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 한국 야구 불후의 명선수이며 광복 후에는 야구 행정에 힘쓴 고 이영민을 기념하는 이영민 타격상이 제정됐다. 고교 선수 가운데 우수한 타격 성적을 거둔 이를 선정해 이 상을 준다. 제1회 수상자로는 경남고 3루수 김동주가 선정됐으며 백인천(1959년), 이광환(1965년), 정현발(1971년), 김일권(1973년), 이만수(1976년), 김건우(1980년), 강혁(1991년), 김현수(2005년) 등 한국 야구를 빛낸 수많은 스타가 이 상을 받았다. 경남고 신민기는 1997년과 1998년 최초이자 유일하게 2년 연속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1962년 - 1월 농협의 백인천이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와 계약하며 대타자 장훈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 광복 후 첫 프로야구 선수가 된 백인천은 1975년 수위타자에 오르는 등 타율 2할7푼8리, 209홈런, 212도루, 776타점 등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국내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에는 MBC 청룡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하며 2010년 현재 유일한 시즌 4할 타율(.412)을 기록했다. 1990년에는 감독으로 LG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1963년 - 9월 21일부터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마침내 일본에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며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25일 1차 리그에서 재일동포 신용균의 호투와 포수 서정리의 공수에 걸친 활약으로 일본을 5-2로 꺾었다. 대회 우승이 걸린 29일 2차 리그 일본 전에서도 신용균의 쾌투와 김응룡의 2점 홈런에 힘입어 3-0으로 완승했다. 신용균 KIA 3군 코치는 “1차 리그 때는 커브와 싱커를 주로 던졌다. 2차 리그에서는 빠른 공을 중심으로 던지며 싱커를 섞은 게 주효했다. 일본 타자들이 조급하게 덤벼 완봉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1966년 - 6월 중앙고의 강속구 투수인 이원국이 도쿄 오리온즈에 입단해 백인천에 이어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제2호 선수가 됐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 제한 등으로 백인천과 달리 1군 무대에서 활약하지는 못했다. 이후 야구 연수를 간 미국에 정착한 그는 마이너리그와 독립리그를 거쳐 1972년부터 멕시칸리그에서 통산 149승(한국야구사에는 150승)을 거두는 등 미국 프로야구와 멕시칸리그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가 됐다.
한국야구, 세계 정상을 향해 비상하다
1975년 - 8월 14일부터 31일까지 캐나다에서 열린 제2회 대륙간컵쟁탈 세계야구대회에 출전하며 처음으로 세계무대의 문을 두드렸다. 콜롬비아, 이탈리아, 니카라과에 승리했지만 캐나다, 푸에르토리코, 일본, 미국에 져 3승 4패로 A조 3위에 머물며 예선 탈락했다.
1976년 - 12월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지만 5승 5패로 공동 5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9일 일본과 경기에서는 6-4로 승리하며 국외에서 열린 대회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꺾었다. 김호중에 이어 구원 등판해 빼어난 투구 내용을 보인 유남호 KBO 운영위원은 “나는 그저 멍했는데 당시 김계현 대표팀 감독님이 ‘자신이 대표팀 감독을 하면서 일본을 한번 시원하게 이겨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것을 오늘 풀었다’면서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회고했다.
1977년 - 마침내 한국 야구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11월 11일부터 26일까지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대회에서 미국과 일본 등을 꺾고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앞선 2번의 경기에서 미국에 연패했던 한국은 우승 결정전에서 김봉연의 홈런과 이해창의 결승타 등에 김시진-최동원-유남호가 이어 던지며 5대4로 승리했다.
1980년 - 1월 28일 연세대 박철순이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와 계약금 1만 달러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 1981년까지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한 그는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OB(현 두산)에 입단해 22연승을 포함해 24승을 올리며 팀을 원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연이은 부상에도 오뚝이처럼 재기하며 1996년까지 통산 76승을 기록했다.
1981년 - 7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김건우, 조계현, 이효봉, 김동기, 강기웅, 조양근 등 고교 선수에 나이 제한(18세 이하)에 걸리지 않은 선동열(당시 고려대)과 구천서(당시 상업은행)가 포함된 청소년대표팀은 3전 2승제로 열린 미국과 결승전에서 3-1, 3-2로 연승하며 정상에 올랐다.
1982년 - “쳤습니다. 좌측. 홈런이냐! 홈런이냐! 홈런입니다. 홈런. 홈런. 홈런. 스리런 홈런.” 김용 MBC 아나운서의 터질 듯한 목소리와 함께 잠실구장은 흥분의 도가니가 됐다. 9월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 전에서 2-2 동점을 깨는 한대화의 3점 홈런이 나온 것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우수 선수들이 이탈해 전력 열세가 예상됐지만 선동열, 임호균 등의 마운드와 탄탄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한 지키는 야구가 빛을 발하며 우승 목표를 달성했다. |
첫댓글 역사와 함께한 현존하는 야구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