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건물이 세워지고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가 늘어날수록, 빗물은 제때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지표면에서 겉돈다. 이렇게 버려지는 빗물을 가가호호 저장했다가 생활용수로 쓸 수 있다면,장마철 넘쳐나는 물을 사전에 예방해 수해도 줄일 수 있을뿐더러 가뭄 때 물을 끌어다 쓸 수도 있어 일거양득이 될 것이다.
빗물을 활용하고 싶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궁금증 하나. 요즘 비는 산성비라는데 그냥 받아서 써도 될까? 독일 베를린대학교에서 생태건축을 연구한 이태구 교수(49·세명대학교 건축공학과)는‘ 초기 빗물’만 주의하면 빗물을 받아서 써도 무방하다고 한다. 산성비에 대한 그릇된 편견 때문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는 것이다. 초기 빗물은 워낙 소량이라, 많은 빗물에 희석되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정 신경이 쓰인다면 처음 내리는 비만 20~30분 정도 흘려보내고 쓰라고 조언한다.
“대도시의 스모그 때문에 초기 빗물 2~3㎜는 pH 4.8~5.2 정도로 산도가 높게 나올 수 있지만, 그걸 받지 않고 흘려보내거나 아니면 기존에 고여 있던 빗물이 10~20㎜ 정도 있는 상태에서 새로 내린 빗물이 희석되면 문제없습니다. 빗물에 희석이 안 되거나 비가 딱 2~3㎜만 오고 그쳤을 때만 산도가 높은 거지요. 그런데 사실 1년 중에 초기 빗물 2~3㎜ 온 것만 탱크에 모이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또 2~3㎜만 오는 경우는 콘크리트 표면에서 증발되지 물탱크로 모이기는 힘들죠.” 햇빛ㆍ공기 막고, 적정 수온 유지하면 썩을 염려 없어 그런데 빗물을 받았다가 쓰면 썩지 않을까? 고인 물은 썩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니 궁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 가지 원칙만 지킨다면 역시 문제없다. 햇빛을 차단하고, 적정 온도를 유지하며, 공기가 통하지 않게 하는 것. 이를 위해서는 지하에 빗물탱크를 묻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중장비로 땅을 파는 인건비를 포함해 200만~300만 원 정도가 들지만, 다소 번거롭고 비용이 추가로 들더라도 안정적으로 빗물을 저장했다가 사용할 수 있다.
이 교수는 지은 지 15년이 넘은 농가표준주택을 2004년 구입한후 생태주택으로 리모델링했다. 그의 집 앞마당에는 5톤짜리 빗물탱크 2개가 묻혀 있다.
“땅속에 빗물탱크를 묻으면 햇빛이나 산소가 거의 안 들어가고,수온도 20도 미만으로 늘 유지되기 때문에 6개월을 저장해도 수질에 문제가 없습니다. 조경용수나 세척 용도로 충분히 쓸 수 있죠. 독일은 거의 다 단독형 주택이고 주말정원이 많아서 300~ 400ℓ짜리 탱크에 빗물을 받아놨다가 조경용수로 쓰고 세탁할 때도 써요.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을 낙수홈통을 통해 빗물은 저수하는 공간으로 보내고,나머지 낙엽이나 이물질은 걸러내는 필터를 쓰지요.” 만약 공사비용을 줄이고 간편하게 빗물을 쓰고 싶다면 실외 빗물 탱크를 설치하는 것도 가능쿇지만, 수온이 25도 이상 올라가거나 햇볕을 지속적으로 받는 경우, 공기가 유입되는 경우에는 빗물탱크에 고인 빗물이 변질될 우려가 있다. 특히 햇볕이 통과할 수 있는 밝은색 빗물탱크는 피하고 가급적 짙은 색의 빗물탱크를 쓰는 게 좋다.
빗물탱크 제작에 필요한 도구들 빗물을 저장했다가 단순한 생활용수 정도로 활용하는 데는 복잡한 시설이 필요하지 않다. 일단 빗물탱크가 필요한데 파이프 등을 주로 다루는 건자재상에 가면 3~5톤짜리 물탱크는 70~80만 원이면 구한다. 지붕과 물탱크 사이를 잇는 우수관의 경우, 가정용으로 릸이 쓰는 직경 75㎜ 파이프는 4m짜리 1개당 1만 원 정도, 큰 건물에 들어가는 직경 300㎜ 파이프는 1개당 4만 원 정도면 살 수 있다. 탱크 안에는 역류 방지를 위해, 또한 쥐나 벌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U트랩을 만들어놓는다.
지상에 빗물탱크를 설치하는 경우, 낙수홈통 옆에 300~500ℓ짜리 물탱크만 연결해서 쓴다면 20~30만 원밖에 들지 않는다. 지상 빗물탱크는 수도꼭지만 설치해도 되지만 지하 빗물탱크는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는 소형 모터가 필요한데 15만 원 정도가 든다. 이 교수는 직접 개량한 농가주택의 지붕 서너 군데에 낙?홈통을 달고 모아진 빗물이 저장탱크로 흘러가도록 했다. 상수도와 빗물을 함께 쓰다보니 한 달 수도요금도 5000~7000원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집에 설치한 빗물계량기를 보며 사용량을 기록하는데, 1년에 여섯 식구가 쓰는 물의 총량인 170~180톤 중에서 90~110톤 정도는 빗물을 끌어다 쓴다.
“주로 세정용수로 빗물을 씁니다. 바깥에서 씻을 게 많잖아요?김장독이라든가 초벌로 씻는 건 다 빗물로 씻죠. 집 청소나 세차할때, 애들 놀이기구나 자전거 같은 기구들도 다 빗물로 씻어요. 부담없이 물을 쓸 수 있지요.” 그 밖에도 빗물뫀 집 안 화장실의 변기 물탱크로 연결해서 상시 쓰고, 마당에서 텃밭을 가꿀 때나 밭일 하고 손 씻을 때도 쓴다고 한다. 빗물탱크에 특별한 오염이 생기지는 않지만 1년에 한 번 정도는 탱크 내부를 청소해준다. 단 식수로 쓰려면 활성탄과 여과장치, 자외선 살균 등 좀 더 복잡한 처리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일반 가정에서 시도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이 교수도 아직 빗물을 식수로 정수하는 것까지는 시도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때가 무르익으면 도전해볼 생각이라고 한다.
에너지 독립과 친환경적 삶을 돕는 빗물탱크, 빗물탱크에 모아둔 물을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만 빗물 활용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교수가 앞마당에 설치한 빗물저류장치 역시 빗물 활용의 한 방법이다. 설비도 비교적 간단하다. 이 교수는 소주 상자 70개를 부직포로 감싸고 10m 길이로 줄을 세워 마당에 묻었다. 이렇게 저류시설을 마련하면 토양의 함수율이 높아지고 자연 상태와 유사하게 물의 순환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 결과로 식물이 왕성하게 자라고 다양한 곤충들도 찾아온다는 것이다. 여름철 지표면 온도도 20% 이상 떨어져 시원하게 여름을 날 수 있다.
빗물 활용에는 단순히 수도요금 절감을 넘어선 여러 가지 장점들이 있다. 무엇보다 빗물은 식물들이 좋아하는 물이다. 이 교수는 텃밭에 보통 4월 말~5월 초 파종을 시작하는데, 봄 가뭄으로 비가 오지 않을 때 겨우내 모아놓은 빗물 탱크의 물을 끌어올려 뿌려주면 식물이 잘 자란다고 한다. 수돗물에는 소독을 위한 염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빗물에는 이런 인위적인 성분이 들어 있지 않다. 지하저장탱크에 있던 물이기 때문에 수온도 지표면 온도와 거의 비슷한 20도 내외여서 식물들에게도 좋다. 이렇게 빗물을 식물에 뿌리면 발아율도 높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자연하고 접촉을 안 하다 보니 자연을 거부해요.빗물이나 공기, 토양도 오염됐다고 생각하죠. 빗물을 쓰다 보면 그런 생각도 사라집니다. 뿐만 아니죠. 빗물을 쓴다면 수돗물에 비해 8분의 1 내지 10분의 1 정도의 에너지만 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게 중앙공급식입니다. 중앙에서 전기나 수도 등이 끊기면 살 수가 없어요. 그러나 빗물탱크는 각각의 집에 설치할 수 있으니 유사시에 단수되더라도 금방 물을 얻을 수 있죠. 방재 차원, 안전, 생태계적인 측면, 에너지 독립 등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유용한 빗물탱크도 막상 개인이 제작해서 사용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면 활용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교수는 아예 농가주택 설계에서부터 빗물탱크를 포함시켜 집을 짓는 건축 도면을 만들었다. 농식품부에서 보급하는‘ 농어촌형 그린홈 표준모델’ 설계 작업에 이 교수가 제안한 5톤짜리 빗물탱크가 담길 예정이다. 모인 물로 옥상 녹화에도 쓰고 화장실 용수로도 쓸 수 있도록 설계해, 일반 상수도만 사용할 때보다 40~50%까지 물을 절약할수 있도록 했다.
작년 7월부터‘ 물의 순환이용촉진에 관한 법’이 시행되면서 적정 규모 이하의 건물이나 공공건물에서는 의무적으로 빗물이용시설과 침투 저류 관리시설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점진적으로 빗물활용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빗물탱크 설치 과정 1땅파기와 바닥 고르기 후 물탱크 안착 2수위조절배관 연결 3침전조 설치 4잔토 다시 메우기 5집수관 연결 6빗물 유입구 및 유출구 설치 7빗물탱크 내 필터, 기타시설 설치 8월류관 설치 후 완성된 빗물탱크
글 고경원 기자 사진 김동진(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