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글 출처
황희의 묘지명(墓誌銘)
- 저자
신숙주(申叔舟)
- 이명
자 : 구부(懼夫)
호 : 방촌(尨村)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1 상신(相臣)
경태(景泰) 3년인 임신년(壬申年, 1452년 문종 2년) 2월 초8일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장수(長水) 황공(黃公, 황희를 말함)이 별제(別第)의 정침(正寢)에서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은 90세였다. 그해 모월 모일에 유사(有司)가 의위(儀衛)를 갖추어 원평부(原平府) 감물역(甘物域)의 마을에 장사지냈다. 부인(夫人) 양씨(楊氏)와 봉분은 같고 광중(壙中)은 다르며 간좌 곤향(艮坐坤向)으로, 이는 공의 유지(遺志)였다.
공의 고휘(古諱)는 수로(壽老)인데 뒤에 희(喜)로 고쳤고, 자(字)는 구부(懼夫)이며 자호(自號)는 방촌(尨村)이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함과 민첩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한번 보면 대번에 기억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이미 그가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것을 알았다.
지정(至正) 병진년(丙辰年, 1376년 우왕 2년)에 처음 음공(蔭功)으로 복안궁 녹사(福安宮錄事)에 제수되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밤에도 불을 켜고 공부를 하였으므로 경사(經史)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누가 과거에 응시하라고 권하자 공은 말하기를, “사장(詞章)은 군자(君子)가 힘쓸 만한 훌륭한 일이 아니다.”고 하고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가 강권하여 계해년(癸亥年, 1383년 우왕 9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을축년(乙丑年, 1385년 우왕 11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기사년(己巳年, 1389년 공양왕 원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우리 태조(太祖)가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닦은 선비를 가려 뽑을 때, 공에게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게 하였고, 이어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우보궐(右補闕)이 되었는데, 정직하게 곧은 말을 하다가 끝내 임금의 뜻에 거슬리어 파직되었다. 얼마 뒤에 경기 감사(京畿監司)를 보좌하는 벼슬로 기용되었고, 이어 형조ㆍ예조ㆍ이조ㆍ병조 네 조의 정랑(正郞)을 역임하고서 병조 의랑(兵曹議郞)이 되어 겸직집현전(兼直集賢殿)과 도평의사(都評議司)의 도사(都事)ㆍ경력(經歷)을 맡았는데, 이르는 곳마다 능력이 있다고 소문났다.
임오년(壬午年, 1402년 태종 2년) 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해 겨울에 마침 나라에 사변(事變)이 있어 승추부(承樞府)가 군기(軍機)를 맡게 되었는데, 임금은 그 적임자를 구하기 어렵게 여기다가 공을 기복(起復, 상중에 있는 신하를 벼슬에 기용하는 일)시켜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大護軍兼承樞府經歷)으로 삼았다. 이에 공이 고사(固辭)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심상(心喪)을 입는 것으로 복제(服制)를 마쳤다. 갑신년(甲申年, 1404년 태종 4년)에 특별히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 좌부대언(左副代言)에 승진하였으며, 을유년(乙酉年, 1405년 태종 5년)에는 차서(次序)를 건너뛰어 지신사(知申事)에 임명되어 왕명을 출납하고 임금을 바른 길로 계도하니, 사람들이 직책을 제대로 다한다고 칭찬하였고 임금의 보살핌도 갈수록 융숭해졌다.
기축년(己丑年, 1409년 태종 9년)에 참지 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되도록이면 대체(大體)만 견지하고서 잡다한 일은 세세하게 살피지 않았지만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공을 두렵게 여기어 복종하였고 조정의 기강이 진숙(振肅)되었다. 이어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거친 뒤에 정유년(丁酉年, 1417년 태종 17년)에 평안도(平安道)에 안렴사(按廉使)로 나가니 온 도내의 정사가 깨끗해졌다.
계묘년(癸卯年, 1423년 세종 5년)에 강원도(江原道)에 기근(饑饉)이 들자 임금께서 이를 걱정하여 특별히 공을 그곳의 감사(監司)로 명하니, 마음을 다해 진구(賑救)하여 구황(救荒) 정사가 제대로 시행되었으므로 백성들이 죽거나 쇠약해지지 않았다. 그러자 임금이 가상히 여기어 숭정 대부(崇政大夫)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로 승진시켜 계속 감사로 있게 하였다. 공이 일찍이 울진(蔚珍)의 바닷가 언덕에 잠시 쉬어갔는데, 공이 강원도를 떠난 뒤에 주민들이 공을 애모(愛慕)하여 그곳에다 대(臺)를 쌓고 이름을 ‘소공대(召公臺)’라 하여 지금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의정부 찬성 겸 대사헌(議政府贊成兼大司憲)으로 소환되었고, 병오년(丙午年, 1426년 세종 8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니, 당시 사람들이 적임자를 얻었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어 정미년(丁未年, 1427년 세종 9년)에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였는데, 그해 7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9월에 임금이 기복(起復)하도록 명하므로 공이 4, 5차에 걸쳐 굳게 사양하니, 임금께서 세 번이나 교서(敎書)를 내려 돈면(敦勉)하였는데, 그 말씀의 뜻이 매우 간곡하여 피할 수가 없어서 마지못하여 직(職)에 나아갔다. 얼마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자 나이가 늙은 것을 이유로 물러나기를 간청하였는데,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글을 올렸으나 임금은 모두 윤허하지 않으면서 말씀이 더욱 간곡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449년 세종 3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치사(致仕)하게 해주었는데, 특별히 명하여 2품(品)의 봉록(俸祿)을 종신토록 지급하도록 하였으며, 조야(朝野)가 모두 공이 물러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나라에 큰일이 있게 되면 임금이 반드시 근시(近侍)로 하여금 공에게 나아가서 묻도록 한 뒤에 결정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웅위(雄偉)하고 품성이 관인(寬仁)하였다. 또 침착하여 도량이 있고 말수와 웃음이 적었으며, 기쁨이나 노여움을 낯빛에 드러내지 않았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아랫사람들을 지성으로 대하였으며, 자제들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소학(小學)≫을 끌어대어 자세하게 타일렀다.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나이가 늙은 뒤에도 더욱 독실하였으며, 정도(正道)를 부식(扶植)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하였다. 친족 중에 고아(孤兒)나 과부(寡婦)로서 간혹 살림이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가 있으면, 공이 반드시 혼수(婚需)를 장만하여 결혼하도록 해주거나, 재물을 내어 구제하여 제각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뒤에야 그만두었다. 집에서 지낼 때는 청렴하고 검소하게 자수(自守)하여 매사가 모두 본받을 만하였고, 산업(産業)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신분이 수상(首相)이 되었는데도 집안 살림이 마치 서생(書生)의 집처럼 쓸쓸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 24년간 있으면서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따르려고 힘썼고 어지럽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일처리는 사리에 따르고 규모(規模)가 원대하여 대강(大綱)을 들면 세목(細目)은 저절로 열려 다스려지지 않는 일이 없었으므로, 공은 점잖고 느긋하여 대신(大臣)으로서의 체모(體貌)를 얻었다. 태종(太宗) 때부터 세종(世宗) 때까지 임금의 보살핌과 신임이 매우 중하여 대소사(大小事)를 막론하고 궁중 안의 비밀스러운 일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공을 불러 자문을 구하였는데, 공은 한마디 말로 결정을 하고서도 물러나온 뒤에는 임금과 의논한 일에 대해 남들에게 언급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므로 그 일은 끝까지 소문이 나지 않았다.
세종은 매양 “공은 식견과 기국(器局)이 크고 깊어서 중대한 일을 곧잘 결단한다.”고 칭찬하면서, 심지어 구시(龜蓍, 점치는 데 쓰는 거북의 껍질과 시초(蓍草)를 말함)와 권형(權衡, 저울대와 저울추를 말함)에 견주기까지 하였다. 당시에 간혹 구제(舊制)를 변경하려고 헌의(獻議)하는 자가 있으면 공은 반드시 말하기를, “신은 변통하는 재주가 모자라서 구제를 고치는 일에 대해서는 감히 가볍게 논의하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지론(持論)이 평서(平恕, 공평하고 너그러움)하였으되 중대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면전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어 그 뜻을 굽히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꿋꿋하였으므로, 의견이 다른 자들이 부끄럽게 여기고 굴복하였고 사람들이 모두 공에게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다.
나이가 아흔이 되어서도 총명함이 조금도 시들지 않아 조정의 전장(典章)과 경사자서(經史子書)를 마치 촛불로 비추며 수를 셈하듯이 환하게 알았으므로, 비록 나이가 한창 젊어 기억을 잘하는 자일지라도 공에게는 감히 따르지 못하였다. 논자(論者)들이 아조(我朝)의 어진 재상을 일컬을 때에는 반드시 공을 첫째로 꼽으며 공의 훈업(勳業)과 덕망(德望)을 송(宋)나라의 왕 문정(王文正, 왕단(王旦)을 말함)과 한 충헌(韓忠獻, 한기(韓琦)를 말함)에 견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공이 병이 났을 때 임금이 내의(內醫)에게 명하여 치료하게 하고 어주(御廚)의 반찬을 나누어 공에게 잇달아 보내주었으며, 부음(訃音)을 듣게 되어서는 몹시 애도하여 조회 보는 일을 중지하고 사자(使者)를 보내 조제(弔祭)하고 부의(賻儀)를 규정보다 후하게 내려주었다. 위로는 조정의 벼슬아치로부터 아래로 어린애와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놀라고 슬퍼하며 서로 위문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탄식하는 소리가 길을 가득 메웠으며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공은 옛날의 유애(遺愛)가 있는 사람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과 영예에 흠결(欠缺)이 없다고 할 만하다.
아! 공은 국사(國事)를 담당한 기간이 가장 오래되어 그 사업(事業)의 융성함이 국사(國史)에 모두 실려 있으므로 개괄하여 말할 수가 없는데, 공의 고자(孤子)인 중추공(中樞公, 황치신(黃致身)을 말함)과 판서공(判書公, 황수신(黃守身)을 말함)이 장차 그 사실을 영원토록 후세에 보여주려고 생각하여, 나 신숙주(申叔舟)에게 지문(誌文)을 쓰게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황씨(黃氏)의 소(昭, 여기서는 황희의 증조부를 가리킴)는 황석부(黃石富)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목(穆, 여기서는 황희의 할아버지를 가리킴)은 황균비(黃均庇)로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추증되었으며, 고려의 평장사(平章事)인 최홍윤(崔洪允)의 외손자이다. 이들은 모두 글을 읽었으나 그 재능을 펴보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니, 그 후손을 기다렸나보다. 참찬(參贊, 황균비를 말함)이 자헌 대부(資憲大夫) 판강릉 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 증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황군서(黃君瑞)를 낳았는데, 그는 몸가짐이 근면 성실하고 전고(典故)를 잘 알았으며 사리(事理)에 명달(明達)하여 한 시대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그가 감문위 호군(監門衛護軍)을 지낸 용궁(龍宮) 김우(金祐)의 딸에게 장가들어 지정(至正) 23년인 계묘년(癸卯年, 1363년 공민왕 12년) 2월 10일 사시(巳時)에 송경(松京, 개성(開城)을 말함)의 가조리(可助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선취(先娶)는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최안(崔安)의 딸인데, 1녀를 낳아 교동현사(喬桐縣事) 서달(徐達)에게 시집갔다. 계취(繼娶)가 양씨(楊氏) 부인으로, 공보다 4년 앞서 별세하였는데 공조 전서(工曹典書) 양진(楊震)의 딸이며 고려의 승상(丞相) 양기(楊起)의 손녀이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인 황치신(黃致身)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이고, 차남인 황보신(黃保身)은 호용위 호군(虎勇衛護軍)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이고, 그 다음 황수신(黃守身)은 병조 참판(兵曹參判)이다. 참판과 중추는 모두 훌륭한 인망이 있어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을 받는다. 1녀는 강화 도호부사(江華都護府使) 기찬(奇贊)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손녀는 모두 69인인데, 벼슬하는 자들이 집안에 가득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찬탄하고 부러워한다. 선행을 쌓으면 경사가 넘친다는 옛말을 여기에서 증험할 수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강하(江河)와 산악(山嶽)이 정기(精氣)를 모아서 한곳에 납작하게 터를 잡으니, 공이 이곳에 태어나 그 큰 덕을 온축(蘊蓄)하였네. 온화하면서도 줏대가 있었고 청백하면서도 과격하지 않아서, 영특함을 아름답게 드날리어 가는 곳마다 공적이 드러났네. 가부(可否)를 판단할 땐 여울물이 골짜기로 내닫는 듯하였고, 오래 국정을 담당하여 빛나는 훈업을 남기었네. 한결같은 정성으로 집과 나라를 다스려서, 태평한 세상을 만들고도 성색(聲色)에 움직이지 않았네. 한기(韓琦)와 왕단(王旦)만이 공의 짝이 될 만하니 유당(幽堂)에 명을 묻어 후세에 길이 보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