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풍쟁이 대포 영감
우리집 울타리는 과수원 울타리가 절반정도였는데 대포영감네 과수원울타리였습니다.
대포영감은 몸집이 매우 뚱뚱하고 머리가 허옇게 세었으며, 항상 쇠 지팡이를 절렁거리며 짚고 다녔습니다. 원래는 강릉읍에서 양조장을 했다는데 돈을 좀 벌어서는 우리 동네에 와서 과수원을 샀는데 벌써 십여 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점잖은 동네 어른들은 ‘읍엣집 영감님’이라고 불렀지만 하도 큰소리를 잘치고, 우스갯소리도 잘 해서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그 영감님을 ‘대포영감’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해 늦가을에 대포영감이 읍내를 갔다 오다가 날이 저물었다고 합니다.
읍내에서 경찰서장하고 술을 한잔하고 십여리 길을 술김에 걸어왔다고 합니다.
외져서 낮에도 다니기가 으스스한 봉화재(烽火峙) 고개를 막 들어서려는데 황소 만한 호랑이 한 마리가 눈에 시뻘건 불을 켜고 멀찍이 따라오더랍니다. 고개를 거의 다 넘어왔는데도 그냥 그만한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따라오더랍니다.
마을이 가까워오자 녀석은 좌우로 빙빙 돌며 해칠 기세를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영감님은 쇠 지팡이로 길섶 바위를 힘껏 내리치며 벽력같은 소리를 내질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호랑이가 깜짝 놀라서 땅바닥을 한 바퀴 나뒹굴고는 물똥을 한 동이나 내깔기고 쏜살같이 도망을 가더라고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음은 물론, 허풍을 떨었다고 믿고 거짓부렁이를 멋대로 내뱉는다고 그때부터 읍엣집 영감이 아니라 ‘대포 영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대포 영감의 큰아들은 동네 사람들을 보곤 무식하다고 깔보기가 일쑤고, 같이 말도 잘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대포 영감네 큰아들은 농사일도 할 줄 모르고 맨날 빈둥거리며 일도 안하는 건달이라고 흉을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여고를 다녔다는 그 부인(대포 영감 며느리)도 농사일을 할 줄 모르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언젠가 부뚜막에 앉아 신문을 보더라고 동네 여자들은 별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성격이 원체 소탈해서 이따금 이웃 아낙네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기도 하고, 마실도 잘 다녀서 동네 사람들은 그 집 며느리 한 사람만은 괜찮다고들 하였습니다. 대포 영감네 과수원은 손질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무성한 풀숲 속에 복숭아며, 사과나무가 제멋대로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어디 과수원인가, 풀밭이지.....’ ‘그 과수원 풀숲 속에 호랑이가 새끼를 쳐도 모르겠더라.’
동네 사람들은 대포 영감네 과수원을 보고 모두 혀를 찼지만 대포 영감이고 그 아들이고 과수원에는 별 관심이 없고 무슨 볼일이 그리 많은지 읍내에만 들락거렸습니다.
이따금 그 과수원 가운데 있는 원두막에서 대포 영감 큰아들이 트럼펫을 불곤 했습니다.
뜨거운 오뉴월 햇살 속에 구슬땀을 흘리며 밭고랑에 엎드려 일을 하다보면 과수원에서 꿈결처럼 아련히 트럼펫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면 마음은 두둥실 떠올라 먼 이국땅을 헤매게 되곤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동네 젊은이들은
‘젠장, 어떤 놈은 그늘에 자빠져 나팔만 불어도 잘먹고 잘살고...’
‘에라, 이까짓 꺼 내 패대기치고 어디 먼데루 도망이나 칠까......’
하고 넋두리를 늘어놓곤 하였습니다.
대포영감네 야학(夜學) 방
어느 핸가 대포 영감 며느리가 야학(夜學)을 연다고 하여 동네가 술렁거렸습니다.
한글을 못 배운 사람들은 누구든지 오면 한글을 가르쳐 준다고 하였습니다.
동네 사람 대부분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국민학교에 다니는 우리 또래뿐이었습니다.
대포 영감네 행랑채 제일 큰 방이 글방으로 꾸며졌습니다. 칠판도 달고 백묵도 있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모두 신기한 것들뿐이었습니다.
물론 무료였을 뿐만 아니라 종이와 연필도 무료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몰려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동네 아주머니들과 처녀들이었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조무래기 계집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저녁마다 호롱불을 앞세우고 깔깔거리며 모여들면 2, 30명씩이나 되었습니다.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느라 솜처럼 피곤하련마는 어두컴컴한 남포(램프)불 밑에서 방바닥에 엎드려서는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읽고, 쓰고 하면서 한글을 익히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먼저 ‘가’자 줄의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그 기’를 가르치고 다음으로 ‘나’자 줄을 가르쳤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다니셨는데 다음날이면 내가 시험을 보이곤 했습니다.
‘노루’라고 써 놓고 읽어 보시라고 하면
‘가만있자. 이게 ‘나’자 줄이지. ‘나,냐,너,녀...’ 오라 ‘노’자로구나. 그리고 이건 ‘라’자 줄이니까 ‘라, 랴,..’ 그래, ‘루’자 로군. 가만있자. 이 앞의 글자가 뭐라고 했더라....’ 매양 이렇게 하시면서도 점차 한글을 깨쳐 나가셨습니다.
받침이 없는 글자가 끝나고 받침을 가르쳤습니다.
‘가’자에 기역하면 ‘각’..... ‘나’자에 행(이응)하면 ‘낭’.... 이렇게 큰 소리로 따라 읽곤 했습니다.
대포영감은 밭가나 논두렁에서 마을 사람들을 보면 일도 못하게 아무나 붙잡아 놓고는 며느리 자랑을 하느라 입에서 침을 튀기곤 했습니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이 뭐라고 했는가? 남자나 여자나 사람은 그저 배워야 하는 게야. 지랄병 빼놓고는 뭐든지 배우라고 하지 않았는가? 무식이 고질병이여, 흠 흠...’ 그러나 정작 대포 영감은 한글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글방에 들어서면 벽에는 커다란 책장을 세워놓았는데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이따금 어머니와 누님을 따라 글방에 갔다가 나는 벽 책꽂이에 있는 책들을 펼쳐보곤 했는데 그림을 곁들인 시를 읽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 시를 읽으며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던 아련한 기억....
섣달부터 정월 초순까지는 온통 마을이 술렁거렸습니다.
갖가지 세시풍속 놀이로 밤이고 낮이고 마을 젊은이들은 몰려다니고, 아낙네들도 어울려 다니며 모처럼의 농한기와 명절을 즐겼습니다. 우리 막내 누나 또래들이 우리 마당에 모여서 ‘언문(한글) 띄기’를 합니다. 이제 ‘한글은 다 띄었다(완전히 배웠다)’는 의미로 빨리 배우게 해 달라는 의미겠지요.
먼저 지게가지에 종이에다 ‘가, 나, 다..’ 또는 ‘ㄱ, ㄴ, ㄷ,...’을 잔뜩 써서 붙입니다. 그리고 지게를 작대기로 받쳐 놓고는 그 밑으로 웅크리고 지나가며 ‘언문 띄자~!’ 하면서 받쳐 놓은 작대기를 툭 치며 빠져나오면 지게가 넘어집니다.
그러면 둘러섰던 사람들은 모두 ‘야! 순이는 언문 띄었다~!!’ 하며 손뼉을 칩니다. 그리곤 또 다음 사람이 차례로 합니다.
하도 재미가 있어 보여 나도 한 번만 하게 해 달라고 졸랐지만 누나들은 시켜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는 심통이 나서 ‘어머이한테 다 일러바칠 거야, 나 시켜주지 않는다고~!’ 하고 눈물을 찔끔거리며 씩씩거려도 누나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모두들 끝나고 나서는 마당에서 널뛰기를 하든가 방에 들어가서 쌍육(雙六)놀이를 합니다.
주사위 두 개를 던져서 나오는 숫자대로 말을 옮기는 놀이로 당시 유행하던 전통놀이입니다.
그러면 나는 혼자 마당에서 그 지게를 세워놓고 몇 번씩이나 빠져나가 보지만 재미가 없었습니다. *
쌍륙(雙六) 놀이와 널뛰기
※쌍륙놀이
중국 한무제(漢武帝) 때 서역(西域)에서 처음 들어와 우리나라 백제로 전래되어 유행했다는 쌍륙(雙六)놀이는 주로 아녀자들의 놀이라고 하는 역사 깊은 놀이로, 한자로는 쌍륙(雙六) 혹은 쌍륙(雙陸)이라고 표기된다. 주사위(骰子) 두 개를 던져서 나오는 숫자만큼 말을 옮겨가는 놀이인데 ‘참 쌍륙’과 ‘여기 쌍륙’ 두 가지 놀이가 있다. 강릉말로는 ‘생율놀이’...
참 쌍륙은 정식 게임으로 주사위를 던져서 말을 옮긴 후 다 빼는 게임이고 여기 쌍륙은 주사위를 던져서 16개의 말을 모두 세운 후 다시 모두 빼는 간이 경기방식이다. 참 쌍륙은 옮기는 중 서로 상대방 말을 잡을 수가 있어 온통 난리가 난다.
주사위 두 개를 동시에 던지는데 나오는 숫자가 1-1이면 ‘진백(꼬백)’, 2-2면 ‘진아’, 3-3은 ‘장삼’, 4-4는 ‘진사’, 5-5는 ‘진오’, 6-6은 ‘줄(준)륙’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