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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표준말 이야기
우리 말글 규정에서 '표준말'에 대한 최초의 규범은 1936년에 조선어 학회(한글 학회의 전신)에서 내놓은〈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입니다. 이 때에 9,547 낱말을 사정한 바 있고, 그 뒤로도 몇 차례 민간(조선어 학회) 주도로 표준말 사정 작업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에 이르러 문교부에서〈표준어 규정〉을 고시(1월 19일, 제88-2호), 이듬해 3월 1일부터 지금까지 시행하여 오고 있습니다.
현행〈표준어 규정〉(문교부)이 시행된 지 만 8년이 넘었어도 아직까지 일반 국민에게 널리 계몽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언어의 변화는 흔히, 수많은 냇물이 합쳐져 강을 이루어 흘러가는 모양과 비견됩니다. 내를 이루는 샘에 변화를 준다고 해도 그 영향이 내에서 강으로, 다시 바다에 미치는 데에는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현행 표준말 규범이 온 나라 백성에 골고루 미치기에는 8년이 짧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서구 문화가 쏟아져 들어오는 때에는 말글 오염이 가속화하기 십상이므로, 올바른 우리 말글 규범의 준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직 표준말 사용에 서툰 이들은 한시바삐 이를 익혀 말글살이를 곧추세워야 할 것입니다.
아래에서, 현행〈표준어 규정〉(문교부)이 시행된 이후 달라진 표준말 가운데서도 생활 속에서 가장 자주 틀리고 있는 것들을 뽑아내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거센소리를 인정한 것
현행〈표준어 규정〉(이하, '표준'이라고 줄여 일컬음) 제3항에서는 "다음 낱말들은 거센소리를 가진 형태를 표준말로 삼는다."라 하고 "칸/간(間)", "털어먹다/떨어먹다" 가운데 각각 "칸"과 "털어먹다"만을 표준말로 인정하였습니다.
"*간"은 한자말 "間"이었으나 현실적으로 [칸]이라고 발음하므로 "칸막이, 빈 칸, 방 한 칸"처럼 "칸"으로 정하였다. 다만 "초가삼간, 뒷간, 마굿간"처럼 복합어로 굳어진 것은 그대로 "간"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재물을 다 없앤다'는 뜻으로는 "털어먹다"만을 인정하였습니다. '밑천을 털다, 도둑이 빈 집을 털다'에서의 "털다"와 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먼지떨이, 재떨이"는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2) 굳어진 형태를 인정한 것
2-1. 어원에서 멀어진 형태로 굳어져서 널리 쓰이는 것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여 표준말로 삼았습니다(표준 제5항).
"*강남콩"은 본디 '江南'에서 온 것이지만, 이미 굳어져 있는 현실 발음대로 "강낭콩"만을 인정하였습니다. "*삭월세" 또한 '朔月貰'의 취음이지만 오늘날의 실제 발음인 "사글세"를 그대로 표준말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강남콩, *삭월세"는 모두 잘못된 말이니 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2. 발음이 바뀌어 굳어진 형태를 그대로 인정하여 표준말로 삼았습니다(표준 제11항).
홀소리의 발음 변화를 인정하여, 바뀐 형태를 표준말로 삼은 낱말들에는 "-구려(*-구료), 나무라다(*나무래다), 미숫가루(*미싯가루), 바라다(*바래다), 상추(*상치), 주책(*주착), 튀기(*트기)" 들이 있습니다. 또한, "*호도과자"도 "호두과자"로 써야 하며, "바라다"의 명사형은 "바람"이지 "*바램"이 아니니 유의하여야 합니다.
(3) 두 뜻을 한 형태로 삼은 것
뜻이 두 가지로 구별되어 그에 따라 두 형태로 쓰여 왔으나, '표준' 이후 하나의 형태로 통일된 것들이 있다. "돌/돐, 셋째/세째, 빌리다/빌다" 들이 그것입니다.
지난날에는 "돌"은 생일을, "*돐"은 주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분되었으나 "돌" 하나로 통일하였습니다. 또한, "둘째, 셋째, 넷째" 등은 '몇 개째'의 뜻이고 차례를 가리킬 때에는 "*두째, *세째, *네째"로 썼으나, 역시 "둘째, 셋째, 넷째"로 통일하였습니다. "*빌다"는 '내가 남에게서 빌어오다'로, "빌리다"는 '내가 남에게 빌려주다'로 구별해 써 왔으나, 그 구분을 없애고 자주 쓰는 "빌리다"로 통합하였습니다.
(4) 모음조화에서 벗어난 형태를 인정한 것
모음조화 규칙에 따라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던 예들에 대하여 현실 발음을 인정하여 표준말로 정했는데, 이에 따라 양성모음이 음성모음으로 바뀌어 굳어진 "깡충깡충"이 "*깡총깡총"을 쫓아내고 표준말이 되었습니다. 또한, "쌍둥이, 귀염둥이, 막둥이"가 표준말이 되고 "*쌍동이, *귀염동이, *막동이"는 표준말이 아닙니다. "추워서 오들오들 떨다"라고 해야지 "*오돌오돌"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다만, "삼촌, 부조금, 사돈" 들은 아직 어원 의식이 남아 있어서 표준말로 두었으므로, "*삼춘, *부주금, *사둔" 들은 비표준말이니 유의해야 합니다.
(5) 모음이 단순화한 형태를 인정한 것
"*괴퍅하다"가 "괴팍하다"로, "*-구면"이 "-구먼"으로, "*미류나무"가 "미루나무"로 각각 표준말이 달라졌는데, 이는 모음이 단순화한 현실 발음을 인정한 것입니다(표준 제10항).
이와는 좀 다르지만, '?' 모음 역행동화 현상이 나타난 형태('학교'를 '*핵교'라 발음하는 것이 이러한 현상인데, 이는 원칙적으로 표준 발음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대로를 표준말로 인정한 낱말들도 있습니다. "-내기, 냄비" 들이 그것으로, 이에 따라 "서울내기, 자선냄비"가 표준말이고 "*서울나기, *자선남비"는 비표준말이 되었습니다. 다만, "아지랑이"는 역행동화가 일어나지 않은 형태를 표준말로 인정하므로, "*아지랭이"는 비표준말입니다.
(6) 준말을 표준말로 인정한 것
본디말을 줄여 쓴 준말이 오히려 본디말보다 널리 쓰이게 된 경우에는, 그 준말만을 표준말로 인정하였습니다(표준 제14항).
"*무우, *새앙쥐" 들 대신에 그 준말인 "무, 생쥐"가 더 널리 쓰인다고 인정하여 이를 표준말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준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본디말 역시 널리 쓰이고 있으면 본디말을 그대로 표준말로 삼았습니다. "귀이개(*귀개), 수두룩하다(*수둑하다)" 들이 그 예입니다.
한편, 준말과 본디말이 다 같이 널리 쓰이면서 준말의 쓰임이 뚜렷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준말과 본디말 둘 다를 표준말로 삼았습니다. 이 같은 예에는 "거짓부리/거짓불, 노을/놀, 막대기/막대, 머무르다/머물다, 시누이/시뉘/시누, 외우다/외다" 들이 있습니다.
12. 복수 표준말 이야기
얼마 전에 노인 한 분이 전화를 걸어 오셔서 '소고기'와 '쇠고기'에 대하여 한바탕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 분 말씀인즉, '쇠고기'는 잘못 된 낱말이라는 것이다. '소달구지', '소도둑' 들을 '*쇠달구지', '*쇠도둑'이라 할 수 없음이 그 까닭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쇠고기'는 '소고기'와 함께 복수 표준어로 되어 있습니다. '쇠고기'는 '소의 고기'가 줄어든 형태인데, 이 경우 '고기'는 '소'의 부속물이므로 '-의'의 쓰임이 가능하였으며, '소의 고기'가 오랜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쇠고기'로 불려 온 것입니다(소가죽/쇠가죽, 소기름/쇠기름, 소머리/쇠머리, 소뼈/쇠뼈 등). 그러나, '소달구지', '소도둑'에서 '달구지'와 '도둑'은 모두 소의 부속물이 아닙니다. 이들은 각각 '소가 끄는 달구지, 소를 훔치는 도둑'의 뜻이지, '*소의 달구지, *소의 도둑'으로 해석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쇠달구지, *쇠도둑'이라는 줄어든 꼴은 본디부터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소고기/쇠고기'류와 같은, 이른바 '복수 표준어'는 우리 일상 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말 가운데 의외로 많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이 것 아니면 저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기 때문에 생각지 않은 착오를 일으킬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바로 이러한, 알고 보면 둘 다 맞는 말들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모양은 다르지만 뜻이 같은 말들
한 가지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태가 둘 이상으로 쓰여 헷갈리게 하는 낱말들이 여럿 있습니다. 주로 지방에 따라 달리 쓰이던 말들이 현대에 와서 교류가 잦아짐에 따라 각자 세력을 크게 넓혀, 이제는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없게 된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복수 표준어로 인정(표준어 규정 제26항)되고 있는 낱말들을 몇몇 들어 보겠습니다.
① 이름씨의 경우
가락엿/가래엿, 가뭄/가물, 개수통/설거지통, 고깃간/푸줏간, 고까/때때, 넝쿨/덩굴, 눈대중/눈어림/눈짐작, 돼지감자/뚱딴지, 딴전/딴청, 멍게/우렁쉥이, 목화/면화, 물방개/선두리, 물부리/빨부리, 벌레/버러지, 보조개/볼우물, 살쾡이/삵, 삽살개/삽사리, 수수깡/수숫대, 신/신발, 애꾸눈이/외눈박이, 어저께/어제, 언덕바지/언덕배기, 엿기름/엿길금, 옥수수/강냉이, 우레/천둥, 자리옷/잠옷, 자물쇠/자물통, 중신/중매, 짚단/짚뭇, 책씻이/책거리, …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가뭄/가물, 넝쿨/덩굴, 멍게/우렁쉥이, 어제/어저께, 엿기름/엿길금' 등이 자주 혼동을 주는 낱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많은 이들이 '/'표 왼쪽이 표준말이고, 그 오른쪽은 비표준말인 줄로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가물, 덩굴, 우렁쉥이, 어저께, 엿길금' 들은 모두 정겨운 우리 토박이말입니다. 이들도 모두 표준말이니 잘 익혀 두어야 하겠습니다.
한편, 위에서 인용한 낱말들 가운데 '눈어림'은 '눈대중'에, '선두리'는 '물방개'에, '물부리'는 '빨부리'에, '볼우물'은 '보조개'에, '우레'는 '천둥'에, '자리옷'은 '잠옷'에, '짚뭇'은 '짚단'에 각각 가리워 잘 쓰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우리말이니 앞으로 잘 살려 써야 하겠습니다.
② 풀이씨․그림씨의 경우
가엾다/가엽다, 교정보다/준보다, 깨뜨리다/깨트리다(-뜨리다/-트리다), 들락거리다/들랑거리다, 발그스레하다/발그스름하다(-스레하다/-스름하다), 불사르다/사르다, 서럽다/섧다, 성글다/성기다, 씁쓰레하다/씁쓰름하다, 앉으세요/앉으셔요(-세요/-셔요), 어금버금하다/어금지금하다, 어림잡다/어림치다, 여쭈다/여쭙다, 역성들다/역성하다, 연달다/잇달다, 의심스럽다/의심쩍다, 장가가다/장가들다, 천연덕스럽다/천연스럽다, 출렁거리다/출렁대다(-거리다/-대다), 혼자되다/홀로되다, …
위에서 인용한 낱말 가운데서도 특히, '가엾다/가엽다', '서럽다/섧다', '여쭈다/여쭙다' 등 'ᄇ 벗어난 끝바꿈'(ᄇ 불규칙 활용)을 하는 그림씨(형용사)와 풀이씨(동사)들이 자주 틀리는 것들입니다. 아래 예문을 들어 보겠습니다..
ᄀ-1. 우리들의 가엾은 아버지.
-2. 우리들의 가여운 아버지.
ᄂ-1. 서러워 말고 힘을 내세요.
-2. 설워 말고 힘을 내세요.
ᄃ-1. 아침마다 인사 여쭈는 아들들.
-2. 아침마다 인사 여쭙는 아들들.
위에서 ᄀ~ᄃ의 1, 2는 모두 맞는 표현입니다. 이들의 갖가지 끝바뀐 꼴인 '가엾게/가엽게, 가엾어라/가여워라, 가엾지/가엽지, …', '서러운/설운, 서럽게/섧게, 서럽지/섧지, …', '여쭈게/여쭙게, 여쭈어/여쭤/여쭈워, 여쭈어라/여쭈워라, …' 들도 모두 표준말이니, 유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발음이 비슷하여 같이 쓰이는 말들
표준어 규정 제19항에서는 "말맛(어감)의 차이를 나타내는 낱말 또는 발음이 비슷한 낱말들이 다 같이 널리 쓰이는 경우에는, 그 모두를 표준어로 삼는다."라고 밝혀 놓고 있습니다. 이처럼 발음이 비슷하여 같이 쓰이게 된 말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고까/꼬까, 고린내/코린내, 교기(驕氣)/갸기, 구린내/쿠린내, 나부랭이/너부렁이, 거슴츠레하다/게슴츠레하다, 꺼림하다/께름하다
'고까'의 경우, '가스[까스]', '버스[뻐스]' 들처럼 비록 된소리로 나더라도 '꼬까'로 쓰지는 않는 줄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까스. *뻐스는 틀림). 그러나 이 경우 '꼬까'는 표준말로 인정됩니다. '고린내/코린내', '구린내/쿠린내' 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위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지만, '네/예'도 역시 둘 다 널리 쓰여 복수 표준어가 된 것들입니다.
한편, 겹홀소리를 풀어 써 버릇하다가 둘 다가 표준말이 된 것들도 있습니다(표준어 규정 제18항). '괴다/고이다, 꾀다/꼬이다, 쐬다/쏘이다, 죄다/조이다, 쬐다/쪼이다' 들이 그러한 예들입니다.
참고로, '우레'를 '우뢰'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아 이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본디 '우레'는 순 우리말입니다. 이를 한자말로 잘못 인식하여 예전부터 '우뢰(雨雷)'로 사용하다 보니, 이제는 우리말 '우레'가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레'는 우리말 '울다'의 어간 '울-'에 뒷가지 '-에'가 붙어서 된, 엄연한 우리 토박이말입니다. 15세기 옛 문헌에 보면, "한 소릿 울에 三千界를 뮈우도다(一聲雷震三千界)."<금강경 삼가해 Ⅱ:2>와 같이 '울에'로 나타납니다. 그 뒤에도 여러 문헌과 작품에서 '울에/우레'가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뒤늦게나마 이를 바로잡아 '우레'를 표준말로 삼은 것입니다. '우레'와 같은 뜻인 '천둥'도 표준말입니다.
13: 닮은꼴 낱말들
바깥나라에 나들이를 다녀온 사람들에게서 종종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는 외국어에 능숙한 이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구조적인 발음 차이에도 까닭이 있겠지만, 그 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낱말 선택에도 실수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낱말 선택의 혼동은 비단 다른 문화권을 접할 때만 빚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언어 문화로 묶여 있는 한 나라 안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이유 가운데, 다른 언어 문화권에서 유입된 들어온 말 곧 외래어의 영향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오랜 동안의 한자말(외래어) 유입으로 인하여 이러한 현상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토박이말의 의미 구별에는―아무리 발음이 닮은 낱말일지라도―그다지 어려움이 없습니다. 가령, 우리는 '밤:'과 '밤'이나 '눈:'과 '눈' 따위를 거의 본능적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한자와 함께 건너온 한자말에 있어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같은 한자를 쓰더라도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낱말로 쓰이기도 하고, 비슷한 뜻을 가진 한자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의미를 구별하기 어려운 낱말들도 많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이들 가운데 뜻과 쓰임에 있어 가장 잦은 혼란을 보여 주고 있는 것들을 몇 개 뽑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개발(開發)과 계발(啓發)의 다른 점
이 두 낱말은 신문지상을 비롯한 각종 공문 등에서 흔히 혼동되어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거의 구분이 없어진 것 또한 사실입니다. 사전에 따라서는 이 둘을 동의어로 처리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발'과 '계발'은 본디부터 쓰임이 서로 달랐으며, 아직도 이 둘의 쓰임은 구분될 필요가 있습니다.《우리말 큰사전》(1992, 한글 학회)에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개발 (이) 개척하여 발전시킴. (ᄇ) 경제 ~. 새로 ~된 광산.
계발 (이) 지능, 정신 따위를 깨우쳐 열어 줌. (ᄇ) 민족 정신 ~.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개발(開發)'에는 '개척'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광산을 개발하거나 유전을 개발하거나 신도시를 개발하는 것 등은 모두 '개척'입니다. 이를 '계발'과 비교하면 가장 특징적인 변별 자질은 물리적인 이룸, 곧〔이루어 냄〕입니다.
'계발(啓發)'은, 위의 풀이에 따르면, 인간의 지적․정신적 능력에 관계된 낱말입니다. 들판에 신도시를 열듯(개발), 정신 세계에 깨우침을 여는 것(계발)입니다. "*동해상에 유전을 계발한다."가 비문이듯이, "*각자의 소질을 개발한다."도 비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각각 "동해상에 유전을 개발한다.", "각자의 소질을 계발한다."로 써야 합니다. '계발'의 변별 자질은 깨우쳐 엶 곧〔이끌어 냄〕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사람의 내면에 관계되었다고 해서 모두 '계발'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인위적으로('학습' 등으로) 사람의 능력을 신장시키는 것은〔이끌어 냄〕보다는〔이루어 냄〕에 가까우므로 '능력 개발'이라 합니다.
(2) '갱신(更新)'과 '경신(更新)'의 다른 점
올림픽 경기에 관한 기사를 읽다 보면, 선수들이 새로운 기록을 세울 때 표현하는 낱말인 '更新'을 어떤 신문에서는 '갱신'으로 쓰고, 또 어떤 신문에서는 '경신'으로 쓰고 있음을 봅니다. 이것은 '更'의 한자음이 두 가지로 나기 때문인데, '고친다'는 뜻으로는〔경〕으로 나고 '다시'라는 뜻으로는〔갱〕으로 읽힌다. 다시 말해, '경신'은 '고쳐서 새롭게 함'을 이르는 말이며, '갱신'은 '다시 새롭게 함'을 이르는 말입니다('갱신'은 법률 용어로서도 쓰이는데, 이 때는 '존속 기간이 다 끝난 법률 관계의 기간을 다시 연장함'의 뜻을 갖습니다.).
가령 주민등록증을 다시 발급 받아야 하는 사정이 생겼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때는 그 사정에 따라 주민등록증을 '경신'할 수도 있고 '갱신'할 수도 있습니다. 곧, 법률상 개명 허가를 얻어 이름을 바꾸었을 때에는 주민등록증을 '경신'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민등록상의 기록이 고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민등록증을 분실하여 새로 발급 받고자 할 때는 기록 변경이 없이 '갱신'한다고 합니다. 또한, 전세 계약서를 다시 작성할 경우, 전세금 인상 등 그 조건을 바꿀 때에는 '경신'이 되지만, 같은 조건으로 계약 기간만을 연장하는 경우에는 '갱신'이 됩니다.
따라서, 올림픽 대회 같은 운동 경기에서 선수가 신기록을 세웠을 때에는 '경신'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이미 있던 기록을 새로이 고쳤기 때문입니다.
(3) '주관(主管)'과 '주최(主催)'의 다른 점
한글 학회《우리말 큰사전》에 보면, '주관(主管)'과 '주최(主催)'의 풀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적고 있습니다.
주관 (이) 주장하여 관리함.
주최 (이) 어떤 모임을 주장하여 엶.
위의 설명만 가지고서는 그 차이를 분명히 밝혀 쓰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실제에서는 각기 어떤 경우에 쓰이는가를 살펴보겠습니. 대체로 '주최'는 위의 풀이에서 나타난 '어떤 모임을 주장하여 여는 것' 외에 '어떤 일 또는 행사에 대하여 계획하거나 최종 결정을 하며 이에 따르는 책임을 질 때' 쓰이는 말입니다. 반면 '주관'은 '어떤 일 또는 행사에 대하여 실무를 맡아 처리하고 꾸려 나갈 때' 쓰입니다. '주관'은 '주최'가 마련한 계획대로 집행하여 나갈 뿐이며, 행사 자체에 대한 최종 책임은 '주최'가 지는 것입니다.
가령 문화체육부와 대한사이클연맹이 함께 사이클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고 합시다. 이 경우, 어느 한 쪽은 이 대회를 계획하고 명분을 제공하여 최종적인 책임을 질 뿐이며, 다른 한 쪽은 대회 홍보 및 참가자 신청․등록, 대회장 준비, 시상식 등 실무적인 일을 맡았다면, 전자는 '주최'이고 후자는 '주관'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대회는 보통 문화체육부가 주최가 되고 대한사이클연맹이 주관이 됩니다.
(4) '등(等)'과 '들'
일반적으로 '등(等)'은 둘 이상의 낱말이나 구를 열거할 때 그 뒷부분에 쓰이는 글자로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사실만 들고 그 뒤에 '등'을 다는 것은 어딘지 어색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예로, 요즘 시중에 팔리고 있는 담배의 포장지에는 "흡연은 폐암 등을 일으킬 수 있으며 특히 임산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라는 경고문이 씌어 있는데, 이 때의 '폐암 등을'이란 표현이 잘못 되지 않았느냐는 질의를 종종 받습니다. 그러나 위의 문구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등'은 우리말 '들'이나 '따위'에 대응되는 의존 명사입니다. '폐암, 후두암 등을'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겠지만, '폐암 등을'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가령 올림픽 경기 개막식 선서를 할 때, '전병관 외 299명은'이라 해도 되지만 '전병관 등 300명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등'을 달기 위하여 선수 이름을 꼭 둘 이상 나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편, 우리말 '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둘 이상'의 복수를 나타내는 뒷가지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들'은 뒷가지이면서 동시에, 위의 '등'과 쓰임이 같은 순수 우리말 매인이름씨이기도 합니다. 곧 '폐암, 후두암, 들을' 이라고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에는 '들'의 앞을 띄어 써야 하겠지요.
14: '다른' 말, '틀린' 말 이야기
그 뜻을 가만히 새겨 보면 금세 올바른 쓰임을 깨닫을 수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나날살이에서 습관적으로 잘못 쓰고 있는 말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끼리 통하면 그만이라고 치부하기 쉬우나, 말이란 영속적으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유산이므로 되도록 빨리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산과 강을 오염되지 않게 보존하여 물려주려면, 몇몇 환경 운동가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겨레말을 본디 모습대로 물려주려면 '나'부터의 솔선수범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 곳에서는 습관적으로 그 뜻을 왜곡하여 쓰고 있는 나날말(일상용어)들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당장 바로잡아 쓸 수 있는 것들이니,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올바른 말글살이를 스스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1) "다르다"와 "틀리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그 뜻이 서로 매우 다릅니다. <우리말 큰사전>(1992, 한글 학회)에서 각각의 풀이를 살펴보겠습니다.
다르다: ① 같지 아니하다. ② 특별한 데가 있다. ③ 변함이 있다.
틀리다: ①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
② 사이나 감정이 나쁘게 되다.
③ 바라거나 하려는 일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다.
④ 서로 견주는 때 얻는 결과가 다르게 되다.
위와 같이 분명한 뜻의 차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뜻 구별이 없이 두 낱말 사이를 넘나들며 쓰고 있습니다. 특히, "다르다"를 써야 할 자리에 "틀리다"를 쓰는 잘못이 가장 많이 눈에 띄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문들을 들어 보겠습니다.
(1) ᄀ. *소문과 다르지 않게 그 여자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ᄂ. *이건 약속이 다릅니다.
(2) ᄀ. *지난번에 샀던 옷하고는 색상이 틀리네.
ᄂ. *김과장 말과 자네 말이 어째서 서로 틀리는가?
ᄃ. *참 밥맛 좋다, 철원 쌀이 틀리긴 틀려!
ᄅ. *서울 거리가 몰라보게 틀려 보이네 그려.
(1)은 "틀리다"를 써야 할 자리에 "다르다"를 잘못 쓴 예입니다. (1)ᄀ에서는 밑줄 친 부분이 '(소문과)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지'(위의 사전 풀이 '틀리다①'을 참조)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다르지'가 아니라 '틀리지'로 써야 합니다. 또한, (1)ᄂ에서는 밑줄 친 부분이 '서로 견주는 때 얻는 결과가 다르게 된'(위의 사전 풀이 '틀리다④'를 참조) 때이므로, '다릅니다'가 아니라 '틀립니다'로 써야 합니다.
(2)는 "다르다"를 써야 할 자리에 "틀리다"를 잘못 쓴 예입니다. (2)ᄀ에서의 밑줄 친 부분은 '지금 보고 있는 옷'과 '지난번에 산 옷'의 색상이 '같지 아니한'(위의 사전 풀이 '다르다①'을 참조) 경우이므로 '다르네'라고 써야 합니다. (2)ᄂ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2)?에서는 '(철원 쌀이) 특별한 데가 있다'(위의 사전 풀이 '다르다②'를 참조)는 뜻이므로 '다르긴 달라'로 고쳐 써야 하고, (2)ᄅ의 밑줄 부분 역시 '변함이 있다'(위의 사전 풀이 '다르다③'을 참조)는 뜻으로 쓰인 예이므로 '달라'로 표현해야 합니다. (1), (2)를 바로잡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1)' ᄀ. 소문과 틀리지 않게 그 여자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ᄂ. 이건 약속이 틀립니다.
(2)' ᄀ. 지난번에 샀던 옷하고는 색상이 다르네.
ᄂ. 김과장 말과 자네 말이 어째서 서로 다른가?
ᄃ. 참 밥맛 좋다, 철원 쌀이 다르긴 달라!
ᄅ. 서울 거리가 몰라보게 달라 보이네 그려.
(2) "바꾸다"와 "고치다"
위의 "다르다/틀리다" 못지 않게 자주 혼동하여 쓰는 말 가운데 "바꾸다"와 "고치다"가 있습니다. <우리말 큰사전>(1992, 한글 학회)에서 두 낱말의 뜻 차이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바꾸다: ① 어떤 물건을 주고 그 대신 딴 물건을 받다. ② 본디의 것이 딴것으로 되게 하다.
고치다: ① 낡거나 헐거나 고장이 나거나 한 물건을 손질하여 제대로 되게 하다
② 그릇되거나 틀리거나 한 것을 바로 잡다.
③ 모양이나 태도 따위를 다시 새롭게 가지다.
④ 이름, 명칭, 형식 따위를 다르게 바꾸다.
특히, "바꾸다②"와 "고치다②,③,④"의 뜻이 서로 넘나들어 잘못 표현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3) ᄀ. *일정을 고쳐 내일 떠나기로 했어요.
ᄂ. *방향을 북쪽으로 고쳐 주십시오.
(4) ᄀ. *마음을 바꿔 먹었으니 걱정 마세요.
ᄂ. *자세를 바꿔 앉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ᄃ. *한자말식 이름을 고운 우리말 이름으로 바꿨다.
(3) ᄀ,ᄂ의 밑줄 친 '고쳐'는 문맥상 '본디 정해 놓은 시간(ᄀ)/방향(ᄂ)을 달리 정하여'의 뜻이므로 둘 다 '바꿔'로 고쳐야 합니다. '그릇되거나 틀린 것'을 바로잡을 때에 "고치다"를 써야 하는데, 위 (3)의 예문에서는 일정/방향을 바꾸는 행위가 그릇되거나 틀린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4)ᄀ에서의 밑줄 친 부분은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는'(위의 사전 풀이 '고치다②'를 참조) 경우이므로 '고쳐'라고 써야 합니다. (4)ᄂ의 밑줄 친 부분은 '태도를 다시 새롭게 가지는'(위의 사전 풀이 '고치다③'을 참조) 행위이므로 '고쳐'로 써야 하고, (4)ᄃ의 밑줄 부분 역시 '이름을 다르게 바꾼'(위의 사전 풀이 '고치다④'를 참조) 경우이므로 '고쳤다'로 표현해야 합니다. (3), (4)를 바로잡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3)' ᄀ. 일정을 바꿔 내일 떠나기로 했어요.
ᄂ. 방향을 북쪽으로 바꿔 주십시오.
(4)' ᄀ. 마음을 고쳐 먹었으니 걱정 마세요.
ᄂ. 자세를 고쳐 앉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ᄃ. 한자말식 이름을 고운 우리말 이름으로 고쳤다.
(3) '너무'와 '매우'
어찌씨(부사) "너무"가 지나치게 남용되어, "참"이나 "매우"라고 말해야 할 자리에서 "너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언어 습관으로서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합니다. "너무"는 '느낌이 강하여 그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한계나 정도에 지나게'의 뜻으로 쓰이는 어찌씨입니다. 가령, "*꽃이 너무 예쁘다.", "*사진이 너무 예쁘게 나왔다." 따위로 말하는 이가 매우 많은데, 이는 "꽃이 참(/매우) 예쁘다.", "사진이 참(/매우) 예쁘게 나왔다."로 고쳐 써야 합니다. 또한, "*오늘은 너무 바빴어요."도 "오늘은 매우(/참) 바빴어요."의 잘못입니다. "너무"는 "비가 너무 내린 것 같아요."라든지, "물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라."와 같은 경우에서 처럼 '지나치게'의 뜻으로 쓰이는 어찌씨입니다. 이 말을 "참'이나 '매우'를 써야 할 자리에 너무 남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15: 자주 틀리는 낱말
나날살이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쓰고 있는 말 가운데에도 알고 보면 잘못 쓰고 있는 것들이 간혹 있기 마련입니다. 가령, ① "오늘이 몇 월 몇 일이지요?", ② "하늘을 날으는 슈퍼맨!", ③ "그 사장은 참으로 야멸차다." 등의 문장들에는 각기 잘못 쓴 낱말이 한 개씩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다가는 어느 기회에 매우 난처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는 이들 문장에 포함되어 있는, 자주 틀리는 낱말 몇 개를 살펴보겠습니다.
⑴ '몇일'과 '며칠'
지난날에는 이 두 경우를 모두 인정하여 왔습니다. '몇일'은 "오늘이 몇 일이냐?"에서와 같이 '몇'이 매김씨(관형사)로 쓰일 적에, 그리고 '며칠'은 "며칠 뒤에 보자."처럼 '며칠'이 이름씨로 쓰일 적으로 각각 구별하여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교부 고시(1988년) 새〈한글 맞춤법〉에서는 '몇일'과 '며칠'을 모두 '며칠'로 통일하였습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이든 '몇일'로 적으면 틀리게 되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한글 맞춤법〉제27항의 [붙임 2]에서 "어원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원형을 밝히어 적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면서 그 용례 가운데 '며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는 '몇 개, 몇 사람' 등에서의 '몇'과 '날'을 나타내는 '일'이 결합된 '몇+일'로 분석하여 그 표기가 '몇일'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혼동되기 쉽습니다. 게다가〈한글 맞춤법〉제27항이 "둘 이상의 단어가 어울릴 경우 …… 각각 그 원형을 밝혀 적는다."고 규정하고 있는 만큼 '몇일'로 적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붙임'을 두어서 '며칠'로 적도록 한 데에는 물론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곧, 우리말의 합성어에서는 뒤에 오는 형태소의 머릿소리가 '이'일 경우 앞에 붙는 말의 받침이 대표음으로 바뀌면서 사이에 'ᄂ'이 덧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다음을 보겠습니다.
앞일 : 〔압일〕→〔암닐〕(*[아필]이 아님)
잣엿 : 〔잗엿〕→〔잔녀ᄉ〕(*[자셧]이 아님)
낮일 : 〔낟일〕→〔난닐〕(*[나질]이 아님)
'며칠/몇일'의 경우, 이 낱말이 '몇+일'로 분석될 수 있는 합성어라면, 위의 발음 법칙에 의하여 그 발음이〔?일〕→〔면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면닐〕이 아니라〔며칠〕로 발음되므로 소리대로 적어 불규칙성을 반영하도록 한 것입니다.
⑵ '날으는 슈퍼맨'과 '나는 슈퍼맨'
제움직씨(자동사) '날다'는〈한글 맞춤법〉제18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벗어난 끝바꿈(불규칙 활용) 풀이씨입니다. 따라서 '날다'는 '나니, 나오, 나는' 들과 같이 끝바꿈하므로 "날으는 슈퍼맨"이 아니라 "나는 슈퍼맨"이 맞습니다.
간혹 "하늘을 나르는 슈퍼맨"이라고 쓰는 이들도 있는데, 이 역시 "하늘을 나는 슈퍼맨"으로 고쳐 써야 합니다. '나르다'는 '옮기다, 운반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남움직씨(타동사)인데, '하늘을 나르는'이라고 하면 '하늘을 옮긴다'는 뜻이 되니, 제 아무리 슈퍼맨이라도 이는 가능하지도 않은 엉뚱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곧, "나는 슈퍼맨"이라고 하면 두 가지 뜻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는 '내가 슈퍼맨'이라는 뜻이요, 또 하나는 '공중을 날아 다니는 슈퍼맨'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나는 슈퍼맨"이라고 하면 '나는(I) 날아 다니는(flying) 슈퍼맨'이라는 뜻이 된다. 어쨌든 "날으는 슈퍼맨"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니 유의하기 바랍니다.
⑶ '야멸차다'와 '야멸치다'
우리는 흔히, 남의 사정을 돌보지 않고 제 일만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 참 야멸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낱말은 '야멸치다'이지 '야멸차다'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저 사람 참 야멸치다."로 해야 합니다.
비슷한 뜻을 가진 낱말로 '매몰차다'는 말은 있으되 '야멸차다'라는 말은 우리 국어 사전 어디에도 없습니다. 글쓴이가 짐작하기로는 '야멸치다'를 '매몰차다'와 연관지어서 생각하다 보니 이러한 혼동이 온 것 같습니다.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를 묘사하는 말 가운데에는 이 밖에도 여럿 있습니다.
기운차다: 힘차다.
대차다: 성미가 굳고 꿋꿋하다.
세차다: 힘있고 억세다.
옹골차다: 옹골지고 기운차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유의 낱말에는 한결같이 '-차다'가 붙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도가 차고 매섭다'는 뜻을 가진 '야멸치다'를 '야멸차다'로 혼동하여 잘못 쓰고 있는 현상에는 아마도 위와 같은 낱말들과의 연상 작용도 한 몫을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상에서 설명한 것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의 머리에 제시해 놓은 문장들을 바로잡아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①' "오늘이 몇 월 며칠이지요?"
②' "하늘을 나는 슈퍼맨!"
③' "그 사장은 참으로 야멸치다."
열쇠 16: 우리말 셈씨 이야기
얼마 전 대방동의 어느 뷔페에 마련한, 하나뿐인 조카의 돌 잔치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좀 늦게 간 탓인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제수는 조카를 안고 손님을 맞이하느라 매우 바쁜 것 같았습니다. 아우의 회사 동료들이 온 모양이었는데, 문득 귀에 거슬리는 말 한 마디가 들렸습니다.
"세 돈짜립니다. 아무래도 너무 작지요?"
돌아보니, 제수가 금으로 만든 아기용 팔찌를 받아들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멋적어하고 있는 청년―아우의 회사 동료인 듯한―이 '세 돈짜리' 반지를 선물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냥 지나쳐도 되련만, 글쓴이는 습관처럼 관여하였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 애 큰아버지 됩니다."
"아, 녜. 처음 뵙겠습니다."
"뭘 그리 비싼 걸 선물하십니까? 그런데… 세 돈이라고 하면 잘못된 말입니다."
청년은 아, 하더니 금방 틀렸다는 걸 깨달은 듯 정정하였다.
"그렇습니다. 세 돈이 아니라 석 돈이지요."
금팔찌는 세 돈짜리가 되었다가, 다시 석 돈짜리가 된 셈입니다. 그러나, 실은 세 돈도 석 돈도 아닌, '서 돈'이 맞는 말입니다. 글쓴이의 이 같은 설명에 청년은 '서 돈은 옛날 말인 줄 알았는데…' 하며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우리말에서 단위를 나타내는 일부 의존 명사, 곧 '돈', '말', '발', '푼' 등의 앞에서 수를 나타내는 말이 쓰일 때 여러 형태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위의 실례도 그러한 보기의 하나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언어 현실에서는 '서 돈'과 함께 '세 돈, 석 돈' 들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너 돈' 대신 '네 돈, 넉 돈'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특히 젊은 계층에서―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에는 '서 돈', '너 돈'과 같은 말법이 옛날에나 쓰이던 말일 뿐, 요즘에는 사라진 말인 줄로 알고 있는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서/너'는 예부터 전통적으로 써 오던 셈씨인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에도 엄연하게 (특정 수량 단위 앞에서) 표준어로 규정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이 '세/네, 서/너, 석/넉' 계열의 어휘는 주로 전통적인 수량 단위(돈, 말, 발, 푼, 냥, 되, 섬, 자 따위)와 결합할 때는 배타성을 띄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타성이 현대로 오면서 조금씩 무너져 혼동되어 쓰인 까닭에 위와 같은 잘못이 빚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혼동을 막기 위해〈표준어 규정〉제17항에서 아래와 같이 규정하였습니다.
제17항 비슷한 발음의 몇 형태가 쓰일 경우, 그 의미에 아무런 차이가 없고, 그 중 하나가 더 널리 쓰이면, 그 한 형태만을 표준어로 삼는다. (ᄀ을 표준어로 삼고, ᄂ을 버림.)
ᄀ ᄂ
서〔三〕 | 세/석 | ~돈, ~말, ~발, ~푼
석〔三〕 | 세 | ~냥, ~되, ~섬, ~자
너〔四〕 | 네 | ~돈, ~말, ~발, ~푼
넉〔四〕 | 너/네 | ~냥, ~되, ~섬, ~자
그러므로 위 규정에 따르면, '세 돈, 석 돈, 세 말, 세 발, 세 푼'이라든지 '세 냥, 세 되, 세 섬, 세 자' 들은 모두 잘못된 표현이 됩니다. 또한, '네 돈, 네 말, 네 발, 네 푼, 너 냥, 네 냥, 너 되, 네 되, 네 섬, 네 자' 들도 써서는 안됩니다. 특히, 이 가운데 '세 자'와 '네 자'는 치수를 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모두 '석 자, 넉 자'가 바른 말임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위와 같은 특정 수량 단위를 제외하면 '서/너, 석/넉'은 거의 쓰이지 않고 주로 '세'가 많이 쓰입니다. 따라서 현대로 오면서 많이 쓰이게 된 수량 단위는 주로 '세/네'와 결합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래 보기와 같이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⑴ 서 겹(?) 석 겹(?) 세 겹 삼 겹(?)
⑵ 서 달(?) 석 달 세 달 삼 달(×)
⑶ 서 대 석 대 세 대 삼 대(×)
⑴의 경우는 '세 겹'이 옳습니다. 전통적인 여러 문헌에서 그 용례가 발견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삼 겹'은 '삼겹살'과 같은 특정한 복합어에서 쓰이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현입니다. '삼겹살'은 맞는 표현이지만 그 외의 '삼 겹'은 잘못된 말입니다.
⑵의 경우는 '석 달'과 '세 달'이 함께 쓰이고 있으나, 전통적으로는 '석 달'로 쓰였음을 참고로 알아두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석 달'과 '세 달'이 모두 맞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문 정책 당국에서 복수 표준어로 명시하거나 표준어 사정으로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⑶의 경우는 이보다 더욱 복잡한 예입니다. 현실적으로 '서 대, 석 대, 세 대'가 모두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가 현대에 와서 자동차나 비행기 등에 많이 쓰이는 것이고, '되, 돈' 따위의 전통적인 특정 수량 단위가 아니므로 '세'로 세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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