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는 말의 뜻은 《금강경》은 반야계통의 경전 중에서《반야심경》과 더불어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금강경》의 중심사상은 철저한 공사상에 입각한 윤리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리적 실천은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행을 뜻합니다.
그러므로《금강경》의 공의 개념은 윤리적 실천에 도달하기 위해 나와 너, 또는 주체와 대상의 대립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자아의 집착을 부정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이란 말도 자아의 집착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마땅히 머무를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의 뜻은
외적인 세상에 펼쳐지는 모든 대상이나 내적인 나의 존재 어디에도 내 것이라 집착할 만한 곳이 없는 것이므로 그러한 새로운 인식에서 청정한 실천행이 나온다는 뜻입니다.《금강경》에서는 강한 부정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부정은 모든 것에 분별, 집착, 망상을 끊으면 자연히 선행과 선심만이 남아 진리 그대로가 마음의 상을 일으키게 하는 논리수단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현실로 깨달아 보이신 법에 진실도 허망도 없다고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응무소주이생기심도 어떤 분별이나 집착, 망상이 없는 인식에서
선행과 선심의 보리행이 나오고 진리를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금강경》에서는 구도자가 만약 사람들을 전도했다고 하는 생각을 일으 킨다면 그는 진실한 구도자가 아니라고 하여 선행에 대한 자부심조차 버릴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이생기심의 그 마음도 이타행을 하는 마음이지만
이타행조차 잊고 진리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우리의 실천으로 연결될 때
색이라는 현실세계와 진리인 공의 세계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금강경(金剛般若波羅密經)의 핵심이 되는 말씀이다.
응무소주(應無所住)란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요, 이생기심(而生其心)이란 하고자 하는 바를 하라는 뜻이다. 즉 걸림 없이 살라는 의미이다. 거울이 만상을 비추되 담아두지 않음과 같다. 나는 이 여덟 자의 말씀을 지극히 좋아 한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명료 간단(明瞭簡單)하면서도 지고(至高)함에 있어 그 이상의 답을 요청할 필요가 없는 촌철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람은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하염없이 무엇인가를 한다. 이때, 영성적인 의식(意識)이 다소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행위를 할 것이냐가 물어질 것이다. 금강경은 하라고 한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은 금강경을 대표하는 가르침으로서 불교인이라면 유가(儒家)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정도로나 익은 말씀이다. 선종(禪宗)의 제 6대 조사(祖師)이신 혜능(慧能)대사도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말씀을 접하면서 확철대오를 하셨고, 무수한 공부인이 그러하셨다. 불교는, 행위를 하되 머무르는 바 없는[집착하는 바 없는]마음으로 하라고 일관되게 가르친다. 왜 행하되(而生其心) 집착(執着)없이 하라고 할까? 집착(執着)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고통이요, 집착의 반복은 집착의 업을 강화함으로써 미래에 더 큰 고통과 갈등과 다툼과 전쟁을 끌어오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은, ‘인생(人生)’이란 일단 욕구[집착]하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과정으로 안다. 욕구하고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고 숙명적이라고 여기는 심리가 본능으로 되어있는 것이 사람이다. 역대의 성자들은 중생의 고통을 보시고, 그 고통의 원인이 집착임을 간파하시고, 그 집착을 놓는 길을 제시하시면서, 간절하게 방하(放下:집착을 버림)의 삶을 권장해 오셨다.
응무소주[방하]가 마음의 평화를 크게 결정한다는 것은 마음의 원리를 깨닫고 보면 분명한 이치이다. 철학자 일각에서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권에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을 동물의 삶과 다를 바 없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응무소주(應無所住)의 삶, 방하(放下)의 삶을 어떻게 살까? 어떤 분야에서나 방법론은 다양하고 무수한 법이다. 어떻게 집착을 놓을 것인가에 대한 불교적인 해법(解法)만 봐도 가히 무수하다.
무수한 해법 중에 가장 정통성 있는 해법 하나는 이다. 동사섭 고급과정에서는 그 비실체성[空]을 깨닫는 길로서 각성 점두나 해공십조(解空十條) 등의 관조를 권장하고 있다. 집착이 되던 그 대상이 실체로서의 존재성이 사라지면 자연히 집착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면 해탈감[해방감, 평화감]을 체험하게 된다.
마음이 해탈 되어지면 자비로운 마음과 행동을 함에 걸림 없는 마음이 현전하여 지인(至人) 인격 삼 요소(三要素)인 대자유-대자비-대자재(大自由大慈悲大自在)를 이룩하게 된다. 머무르는 바 없음의 응무소주(應無所住)란 대자유, 대자비, 대자재의 마음이다. 호리지차(毫釐之差)가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는 격언이 떠오른다.
처음은 털끝만큼의 차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을 하든, 한 마음을 ‘걸림 없는 마음이게’ 할 일이다. 한 마음 비움과 비우지 않음이 처음은 털끝과 같이 별 차이 없는 듯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천당과 지옥의 차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걸림 없는 삶이라! 안으로 돌아봄에 허공처럼 걸림 없는 평화로운 마음과 자비심 충만한 마음, 그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밖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투철하게 해 가는 것, 그것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온 중생이 걸림 없이 대 해탈을 살으소서!
온 우주에 맑고 밝은 기운이 가득하소서!
모악산 자락에서,
2003년 12월, 용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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