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
연중 32주일, 05-10-30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교우들에게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누구신가요? 우리 마음속의 선생님은 공부를 잘 가르쳐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수학공식은 머릿 속에서 다 잊어버렸어도 선생님께서 베풀어주신 따뜻한 사랑은 마음 속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학문도 알려주셨지만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올 초에 사제관에 있는데 벨이 울렸습니다. “네, 누구시죠?” “신부님, 김노식 선생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문 밖에 있는 분은 바로 초등학교 때 제일로 무서웠던 호랑이 선생님이셨습니다. 알고 봤더니 바로 옆 송화초등학교 교감선생님으로 오신 거였어요. 더 반가운 일은 선생님께서 세례받고 교인이 되셨다는 거에요. 참 반갑고 고마운 만남이었습니다.
그런 일만 있는 것이 아니죠. 제가 신부 1년차 때 과천에서 예비자 교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부가 돼어 처음으로 낯선 임지에서 예비자 교리를 하니까 떨리는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갔습니다. 한 20명 정도 되는데 맨 앞에 있는 누가 저를 보고 자꾸 웃는 거예요. 젊은 여자면 좋겠는데 그렇지도 않고 어떤 아저씨가 저를 보고 자꾸 웃는 거예요. ‘부담스럽게 왜 그러지’ 그러다가 눈이 한번 딱 마주쳤는데 아이고 어머나! 고등학교 때 사회를 가르치셨던 윤승유선생님이신 거예요. 교리하다말고 “안녕하세요!” 바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예비자 교리를 들으시니까 매우 불편했지만 조금 지나니까 적응이 됐습니다. 그 다음부터 선생님은 제 밥이었습니다. “선생님 이거 아세요?” 하면 모르신데요. 그럼 “선생님이 그런 것도 모르셔서 되겠습니까!”(웃음) 하여간 재미나게 지내고 세례도 받으셨습니다. 얼마 후 제 임지에서 또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참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 선생님도 후에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1학년 때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냈습니다. 2학년 때도 그렇고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제가 지금은 77kg정도 나가는데 그때는 58kg정도였습니다. 들어가기 싫은데도 들어갔으니 무기력하고 의욕도 없었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담임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당시는 어떻게 하면 신학교를 나갈까 궁리도 많이 했었는데 그렇게 힘들 때마다 저에게 격려와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셨습니다. 한번은 제가 참 힘들어하며 찾아가니까 시무룩한 저에게 ‘인생은 활짝 핀 장미꽃처럼 사는거야’ 하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갑니다.
진짜신부 있고 가짜신부 있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좌신부 때 모셨던 김영배요한 신부님은 진짜 신부님이셨어요. 흐트러짐이 하나도 없으시고 아주 대쪽 같은 분이셨습니다. 저에게 가르쳐주신 것 중에 ‘길이 아니면 가지마라.’였는데 저는 망아지 같아서 ‘길이라도 좋다. 아니라도 좋다.’ 그러고 살았습니다. 그분 밑에서의 보좌생활을 마치고 주임신부로 본당에 나와야 하는데 저는 신부님 밑에서 일년만 더 배우겠다고 졸라댔습니다. 그러나 신부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덕분에 제가 팽성에 오게 된 거에요.
팽성에 부임한 뒤 신부님께서는 제가 못미더우셨는지 여기를 몇 번 들렀다 가시곤 하였습니다. 이제 그분은 병중에 요양하는 처지가 되셨지만 제가 자주 전화로 문의하고 찾아가서 지혜를 구해오곤 합니다. 특히 성당을 짓게 되면서 신부님께 많이 여쭈었습니다. 그분은 동양에서 가장 큰 성당을 지으신 분이거든요.
좋은 스승들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라 했는데 노병은 사라져가도 좋은 스승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제가 신부가 된 것을 잘 살펴보니까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 스승님이 두 분 계셨습니다. 한분은 저에게 천주존재를 알려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공소회장님이셨는데 참으로 기골이 장대하시고 엄격하시고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동네에 무슨 일이 있어서 시시비비를 가릴 일이 있었으면 늘 그분이 판결해주셨으니 그분의 말씀은 동네에서 곧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하신 분도 새벽에 눈을 뜨면, 그리고 잠자리를 펴면 무릎꿇고 기도하는 대상이 있으셨습니다. 저는 그걸 매일 같이 하며 자랐습니다. 그분은 제 할아버지셨으니까요.겨울 새벽에는 저녁에 땐 군불이 식어 추워서 깨는데 할머니께서 부엌으로 가셔서 군불을 때시면 구들장이 다시 뜨끈해지고 그럼 깔아 놓은 이부자리 밑으로 기어들어가잖아요. 이른 아침에 드는 잠이 얼마나 따뜻하고 곤합니까? 그런데 저는 그 새벽에 이불 뒤집어쓰고 할아버지와 묵주신공을 드려야 했습니다. 5단 다 안바친 게 다행이죠. 새벽에는 절반만 하고 나머지는 자기 전에 또 이불 뒤집어쓰고 했습니다. 묵주기도를 하고 나면 아침기도를 하는데 아침기도만 하면 됐지 꼭 그 뒤로 곁다리 기도들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땐 참 하기 싫었죠. 그러나 자연적으로 할아버지께서 기도하시는 대상, 천주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가르쳐 주셨는데 예전 신부님들은 참 무섭고 엄격하셨습니다. 시골에서 읍내까지 와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늦으면 문을 닫아 거시고 늦게 온 사람들은 혼이 난 다음에야 성당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제 기억속의 이정운베드로 신부님께서는 좀 다른 분이셨습니다. 한번은 우리 공소에 오셔서 판공을 하시는데 아주 작정을 하시고 오신 모양이었어요. 당시 성당을 짓는데 건축모금이 잘 안되었는 모양이에요. 공소일정을 마치시고 미사를 드리시는데 엄청난 일이 강론시간에 일어났습니다. “이 유서깊은 양협공소에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제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신부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는 아주 속이 상하셔서 펑펑 우셨습니다. 아마도 그 때 신부님의 연세가 지금의 제 나이일 것입니다. 성당 건축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셨겠습니까? 그런데 교우들이 따라주지 않으니까 배신감을 느끼고 괴로우셨던 거죠. 교우들 앞에서도 통곡을 하셨으니 혼자서는 어떠셨겠어요? 그런데 그 신부님, 신학교 들어가니까 그 무서운 라틴어를 가르치고 계시더라구요. 그리고 요번에 고위성직자인 몬시뇰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나에게 영향을 미쳐온 훌륭한 스승들을 만났습니다. 그래도 내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은 다 고마운 스승들의 덕분입니다. 내가 요 모양 요 꼴로 살고 있는 것은 반대로 나쁜 스승 때문입니다.
사람은 학습하는 존재, 배우는 존재입니다. 내 주위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맹자의 모친이 그렇게 이사를 다녔다잖아요. 아버지한테 매일 매 맞고 자란 아들은 ‘나는 내 아들한테 그러지 말아야지’ 그러면서도 결국 그렇게 된다잖아요. 시어머니한테 구박받고 살아온 며느리는 결국 자기 며느리 그렇게 구박한다고 하잖아요. 군대도 똑같습니다. 고참한테 당한 졸병 나중에 고참이 되어서 후임한테 그렇게 한답니다. 자기도 모르게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좋은 사람들 틈에서 살아야 합니다. 좋은 모습과 글 등을 통해서 좋은 본을 받으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세 명이 길을 걸어가면 그중에 한명은 스승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난 주일에 우리는 하느님 대신에 세례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람이 대부, 대모라라 알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나를 하느님께로 인도해 줄 수 있는 하느님을 닮은 좋은 스승들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선생님들은 내가 사람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고 열어주는 스승님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우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 주고 길을 보여주고 열어주는 좋은 스승들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에 게으름이 없도록 하며 좋은 스승을 만났을 때의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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