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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숭복사비명 병서〔大嵩福寺碑銘 竝序〕
내가 듣건대, 왕자(王者)는 부조(父祖)가 쌓은 덕업을 기반으로 해서 자손을 위한 계책을 크게 세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정치는 인(仁)을 근본으로 하고 예교(禮敎)는 효(孝)를 우선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는 즉 인에 입각하여 대중을 구제하는 정성을 확대 적용하고, 효에 입각하여 어버이를 높이는 전범을 거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夏)나라의 홍범(洪範)을 통해서 무편(無偏)의 자세를 본받고, 주(周)나라의 시편(詩篇)을 통해서 불궤(不匱)의 정신을 따라야 할 것이다.조상의 덕을 닦으면서〔聿修〕 비패(秕稗)의 기롱을 받지 않게 하고, 제사를 올리면서〔克祀〕 빈번(蘋蘩)의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악한 은혜가 만백성에게 골고루 적셔지고, 덕의 향기〔德馨〕가 드높이 하늘에까지 달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애태우며 더위 먹은 사람에게 부채질해 주고 죄인을 보고서 눈물을 흘린 것은 부처가 대미(大迷)의 지경에서 중생들을 구제해 주는 것 아님이 없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의 조상을 하늘과 짝 지우며 상제(上帝)에 배향하는 것은 불교가 상락(常樂)의 세계에서 존령(尊靈)을 받드는 것 아님이 없다. 이를 통해서 유가에서 구친(九親)을 돈목(敦睦)하는 것은 불가에서 삼보(三寶)를 소륭(紹隆)하는 것과 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물며 옥호(玉毫)의 광채가 밝게 비치는 것과 금구(金口 부처의 입)의 게송이 흘러 전하는 것이 서토(西土)의 생령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방의 세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우리 태평(太平) 승지(勝地)로 말하면, 성품은 온유하고 화순하며 기운은 발육하고 생장시키는 데에 적합하다. 산림에 정묵(靜默)의 승도(僧徒)가 많아 인(仁)으로 벗을 모으고, 강해가 조종(朝宗)의 형세와 일치하듯 선(善)을 따름이 마치 물 흐르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기풍을 드날리고 범왕(梵王)의 불도(佛道)에 젖어 드는 것이 마치 도장에 인주를 찍는 것과 같고 거푸집 안에 쇠가 들어 있는 것과 같이 되었다. 그리하여 군신(君臣)이 삼보에 귀의할 뜻을 밝히고 사서(士庶)가 육도(六度)에 정성을 기울인 결과, 심지어는 국성(國城)에까지 원하는 대로 탑묘(塔廟)를 즐비하게 세울 수 있게끔 되었다. 그러니 섬부주(贍部洲)의 해변에 있다고 하더라도, 도사다(都史多)의 천상에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신묘한 일 중에서도 신묘한 이 일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금성(金城)의 남쪽에 있는 일출봉(日出峯) 기슭에 숭복(嵩福)이라는 이름의 가람(伽藍)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람은 선조(先朝 경문왕(景文王))가 왕위를 계승한 초년에 열조(烈祖)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원릉(園陵)을 조성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 중건한 것이다. 고사(古寺)가 세워진 유래를 상고하고 신찰(新刹)이 완공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는 소문왕후(昭文王后)의 원구(元舅 큰 외숙)요 숙정왕후(肅貞王后)의 외조(外祖)로서, 고귀한 공자(公子)의 신분이면서도 실로 참다운 고인(古人)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서 마음껏 풍류를 즐겼던 것처럼 가당(歌堂)과 무관(舞館)을 그럴 듯하게 세우더니, 나중에는 혜원(慧遠)이 서경(西境)을 함께 기약했던 것처럼 그 건물을 희사하여 상전(像殿)과 경대(經臺)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당년에 풍악을 울리던 피리와 가야금이 오늘날에는 사찰의 쇠북과 경쇠가 되었으니, 이처럼 시대에 따라 바뀐 것은 출세간(出世間)의 특별한 인연이었다.
이 사원 주변의 경관 중에 고니〔鵠〕 모양의 바위가 있었으므로 사원의 이름을 그대로 곡사(鵠寺)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원앙〔鴦〕처럼 짝하고 있는 회랑(回廊)으로 하여금 성가(聲價)를 드높이게 하고, 거위〔鵝〕처럼 날개를 펼친 불전(佛殿)으로 하여금 빛을 더하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저 바라월(波羅越)의 형태를 표방한 사원이나 굴린차(崛恡遮)의 이름을 기념한 사원이 어찌 천리를 나는 고니의 비유를 취하고 쌍림(雙林)으로 바꿔서 이름을 새로 지은 이 사원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이곳의 지세가 위세 면에서 취두(鷲頭)보다 낮고 지덕(地德) 면에서 용이(龍耳)처럼 높은 만큼,금계(金界)로 획정하기보다는옥전(玉田)을 조성하는 것이 적당한 것이었다.정원(貞元) 무인년(798, 원성왕14) 겨울에 이르러 왕 자신을 장사 지낼 일에 대해 유교(遺敎)를 내리면서 인산(因山)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장지를 택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사원이 자리한 터를 지목하여 장차 왕릉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이때 어떤 이가 의문을 제기하며 말하기를,
“옛날에 유씨(游氏)의 사당과 공자(孔子)의 구택을 모두 차마 허물 수 없다고 하여 그냥 놔두었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지금 금지(金地 사원)의 땅을 뺏으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수달다(須達多)가 크게 희사한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을 장지로 삼는다면 땅은 복될지라도 하늘은 허물할 것이니 서로 보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하니,
정사(政事)를 담당한 자가 반박하여 말하기를,
“범묘(梵廟 사원)의 경우는 어디에 있든 반드시 화합하게 되어 있는 만큼, 어디로 가든 간에 맞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재앙이 일어나는 터도 복된 도량으로 전환하여, 백억겁토록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영수(靈隧 묘지)의 경우는 아래로 지맥을 살피고 위로 천심을 헤아려서, 반드시 구원(九原) 속에 사상(四象)을 포섭함으로써 천만대토록 그 여경(餘慶)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다. 불법은 어느 한 곳에 머무는 상(相)이 없으나 장례는 행하기에 좋은 시기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거하는 것이 하늘에 순응하는 도리이다. 단지 청오(靑烏)가 좋다고 간주해서 그런 것일 뿐이지, 어찌 백마(白馬)를 슬피 울게 하려고 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이 인사(仁祠)의 내력을 살펴보건대, 본디 척리(戚里)에 속해 있었던 것인 만큼, 낮은 척리에서 높은 왕실로 나아가고 옛 절 대신 새 왕릉을 도모하는 것이 참으로 타당하다. 그리하여 왕릉이 해역(海域)의 웅장함을 차지하게 하고, 사원이 운천(雲泉)의 아름다움을 독점하게 한다면, 우리 왕실의 복산(福山)이 높이 솟을 것은 물론이요, 저 후문(侯門 척리)의 덕해(德海)도 편안히 흐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알고서 하지 않음이 없게 되는〔知無不爲〕 가운데각각 제자리를 얻게 된다〔各得其所〕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저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작은 은혜를 베푼 것이나 노(魯)나라 공왕(恭王)이 중도에 그만둔 것과 같은 차원에서 따질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의당 거북점과 시초점〔龜筮〕 모두 사람의 뜻과 서로 들어맞는다는 소리가 들릴 것이요, 용(龍)과 제천(諸天)의 신이 환희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사(精舍 사원)를 옮기고 현궁(玄宮 왕릉)을 조성하는 두 가지 공사에 인부를 동원하고 백공(百工)에게 일을 진행하게 하였다.감우(紺宇 사원)를 개창(改創)할 때에는 인연이 있는 대중이 서로 이끌고 와서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바람이 통하지 않고, 송곳을 꽂을 땅조차 없을 정도였으니, 이는 마치 5리(里)의 안개를 피우는 술법을 배우려고 사람들이 달려와서 저잣거리를 이룬 것이나 한때 설산(雪山)의 법회에 대중이 화열하며 모여든 것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기와와 재목을 거두고 경전과 불상을 봉대(奉戴)하는 일에 있어서도 서로 번갈아 수수(授受)하며 경쟁적으로 정성을 바쳤으므로, 역부(役夫)가 반걸음도 옮기기 전에 석자(釋子)가 편히 거할 곳이 벌써 이루어졌다.
구원(九原 왕릉)을 조성할 때에는 비록 왕토(王土)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공전(公田 국가 소유의 토지)이 아니었으므로, 왕릉 주변의 토지를 좋은 값으로 매입하여 구롱(丘隴) 200여 결(結)을 보태었으며, 그 대가로 도합 2천 점(苫)의 도곡(稻穀)을 보상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기전(畿甸)의 고을 사람들과 공동으로 나무를 베어 길을 내고 소나무를 분담해서 주위에 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쓸쓸히 자꾸만 들려오는 슬픈 바람 소리는 봉황처럼 춤추고 난새처럼 노래했던 옛 생각이 솟구치게 하였고, 어둠에 묻혔다가 밝은 해를 본 묘역은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위세를 돋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살펴보건대, 땅은 하구(瑕丘)와 달라도 경계는양곡(暘谷)과 접하였고, 기수(祇樹)의 남은 향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곡림(穀林)의 상서로운 기운이 그 농도를 더하고 있다. 수놓은 듯한 봉우리들은 사방 멀리에서 서로 조회(朝會)를 하고, 누인 명주 같은 개펄은 한 가닥 선으로 눈앞에 다가온다. 실로 교산(喬山)의 빼어남을 간직하고, 필맥(畢陌)의 기이함을 보여 주고 있으니, 금지(金枝 왕족)가 계림(雞林)에서 더욱 무성해질 것이요, 옥파(玉派 종실)가 접수(鰈水)에서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이에 앞서 사우(寺宇)를 옮길 적에 땅에서 솟아 나온 것과 같은 점이 있었으나, 아직 화성(化城)과 같이 되지는 못하였다. 가까스로 잡목을 베어 내어 강만(岡巒)을 구분하고 띠풀을 엮어서 풍우(風雨)를 피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겨우 70여 년이 지나는 사이에 숨 가쁘게 아홉 조정이나 거치게 되었으므로, 그동안 누차 전복될 위기를 맞았을 뿐 어엿하게 꾸며 볼 여유는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삼리(三利)의 수승(殊勝)한 인연을 맞게 되어서 천세(千歲)의 보배로운 운세를 흠 없이 누리게 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선대왕(先大王)은 홍저(虹渚)가 빛을 떨치듯 오잠(鼇岑)에 자취를 드리웠다. 처음에 옥록(玉鹿)에서 명성을 날리며 특별히 풍류(風流)를 진작시키더니, 이윽고 금초(金貂)의 지위에서 관원들을 총괄하며 나라의 풍속을 맑게 하였다. 용전(龍田)의 지위를 차지하고 덕(德)을 심었으며, 봉소(鳳沼)에 거하면서 마음을 계옥(啓沃)하였다. 무슨 말을 할 때에는 인자(仁者)로서 사람을 편안하게 하였고, 정사를 꾀할 적에는 정도에 입각하여 인도하였다. 팔병(八柄)의 막중한 권한을 모두 행사하여 사유(四維)가 실추된 것을 바로잡아 두서 있게 하였다. 어려운 일들을 차례로 겪었지만 행하는 일마다 이롭게 진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국(杞國)의 근심이 닥쳐와 보위가 비게 되면서 산악이 흔들렸는데, 사슴의 뒤를 좇는 들판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까마귀 떼가 동산에 모여들기는 하였다. 그러나 선대왕(先大王)이야말로 현명하고 온순한 데다 노성하고 인자하여 백성들의 추대를 받았으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겠는가. 이에 대저(代邸)에서 입신하고 나서 자문(慈門 불문(佛門))에 뜻을 기울이며 선조(先祖)에게 수치를 끼칠까 염려하여 불사를 일으킬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분황사(芬皇寺)의 승려 숭창(嵩唱)에게 청하여 범거(梵居 사원)를 중수하겠다는 뜻을 부처에게 아뢰도록 하고 한편으로 김순행(金純行)을 보내어 선조의 덕업을 선양하려는 성의를 사당에 고하게 하였다. 이는 《시경(詩經)》에서 말한 바 “화락한 군자여, 복을 구하는 것이 삿되지 않구나.〔愷悌君子 求福不回〕” 라고 한 것이나, 《서경(書經)》에서 말한 바 “상제가 이에 흠향하고 아래 백성들이 공경하며 따른다.〔上帝時歆 下民祗協〕” 라고 한 것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지극한 정성이 신불(神佛)의 보우를 받고 선의의 행동을 사람들이 잘 따르게 된 결과, 경(卿)과 사(士)와 대부(大夫)의 뜻이 수귀(守龜)의 뜻과 합치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동국(東國)을 혁혁히 빛내면서 임금으로 임하고 나서, 배신(陪臣)을 보내어 선왕(先王)이 훙거(薨去)한 사실을 알리고 금상(今上)이 왕위를 계승한 것을 보고하였다.
마침내 함통(咸通) 6년(865, 경문왕5)에 천자가 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 호귀후(胡歸厚)를 정사(正使)로 삼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전에 진사(進士)였던 배광(裵匡)의 허리에 금어대(金魚袋)를 채우고 머리에 해치관(獬豸冠)을 씌워 부사(副使)로 삼은 뒤에 왕인(王人)인 전헌섬(田獻銛)과 함께 와서 조명(詔命)을 전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에,
“빛나게 선왕의 뒤를 이어받고 나서 성유(聲猷)를 제대로 봉행함으로써 잘 계승하였다는 이름이 드러나게 하였으니 왕위에 추대한 지극히 공정한 거조에 참으로 부합된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를 명하여 신라의 국왕으로 삼는 바이다.”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검교태위 겸 지절충영해군사(檢校太尉兼持節充寧海軍使)를 제수하였다. 지난날에 선대왕이 제(齊)나라를 변화시키며 빼어난 면모를 드러내고, 노(魯)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하며 향기를 드날리지 않았더라면, 천자가 어떻게 이처럼 봉필(鳳筆)을 날려 해외의 제후(諸侯)를 총애하고 용정(龍旌)을 내려 대사마(大司馬)의 직책을 임시로 수행하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또한 영광스럽게 천자의 은택에 젖었고 보면, 반드시 영구(靈丘 왕릉)에 나아가 친히 참배해야 하겠기에, 천승(千乘) 제후의 행차를 준비하게 하였으나, 그것이어찌 십가(十家)의 재산만 소모할 뿐이었겠는가. 이에 마침내 태제(太弟)인 상국(相國)에게 명하여 청묘(淸廟)의 제사에 치제(致齊)하게 하고 현경(玄扃 왕릉)에 대신 참알(參謁)하게 하였다. 아름답도다. 계림(雞林)의 번성함이여, 그리고 영원(鴒原)의 무성함이여.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코끼리가 밭 갈던 일을 언제나 그리워할 것이요, 시대가 평화로우니
소가 헐떡거리는 것을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들판과 시내를 화려하게 비추며 태제의 행렬이 지나가자 구경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복어처럼 등에 거뭇거뭇하게 점이 찍힌 노인과 고니처럼 눈썹이 흰 승려가 손뼉을 치며 서로 기뻐하고 크게 경하하며 말하기를,
“고귀한 개제(介弟 태제)의 이번 행차로 성제(聖帝)의 은광(恩光)이 드러나고 우리 임금의 효도가 이루어졌다. 예의 있는 우리의 풍속이 넉넉하게 여유가 있어서, 마침내 바다 물결이 가라앉게 하고, 변방에 전쟁의 티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천리(天吏)가 고르게 하고, 땅의 곡식이 풍성하게 하였다. 그러니 뒤를 이어서 연우(蓮宇 사원)를 중수하고 백성(柏城 왕릉)을 돌볼 적기가 바로 지금이니, 지금 하지 않고 어느 때를 다시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이에 선대왕(先大王 경문왕)의 효성이 크게 사무쳐서 생각과 꿈이 일치된 결과 성조대왕(聖祖大王 원성왕)을 꿈속에서 뵙게 되었는데, 성조대왕이 선대왕을 어루만지며 고하기를,
“나는 너의 선조이다. 네가 불상을 세우고 나의 능역(陵域)을 돌보려고 하는데 조심하고 공경히 할 것이요, 서둘러서 경영하려고 하지 말지어다. 부처의 덕과 나의 힘이 너의 몸을 보호해 줄 것이다. 진정 중도를 잡고 행한다면 하늘의 복록을 끝까지 길이 누리리라.”
하였다. 이윽고 청랑한 물시계 소리에 맞춰 옥침(玉枕)에서 잠이 깨어 일어나니, 십훈(十煇)으로 점을 치지 않아도 구령(九齡)의 해몽과 일치하는 듯하였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속히 명하여 법회를 경건히 거행하도록 하였다. 화엄(華嚴)의 대덕(大德)인 석결언(釋決言)이 당사(當寺)에서 유지(有旨)를 받들고 5일 동안 강경(講經)을 하였으니, 효성을 펴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선대왕이 하교하기를,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不愛其親〕에 대해서는 경(經)에서도 경계한 바이다.‘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無念爾祖〕’라고 한 시(詩)의 구절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를 돌보아 주는 이때에 과인이 사원을 중수하려고 하자 꿈속에서까지 감응이 이루어지게 하니 마음이 떨리고 두렵기만 하다. 3년 동안 날지 않은 것〔三年不蜚〕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단 하루라도 반드시 손질할 것〔一日必葺〕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백관(百官)의 어른과 어사(御史)는 이 일에 대한 이해관계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전당 잡혔다〔賣兒貼婦〕는 기롱은 받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혹시 귀신이 원망하고 사람들이 괴로워한다는 말이 나올까 염려가 되니, 행해야 할 일은 진헌하고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은 폐지하도록 임금에게 건의하는 일을 그대들은 소홀히 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종신(宗臣)인 계종(繼宗)과 훈영(勛榮) 이하가 협의하여 상언(上言)하기를,
“애틋한 소원이 신명에게 감통(感通)하여 선조의 혼령이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참으로 임금님이 뜻을 먼저 정하셨기 때문에 실제로 여론이 모두 동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원이 이루어지면 구족(九族)에게도 많은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농한기를 맞았으니 토목 공사를 일으키소서.”
하였다.
이에 건례선문(建禮仙門)에서 특출한 인재들을 발탁하고, 소현정서(昭玄精署)에서 출중한 승려들을 뽑았으며, 종실의 세 명의 유능한 신하인 단원(端元), 육영(毓榮), 유영(裕榮)과 석문(釋門)의 두 명의 걸출한 승려인 현량(賢諒)과 신해(神解), 찬도(贊導)하는 승려인 숭창(嵩唱) 등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게다가 한 나라의 임금이 단월(檀越 시주)이 되고 국가의 저명한 인물이 유사(有司)가 되었으므로, 역량 면에서 여유가 있었음은 물론이요 마음속으로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장차 작은 것을 크게 늘리려고 하는 터에, 새것을 옛것과 뒤섞이게 하는 것이 어찌 온당하겠는가마는,단계(檀溪)의 숙원을 이루지 못할까 걱정이 되고, 내원(㮈苑)의 전공(前功)을 해칠 염려도 없지 않기에 옛 재목을 간추려 모아서 높이 다진 대지(垈地)로 옮겨 놓았다. 그러고는 별을 점치고 날을 헤아려 웅장한 규모의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면서 진흙을 이기고 쇳물을 부으며 다투어 묘한 솜씨를 보여 주었다.
구름 같은 사닥다리를 타고서 수(倕)의 재목을 아슬아슬하게 가설(架設)하고, 서리처럼 하얀 흙벽을 노(獿)의 백악(白堊)에 향을 버무려서 발랐다. 바위산의 기슭을 깎아 내어 담장을 돋우고, 시냇물을 굽어보며 문 앞이 트이게 하였다. 거친 섬돌은 쇠 장식 계단으로 바꾸었고, 낮은 곁채는 아로새긴 회랑(回廊)으로 달라지게 하였다. 겹으로 된 불전(佛殿)은 용(龍)처럼 서렸는데 그 가운데에 노사나(盧舍那)를 주불(主佛)로 봉안하였고, 층으로 된 누각은 봉(鳳)처럼 우뚝 섰는데 그 위에 수다라(修多羅 경(經))를 이름으로 하였다. 고래등 같은 동량을 높이 설치하였고, 난새를 새긴 난간을 마주 보게 하였다. 화려한 반자에는 꽃들이 모여 차례로 줄지어 있고, 수놓은 두공(枓栱)에는 가지가 옹위하듯 서로 맞물려 있는데,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듯하여 눈길을 돌리면 누구나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 밖에 더 높이고 고쳐 지은 것으로는, 영정(影幀)을 모신 별실(別室)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연방(蓮房)과 음식을 요리하는 식당과 아침마다 밥을 짓는 공양간과 같은 곳이 있었다. 여기에 또 새기고 다듬는 데에 솜씨를 다하고 색칠을 하는 데에 정밀함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바위 골짜기와 함께 맑은 기운이 우러나오고 안개 노을과 어울려 서로 찬란하게 빛났다. 옥으로 된 찰간(刹竿)에는 봉래도(蓬萊島)를 비추는 달이 걸려서 두 송이 서리 머금은 흰 연꽃이 피어나고, 쇠로 된 풍경(風磬)에는 솔 우거진 시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부딪쳐서 어느 때나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주변의 승경(勝景)을 돌아보더라도 먼 변방에서 경치가 걸출한 곳이었다. 좌측의 산봉우리는 닭의 발이 구름을 끌어당기는 것 같고, 우측의 원습(原隰)은 용의 비늘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 같다. 앞을 굽어보면 메기 형상의 산이 검푸르게 줄 지어 서 있고, 뒤를 돌아보면 봉새 같은 언덕이 갈고리처럼 이어져 있다. 그래서 멀리서 바라보면 가파르면서 기이하고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삽상하면서 아름다우니, 낙랑(樂浪 신라)의 선경(仙境)은 참으로 낙방(樂邦)이요, 초월(初月)의 명산은 바로 초지(初地)라고 이를 만하다.
잘 건설하여 주도면밀하게 일을 마칠 수 있었고, 근실히 닦아서 복을 헛되이 버리지 않았으니, 반드시 인방(仁方 동방)을 크게 감싸 줄 것이요, 임금의 보수(寶壽)에 이바지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삼천세계(三千世界)를 망라하여 사방의 경내로 삼고, 500년을 헤아려서 한 해의 봄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번산(樊山)에서 사냥한 표범의 꼬리를 매달아 세우며 바야흐로 기뻐할 이때에, 형산(荊山)의 용에 걸터앉아 떨어뜨린 수염을 안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헌강대왕(獻康大王)은 연소한 나이인데도 높은 덕을 지녔고 뛰어난 체격에 맑은 정신을 소유하였다.〔神淸遠體〕 침문(寢門)에서 내수(內豎)에게 안부를 묻지 못하게 된 것을 비통하게 생각하면서 익실(翼室)에서 상차(喪次)의 주인이 되는 일〔宅宗〕을 준행(遵行)하였다. 등 문공(滕文公)이 예법을 극진히 하여 거상(居喪)을 한 것처럼 끝까지 극기를 잘 하였고, 초 장왕(楚莊王)이 때를 기다려 정사(政事)를 닦은 것처럼 실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더군다나 또 천성적으로 중화(中華)의 풍도를 따르고 지혜의 이슬에 몸을 적시면서 선조를 높이는 의리를 드날리고 부처에게 귀의하는 성의를 분발하였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중화(中和) 을사년(885, 헌강왕11) 가을에 하교하기를,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고 선왕의 일을 이어받아 길이 후손에게 복을 물려주는 일은 바로 나에게 달려 있다. 선조(先朝)에서 세운 곡사(鵠寺)는 이름을 바꿔서 대숭복사(大嵩福寺)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불경을 수지(受持)하는 개사(開士)와 기강을 확립하는 정리(淨吏)가 전지(田地)를 가지고 공양과 보시에 이바지하는 것은 일체 봉은사(奉恩寺)의 고사(故事)에 의거하도록 하라. 고(故) 파진찬(波珍飡) 김원량이 희사한 땅의 산물(産物)을 전운(轉運)하는 일이 가볍지 않으니 정법사(正法司)에 위임하도록 하라. 그리고 별도로 두 명의 숙덕(宿德)을 뽑아 입적시켜 상주하게 하면서 그의 명복을 빌게 하라. 그러면 윗자리에 있는 나로서는 저승 세계까지 보살피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요, 큰 인연을 지은 김원량으로서도 반드시 감통(感通)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종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고, 발우(鉢盂)에는 향적반(香積飯)이 가득 담기게 되었다. 중생을 창도하는 것은 육시 예배(六時禮拜)를 하며 옥경(玉磬)이 울리듯 할 것이요, 부처의 가르침을 수지(修持)하는 것은 만겁(萬劫)토록 하늘의 별이 세상을 비추듯 할 것이다. 위대하도다. 이는 공자(孔子)가 말한 바 “근심이 없는 분은 문왕일 것이다. 부친이 시작한 일을 아들이 이어받았으니.〔無憂者其惟文王 父作之 子述之〕”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력(慶曆) 경오년(景午年) 봄에 하신(下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예(禮)에 이르지 않았던가.‘명은 기물(器物)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선조의 미덕을 일컬어 후세에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다.〔銘者自名也 以稱其先祖之德 而明著之後世 此孝子孝孫之心也〕’라고. 선조(先朝)에서 처음 사원을 세울 적에 큰 서원을 발하였는데, 당시에 김순행(金純行)과 그대의 부친 최견일(崔肩逸)이 이 일에 종사하였다. 명을 지어 한번 일컬으면, 과인이나 그대나 모두 효성을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니, 그대는 명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나는 바다 건너 중국에 들어가서 떠돌다가 월계(月桂)의 향기를 훔치긴 하였지만, 우구(虞丘)의 비통함을 길이 안고 계로(季路)의 헛된 영화만 누리고 있을 뿐이기에, 명을 받들고는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할 줄 모른 채 슬피 오열할 따름이다.삼가 생각건대, 내가 중국에서 벼슬할 적에 유씨 자규(柳氏子珪)가 동국(東國)의 일을 기록한 내용을 열람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서술된 정사에 관한 조목이 왕도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국사(國史)를 읽어 보니, 그것은 완전히 성조대왕(聖祖大王 원성왕(元聖王)) 때의 사적(事迹)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전해 오는 말을 듣건대, 중국 사신 호공 귀후(胡公歸厚)가 복명할 적에 풍요(風謠)를 많이 채록하고는 당시의 재상에게 아뢰기를,
“앞으로 나 이후로산서(山西) 출신은 해동(海東)에 사신으로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계림(雞林)에는 아름다운 산수가 많은데, 동국(東國)의 왕이 그 경치를 도장으로 찍어내듯이 시로 지어서 나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요행히 운어(韻語)를 엮는 법을 예전에 배운 덕분에 억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답을 하였습니다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해외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군자(君子)가 말을 할 줄 안다고 여겼다. 이는 열조(烈祖)가 사술(四術)로 터전을 닦고 선왕(先王)이 육경(六經)으로 풍속을 교화시켰기 때문이니, 이 어찌이궐(貽厥)을 위해 힘쓴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동방의 문물이 빛나게 할 수 있었고 보면, 나의 명(銘)에도 부끄러운 말〔愧辭〕이 없게 될 것이요, 나의 붓에도 남은 용기〔餘勇〕가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감히 하늘을 대롱 구멍으로 엿보고 바다를 바가지로 퍼서 재면서 평범한 말로 엮어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달이 떨어지고 산이 무너져 홀연히 영원한 한탄을 일으키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뒤이어 정강대왕(定康大王)이 선왕의 숫돌에 계속 칼을 갈고 훈지(塤篪)를 불며 가락을 맞추는 시대를 만났다. 일단 큰 왕업을 이어 지키게 된 뒤에는 장차 남긴 업적을 계승하여 이루려고 하면서 임금 자리를 편안하게 여기는 일이 없이 그 문물을 잃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멀리 태양 같은 형님의 뒤를 따르다가 갑자기 서산에 지는 해 그림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달 같은 누이에게 높이 의지하여 동해의 빛이 길이 전해지게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대왕 전하는 오누이 간에 왕위를 이어 왕가의 계보가 확실한 가운데 빼어난 곤덕(坤德)을 본받고 아름다운 천륜을 계승하였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신주를 품었다〔懷神珠〕고 하는 것이요, 채석을 구웠다〔鍊彩石〕고 하는 것이다. 전하는 부족한 곳이 있으면 모두 보완하였고 선(善)이라면 닦지 않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우(寶雨)》의 금언(金言)에서 분명히 수기(授記)함을 얻고, 《대운(大雲)》의 옥게(玉偈)와 완전히 부합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하는 또 문고(文考 부친인 경문왕)가 부처의 집을 낙성하고 강왕(康王 헌강왕)이 승려에게 공양을 베풀면서 유리(琉璃)와 같은 불세계(佛世界)를 높였으면서도 아직 완염(琬琰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짓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재주가 없는 나에게 거듭 명하여 졸렬한 붓끝을 놀리게 하였다. 내가 비록못이 먹물로 검게 변한 고사에는 부끄럽고, 서까래와 같은 붓의 꿈을 꾼 일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장융(張融)이 이왕(二王)의 필법이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은 일에 나름대로 견주면서, 조조(曹操)가 어쩌다가 풀 수 있었던 8자(字)의 찬사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설사 세상을 불태운 재가 못을 메우고, 먼지가 휘날려 바다를 뒤덮을지라도 본지(本枝 왕실의 후예)는 번성하여 약목(若木)과 가지런히 번영을 길이 누릴 것이요, 이 풍석(豐石)은 높다랗게 옥초(沃焦)를 마주 보며 우뚝 서 있을 것이다. 정성을 다해 손을 모아 절하고 눈물을 훔치며 붓을 잡고서 빛나는 발자취를 따라 명(銘)을 지어 바친다. 명은 다음과 같다.
가위의 자비로운 부처님 / 迦衛慈王
우이의 밝은 태양 / 嵎夷太陽
서토에 출현하고 / 現于西土
동방에서 돋았도다 / 出自東方
멀어도 보살피지 않음이 없어 / 無遠不照
인연이 있으면 번창하였나니 / 有緣者昌
사원의 공이 드높고 / 功崇淨刹
왕릉의 복이 깊었도다 / 福蔭冥藏
열렬한 우리 영조는 / 烈烈英祖
덕이 명우에 부합하여 / 德符命禹
큰 산 속에 들어간 뒤에 / 納于大麓
이윽고 하토를 차지했도다 / 奄有下土
우리 자손을 보호하고 / 保我子孫
백성의 부모가 되어 / 爲民父母
도야에 깊이 뿌리내리고 / 根深桃野
상포에 멀리 나뉘어 흘렀도다 / 派遠桑浦
상여 줄 잡고 영구차 끌고 / 蜃紼龍輴
명당인 능에 새로 모시려고 / 山園保眞
유당의 묘도(墓道)를 개설하고 / 幽堂闢隧
옛 절을 이웃으로 옮겼도다 / 聳塔遷隣
만세토록 애모할 예제(禮制)가 되고 / 萬歲哀禮
천생토록 청정한 인연이 되리니 / 千生淨因
사원은 이로움이 많을 것이요 / 金田厚利
왕손은 길이 봄빛을 누리리라 / 玉葉長春
효손의 깊고 아름다운 덕이 / 孝孫淵懿
천지를 밝게 감동시킨지라 / 昭感天地
봉황이 날고 용이 뛰는 가운데 / 鳳翥龍躍
금규의 상서에 맞게 되었도다 / 金圭合瑞
훤히 살피는 신령에게 요청하여 / 乞靈不昧
복을 구하자 곧장 이르렀나니 / 徼福斯至
선조의 그 은덕 보답하고자 / 欲報之德
불사(佛事)를 성대히 일으켰도다 / 克隆法事
나라의 인재를 가려서 뽑고 / 妙選邦傑
나라의 기술자를 독려하면서 / 嚴敦國工
농사일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 伺農之隙
부처의 집을 완성하였도다 / 成佛之宮
채색 난간에는 봉황이 모여들고 / 彩檻攢鳳
아로새긴 들보에는 무지개가 걸리고 / 雕樑架虹
둘러친 담장에선 구름이 일어나고 / 繚墉雲矗
단청 벽에는 노을이 한데 녹았도다 / 繢壁霞融
자리한 터전은 앞이 툭 트이고 / 盤基爽塏
접하는 경치도 모두 소쇄하나니 / 觸境蕭灑
쫑긋쫑긋 서 있는 푸른 봉우리요 / 藍岫交聳
퐁퐁 솟아나는 감미로운 샘이로다 / 蘭泉逬瀉
꽃은 봄날 동산에 교태 부리고 / 花媚春巖
달은 가을밤에 높이 떴으니 / 月高秋夜
비록 해외에 있다 해도 / 雖居海外
홀로 천하에 빼어났도다 / 獨秀天下
진은 보덕이라 하고 / 陳稱報德
수는 흥국이라 했다지만 / 隋號興國
왕실의 복이 국력에서 나오는 / 孰與家福
우리의 이 사원만 하겠는가 / 興之國力
불당에는 요란해라 범패 소리 / 堂聒妙音
주방에는 풍성해라 정결한 음식 / 廚豐淨食
]정강대왕이 끼치신 교화 / 嗣君遺化
만겁토록 무궁하리로다 / 萬劫無極
아 거룩해라 우리 여왕님은 / 於鑠媧后
효우의 정이 돈독하신 분 / 情敦孝友
형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 致㜫雁行
삼가 용수를 아름답게 하였다오 / 愼徽龍首
나의 문사는 몽당붓이라 부끄럽고 / 詞恧腐毫
나의 글씨는 철주하듯 민망하나 / 書慙掣肘
고래가 사는 바다는 마를지언정 / 鰌壑雖渴
귀부 위의 이 비석은 영원하리라 / 龜珉不朽
大嵩福寺碑銘 竝序
臣聞。王者之基祖德而峻孫謀也。政以仁爲本。禮以孝爲先。仁孝爲一編大旨。 仁以推濟衆之誠。孝以擧尊親之典。莫不體無偏於夏範。無偏無儻。王道蕩蕩。 遵不匱於周詩。孝子不匱。永錫爾類。 聿修芟秕稗之譏。芟。刈也。秕。不成粟也。稗。似稻而實細也。比政事不明。克祀潔蘋蘩之薦。采蘩註。南國被文王之化。諸侯大夫能盡誠敬。以奉祭祀。 俾惠渥均濡於庶彙。德馨高達於穹旻。勞心而扇暍 音謁。暑病。武王自孟津還于周。見暍人。左擁而右扇。 泣辜。夏禹出見罪人。下車問而泣之。 莫非拯羣品於大迷之域。竭力而配天饗帝。周頌。思文后稷。克配彼天。盖尊之也。莫非奉尊靈於常樂之鄕。是知敦睦九親。堯典曰。九族旣睦。實惟紹隆三寶。佛法僧。 矧乃玉毫光所燭照。金口偈所流傳。靡私於西土生靈。爰及於東方世界。佛說法華時。放眉間瑞光。照東方萬八千里云。 則我太平勝地也。性玆柔順。東方配五常則仁。故柔順。 氣合發生。東方始生萬物 山林多靜默之徒。以仁會友。江海協朝宗之勢。從善如流。故激揚君子之風。薰漬梵王之道。猶若泥從璽。天子之璽。以紫泥封之。 金在鎔。董仲舒曰。上之和下。下之從上。猶金之在鎔。此二句。明從善如流。 而得君臣鏡志於三歸。士庶翹誠於六度。鏡。照也。翹。秀起貌。 至乃國城無惜。能令塔廟相望。雖在贍部洲海邊。寧慚都史多 卽兜率 天上。衆妙之妙。何名可名。金城之离。金城。新羅都城名。日觀之麓。日觀者。泰山東南峯名。而今新羅東。亦有之。 有伽藍號嵩福者。乃先朝 景文王 嗣位之初載。奉爲烈祖元聖大王冊號敬信。卽景文王之九世祖。 園陵追福之所修建也。粤若稽古寺之濫觴。詩云。三江浩浩。其源濫觴。註。濫。泛也。觴。杯也。謂岷山初出之源。但可泛一杯而已。故言凡事之始曰濫觴。 審新刹之覆簣。孟子云。爲山九仞。功虧一簣。若盡一簣則是覆也。故言凡事之終云覆簣。 則昔波珍飧職名金元良者。昭文王后元聖大王之母 之元舅。肅貞王后元聖大王之后 之外祖也。身雖貴公子。心實眞古人。始則謝安縱賞於東山。儼作歌堂舞館。終乃慧遠同期於西境。捨爲像殿經臺。晉謝安携妓遊東山三十年。後與慧遠法師共對遺民雷次宗,周續之,宗炳等百二十人。結白蓮社。發願往生西方。 當年之鳳管鵾絃。崑山之竹。作管吹之。有龍鳳之音。以鵾之筋。作琴瑟之絃。用鐵撥彈。則其響如雷。 此日之金鍾玉磬。隨時變改。出世因緣。寺之所枕倚也。巖有鵠狀。仍爲戶榜 鵠寺。能使鴦廬長價。䲶鴦必具雌雄。故東西翼廊謂鴦廬。 永令鵝殿增輝。養鵝園林。則蛇遠去。如佛之所住。百害盡袪。故法堂謂之鵝殿。 則彼波羅越之標形。西域達親國。有過去加葉佛伽藍。窮大石山作之。凡五層。最下層。作象形五百間石室。第二層。獅子形四百間。第三層。馬形三百間。第四層。牛形二百間。第五層。鴿形一百間。囱牖通明。室中朗然。是名波羅越寺也。崛恡遮之紀號。詎若飛千里以取譬。古詩。黃鶴飛千里。 變雙林而刱題者哉。梁武帝時。傳大士於松山頂古寺。有雙擣樹。故改名雙林而居之。 但玆地也。成卑鷲頭。梵語枯標陀羅。乃唐言鷲峯也。佛於此說法。 德峻龍耳。郭璞錦囊經云。葬龍耳。則三年內。白衣天子到門。 與晝金界。金沙寶界 宜開玉田。王者之葬。用玉匣。 洎貞元 唐德宗年號 戊寅年 元聖大王十四年 冬。遺敎窀穸之事。因山是命。綱目註。帝王之葬。因其山川。而不復起墳。 擇地尤難。乃指淨居 鵠寺。將安秘殿 王陵。時獻疑者有言。昔游氏之廟。鄭公欲毀游氏之廟。以廣園囿。子產曰。子游之善。不能保五畝之宅耶。公乃止。○子游是言偃之字。而曰游氏者未詳。 孔子之宅。魯恭王欲壞孔子舊宅。以廣其居。聞有金石絲竹之音。乃不壞。皆不忍終毀。人到于今稱之。則欲請奪金地。無乃負須達多大捨之心乎。須達多。指給孤獨。作祇垣精舍者。比金元良也。 冥裝者。地所祐天所咎。地則增其厚。天則減其虛。 不相補矣。而莅政者譏曰。梵廟也者。所居必化。無往不諧。故能轉禍基爲福場。百億劫濟其危俗。靈隧也者。頫硂坤脈。頫音府。低頭也。硂同銓。坤脈。五行之氣運於地中。猶人之血脈運於皮膚之中。 仰揆乾心。二十八宿。與列星羅于乾心。各有主張分地。 必在苞 抱同 四象于九原。四象。老少陰陽。九原。葬處也。 千萬代保其餘慶。則也法無住相 佛法。禮有盛期 葬禮。易地而居。順天之理。但得靑烏善視。郭璞之師靑烏先生。善陰陽地理。著錦囊經。 豈令白馬悲嘶。梁高편001傳云。昔外國王。盡毀諸寺。惟招提一寺未及毀。夜有白馬繞塔悲嘶。王乃停毀。改招提爲白馬寺。 且驗是仁祠 寺也。本隸 付屬 戚里。金元良也。誠宜去卑就峻。應上威卑德峻。 捨舊 寺也 謀新 陵也。使幽庭據海域之雄。陵也 淨刹擅雲泉之㜫 寺也。則我王室之福山高峙。彼候門之德海安流。周禮。師편002候穰편003。註。候者。候迎。吉祥。佛之所居。亦候迎吉祥。故曰候門。 斯可謂知無不爲。各得其所。豈與夫鄭子產之小惠。魯恭王之中轍。同日而是非哉。宜聞龜筮協從。可見龍神歡喜。遂遷精舍。爰創玄宮。兩役庀徒。庀音披。具也治也。 百工蕆事。蕆音闡。備也。 其改創紺宇。則有緣之衆。相率而來。張袂不風。植錐無地。霧市奔趨於五里。後漢。張楷能作五里霧。學術者塡門。人謂霧市。 雪山和會於一時。西域記。伊爛那城長者之子二百億。性情仁善。投雪山學佛。凡有所須。自其居家。至于雪山。隣里奴僕。交路替傳。曾不踰時。其和會可知。至於撤瓦抽椽。奉經戴像。迭相授受。競以誠成。役夫之跬步不移。釋子之宴居已就。寺役畢。 其成九原。則雖云王土。且非公田。於是括以邇封。括。量也。封。墳也。邇封。封之近地。 求之善價。益丘隴餘二百結。丘隴。田畓結卜數。 酧稻穀合二千苫。猶石也 旋命所司 司治葬者 與王官之邑。之葬地也。 共芟榛徑。分蒔松埏。故得蕭蕭多悲風。激舞鳳歌鸞之思。言宮人歌舞。以思先王。 鬱鬱見白日。助盤龍踞虎之威。言陵之形勢也。漢書。諸葛亮至石頭城。嘆曰。鍾山虎踞。石頭龍盤。眞帝王之宅。 且觀其地。壤異瑕丘。檀弓。公叔文子昇於瑕丘。嘆曰。吾將死。葬于斯。 境連暘谷。日出處。 祇樹之餘香未泯。曾是寺址穀林之佳氣增濃。穀林。堯葬處。 繡峯則四遠相朝。峯如錦繡 練浦則一條在望。浦似亘練 實謂橋山孕秀。黃帝壽百一十歲。昇龍上天。葬弓劒於橋山。 畢陌標奇。畢陌。文王葬地。 而使金枝 本孫 益茂於鷄林。玉派 外孫 增深於鰈水者矣。爾雅。東方有比目魚。其名曰鰈。○葬事畢初寺宇之徙也。雖同聳出。言寶塔多也。見法華經。 未若化城哉得剗荊棘而認岡巒。雜茅茨而避風雨。僅踰六紀。十二年爲一紀。取歲星一周天。 驟歷九朝。元聖,照聖,哀莊,憲德,德興,僖康,神武,文聖,憲安。 而屢値顚覆。未遑嵩飾。三利之勝緣有待。憲安王無子。欲擇膺廉爲壻。膺廉聞長女醜而少女有姿色。欲娶少女。範喬曰。娶長女有三利。一。王無子。以壻爲太子。二。少女自然相從。三。終得大位。是爲景文王。 千齡之寶運無虧。伏惟先大王 景文王也。僖康王之曾孫。 虹渚騰輝。虹。水名。顓頊母曰女節。見有星流華渚。感而生顓頊。 鰲岑降跡。慶州有鰲山。 始馳名於玉鹿。敎授官也。南唐建學舍於玉鹿洞。以李道爲洞主。掌敎授。別振風流。俄綰職於金貂。侍中冠名。漢官儀。貂蟬註。金取堅。蟬取高居飮潔。貂取內勁悍外溫潤。 肅淸海俗。據龍田而種德。易乾卦九二曰。見龍在田。利見大人。言其德已著。如舜遇釐降。卽其時也。先王之爲憲安婿亦類此。 栖鳳沼而沃心。周靈王太子晉。吹鳳簫求凰。與秦穆公之女季嘯。俱爲神仙而去。後人稱太子所居室曰鳳閣。所遊池曰鳳沼。發言則仁者安人。謀政乃導之爾。八柄之重權咸擧。周禮。太宰以八柄紹王。御羣臣。註。一。有德則爵。二。有功則祿。三。言語合道則賜予。四。有善行則置于位。五。有大勳則使子孫享養。六。有大罪則殺而奪符。七。有罪則廢而放之。八。有過失則譴責。 四維之墜緖斯張。四維。天之東西南北。人之仁義禮智。 歷試諸難。利有攸往。旋屬憂侵杞國。李白詩。杞國無事憂天傾。此言王之昇遐。取天傾意。 位曠搖山。古文。邦國曠位。山岳搖動。亦言王之昇遐。 雖非逐鹿之原。亦有集烏之苑。詩云。瞻烏爰止。于誰之屋。言未知寶位將止于誰也。 然以賢以順。且長且仁。爲民所推。捨我奚適。乃安身代邸。漢文帝以代王至長安。受皇帝位於代邸。注意慈門。佛門也 慮致祖羞。移寺而安陵。若不嵩飾其寺。則是爲祖先奉佛之羞。願興佛事。因請芬皇寺僧嵩唱。以修奉梵居之旨白于佛。芬皇寺。在今慶州邑北。 復遣金純行。以隆宣祖業之誠告于廟。詩所謂愷悌君子。求福不回。書所謂上帝時歆。下民祗協。故能至誠冥應。善欲克從。卿士大夫與守同心龜協。赫赫東國而君臨之。爰遣陪臣。諸侯之臣。於天子爲陪臣。 告終稱嗣。憲安王薨。景文王嗣位。 遂於咸通六年。唐懿宗年號。 天子使攝御史中丞胡歸厚。以我鄕人前進士裵匡。腰魚 金魚袋 頂豸 音池。一名神羊。似鹿而一角。生于北荒。楚文王好服豸冠。漢爲法冠。御史冠之。堯時。有一雙獬豸立於階下。善者入則引之。不肖者入則觸之。死葬殿左。朱草生長一丈。小人入則指之。爲輔行 副使。與王人田獻。銛 音暹。利也。 來錫命曰。自光膺嗣續。克奉聲猷。俾彰善繼之名。允協至公之擧。非王子弟。而以仁善承位。故曰至公。 是用命爾爲新羅國王。仍授檢校太尉兼持節充寧海軍使。向非變齊標秀。至魯騰芬。何以致飛鳳筆而寵外諸侯。降龍旌而假大司馬之如是矣。筆柄雕鳳。旌上畫龍。 亦旣榮沾聖澤。必將親拜靈丘。先王陵。 肆以備千乘之行。奚翅耗十家之產。漢文帝曰。百金。中人十家之產。 遂命大弟相國。致齊淸廟。代謁玄扃陵也。懿乎鷄樹鷄林 揚蕤 音惟。草木華垂貌。又孫氏瑞應曰。王者禮備至。則葳蕤生于殿前。 鴒原挺茂。詩。常棣註。鶺鴒行。則首尾相接。喩兄弟急難相救。 歲久而永懷耕象。陸龜蒙曰。世謂舜田于歷山。象爲耕。鳥爲耘。吾觀象行。必端而必深。法其端深曰象耕。鳥之啄食。務疾而畏奪。法其疾畏。故曰鳥耘。非眞象鳥耕耘。 時和而罷問喘牛。漢相丙吉事。 藻野耨川。文選云。靚粧藻野。袨服耨川。或曰。當作耨野藻川。言耘耨於野。采藻于川。 觀者如雲。乃有鮐背之叟。背瘠如鮐。 鵠眉之僧。眉皓如鵠。 抃手相慶。大相賀曰。貴介弟之是行也。聖帝之恩光著矣。吾君之孝理成焉。禮義鄕風。綽有餘裕。遂使海波晏。塞塵淸。天吏均。淮南子。四時。天之吏。地財羨。音衍。餘也。 則乃踵修蓮宇寺也。威護柏城 陵也。今也其時。捨之何俟。於是孝誠旁達達。思夢相符。晝思夜夢。 乃見 現也聖祖大王元聖王 撫而告曰。余而 汝也 祖也。而 上同 欲建佛像。飾護予陵域。小心翼翼。經始勿亟。佛之德。予之力庇爾躬。允執厥中。天祿永終。旣而韻耿銅壺。漏壺也 形開玉枕。莊子。其寢也。魂交。其覺也。形開。 不占十煇。春官掌十煇之法。以觀妖祥。煇謂日傍之光。一曰侵。陰陽相侵。赤雲爲陽。黑雲爲陰。二曰象。如赤鳥。三曰鐫。日傍雲氣刺日。四曰監。赤雲在日傍。如冠珥。五曰闇。日月食也。六曰瞢。日月無光。七曰彌。雲氣貫日而遏。八曰叙。雲氣次序如山。九曰躋。升虹也。十曰想。雜氣形象。 若佩九齡。文王謂武王曰。汝何夢矣。武王對曰。帝與我九齡。文王曰。汝九十。我百歲。 遽命有司。虔修法會。華嚴大德釋決言承旨。於當寺講經五日。所以申孝思而薦冥福也。因下敎曰。不愛其親。經所戒也。無念爾祖。詩寧忘乎。睠言在藩。新羅是海外藩邦。而天子睠顧。 有欲修寺。魂交致感。㾕慓편004心驚聳動貌衿靈。旣媿三年不蜚。深思一日必葺。百尹 尹。治也。猶言百官。御史。謂利害何。雖保無賣兒貼婦之譏。宋明帝以湘東舊宅爲寺。謂何尙之曰。此是朕之大功德。散騎常侍虞愿對曰。此是賣兒貼婦之錢。佛若有知。必當悲愍。何功德之有。註。貼。以物爲質。言徭役繁重。民不能供。故或賣兒質婦。以當役錢。 或慮有鬼怨人勞之說。秦築長城。民作 魚편005河曲。鬼有怨恨之聲。 獻可替否。爾無忽諸。替。廢也。否。非也。 宗臣繼宗勛榮以下。協議上言曰。妙願感神。慈靈現夢。誠因君志先定。果見衆議僉同。是寺也成。九族多慶。幸値農隙。請興杍工。杍音子。木匠也。 爰用擇人龍於建禮仙門。馬岌謂宋纖曰。人中之龍。摩詰詩。建禮高秋夜。註。建禮。門名。盖禮曹門也。 擧僧象於昭玄精署。卽持律院。 乃命宗室三良。曰端元,毓榮,裕榮。與釋門二傑。曰賢諒,神解。及贊導僧嵩唱等督其事。且國君爲檀越。邦彦爲司存。卽有司也。彦。美士。 力旣有餘。心能匪懈。將俾小加大。豈宜新間舊。然恐沮檀溪宿願。梁武帝伐竹木沈檀溪。積茅如岡阜。立願云。事若成。則當以此材建立伽藍。竟得如意。 不瑕傷㮏苑前功。西域有中虛㮏樹。女子從中而出。王取而爲后。建寺於其地。號㮏苑。 選掇故材。就遷高墌。於是占星揆日。詩云。定之方中。揆之以日。乃作楚宮之事也。廣拓宏規。合土範金。造作器用。見禮運。 爭呈妙技。雪梯而倕材架險。削木爲梯。其白如雪。倕。黃帝時巧匠名。 霜塗而堊黏香。。古之土工。堊。白土也。黏。着也。言以香和土而塗之。 斸嵒麓而培垣。培。加土也。 壓溪流而敞戶。敞。高明也。 易荒階以釦砌。釦音口。金飾也。言砌石之隙。以鉛錫而鑄飾。 變卑廡以琱廊。琱。雕飾也。 複 重也 殿龍盤。中以盧舍那 淨滿也 爲主。層樓鳳跱。峙同。屹立貌。 上以修多羅 契經也 爲名。高設鯨桴。張衡東京賦。撥鯨魚鏗牢鍾。註。海岸有獸。名蒲牢。其聲如鍾。性畏鯨。見鯨輒吼。故鑄鍾。以蒲牢爲首。桴則像鯨而擊之。 對標鸞檻。畫鸞於檻。 綺井華攢而鞞편006鞢。綺井者。卽藻井也。畫芰荷水草以覆之。所以避火。乃井上板子。○攢音贊。聚也。鞞音狎。鞢音雜。花相次比貌也。 繡栭枝擁而杈枒。栭音而。梁上柱。杈音叉。岐枝木。枒音牙。言栭梠相接。齒牙相入。 聳翼如飛。回眸必眩。其以增嵩而改作者。有若睟容 佛也 別室,別於衆寮。卽正殿也。圓頂僧也 蓮房,蓮也一房百子。故喩僧之一舍衆居。 揣 度也 食臑 音耎 堂 卽食堂,晨炊㢋 音侈。廣也。 舍。卽香積殿 加以雕礱 磨也 罄 盡也 巧。彩雘 音廓。丹中之善者。多出衡山。 窮精。俄知寺役畢也。更加治理。使人眩眸。 巖洞共淸。烟霞相煥。玉刹 法堂上左右白竿 掛蓬溟之月。兩朶霜蓮金鈴激松澗之風。四時天樂。就觀勝槩。傑出遐陬。左峯巒則鷄足拏雲。三峯特秀。如鷄足之倒立。拏。牽引也。 右原隰則龍鱗閃 動也 日。公羊傳。上坪曰原。下坪曰隰。言上下阡陌。相次如龍鱗。 前臨則黛列鯷嶠。黛。翠黑色。鯷。腹大尾少魚。山形似之。 後睇則鉤連鳳岡。飛鳳山。 故得遠而望也峭而奇。迫而察也爽而麗。則可謂樂浪仙境。眞是樂邦。佛國曰極樂。 初月名山。便爲初地。十地中初地也。地有生成住持四義。○先生筆法。與山水而幷奇麗。 善建而事能周帀。寺與陵俱修 勤修而福不虛捐。必爲大庇仁方。上資寶壽。罩三千界爲四境。罩音朝。壓也。 籌五百歲爲一春。人間五百歲。爲四王天一晝夜。 豈期獵豹樊岑。方歡豎尾。跨龍荊岫。遽泣墮鬚。黃帝鑄鼎於荊山下湖水上。鼎成。龍至。帝及羣臣宮女七十二人。乘龍上天。百姓攀龍鬚。鬚絶。帝墮弓。百姓抱弓號泣。喩景文王昇遐。◑奉佛旣勤。豈期至此乎。獻康大王景文王太子 德峻妙齡。神淸遠體。仰痛於寢門問豎。文王爲世子時。王季有疾。則鷄初鳴。就寢門。問候於宦䝂。俯遵於翼室宅宗。宅居。宗主。盖帝王居喪。則不居正殿。徙居翼室。爲居憂之宗主也。滕文公盡禮居憂。終能剋己。克除私欲也。楚莊王俟時修政。其實驚人。楚阜之鳥。三年不飛不鳴。飛將衝天。鳴將驚人之語。 矧復性襲華風。躬滋慧露。抗 擧也 尊祖之義。激歸佛之誠。中和 唐僖宗年號 乙巳年秋。敎曰。善繼其志。善述其事。永錫爾類。在我而已。先朝所建鵠寺。宜易榜爲大嵩福寺。其持經開士。大心始開。 提綱淨吏。維羅之類 南畝以資供施。一依奉恩故事。武烈王爲眞智王追福所建。 其故波珍飧金元良所捨地利。輸轉非輕。宜委正法司。糾正僧法之司 別選二宿德。編籍爲常住。薦祉于冥路。則有以見居上位者 王自稱。無幽不察。結大緣者 金元良。有感必通。自是鳧鍾 考工記。黃帝命鳧氏造鍾。吼泬寥。泬音穴。宋玉九辨。泬寥兮天高。註。泬。曠蕩也。寥。空也。 龍鉢 壇經云。曺溪寶林寺前潭中。有一龍常出沒。現形甚巨。師叱之曰。爾不能現少편007身耶。龍乃少편008身躍出。師展鉢曰。爾入老僧鉢。龍乃入鉢。師至堂。爲龍設法。龍乃蛻去。故云龍鉢耶。又龍所獻鉢歟。 飫香積。維摩經。淨名居士過上房四十二恒沙世界。至香積世界。借一飯。供養一萬文殊也。 喝導則六時玉振。金聲而玉振之語。 修持則萬劫珠聯。持戒之法。如聯珠而不絶。 偉矣哉。得非尼父所謂無憂者其惟文王。父作之。子述之者耶。父王季。子武王。 慶曆景午 卽丙午也。丙字。高宗之諱。故改爲景。 年春。顧謂下臣曰。禮不云乎。銘者自名也。以稱其先祖之德。而明著之後世。此孝子孝孫之心也。先朝締構之初。發大誓願。金純行與若 汝也 父肩逸。嘗從事於斯矣。銘一稱而上下皆得。吾與汝俱得孝子之心也。 爾宜譔銘。譔。造也。銘。名記其功。 臣也浪跡星槎。引張蹇乘槎。自喩入中國。 偸香月桂。言登第也。 虞丘永慟。家語。孔子至虞丘。聞子皐哭甚哀。問其故。對曰。樹欲靜而風不 待편009。子欲養而親不侍편010。遊宦列國。旣歸而親沒。故哭之。季路徒榮。家語。子路少時。爲親負米。及親沒。仕於楚而嘆曰。雖欲負米。其可得乎。 承命震驚。撫躬悲咽。昔於乘桴之時。父有嚴訓。今於還錦之日。父不待養。季路,子皐。實與我千古同情。況有君命。及於父事。心驚淚咽。無地措躳。 竊思西宦日。覽柳氏子珪錄東國事之筆。所述政條。莫非王道。今讀鄕史。完是聖祖大王 文편011聖王 朝事迹。抑又流聞。漢使胡公歸厚之復命也。流聞。傳聞也。 飽採風謠。白時相曰。自愚已往。出山西者 言武士也。漢書云。山西出將。故烈武夫多出楊州。 不宜使海東矣。何則。鷄林多佳山水。東王詩以印之而爲贈。賴愚嘗學爲綴韻語。強忍媿酧之。不爾。爲海外笑必矣。君子以爲知言。東國之行王道右文學。中國人習知之。 是惟烈祖以四術開基。武烈王使金春秋。統合三韓。始開詩書禮樂之敎。一云。元聖王以五經三史諸子百家。分上中下而用人。 先王以六經 詩,書,易,禮記,春秋,周禮 化俗。豈非貽厥之力。應上峻孫謨。勸王基祖德。能得煥乎其文。則銘無媿辭。筆有餘勇。言若使我贊揚四術,六經之化。則無愧於心。有勇於文。 遂敢窺天 側管窺天 酌海。傾蠡酌海。 始緝凡詞。今撰佛碑。未免凡詞。 誰知墜月摧峯。獻康王薨。如月墜山崩。 俄興永恨。旋遇定康大王。功成遺礪。韻叶吹篪。旣嗣守丕圖。將繼成遺績。無安厥位。伊訓文。 未喪其文。而遠逐日弟兄。遽値西山之影。高憑月妹姊。永流東海之光。說文。東王以日爲兄弟。以月爲姊妹。又春秋感精符曰。人主。父天母地。兄日妹月也。今定康遠逐獻康兄之日。而共作西山之影。言其死也。死而無子。傳於眞聖妹。則是憑月流光也。 伏惟大王殿下 眞聖女主 瓊萼聯芳。取詩棣萼。比兄弟之意。唐玄宗。兄弟五人。作花萼聯芳樓。 璇源激爽。王者宗系體英坤德。纘懿天倫。諒所謂懷神珠。法華經。八歲龍女懷珠。入會獻珠。往南方成佛。 鍊彩石。女媧補天事。 有虧皆補。無善不修。故得寶雨金言。焯然授記。寶雨經云。五百年後法欲滅時。汝於瞻部洲東北方摩訶支那國顯女身。自在王位。化育羣生。大雲亦經名 玉偈。完若合符。且以文考成佛宮。康王施僧供。已峻琉璃之界 寺也。未刊琬琰之詞。碑文也。 申命瑣才 瑣。玉屑。言才少也。申。重也。先王旣命。今王重命之。 俾搖柔翰 柔。無力也。言非長杠巨筆。 臣雖池慚變墨。羲之洗硯。池色變黑。 而筆忝夢椽。忝。辱也。王珣字坦之。夢人授如椽大筆。 竊比張融不恨無二王之法。齊張融善草書。高帝曰。恨卿無二王書法。對曰。亦恨二王之無臣法。○二王。羲之,坦之。 庶幾曹操或能解八字之褒。設使灰撲塡池。漢武帝鑿昆明池。得灰。問東方朔。不知。藏之府庫。後有西來胡僧曰。此乃天地撲滅時劫灰也。 塵飛漲海。王方平與麻姑言。見東海三變爲桑田。 本枝蔚矣。齊若木而長榮。淮南子曰。灰野之山有樹。名日若木。日入處也。 豐 厚也 石 碑也 巋然。對焦墟而卓立。十住毘婆娑云。南海有石。其名沃焦。萬流至此皆焦。故海水不增。取久遠之義。 齎誠拜手。抆涕 思先王之命。自然流涕。援毫。追蹤華 蹤迹之華麗也 而獻銘曰。迦衛慈王。迦衛。具云迦維衛。此云赤津。 嵎夷太陽。嵎夷。日出處。 現于西土。出自東方。無遠不照。有緣者昌。功嵩淨刹 寺也。福蔭冥藏 陵也。烈烈英祖 元聖王。德符命禹指大舜。納于大麓。用舜典語。 奄有下土。保我子孫。爲民父母。根深桃野。派遠桑浦。都편012桃,扶桑。皆吊海。 蜃紼龍輴。山園保眞。幽堂闢隧 治陵。聳塔遷隣 移寺。萬歲哀禮。千生淨因。金田厚利。玉葉長春。孝孫淵懿。昭感天地。鳳翥龍躍。金圭合瑞。此二句。言子孫英傑。世世顯榮。金圭。諸侯所執之信圭。上圓下方。瑞。信也。五等諸侯。各有所執。公執桓圭。侯執信圭。伯執躬圭。子執穀璧。男執蒲璧也。言以王之金圭。符合于天子之冒。周禮。天子執冒以朝諸侯。冒。鎭圭也。以德覆冒天下。包靈不昧。徼福斯至。欲報之德。先祖之德。 克隆法事。妙選邦傑。俗三良。邦二傑。 嚴敦國工。工匠也。 伺農之隙。成佛之宮。彩檻攢鳳。雕樑架虹。繚墉雲矗。繢壁霞融。盤基爽塏。觸境蕭灑。藍岫交聳。蘭泉逬瀉。花媚春巖。月高秋夜。雖居海外。獨秀天下。陳稱報德。陳後主爲高宗。創報德寺。 隋號興國。隋文帝創興國寺。 孰與家福。金元良。 興之國力。景文移建。獻康改榜。 堂聒妙音。廚豐淨食。嗣君 定康王 遺化。萬劫無極。於 嘆美辭 鑠盛也 媧后。指眞聖女主也。 情敦孝友。致㜫雁行。愼徽 美也 龍首 陵也。詞恧 音六。媿也。 腐毫 自謙也。書慚掣 引也 肘。臂節也。說苑。魯君使宓子賤爲單父宰。子賤恐魯君聽讒而不得便其政。遂請魯君之近吏편013善書者。俱與至官。使之書。傍坐掣其肘。書醜則怒。更欲善書則又掣之。書者歸告于君。君不會其意。問於孔子。孔子曰。不齊。君子也。意者以此爲諫乎。君悟而從之。單父大治。不齊。子賤之名。○先生此書中諷諫之語。實不媿於掣肘之意。而其如君不能悟何哉。鰌壑雖渴。鰌音秋。長千餘丈。入穴則潮進。出穴則潮退。壑指其所居之海。 龜珉不朽。珉。美石。卽龜上所豎之碑也。世傳言。龍生九子。不成龍而各有所好。一曰贔屭。形似龍而好負重。故碑下趺是也。二曰螭吻。形似獸。性好望。故今之屋上獸頭是也。三曰蒲牢。形似龍而始吼。今之鍾上紐是也。四曰狴犴。形似虎。有威力。故立于獄門是也。五曰饕餮。性好飮食。故立于鼎盖是也。六曰。性好水。故立于橋頭是也。七曰睚䀝。性好殺。故立于刀環是也。八曰金猊。形似獅。性好烟。故立于香罏是也。九曰椒圖。形似螺蚌。性好閉。故立于門鋪首是也。
[편1]高 : 高下缺字。疑僧字。[편2]師 : 師上疑字。疑肆字。[편3]穰 : 禳[편4]慓 : 慄[편5]魚 : 魚下缺字。疑游。[편6]鞞 : [편7]少 : 小[편8]少 : 小 <(출전: 고운집 제3권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