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를 먹던 가족(황금알 시인선 234)
김승강 시집저자김승강출판황금알 | 2021.10.23.페이지수144 | 사이즈 128*211mm판매가서적 10,000원
책소개
김승강의 시는 현실을 더욱더 현실답게 묘사함으로써 극사실주의를 관통하여 환상성을 가진다. 시적 묘사는 마치 천연스럽고 일상적이고 평이한 드라마이다. 이러한 평이함을 전개하면서도 극사실까지 뛰어넘어 환상성을 환기하는 건, 머리칼에 구멍을 만들 듯이 예리한 섬세함과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묘사의 매력이다. 김승강은 시인의 말에서도 진술했지만, 타자로 밥을 먹는 현실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면 먼 여행을 가듯이, 이 시집은 타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대상에 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바라보면서 극사실로 밀고 나가는 시편들이다. 그 감정의 부스러기를 덜어낸 밀도는 과히 환성성을 불러온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저자
김승강
저자 : 김승강
김승강 시인은 1959년 경남 마산 합포구 구산면 난포리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2003년 『문학·판』으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흑백다방』 『기타 치는 노인처럼』 『어깨 위의 슬픔』 『봄날의 라디오』 등이 있다.
책 속으로
1부
육중한 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모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먼저 도착한 이들이었다
내가 들어오고
뒤이어 누군가가 들어왔는데
먼저 도착한 이들과 함께 나도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열두 번째로 도착한 것이었다
이제 두 명만 더 오면 된다고 했다
우리를 양편으로 갈라놓은
긴 식탁 위로 음식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열세 번째로 도착한 이가 들어오고
바로 열네 번째로 도착한 이가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음식이 다 놓이고
문이 덜컹하고 육중하게 닫혔다
방은 관처럼 길었고
창은 감옥처럼 높았다
우리는 우선 차려진 음식부터 먹기로 했다
장미의 기억
그녀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그를 향해 걸어갔다
우리는 서로를 지나쳤다
그녀를 지나쳐 몇 걸음 뒤 나는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나를 지나쳐 몇 걸음 뒤 그녀가 나를 뒤돌아보았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 흔들렸다
장미 한 송이 길 위로 툭 떨어졌다
통영
두 번째 날이 저물자
나는 다시 술집을 찾아 나섰다
시장통을 기웃거리는데 한 선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선술집 출입문 유리창에는
빨간 페인트 글씨로
안주일절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 문구가 정겨워
격자창 미닫이문을 밀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 문을 들어서자
네댓 명이서 술을 마시고 있던 일행이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일행은 손님들 중에서도
유별나게 눈에 띄었는데
모두 후줄근한 양복에
잠자리 안경을 쓰고 있었다
놀랍게도 다 아는 사람들이었고
모두 죽은 사람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는 체를 하려는 순간
그들은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선술집 창가 한쪽 구석에서
출입문을 등지고 앉아
혼자 술과 밥을 먹었다
출입문 유리창의 안주일절이라는 문구가
등으로 박혀 들어와 술잔에 어른거렸다
든든한 부부
비밀은 공유가 가능한가
둘 사이에 비밀이 없을 때
둘이 공유하는 비밀은 비밀인가 아닌가
이를테면,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한쪽이 사람들 몰래
눈을 찡긋한다
다른 한쪽은 든든하다
공유하는 비밀은 아랫도리를 젖게 한다
공공연한 비밀은 비밀인가 아닌가
공공연한 비밀 말고
진짜 비밀을 보장한다며
다른 집과 어울리지 못하는 집이 한 채
길가에 서서 외치고 있다
한 부부가
길가의 집을 지나쳐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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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김승강의 시는 현실을 더욱더 현실답게 묘사함으로써 극사실주의를 관통하여 환상성을 가진다. 시적 묘사는 마치 천연스럽고 일상적이고 평이한 드라마이다. 이러한 평이함을 전개하면서도 극사실까지 뛰어넘어 환상성을 환기하는 건, 머리칼에 구멍을 만들 듯이 예리한 섬세함과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묘사의 매력이다. 다음의 「회를 먹던 가족」을 읽어 보면,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연상하면서도 크로데스크하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성경책을 든 사람들이 폭풍의 언덕 위에 서 있는 교회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섬 북쪽 벼랑 끝 예식장에서는 예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방파제 옆 횟집으로 회 먹으러 갔다 회는 추운 겨울이 제맛이지 펄떡펄떡 뛰는 횟감을 고르고 우리는 회가 준비될 때까지 먼저 나온 당근과 오이를 씹어먹었다 아이들은 과자를 손에 쥐여주고 선창가에서 뛰어놀게 했다 회가 얌전하게 접시에 받쳐져 나오고 우리는 일제히 덤벼들어 회를 먹었다 회에는 소주가 제격이지 매제가 초장 묻은 입술로 말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여자들은 사이다를 주문했다 매운탕이 나오고 밥이 나올 즈음 교회에 갔던 형님과 형수님이 뒤늦게 합류했다 형님과 형수님은 성경책을 내려놓고 그들 몫으로 덜어놓은 회부터 허겁지겁 먹었다 저녁 무렵 폭풍의 언덕 위 교회를 향해 아내가 혼자 길을 떠났다 벼랑 끝 예식장 위로는 아버지가 비닐봉지처럼 날아올랐다 방파제 끝에서 놀던 아이들은 까마귀들에게 새우깡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회를 먹던 가족」 전문
위의 시에서 “성경책을 든 사람들이 폭풍의 언덕 위에 서 있는 교회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와 “저녁 무렵 폭풍의 언덕 위 교회를 향해 아내가 혼자 길을 떠”나는 풍경은 절망적인 공간을 함께 공유한다. 성경책을 들고 교회로 가는 이들은 일주일치의 죄를 사하러 가지만, 아슬아슬한 위험이 도사린 폭풍의 언덕에 있는 교회라는 건, 구원조차도 기약할 수 없는 리스크를 은연중에 담보한다. 시의 말미에 길을 떠나는 아내마저 절망적인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이별의 쓸쓸함을 배가한다. 시의 구조상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절망이라는 공간과 쓸쓸한 풍경을 연대함으로써, 이 시는 비애의 애달픔 그 너머를 넘어서는 절대적이고 운명적인 허무와 만나고 있다.
그러나 섬 북쪽 벼랑 끝 예식장에서는 누군가가 결혼식을 거행한다. 절망의 공간 언저리에서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예식장이 있다는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폭풍의 언덕이 있는 아슬아슬한 공간에서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알리는 예식은 생명의 탄생을 암시한다. 생명 탄생뿐만 아니라 생명 활동의 진술도 잇따른다. “우리 가족은 방파제 옆 횟집으로 회 먹으러 갔다 회는 추운 겨울이 제맛이지 펄떡펄떡 뛰는 횟감을 고르”는 행위는 생명과 죽음이 교차한다. 펄펄 살아서 뛰는 횟감은 어육의 근육은 살았지만,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횟감 그것을 “우리는 일제히 덤벼들어 회를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약간 우스꽝스럽지만, 이것이 삶이다. 타자의 죽음으로 인간...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