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비롯한 왕들의 초상화가 걸린 경기전에서 전동성당 사거리를 건너 전주천 방향
으로 직진하면 전주남부시장의 중심에 위치한 로타리도로에 둘러쌓여 있는 풍남문을 만나게 된다.
성문 안쪽에 호남제일성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풍남문은 전주사람들에게는 전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자
전주의 중심에 자리잡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곳이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2가 83-4번지에 위치한 보물 제308호 풍남문(豊南門)은 원래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고려 공양왕 원년(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豊南門)’이라는 이름은 영조 43년(1767) 정해년 대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
(1768) 종전처럼 3층루가 아닌 현 모습으로 수축하여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가 개국하자 전주는 풍패지향으로 중시되어 태조 원년(1392)에 완산유수부로 승격되면서 호남지역을
관할하는 전라도의 수부가 된다. 중국 진 왕조 이후 중국 천하를 재통일한 인물이 한고조 유방이다.
그는 풍패(지금의 강소성 패현) 출신이었다. 전주는 조선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의 관향. 그래서 유방의
고향 풍패에 견주어 과거에는 전주를 흔히 풍패향, 풍패지향이라 불렀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젖어 있던 조선 양반들의 염원과 이상을 그대로 담아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순종 때 도시계획으로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면서 풍남문도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1905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전주부성 4대문중 풍남문만 제외한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1978년 문루 보수과정에서
옹성의 기단이 풍남문 홍예문으로부터 12m 지점에서 발굴됨에 따라 이 기단대로 연장 97.5m의 여담쌓기와
치석 6,856개로서 옹성 1,933㎡를 축조하여 복원하였다.
풍남문 종각에서 파루를 쳐서 부성 안에 조석을 알렸던 종소리는 이제는 서울 보신각 종처럼 제야(1월1일 0시)
에 종소리를 울려 이 고장의 새해 새 희망을 안겨주고,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게 한다.
건축양태는 조선 후기의 문루 형식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형태로 지목되고 있다. 원래 도성이나 읍성,
산성 등은 으레 성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 형식이자 관례로 되어 있다.
평면상에서 볼 때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수법은 우리나라 문루(門樓)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부재에 사용된 조각 모양과 1층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은 점들은 장식과 기교를 많이 사용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문루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풍남문은 우리나라 역사의 여러순간들을 간직하고 있는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통치한 역사적 장소이고 하고 정유재란 때는 왜적이 전주부성으로 침공하자 우리 관군이 성을 지키고 있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퇴각하자 왜군이 며칠을 머무르면서 불태워버린 비운의 장소이기도 한곳이다.
조선후기에는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둔 동학군이 고창, 함평, 원평을 거쳐 노도와 같이 전주로 진격하여
풍남문에서 격전 끝에 관군을 물리치고 입성하여 화약을 맺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자료참조]
http://www.cha.go.kr/
http://enc.daum.net/
http://korean.visitkorea.or.kr/
http://tour.jeonju.go.kr/
[주변맛집]
완주맛집<선심생구이전문점> 꽃등심구이, 생갈비구이
전분 완주군 봉동읍 장기리2구(한진주유소 옆골목)/
주간: 063-261-2072 / 야간: 063-261-7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