한 곳에 차 전문 시장을 세운 것입니다.
청 정부는 차 시장을 세우고 차인(茶引)을 받는데요, 차인은 쉽게 이야기하면 차에 대한 세금과 더불어
티베트까지 갈 수 있게 해주는 운행 허가증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때 당시 한 해 거두어들였던 차인이 은 379량이라고 합니다.
세금으로 거둔 은 379량은 차를 싣고 떠났던 말로 따지면 약 843마리분의 보이차라고 하니
대단한 양입니다.
어떤 품목이든 국가에서 세금을 징수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욱 빠르고 효율적인 징수를 위해 도량화가 필요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티베트로 수출되던 보이차는 이런 도량이 없었습니다.
산차로도 갔고 둥근 공 형태로 만든 단차, 호박 모양의 과차로도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병차 형태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무게는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차의 무게는 모두 측정해서 차인을 발급했습니다만, 제품이 여러 형태이다 보니
차인의 발급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한 것이 바로 칠자병차입니다.
옹정7년(1729년)에 청나라는 사모에 보이부를 설립합니다.
보이부는 당시 보이차의 주 생산지였던 서쌍판납의 차를 독점 운영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보이차 역사에서만 본다면 중국이 처음으로 도입한 독점과 관리를 위한 제도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차인의 개량과 보이차의 도량화를 시도합니다.
1735년에 완성된 차인과 도량화를 보면 이렇습니다.

차인 한 장당 백 근의 차를 살 수 있습니다.
정확한 무게와 세금징수의 편의를 위해 보이차는 납작한 원형으로 만들도록 지시합니다.
한 편의 무게는 7량, 일곱 편이 한 통이 되도록 죽순 껍질로 포장하며 한 통의 무게는 49량이 됩니다.
이때의 근과 량은 지금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 한 편에 7량이라는 무게는 오늘날의 357그램 정도라고 합니다.
차인 한 장으로 살 수 있는 차는 32통이 됩니다.
즉 수매하는 입장에서는 차인 한 장 발급해주고 32통만 사면 끝나는 간편한 시스템입니다.
각 통에 일곱 편이 들어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칠자병차(七子餠茶)입니다.
칠자병차의 탄생은 세금이나 수매 모두 간단하게 해결하는 제도였습니다.

지금도 칠자병차라고 부릅니다만, 당시 기록을 보면 칠자원차(七子圓茶)라고 나와 있습니다.
원차나 병차나 모두 납작한 원형의 차를 말하는 것이니 칠자원차와 칠자병차는 같은 차입니다.
오늘날 쓰이는 칠자병차라는 말은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맹해차창에서 1957년 처음으로 병차라는 말을 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민국시기에 불해차창에서 수매했던 보이차 목록 중에 칠자병차라고 기록된 자료가 있습니다.
정확한 시작 시기는 모르지만, 농가나 상인들은 원차라는 말과 병차라는 말을 모두 썼다는 것이지요.
칠자병차의 탄생은 보이차 최초의 도량화를 이룬 사건입니다.
도량화는 또한 안정적인 품질을 지속 가능하게 해줍니다.
보이부 설립 후 백여 년이 지난 1825년, <전해우형지>에는
'보이차의 명성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는 글이 나옵니다.
변방에서 만들어 티베트로 수출하던 보이차는 도량화와 함께 탄생한 칠자병차의 인기에 힘입어
천하에 명성을 날리는 차가 됩니다.
이어집니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칠자병차가 세금을 걷기 위한 방법으로 탄생했군요.
357g의 무게단위의 근거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