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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 1962)
질 들뢰즈, 이경신, 민음사, 2001, P. 356.
제1장 참담 15-84 (Le tragique, 참담, 비참, 1)
제2장 적극적인 것과 반응적인 것 85-138 (Actif et réactif 44)
제3장 비판 139-200 La critique
제4장 원한에서 가책까지 201-257 Du ressentiment à la mauvaise conscience
제5장 초인: 변증법에 반대해서 259-337 Le surhomme: contre la dialectique
[제6장]결론
* 초인을 다음인간 또는 윤구병 표현을 빌려서 아제인간으로 대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초인은 공시태에서 공간상 상층으로만 여겨지는데, 아제인간은 통시태에서 시간상 다음 또는 아제(내일 또는 미래)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니체의 아제인간은 벩송의 신비가와 닮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철학자가 마치 불교처럼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이 목표이듯이, 인간의 욕망은 모든 인민들이 심층에서 솟아나는 충력(권능 의지)로 신들(les dieux)이 되는 것이다. 욕망의 실현은 자유, 자주, 주체이다. (52QKF)
원한과 가책은 위상적이고 유형적으로 다루면서, 철학적 주제들을 다루는 방식이 그러하듯이 공시적 관점으로 전개한다. 그런데 이 5장은 “변증법에 반대하여”는 다르다. 여기서는 동태적이고 통시태적으로 다루면서 과정과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 이리하여 헤겔은 역사를 변증법적이라고 하였지만 공시적 관점에서 찾을 수 있는 추론의 과정을 통시태로 옮겨 놓은 것 같다. 그런데 니체는 (생성)과정을 다루면서 통시적으로 의식의 흐름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논리적 추론의로서 종합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고 과정의 작동들이 필요하여 필연적으로 또는 우발적으로 거쳐야할 것은 거쳐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변증법적이 아니라, 니체에게서는 드라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에서 또는 권능에서 시작하여 지성인간(속좁은 이성) - 어제인간 - 이제인간 – 아제인간으로 가는 과정을 사유한 것으로 보인다. (52QKJ)
** 디오니소스가 내재성의 근원이라면, 짜라투스트라는 내재성이 발현하기 시작하는 속성의 계보 또는 계열과 같다. 그러면 양태는 다음인간(초인)이며 어린이이다. 차이의 생성은 디오니소스 안에서 일어나며, 계보 또는 계열의 생성은 이중 부정(차라리 긍정의 긍정)에 속한다. 이런 놀이(게임)을 하는 것이 짜라투스트라의 춤, 웃음, 놀이이다. 모든 인민의 삶이 놀이로서 긍정으로 발현되는 세상은 주사위가 공중에 떠있는 세상이다. 열린 세상이며, 시간에서 문이 활짝 열려 있다. (52QMA)
* 고통(douleur), 번민(souffrance, 괴롬), 고뇌détresse, 비탄), 불안(angoissse) 등을 일반적으로 성질상 분류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작가들이 선호하는 개념으로 읽어야 할까? (52Q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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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초인: 변증법에 반대해서 259-337 (Le surhomme: contre la dialectique 169)
§5.1. 허무주의 259 (Le nihilisme 169)
- “허무”가 의미하는 바 (Ce que signifie “nihil”)
[왜 존재로 시작하지 않는가? 존재는 허구이다. 그렇다면 실재성은 무인 셈이다. 무를 실재성이라고 간주하는 생각은 어디에서 유래할까? 인도와 불교에서 공(空)일까? 니체가 한때 쇼펜하우어에 경도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까? (52PKC)]
§5.1.1 “허무”가 의미하는 바 (Ce que signifie “nihil”)
허무주의(nihilisme)이란 단어에서 허무(nihil)는 비존재(le non-êtr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무가치(une valeur de néant)를 의미한다. 삶은 사람들이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비하하는(déprécier) 한에서 무가치해진다. 비하(la dépréciation)는 항상 허구(une fiction)를 가정한다. 바로 허구에 의해서 사람들은 왜곡하고 비하하며, 허구에 의해 사람들은 어떤 것을 삶에 대립시킨다. (169, 259)
삶을 부정하고 무화시키려는 의지와 연관 있는 것은 우월한 가치들이다. “의지의 무(Néant de volonté)라는 쇼펜하우어의 개념은 단지 하나의 징후(un symptôme)일 뿐이다. 그것은 바로 무화의 의지(volonté d’anéantisseement), 무의 의지(volonté de néant)를 의미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항상 하나의 의지인 채로 남아있다.” 허무주의 속에서 허무는 부정화(la négation)를 의미하는데 마치 권능의 의지의 성질처럼 의미한다. 그러므로 허무주의는 그 첫째 의미와 그 토대위에서 포착된 무가치, .. 허구, .. 무의 의지를 의미한다. (169-170, 260) [부정화(la négation)는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았지만 폭발할 수 있는 권능이다.] 허무주의는 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둘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더 이상 의지가 아니라, 반작용(une réaction)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초감각적인 세계에 대해 반대해서 반응하고, 우월한 가치들에 반대하여 반응하고, 그것들의 현존을 부정하고, 그것들에게서 모든 타당성을 부인한다. (170, 260) [신체가 갖는 반응적인 것(réactif)을 포함한다.]
“사람들이 사물의 참된 본질로서 제공했던 구별되는 기호들은 비존재와 무라는 독특한 기호들이다.” 그래서 허무주의는 신, 선, 진리조차 부정하고, 모든 형태의 초감각적인 것을 부정한다. 그 무엇도 진리가 아니며, 선도 부정한다. 신은 죽었다. 의지의 무는 더 이상 무의 의지를 위한 징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결국엔 모든 의지의 부정, 삶의 권태(taedium vītae, 싫증)이다. 더 이상 인간의 의지도, 대지의 의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눈이 싸여 잇는 모든 곳, 삶은 여기서 말 못하는 벙어리이다. 사람들은 최후의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울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 까마귀들은 도대체 모슨 소용이 있겠는가? 헛되도다(en vain)! 아무것도 없다(nada), 아무것도 더 이상 여기서 돋아나지도 자라지도 않는다.” (170, 260-261)
허무주의 첫째 의미는 그것의 원리를 마치 권능의 의지처럼 ‘부정하다(nier)’의 의지 속에서 발견한다. “약함의 비관주의”라는 둘째 의미는 그것을 원리를 완전히 혼자이고 완전히 박탈된 반응적 삶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환원된 반응적 힘들 속에서 찾는다. 첫째 의미는 부정적 허무주의이고 둘째 의미는 반응적 허무주의이다. (170, 260) [전자는 쇼펜하우어에서 후자는 니체에서]
§5.2. 연민의 분석 262 (Analyse de la pitié, 171)
- 세 허무주의: 부정적, 반응적, 수동적. (Les trois nihilisme: négatif, réactif et passif) / 신은 연민으로 죽었다.(Dieu est mort de pitié.) / 인간들 중에 마지막 인간(Le dernier des hommes.)
§5.2.1. 세 허무주의: 부정적, 반응적, 수동적. 262 (Les trois nihilisme: négatif, réactif et passif 171)
무의 의지와 반응적 힘들의 근본적인 결탁(la complicité)은 다음에 있다: 무의 의지 아래서 보편적 삶이 비현실적이 될 때 개별적 삶은 반응적이 된다. (171, 262)
“반응적 허무주의”는 어떤 식으로 “부정적 허무주의”를 연장한다(prolonger). 승리하는 반응적 힘들은 그들을 승리로 이끄는 그 부정하는 권능을 대신한다. 그러나 “수동적 허무주의”는 반응적 허무주의의 극단에 도달이다. 즉 밖에서 이끌어지기보다 오히려 수동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171, 262-263)
이름이다
§5.2.2. 신은 연민으로 죽었다. 263 (Dieu est mort de pitié. 171)
그 역사는 또 다른 식으로 언급된다. 신은 죽었다. 하지만 그는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 그는 연민으로 죽었다고 니체는 말한다. 때로는 그 죽음이 우발적인 것(accidentelle) 처럼 소개되었다. 늙고, 피곤하여, 원하기에 지쳐, 신은 “어느 날 자신의 너무 지나치게 큰 연민으로 질식하여 끝난다.” 때로는 그 죽음이 범죄적 행위의 결과이다. “.. 그는 모든 것을 살펴보았고, 인간까지 살펴보았던 신, 그 신은 죽어야만 했다. 인간은 그런 증인이 살아있는 것을 참지 못한다.” (171-172, 263).
연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0(zéro)에 근접하는 삶의 상태들을 위한 관용이다. 연민은 삶에 대한 사랑이지만, 약하고 병들고, 반응적인 삶에 대한 사랑이다. .. 누가 연민을 겪는가(éprouver)? 소위 반응적 삶만을 감내하는 자, 그 삶과 그것의 승리를 필요로 하는 자.... 니체의 상징주의에서 연민은 항상 무의 의지와 반응적 힘들의 복합체, 전자와 후자들의 유사성(cette affinité), 후자들을 위한 전자의 관용을 지칭한다. (172, 263-264)
§5.2.3. 인간들 중에 마지막 인간 264 (Le dernier des hommes. 172)
신은 연민으로 질식되었다. 마치 반응적 삶이 그의 목 안으로 들어가기라고 한 것처럼, 모든 일이 벌어진다. 반응적 인간은 신을 죽음으로 내몬다. (172, 264)
원한은 무신론적이 되지만, 그 무신론은 또한 원한이고, 항상 원한이며, 항상 가책이다. 신의 살해자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흉악한 자”, “고통스런 소리를 내며 감춘 수치심으로 가득한” 반응적 인간이다. (173, 264)
신의 죽음의 결말들을 알리는 자는 점장이(le devin)이며, “크게 지친 점장이”이다. .. “모든 것은 공허하고 모든 것은 똑 같으며, 모든 것은 만기가 되었다!‥… 우리에게 있어 모든 샘은 말라붙었고, ... 진실로 우리는 이미 너무 지쳐있어서 죽을 수 도 없다.” 죽기에도 너무 지쳐있다.” 마지막 인간(Le dernier des hommes. 최후의 인간)이라는 신의 살해자의 자손이 여기 있다. (173, 265)
그렇게 언급된 이야기는 우리를 똑 같은 결론으로 데려간다. 즉 부정적 허무주의는 반응적 허무주의에 의해 대체되고, 반응적 허무주의는 수동적 허무주의에 대체된다. 신에서부터 신의 살해까지, 신의 살해자에서 마지막 인간[이제인간]까지. 그러나 그 도달점은 점장이의 지식이다. (173, 266) [아제 인간이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하이데거는 니체에 주석을 달면서 다음을 주목한다. “만약 신이 초감각적 세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떠났다면, 비어있을지라도 그 자리는 남는다. 초감각적 세계의, 또 이상적 세계의 빈 곳은 유지될 수 있다. 비어있는 자리는, 말하자면 다시 점유되길, 다른 것에 의해서 신을 대체하길 호소하기까지 한다.” (173, 266)
부정적이고 반응적이고 수동적인 허무주의. 그것은 니체에게 있어서, 유대교, 크리스트교, 종교개혁, 자유사상,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 푯말이 세워진 하나이자 동일한 역사이다. 마지막인간[이제인가]에 이르기 까지. (174, 267)
§5.3. 신은 죽었다. 267 (Dieu est mort, 175)
- 비극적[과정의] 명제(La proposition dramatique.) / “신은 죽었다”가 지닌 의미의 다수성(Pluralité de sens de “Dieu est mort”.) / 유대교의 의식, 기독교의 의식(성 바울), 유럽 의식, 불교적 의식(La conscience judaïque, la conscience chrétienne(saint Paul), la coscience européenne, la conscience buddhique.) / 크리스트와 부처(Le Christ et Bouddha.)
§5.3.1. 드라마적 명제 267 (La proposition dramatique. 175)
사변적 명제들은 신의 형식의 관점에서 신의 관념을 이용한다. 신의 관념이 모순을 함축하거나 또는 함축하지 않거나 하는 만큼이나 신은 현존하거나 또는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라는 정식은 전혀 다른 본성[자연](une tout autre nature)에 속한다. (175, 267)
“신은 죽었다”라는 정식은 사변적 명제가 아니라, 드라마적 명제(une proposition dramatique), 특별나게 드라마적 명제이다. 사람들은 신속에 죽음을 놓지 않고서는 신을 가지고 종합적 인식의 대상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5.3.2. “신은 죽었다”가 지닌 의미의 다수성 (Pluralité de sens de “Dieu est mort”. 175)
“신들이 죽을 때, 그들은 항상 죽음의 여러 종류(방식)으로 죽는다.” (175, 268)
§5.3.3. 유대교의 의식, 기독교의 의식(성 바울), 유럽의 의식, 불교적 의식 268 (La conscience judaïque, la conscience chrétienne(saint Paul), la coscience européenne, la conscience buddhique. 175)
1) 부정적 허무주의 관점에서: 유대교적이고 크리스교적인 의식의 계기: 신의 관념은 무의 의지, 삶의 비하를 표현한다. “사람들이 삶 속이 아니라, 내세에, 무 속에 삶의 중력을 놓을 때, 그들은 삶에서 그 중력을 중심을 빼앗는다.” (175, 268)
유대의 신은 자신의 아들을 그 자신과 유태 민족(le peuple juif)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서 죽음에 처한다. 신의 죽음의 첫째 의미는 그와 같다. 사튀르누스조차 동기에 있어서 그런 세심함을 갖지 못한다. (175-176, 268)
유대교의 의식은 신을 유대인의 전제들 자체와는 별개인 그의 아들 속에서 신을 표현한다. 그것은 신을 죽음에 처하게 할 때 그의 신을 정말로 전세계적(cosmopolite)이고 “모든 사람을 위한(pour tous)” 보편적 신으로 만드는 수단을 발견했다. (176, 269)
그러므로 크리스트교의 신은 유태인의 신이지만 전세계적이 되며, 그의 전제들로부터 분리된 결론이 되었다. (176, 269)
그는 고아(orphelin)로 태어나서 자신의 모습대로 아버지를 만들어 낸다. 사랑의 신, 그러나 그 사랑은 여전히 반응적 삶의 사랑이다. 바로 여기에 신의 죽음의 둘째 의미가 있다. 즉 성부(le Père)는 죽고, 성자(le Fils)들은 우리에게 다시 신을 만들어 준다. .. 우리를 공포스럽게 만들었던 아버지 대신에 우리는 약간의 신뢰, 약간의 믿음을 요구하는 아들을 갖는다. (176, 269)
신의 죽음의 셋째 의미: 성 바울(saint Paul)은 그 죽음을 독점하고, 크리스트교를 구성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어떤 해석을 제공한다. (176, 270)
채권자는 자기 자신의 아들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아들로 빚을 갚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채무자가 엄청난 빚을 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자기 아들을 독립시키기 위해서 그 아들을 죽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우리 때문에 그를 죽인다.
십자가 못 박힌 신은 부활한다. 성 바울의 또 다른 날조(falsification)는 다음과 같다: 크리스트의 부활, 우리를 위한 사후의 생명, 사랑과 반응적 삶의 통일. 아들을 죽이는 것은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고, 아버지를 죽이는 것도 더 이상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 속에서 죽고,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우리 때문에 아버지 속에서 부활한다. “결국 성 바울은 구원자의 삶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고,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음과 또 다른 어떤 것이 필요했다‥…”: 부활(résurrection). - 크리스트교의 의식 속에서 사람들은 원한을 숨길 뿐만 아니라, 그것의 방향을 바꾼다. 유대교의 의식은 원한[회한(悔恨)]의 의식이었고, 크리스트교의 의식은 가책이다. (177, 271).
2) 반응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유럽적 의식의 계기.
- 지금까지 신의 죽음은 신의 관념 속에서 무의 의지와 반응적 삶의 종합을 의미한다. (177, 271)
신의 의지 대신에 반응적 삶, 신 대신에 반응적 인간, 즉 더 이상 인간인 신(le Dieu-Homme)이 아니라, 신인 인간(l’Homme-Dieu), 유럽 인(l’ Homme européen)이다. .. 그 반응적 삶은 신을 더 이상 참아낼 수가 없다. 그것은 신의 연민을 견딜 수가 없다. 그것은 그의 희생이라는 말로 그[신]를 받아들이며, 그의 긍휼(sa miséricorde)이란 함정에서 그를 질식시킨다. 그것은 그가 부활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 뚜껑에 주저앉는다. 더 이상 신의 의지와 반응적 삶 사이의 상관관계는 없지만, 반응적 인간에 의한 신의 이동, 대체가 있다. 여기에 신의 죽음의 넷째 의미가 있다. (178, 271-272)
§5.3.4. 크리스트와 붓다 274 (Le Christ et Bouddha. 178)
3) 수동적 허무주의의 관점: 불교적 의식의 계기.
만약 사람들이 복음과 더불어 시작하고 성 바울과 더불어 결정적인 형태를 발견하는 날조(falsification, 가식)을 참작한다면, 크리스트에 관해서 무엇이 남는가? 그것의 인격적 유형(son type personne)은 무엇인가? 그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니체가 성성의 “벌어져 있는 모순(la contradiction béante)”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를 인도해야만 한다. 텍스트를 우리에게 진정한 크리스트에 대해 짐작해 보도록 하는 것은 바로 그가 가져온 즐거운 소식, 원죄 관념의 제거(la suppression), 모든 원한[회한]과 복수심의 부재(l’absence), 귀결로서조차 모든 전쟁의 거부(le refus), 사랑의 심장으로 이 아래 세상에서 신의 왕국의 계시(la révélation), 그리고 특히 그의 이론의 증거로서 죽음의 수용(l’acceptation)이다. (178, 272)
크리스트는 성 바울이 만들고자 하는 것의 반대였으며, 진정한 크리스트는 일종의 붓타(Bouddha)였다. “거의 힌두교가 아닌(peu indou) 지역의 붓다”였다. .. 예수(Jésus)는 가책과 원한을 넘어서서 반응적 인간에 교훈을 주었다. 그는 인간에게 죽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가장 흥미롭고, 타락자들(des décadents) 중의 가장 유순한 타락자였다. 크리스트(le Christ)는 유대인도 크리스트교인도 아니었고 오히려 불교도였다. 교황보다 달라이-라마에 더 가깝다. (179, 273)
“성 바울에 의해 이교도적 불가사의한 학설[교리]로 뒤틀리고 변형되었고, 이 교리는 마침내 정치적 조직과 타협한다.‥…그리고 전쟁하는 법, 사형에 처하는 범, 고문 하는 법, 심판하는 범, 증오하는(haïr) 법을 배운다.”: 아주 부드러운 이 크리스트의 수단이 된 증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불교와 성 바울의 공식적인 크리스트교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종교이다. “불교는 끝을 위한 종교이며 문화의 무기력이다. 크리스트교는 그 문화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만약 필요하다면 그것을 창조해 낸다.” (179 273-274)
불교가 실현된 종말(fin)처럼 또는 도달된 완성처럼 살아가기에(à vivire) 도달되었던 것, 그것을 크리스트교에서는 단지 동기(moteur)처럼 산다. 불교가 그 종말을 [현실에서] 재결합할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런데] 크리스트교가 실천에 바울주의의 신화학을 쓸어내어서 “실천”에 도달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고. 또한 크리스트교는 크리스트의 참된 실천도 배제하지 않는다. “불교는 침묵한 채 전 유럽에서 앞서간다.” 그러나 [크리스트교는] 거기로부터 그곳에 도달하기 위하여 증오와 전쟁[을 배제하지 않았다]. 크리스트는 개인적으로 궁극적인 종말에 자리 잡았고, 그는 불교적이 아니었던 장소에서, 붓타의 새로서 한 번의 날개 짓으로 그것에 도달했었다. (179, 274)
[우리가 넷째를 하나 더 첨가해 보자. 평등을 통한 평화의 세계 건설로서 중관사상의 불교를 수용해보자. 권능의 솟아남에서 현실에서 실현을 위한 창발을 이룰 것이다.]
[4) 능동적 자연주의[권능적 실현주의]: 주사위 놀이
[능동적 자연주의는 허무주의와 연관이 없다. 마치 용수의 공(空)이 라틴어 니힐(nihil)이나 무(néant)와 연관이 없듯이 말이다.]]
[먼지도 부처다. 대양의 도장이 찍히는 것도 부처다. 숙명이 그렇게 이루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쪽이 퀴니코스를 거친 스토아 사상이 아니겠는가? 용수를 거친 대승불교와 달라이 라마에 이르기 까지 – 달라이-라마는 용수 사상을 구현하는 자이지 유식을 퍼트리는 자가 아니라고 한다.]
[어제, 이제, 아제라는 시간의 지속에서 이제에서 현재는 아제라는 미래를 열었다. 어디로 가는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민들은 자신의 숙명을 자연스럽게 실행하여 미래로 나가간다. 종말의 미래를 그릴 수(서술)할 수 없지만, 전미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듯이, 우리의 목표를 설정하며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평화통일 영세중립 코리라”를 외면서 말이다. (52QLG)]]]
§5.4 헤겔주의에 반대해서 274 (Contre le hégélianisme 180)
- 변증법 속에서 보편자와 개별자(L’universel et le particulier dans la dialectique.) / 대립의 추상적 특징(Caractère abstrait des oppositions.) / 변증법에 반대하는 “누가?”라는 의문(La question Qui? contre la dialectique.) / 변증법 속에서 허구, 허무주의, 반작용(Fiction, nihilisme et réaction dans la dialectique.)
§5.4.1. 변증법 속에서 보편자와 개별자 274 (L’universel et le particulier dans la dialectique. 180)
사람들은 이런[니체의] 역사철학과 종교철학 속에서 헤겔(Hegel, 1770-1831)적인 개념화작업의 재개(une reprise) 또는 희화화(une caricature)조차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 연관은 더 깊고, 그 차이는 더 보다 근본적이다. (180, 274)
니체는 소란스런 위대한 사건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한 사건이 마침내 그것에 본질을 제공하는 힘들을 발견하기 위해서 많은 침묵과 시간이 필요하다. - 틀림없이 헤겔에게서 조차, 한 사건이 그것의 참된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 니체가 말하는 시간은 신의 죽음에 그것이 본래적으로(또는 즉자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게 외재성의 눈부신 선물로서 한정된 본질을 가져다주는 힘들의 형성에 필수적이다. 헤겔에게서 의미의 다양성, 본질의 선택, 시간의 필수성은 그만큼 외관들(des apparences)이고, 외관들일 뿐이다. (180, 275)
§5.4.2. 대립들의 추상적 특징 275 (Caractère abstrait des oppositions. 181)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변함없는 것과 특수한 것,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이 모든 것은 무엇인가? ... [이 대구들 중에서] 하나는 주체[주어]인데, 무엇이 그 주체인가? 어떤 힘들인가? 다른 하나는 술어 또는 대상인데, 그것은 어떤 의지의 대상인가? (181, 275-276)
가책의 모든 이론은 헤겔의 불행한 의식에 대한 재해석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외관상 찢어져 있는 그 의식은 허울 좋은 대립 아래 숨어있는 힘들의 미분적 연관들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크리스트교와 유대교의 연관은 덮개로서 또 구실로서를 제외하고 대립을 존속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181, 276-277)
니체 저작은 세 가지 방식으로 변증법을 반대한다. 즉 [1]변증법은 구체적으로 현상들을 소유하는 힘들의 본성에 무지하기 때문에 의미를 알지 못한다. 또 [2]그것은 힘들, 그것들의 성질들, 그것들의 관계들이 파생하는 현실적인 요소에 무지하기 때문에 본질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3]그것은 추상적으로 비현실적인 항들 사이에서 교대(des permutations, 치환)를 행하는데 만족하기 때문에 변화와 변형을 알지 못한다. (277)
§5.4.3. 변증법에 반대하는 “누가?”라는 의문 277 (La question Qui? contre la dialectique. 182)
이 모든 불충분성[위의 3가지]은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잇다. 즉 “누가?”라는 의문에 대한 무지하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소피스트들의 기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동일한 경멸이 담겨 있다. (182, 277) [기원이 고대 그리스 초기에 아르케(원질)일 것이다. 그런데 이 아르케를 기원 또는 원인으로 바꾸어 보면 “자연”의 내재성의 힘들 또는 권능을 보게 될 것이다. (52QLG)]
누가 인간이며 신은 무엇인가? 무엇이 특수하며 무엇인 보편적인 것인가? 포이어바흐(Feuerbach, 1804-1872)는 인간이 변해서 신(Dieu)이 되었고, 신이 변하여 인간의 본질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Homme)이란 자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신으로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노예이길 그만두지 않은 반응적 인간이고, 노예이며, 항상 노예이고 신적인 것(le divin)을 제작하는 기계(machine)이다. 신(Dieu)인 것은 더더욱 변하지 않았다. 항상 신이고 항상 우월한 존재이며, 노예를 제작하는 기계이다. 변화하는 것, 또 오히려 자신의 한정들을 변화하는 것, 그것은 매개적 개념(le concept intermédiaire)이며, 그것은 중간항들(les terme moyens)이다. 이 중간 항들은 또한 서로 서로 주어와 술어가 될 수 있고, [마치] 신 또는 인간처럼. (182, 278)
§5.4.4. 변증법 속에서 허구, 허무주의, 반작용 278 (Fiction, nihilisme et réaction dans la dialectique. 182)
신은 인간이 되고 인간은 신이 된다. 그러나 누가 인간인가? 그는 항상 반응적 존재, 표상하는 것, 약하고 비하된 삶의 주체이다. 신은 무엇인가? 항상 삶을 비하하는 수단으로서 우월한 존재, 무의 의지의 “대상”, 허무주의의 “술어”이다. 신의 죽음 이전이나 이후에도, 인간은 “그 인자(qui il est)”로 신은 “그것인 바(ce qu’il est)”로, 즉 반응적 힘들과 무의 의지였다. 변증법은 우리에게 인간과 신의 화해를 알린다. .. 변증법은 우리에게 인간에 의한 신의 대체를 알린다. (182-183, 278)
모든 변증법은 반응적 힘들의 관점이다. 반응적 힘들의 편에서 고려할 때, 미분적인 요소는 전복되고, 거꾸로 반사되어 대립되었다. 바로 그것이 하나의 전망인데, 이 전망은 허구를 실재적인 것에 대립시키고, 허구를 반응적 힘들이 승리하는 수단으로 발전하게 한다. 그 전망이 허무주의이고, 허무주의적 전망이다. 부정적인 것의 노동은 의지의 봉사에 속한다. 변증법의 본질을 예감하기 위해서는 “그 의지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으로 충분하다. .. 변증법은 허무주의적 전망과 반응적 힘들의 전망에서 사유이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변증법은 크리스트교의 근본적 사유이다: 즉 ‘생각하다’는 새로운 방식들을, ‘느끼다’는 새로운 방식들을 창조하기에 무능함이다. (183, 279) [천상으로 가는 변증법은 무능이다.]
§5.5 변증법의 화신들 279 (Les avatars de la dialectique, 183)
- 변증법의 역사 속에서 슈티르너의 중요성(Importance de Stirner dans l’histoire de la dialectique.) / 재점유의 문제(Problème de la réappropriation.) / 자아의 이론으로서 변증법(La dialectique comme théorie du Moi.)
§5.5.1 변증법의 역사 속에서 슈티르너의 중요성 279 (Importance de Stirner dans l’histoire de la dialectique. 183)
변증법의 역사 속에서 슈티르너(Stirner, 1806–1856)는 별도의 한 자리, 마지막 자리, 극단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변증법을 소피스트들의 기술과 화해시키려고 시도한 과감한 변증법주의자였다. 그는 “누가?”라는 의문의 길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헤겔, 바우어, 포이어바흐에 동시에 반대해서 그 의문을 본질적 의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의문: ‘인간은 무엇인가?’가 ‘인간은 누구인가?’가 된다. .. ‘무엇(qu’est ce que)’은 실현할 개념을 겨냥한다. ‘누구(qui)’로 시작할 때 그 의문은 [개념들 중의] 하나가 더 이상 아니다.”(183, 279-280)
“나는 신도 인간도 아니다. 나는 우월한 본질도 나의 본질도 아니다. 결국 내가 내 속에서 또는 내 밖에서 본질로 여기는 것은 바로 하나(tout un)이다.” “인간은 단지 다른 우월한 존재만을 표상하기 때문에, 우월한 존재는 결국 단순한 변신(une simple métamorphose)일 따름이다. 그리고 인간의 공포는 단지 신의 공포의 다른 측면일 따름이다.” 니체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흉악한 자가 신의 연민(la pitié)을 견디지 못해서 신을 죽였는데, 여전히 인간들의 연민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말할 것이다. (280)
§5.5.2 재점유의 문제 280 (Problème de la réappropriation. 184)
변증법의 사변적 동력(le moteur)은 모순과 그것의 해결이다. 그러나 그의 실천적 동력은 소외와 소외의 제거, 소외와 재점유(la réappropriation) 이다. 여기서 변증법은 자신의 참된 본성을 드러낸다. (184, 280)
바우어의 자기의식은 순수 혹은 절대적인 인간적 비판이 아닌가? 포이어바흐의 종적 인간은 종, 본질, 감각할 수 있는 존재인 한에서 인간이 아닌가? 나는 그 모든 것 중 아무 것도 아니다. 슈티르너는 관념, 의식, 또는 종이 전통적 신학만큼 소외들임을 보여주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상대적 재점유들은 여전히 절대적 소외들이다. 신학과 경쟁하는 인간학은 자아를 인간의 속성으로 만든다. 그러나 변증법은 자아가 마침내 주인이 되지 않는 한[재점유하지 않은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185, 281)
포이어바흐와 더불어 “재점유하다”의 의미는 변화한다. 타협이라기보다는 회수(la récupération), 선험적 속성들의 인간의 회수이다. “절대적이고 신적인 존재”로서 인간을 제외하고 보존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그 때 소외를 극복하는 것은 순수하고 냉혹한 무화, 그것이 다시 취한 어떤 것도 존속하도록 두지 않는 재탈취이다. “자아는 모든 것이 아니지만, 모든 것을 파괴한다.” (185, 281-282)
§5.5.3 자아의 이론으로서 변증법(La dialectique comme théorie du Moi.)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자아는 또한 아무것도 아닌 자아이다. “자기 스스로 분해되고, 결코 아무것도 아닌 자아만이 정말로 자아이다.” “나는 내 권력의 소유주이고 내가 나를 유일하다고 인식할 때 나는 유일하다. 유일자 속에서 소유자는 그가 빠져나온 창조자들 무로 되돌려 놓는다. .. 만약 내가 나의 원인을 유일자인 자아에 근거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삼키는 일시적이고 소멸될 수 있는 창조자에 근거하는 것이고, 나는 ‘내가 무에 내 원인의 근거를 두지 못 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슈티르너 저서의 관심사는 삼중적이다. 즉 그의 선배들의 저작 속에서 재점유의 불충분성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자아만이 재점유의 심급일 때 변증법과 자아론의 본질적 관계의 발견; 자아와 더불어 자아 속에서 변증법의 완성이었던 바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185-186, 282)
슈티르너는 허무주의를 변증법의 진리처럼 계시[폭로]하는 변증론자이다. 그에게 “누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유일한 자아는 무에게 그가 아닌 모든 것을 반환하고, 그 무는 소위 그 자신의 무, 자아의 무 자체이다. (186, 283)
그런데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avec Engels, 1845-1846 작성)에서 맑스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의미들 중의 한 의미를 발견한다: 즉 맑스에게서는 치명적인 미끄러짐을 정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슈티르너의 발견을, 즉 자아의 이론으로서 변증법을 받아들인다. 이 점에서는 그는 포이어바흐의 인간 종이 소외라는 점에서 슈티르너에게 일리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번에는 슈티르너의 자아가 추상이며, 부르주아 이기주의의 투영[반영]이다. 종은 무엇이며 누가 개인인가? 변증법은 균형점과 정지점을 발견했는가? 또는 허무주의의 도달에 앞서 최후의 화신인 사회주의자의 화신을 발견했는가? 진실로 변증법과 역사가 서로서로 끌어주는 공통된 경사면 위에서 그것들을 정지시키는 것은 힘들다. 맑스는 종말에 앞선 최종단계를, 즉 프롤레타리아의 단계를 표시하는 것 이와 다른 것을 하는가? (186, 283)
§5.6 니체와 변증법 284 (Nietzsche et la dialectique 187)
- 초인의 의미와 전환의 의미(Signification du surhomme et de la transmutation.)
§5.6.1. 초인의 위미와 전환의 의미 284 (Signification du surhomme et de la transmutation.187)
우리가 니체에게서 헤겔부터 슈티르너까지의 헤겔적 운동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가정해보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187, 284)
니체는 끊임없이 다음을 고발 한다: 독일 철학의 신학적이고 크리스트교적인 특징(“튀빙겐 세미나”) - 허무주의적 전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그 철학의 무능함(헤겔의 부정적 허무주의, 포이어바흐의 반응적 허무주의, 슈티르너의 극단적 허무주의) - 자아, 인간 또는 인간적인 것의 환상들(les phantasme) 이외에 그 어떤 것에도 도달할 수 없는 그 철학의 무능함(변증법에 반대하는 니체의 초인) - 소위 변증법적 변형들의 기만적(mystificateur) 특징(재점유에 반대하는 또 추상적 교대에 반대하는 가치 전환). (187, 284)
니체의 긍정적 임무는 이중적이다. 즉 초인[아제인간]과 가치전환. “누가 인간인가”가 아니라 “누가 인간을 극복 하는가”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이 어떻게 극복될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는 그렇게 묻는 최초이자 유일한 자이다. 초인이 내 마음과 상통한다. 바로 그가 내게 유일자(l’Unique)이다. ...” (187-188, 285)
초인은 감각하는 새로운 방식에 의해 정의된다. 인간과는 다른 주체이고 인간적인 유형과는 다른 유형이다. 초인은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이며, 신적인 것과는 다른 술어들이다. .. 초인은 평가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그것은 가치들의 변화도, 추상적인 교대도 변증법적 전복도 아니고, 가치들의 가치가 파생하는 요소 속에서의 변화와 전복, 즉 “가치전환”이다. (188, 285-286)
이 긍정적 임무라는 관점에서, 니체의 비판적 의도들은 그것들의 통일성을 발견한다. 헤겔주의자들에게 소중한 절차인 혼합물[변증법적 종합]은 헤겔주의자들 자신들에게 등을 돌린다. 니체는 하나의 동일한 논쟁 속에 크리스트교, 휴머니즘, 이기주의, 사회주의, 허무주의, 역사와 문화이론들, 변증법을 직접[친히] 아우른다. (188, 286)
“... 짜라투스트라는 그것의 많은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완벽하게 구별해 냈다. 비록 멀리서는 그것이 하나의 입에서 나온 비명과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우월한 인간의 통일성은 또 비판적 통일성이다. 변증법이 자신을 위해서 모아들인 조각들, 파편들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그 전체를 묶는 실, 허무주의와 반작용의 실로 통일성을 획득한다. (188-189, 286)
§5.7. 우월한 인간의 이론 287 (Théorie de l’homme supérieur 189)
- 우월한 인간의 여러 인물들(Les personnages multiples de l’homme supérieur.) / 우월한 인간의 양면성(Ambibalence de l’homme supérieur.)
§5.7.1. 우월한 인간의 여러 인물들(Les personnages multiples de l’homme supérieur.)
우월한 인간의 이론은 짜라투스트라의 제4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4부는 출판된 짜라투스트라의 본질적 부분이다. 우월한 인간을 구성하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즉 예언자, 두 명의 왕, 거머리를 가진 남자, 마술사, 마지막 교황, 인간들 중에 가장 흉악한 자, 자원 거지, 그림자이다.(189, 287) [여덟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Ein Buch für Alle und Keinen. 1883–1885)(Ainsi parlait Zarathustra) 넷째부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예언자 .. [2]마술사 .. [3]인간들 중에 가장 흉악한 자 .. [4]두 명의 왕 .. [5]거머리를 가진 남자... [6]마지막 교황 .. [7]자원 거지 ... [8]그림자. (189-191, 287-289)
두 명의 왕은 류적 활동의 간수들(gardiens 수위)이고 거머리를 가진 인간은 과학으로서 그 활동의 산물이고, 마지막 교황은 종교로서 그 활동의 산물이다. 자원 거지는 과학과 종교를 넘어서서 그 활동에 부합하는 산물이 무엇인지 알길 원한다. 그림자는 그것이 자신의 목적을 잃고 그것의 원리를 찾고 있는 한에서 그 활동 자체이다. (191, 289)
§5.7.2. 우월한 인간의 양면성 289 (Ambibalence de l’homme supérieur. 191)
우리는 마치 우월한 인간이 두 종류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말했다. .. 왜 두 가지 방식으로 우월한 인간을 다루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 이중적인 측면(deux façons)을 고려해야만 한다: 때로는 짜라투스트라를 우회시키기 위해서, 어떤 치욕, 어떤 함정 팡에서도 물러서시 않는 적으로, 때로는 주인으로 짜라투스트라 자신의 계획과 유사한 계획 속에 뛰어드는 거의 동료로서. (191, 289-290)
§5.8.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응적”인가? 290 (L’homme est-il essentiellement “réactif”? 191)
- 인간은 반응적 생성이다.(L’homme est le devenir-réactif.) / “당신들은 실패한 (부족한)본성에 속한다.”(“Vous êtes des natures manquées.”) / 작용과 긍정(L’action et l’affirmation.) / 우월한 인간과 관련한 니체의 상징체계(Symbolisme de Nietzsche en rapport ave l’homme supérieur.) / 두 마리의 불“개”(Les deux chiens de feu.)
§5.8.1. 인간은 반응적 생성이다. 290 (L’homme est le devenir-réactif. 191)
이런 양면성(cette ambivalence)은 사람들이 보다 일반적 의문을 제기할 때만 정확하게 해석될 수 있다. 즉 인간은 어느 정도로 본질적으로 반응적인가? 한편 니체는 반응적 힘들의 승리를 인간과 역사 속에서 본질적인 어떤 것으로 제시한다. 원한과 가책은 인간의 인류성을 구성한다. 허무주의는 보편사의 선천적(a priori) 개념이다. (191-192, 290)
다른 한편 니체는 노예들이 정복했을 따름인 인간 유형으로서 주인, 반응적 힘들이 그것의 의미로부터 우회시켰을 따름인 인간의 류적 활동으로서 문화, 반응적 인간이 왜곡시켰을 따름인 그 활동의 인간적 산물로서 자유롭고 주권자인 개인에 대해 말한다. 인간사조차 적극적 시기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짜라투스트라가 그의 참된 인간들을 불러내고 그의 통치(le règne)도 인간의 통치이라는 것을 알리는 일이 일어난다. (192, 291)
§5.8.2. “당신들은 실패한 (부족한, 결여된)본성에 속한다.” 291 (“Vous êtes des natures manquées.” 192)
힘들이나 그 힘들의 성질보다 더 깊게, 힘들의 생성들이나 또는 권능의지의 성질들이 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반응적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인간을 구성하는 무엇인가가 훨씬 더 깊이 있다. (192, 291) [심층(깊이)에 더 많은 것이 있다.]
처음 보기에 인간의 활동성은 류적으로서 보인다. 반응적 힘들이 그것[활동성]에 이식되고, 그것을 변질시키고, 그것의 의미[방향]로부터 그것을 우회하게 한다. 그러나 보다 깊게보면, 류적 진리는 모든 힘들의 반응적 생성이고, 그 활동성은 단지 생성에 의해서 가정되는 특수한 항이다. (192, 292)
§5.8.3. 작용과 긍정 292 (L’action et l’affirmation. 192) 짜라투스트라는 끊임없이 그의 “방문객”들에게 “당신들은 모자란다고, 당신들은 모자라는 본성들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 짜라투스트라의 방문객들은 가짜 우월한 인간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우월한 인간을 체험하고 그들이 가짜인 것처럼 느낀다. (192, 292)
§5.8.4. 우월한 인간과 관련한 니체의 상징체계 294 (Symbolisme de Nietzsche en rapport ave l’homme supérieur. 194)
또 다음을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류적 활동성, 그것의 목표, 그것의 산물, 이것들이 본질적으로 부족한가(manqués, 결함이 있는가)? 왜 그것들이 낭패된 것(ratés)으로 현존하는가? 대답은 간단한데, 만일 사람들이 상기하기를 활동성이 반작용의 힘들을 훈련시키고, 그것들을 영향을 받을 수 있게 만들며, 그것들 자체를 적극적으로 만들길 원한다는 경우에만 그러하다. (194, 294) [간단하다 과정 속에는 낭패와 결함이 있을 수 있다.]
신은 인간에 대해 연민을 느꼈다. 이 연민은 그의 죽음의 원인이었다. 우월한 인간에 대한 연민, 그러한 것이 짜라투스트라의 유혹이며, 그는 다음 차례로 우월한 인간을 죽게 할 것이리라. (195, 295)
§5.8.5. 두 마리의 불“개”(Les deux chiens de feu. 195)
[참조, §4.13.2. 불개(Le chien de feu.)]
우월한 인간은 활동의 추상적 요소에서 머문다. 그는 결코 사유 속에서 조차 긍정의 요소까지 고양되지 않는다. 우월한 인간은 가치들을 전복시키고 반작용을 작용으로 변화시키길 열망한다. (195, 295)
본성을 변화시킬 조건들 ..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다. .. 긍정의 요소는 바로 초인의 요소이다. 긍정의 요소는 바로 인간에게 결여된 것이고, 초인에게조차 결여된 것이며, 특히 그에게 결여된 것이다. 니체는 인간 속의 불충분성으로서 결여의 네 가지 방식으로 또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196, 296)
1) 우월한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즉 웃기, 놀기, 또 춤추기가 있다.
2) 우월한 인간들 자신은 나귀를 그들의 “우월한 자”로 인정한다. .... 당나귀는 이-아(I-A)를 말하는 짐승, 긍정적이고 긍정하는 짐승, 디오니소스적 짐승이다. .
3) 그림자의 상징주의는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그림자는 인간의 활동이지만, 보다 상위의 심급으로서 빛을 이다. 필요로 한다. [유출설의 가장 부족한 부분이 그림자인 셈이다.]
4) 두 마리의 불개 중 하나는 다른 것의 희화화이다. 한 마리는 소란과 연기 속에서 표면에서 활동한다. .. 다른 개는 긍정적 짐승이다. “그 개는 사실 대지의 중심에서 말한다. ‥… 그 개 주변에서 색조을 띤 구름처럼 웃음이 떠돈다.”. (196, 296-297)
§5.9. 허무주의와 전환: 집약적 지점 297 (Nihilisme et transmutation: le point focal. 197)
- 자신에 의해서 극복되고 완성된 허무주의(Nihilisme achevé, vaincu par lui-même.) / 권력 의지: 인식 이유와 존재 이유(La volonté de puissance: ratio cognoscendi et ratio essendi.) / 멸망하길 원하는 인간 또는 적극적 부정(L’homme qui veut périr ou la négation active.) / 부정의 개종, 개종의 지점(La conversion du négatif, le point de conversion.)
§5.9.1. 자신에 의해서 극복되고 완성된 허무주의 297 (Nihilisme achevé, vaincu par lui-même. 197) [자기 자신은 짜라투스트라일 것이고, 다음인간 즉 인민들로 확장할 수 있다.]
허무주의의 지배[통치]는 강력하다(puissant, 권능적이다). 그것은 삶보다 우월한 가치들 속에서[관념, 본질들 속에서] 표현되지만, 마찬가지로 그것을 대체하는 반응적 가치들 속에서 또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최후의 인간의 세계 속에서도 표현된다. (197, 297)
문제는 “허무주의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가치들 자체의 요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부정을 긍정과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이다. (197, 298)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해결에 더 근접해 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니체에게서 앞서 분석된 허무주의의 모든 형태, 극단적이거나 수동적인 형태조차 미완성된, 불완전한 허무주의를 구성한다는 것을 주목할 것이다. .. 사실 허무주의는 극복되지만,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서 극복된다. (197-198, 298-299)
그러므로 전환이 완성된 허무주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전환은 가치들의 비판에 “전체화하는(totalisante)” 완성된 형태를 부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해석은 우리에게 아직까지 전환이 왜 그것의 결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전환) 자체 속에서 또 그것 자체의해서(en elle-même et par elle-même) 허무주의적인가 하는 점을 말하고 있지 않다. (198, 298) [전환 그 자체 속에서 그 자체에 의해서는 플로티노스에 닮았다. “자연 안에서 자연에 의해서”라고 읽으면 스피노자와 벩송을 만난다.],
§5.9.2. 권능 의지: 인식 이유와 존재 이유 299 (La volonté de puissance: ratio cognoscendi et ratio essendi. 198)
부정의 그 낡은 요소에 의존하고 있는 가치들, 근본적인 비판 아래로 추락하는 가치들은 그날까지 알려져 있거나 알려질 수 있는 그날까지 알려져 있거나 알려질 수 있는 모든 가치들이다. “그날까지”란 전환의 날을 가리킨다. (198, 299)
이리하여, 허무주의, 무의 의지는 권능의지, 권능의지의 성질일 뿐 아니라, 권능의지 일반의 인식이유(la ratio cognoscendi de la vonlonté de puissance en général)이다. 알려져 있고, 알려질 수 있는 모든 가치는 본성상 그 이유에서 파생하는 가치들이다. (198, 300)
[권능의 의지를 형식으로 사유한다는] 이러한 것은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테마들의 멀리서온 잔존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권능의지로부터 인식하는 것은 고통과 체형(supplice)이지만, 권능의지는 또한 미지의 기쁨(la joie inconnue), 미지의 행복, 미지의 신이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불평 속에서 노래한다. “... 오, 다시 돌아오라. 미지의 신이여! 나의 고통이여! 나의 최후의 행복이여!” (198, 300)
권능의지의 다른 면, 알려지지 않은 면, 권능의지의 다른 성질, 알려지지 않은 성질: 즉 긍정(l’affirmation)이다. .. 그것은 권능의지 일반의 존재이유(la ratio essendi de la vonlonté de puissance en général)이다. (199, 300-301) [권능의지는 인식에서는 아뇨!를 존재에서는 네 그렇군요!이다. 인민의 삶은 긍정이다. 인민에게 강요하는 지식에는 부정이다. (52QLI)]
아리아드네에게 대답하는 중에, 디오니소스가 적절한 불가사의를 지닌 채 예고하는데, 고통이 기쁨으로 변하는 디오니소스적 전환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틀림없이 우선 서로 증오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면, 만약 네가 나를 긍정으로 느끼고 긍정인 나와 혼인하며 나를 긍정으로 생각함이 틀림없다면, 너는 나를 부정으로 인식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199, 301)
§5.9.3. 멸망하길 원하는 인간 또는 적극적 부정 301 (L’homme qui veut périr ou la négation active. 199)
그러나 전환이 한 요소를 다른 요소로 대체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사실일 때, 그것이 왜 완성된 허무주의인가? 셋째 이유(une troisieme raison)가 여기서 개입되어야 한다. (199-200, 301-302)
[셋째 이유 설명] 무의 의지는 반응적 인간을 넘어서서 이번에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계획을 추구한다. 반응적 힘들은 무의 의지와 동맹을 파괴하고, 무의 의지는 제 차례가 되어 반응적 힘들과 동맹을 파괴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새로운 관심을 일깨운다[예, 예술적 창조의 길]. 자신을 파괴하는 것, 적극적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 사람들은 특히 니체가 자기-파괴(auto-destruction)라고 부르는 것과 최후의 인간의 수동적 소멸(extinction passive) 을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니체의 용어 중에서 “최후의 인간”과 “소멸하기를 원하는 인간(l’homme qui veut périr)을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200, 302)
“다리를 건너가면서” .. “나는 인식하기 위해서 살고, 언젠가 초인(다음인간)이 살도록 인식하고자 하는 자를 사랑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소멸을 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원한다: 나는 그자를 사랑한다, 그자는 허무주의를 권능의지의 인식이유로 이용하지만, 그 권능의지 속에서 인간이 극복된 존재이유를 발견하며, 따라서 그 존재이유에서 그 인간은 패배했던(vaincu) 허무주의를 극복하였다. (200, 302-303)
§5.9.4. 부정의 개종, 개종의 지점 303 (La conversion du négatif, le point de conversion. 200)
능동적 파괴는 다음을 의미한다: 무의 의지 속에서 변환의 지점, 변환의 계기(순간)를 의미한다. (200, 303)
어떤 순간에 나타나는 “생성의 영원한 기쁨”, “무화의 기쁨”, “무화와 파괴의 긍정”. 이러한 것이 디오니소스 철학의 “단호한 점(le point decisif)”이다. .. 그 지점은 “최고점, 초점, 초월점”이고, “니체에게서 대립자들의 균형이나 화해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종에 의해서 정의 되는 자정(Minuit)이다. (201, 303)
“당신들은 초인의 아버지, 선조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인 당신들의 최선의 업적이리라.” 부정은 모든 반응적 힘들을 희생(le sacrifice)시키고, “퇴화된 기생적 특징들을 나타내는 모든 것의 냉혹한 파괴”가 되며 삶의 초과(un excédent, 잉여)에 봉사한다. 바로 거기서 부정은 자기의 완성(son achèvement)을 발견한다. (201, 303-304) [열반에 도달: 완성]
§5.10. 긍정과 부정 304 (L’affirmation et la négation 201)
- 나귀의 예/네(Le oui de l’âne.) / 차라투스트라의 원숭이, 악마(Le singe de Zaratustra, le démon.) / 긍정의 부정성(la négativité du positif.)
[니체의 동물들의 예는 동물의 특성으로써 표본을 삼은 것이 아니라, 동물이 작자의 어떤 의도에서 쓰인지가 중요하다. 당나귀도, 거미도, 원숭이, 사자도, 뱀도.. 그 문단에서 설명의 용도에서 찾아야 한다. 기호학이라고 할까? 진위를 따지는, 존재근거를 따지는 의미론은 아니다. (52PKD)]
[§5.10.0.1. 전환 304 (La transmutation 201)]
전환과 가치 전환은 다음을 의미한다. [니체의 변증법은 정반합이 아니라, 발현, 창발, 생성 그리고 도달(열반)이다. 절대지, 선의 이데아, 부동의 원동자, 신, 제국, 금융 등으로 상층의 관념 또는 본질에 도달을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 허구, 이야기(신화)이다.]
1) 권능의지 속에서 성질의 변화
2) 권능의지 속에서 인식 이유의 존재 이유로 이행
3) 권능의지 속에서 요소의 개종(conversion).
4) 권능의지 속에서 긍정의 지배(règne, 통치)
5) 알려진 가치들에 대한 비판
6) 힘들의 연관의 전복(reversement) (201-202, 304-305) [이상은 앞 절들의 논의의 요약인 셈이다]
[§5.10.0.1. 긍정과 부정 306 (L’affirmation et la négation 203)]
[19세기 영혼과 신체의 논의를 한다면 영혼=긍정, 신체=부정, 그런데 여기서 영혼은 신체를 다루는 지성(누스, 정신)이 아니라 심층의 경험적 총체인 기억이다. 니체의 권능 의지는 기억에 닮았다. (52PKE)]
우리는 아마도 긍정, 부정, 그리고 이것들의 연관이 관련된 니체의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부정과 긍정은 권능의지의 두 성질처럼, 권능의지 속에서 두 이유로서 서로 대립된다. (203, 306)
사람들이 긍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정의 사슬을 뒤흔들고 있는 기괴하고 서글픈 유령(fantôme)이다. 그러나 [니체에게서] 전환이 갑자기 도래할 때, 부정은 흩어지고, 성질 속에서도 이유 속에서도 독립적인 힘으로서 부정적인 어떤 것도 살아남지 못한다. “어떤 기도도 도달하지 못하고, 어떤 부정도 훼손하지 못하는 존재의 지고한 성좌, 존재의 영원한 긍정, 나는 영원히 너의 긍정이다.” ( 306-307)
그러나 그때, [둘째로] 니체는 왜 긍정을 부정적 전제 조건 그리고 또 부정적인 직접적 결과로서 소개하기도 하는가? “나는 내 파괴력에 부합하는 정도로 파괴하는 기쁨을 안다.” 1) 자기 자신만큼 어마어마하고 무제한적인 부정이 무매개적으로 뒤따르지 않는 긍정은 없다. ... 2) 또 엄청난 부정이 자신을 앞서가도록 하지 않는 긍정도 없다. (203-204, 307)
사자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신성한 긍정(oui sacré)”을 사자의 “신성한 부정(non sacré)”이 선행해야만 한다. 소멸하고 극복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적극적 파괴로서 파괴는 창조자의 예고(l’annonce)이다.... (204, 307)
§5.10.1. 나귀의 예/네 307 (Le oui de l’âne. 204) [여기에 나귀의 반전이 있다. 나귀는 마름이다.]
사람들이 나귀, 이-아[긍정, ja]를 말하는 짐승이 전형적인 디오니소스적 짐승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의 외관은 디오니소스적이지만, 그 실재는 전적으로 기독교적이다. 그것은 단지 우월한 인간들에게 있어서 신의 구실하기 좋을 따름이다. (307-308) [사실 나귀같은 자들이 신부와 목사들과 같은 성직자들이다.]
§5.10.2. 차라투스트라의 원숭이, 악마 309 (Le singe de Zaratustra, le démon. 205)
사람들이 니체의 사유 속에서 모순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한편 니체는 어떤 부정도 훼손하지 못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알린다. 다른 한편 그는 아니오라고 말할 줄 모르는, 어떤 부정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나귀의 긍정을 고발한다. (205, 309) [여집합의 인정은 대립과 모순의 명제들을 다루지 않는다.]
§5.10.3. 긍정자의 부정성 311 (la négativité du positif. 206)
사람들은 니체가 어디에 도달하길 원하는지, 누구에게 자신을 대립시키는지 알고 있다. 그는 부정의 힘에 기대는 모든 형태의 사유에 대립한다. 그는 부정의 요소 속에서 소멸하고, 부정을 하나의 동인, 하나의 권능, 하나의 성질로 이용하는 모든 사유에 대립한다. (206, 311) [부정을 부정만으로 보고 긍정을 먼저 설정한 자들에 대립된다. 니체에서 ‘부인하다’는 긍정성이다.]
[긍정자는 두 가지 의미의 부정성을 실행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존재(일자)의 부정이며 다른 하나는 신체적 통일성을 부정해야 한다. 즉 하나는 자유한국당(또 바미당,), 다른 하나는 더민주당(정의당 국민당), 하나는 미국과 일본의 주구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의 환상에 빠져 있는데 이는 잠재적으로 미국의 동의자이다. 이를 벗어날 아제의 긍정자는 8천만의 자율, 자치, 자주의 길을 창안할 것이다. / 니체는 원한과 가책의 부정에서 새로운 긍정이라고 하는데 그 긍정이 프로테스탄트가 되어서는 안 되고, 디오니소스(=불교 해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벩송으로 보면 생물학(류적 인간의 계통)과 심리학(자아의 기억총체, 두뇌의 회로전체가 아니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52PKE)]
§5.11. 긍정의 의미 312 (Le sens de l’affirmation 207)
- 나귀와 허무주의(L’âne et le nihilisme.) / 현실적인 것의 소위 긍정성에 반대하여(Contre la prétendue positivité du réel.) / “이 시대의 인간들”(Les “hommes de ce temps”.) / 긍정하는 것은 짐을 떠맡는 것도 아니다.(Affirmer n’est pa porter ni assumer.) / 존재의 이론에 반대하여(Contre la théorie de l’être.)
[나귀의 예: 태극기부대 가스통무리, 어벙이할배 부대 등의 예와 같이 맹목적이다. - 파랭이는 주구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크리스트교의 승리이라고 하고, 빨강이는 되도려 보내야할 폐기물 정도로 여긴다.]
§5.11.1. 나귀와 허무주의 312 (L’âne et le nihilisme. 207)
니체에 의하면 긍정은 두 부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정확히 변증법의 방식과는 반대된다. 그래도 문제는 남아있다. 순수 긍정이 왜 그 두 부정을 포함해야만 하는가? 나귀의 긍정이 왜 아니오라고 말할 줄 모름에 따라서 거짓된 긍정인가? ... 한편, 우월한 인간들에게 결여된 것으로 긍정의 예감이다. .. 다른 한편 우월한 인간들이 그것[오해]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오해는 긍정의 본성에 관한 오해(le contresens)이다. (207, 312)
그 때문에 나귀는 낙타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제1부의처음에 짜라투스트라가 가장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용감한 정신”이라고 소개한 낙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 게다가 니체의 상징들은 다른 텍스트들에 의해서 해석되고 다시 검증되어야 한다. (207, 312)
긍정하는 것은 여기서 짐을 지는 것, 책임을 떠맡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복종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감당하는 것이다. (208, 313)
§5.11.2. 현실적인 것의 소위 긍정성에 반대하여 313 (Contre la prétendue positivité du réel. 208)
있는 그대로의 실재적인 것이란 나귀의 관념이다. 나귀는 그가 진 짐, 그가 책임지는 짐의 무게를 실재적인 것의 긍정성(실증성)처럼 느낀다. (208, 313)
“사람들은 당신들에게 요람에서부터 이미 무거운 말투들과 무거운 가치들을 지급한다(doter).‥…그리고 우리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짐지우는 것을 튼튼한 어깨에 지고 척박한 산 위를 넘어서 끌고 간다! 그리고 우리가 땀을 흘릴 때,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래, 삶은 나르기에는 무거운 거야’라고 말한다.” 나귀는 우선 크리스트이다. 크리스트야 말로 가장 무거운 짐을 나른다. 바로 그는 부정의 결실들이 전형적인 적극적 불가사의를 내포하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결실들을 나르고 있다. (208, 313-314)
“... 당신들 실재성의 인간들!‥… 당신들은 불임의 인간들이다.‥…당신들은 반쯤 벌린 문들인데, 그 문 앞에서 굴 파는 자가가 기다린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당신들의 실재성이다.‥…” 이 시대의 인간들은 여전히 낡은 관념들 아래서 살아간다. (209, 314)
§5.11.3. “이 시대의 인간들” 315 (Les “hommes de ce temps”. 209)
니체가 수락으로서 긍정에 대해 비판할 때, 단지 스토아적 입장을 생각한 것도, 그 입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적(l’ennemi)은 더 가까이에 있다. (209-210, 315)
헤겔이래 [우선] 철학은 존재론과 인간학, 형이상학과 인본주의, 신학과 무신론, 가책의 신학과 원한의 무신론의 이상한 혼합처럼 제시된다. ... [그리고] 긍정이 존재의 기능으로 있을 때, 인간은 긍정의 공무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니체가 싸우고 있는 적의 정체를 알아보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것은 긍정을 진리의 진실성 또는 실재적인 것의 긍정성과 혼동하는 변증법이다. (210, 316)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라고 하는 그 변증법을 의미할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이미 헤겔적 존재의 반박을 아주 멀리까지 진전시켰다. 그는 단지 사유된 진리를 감각할 수 있는 것의 진리로 대체한다. (210, 316)
니체는 “이 시대의 인간들” 안에서, 즉 “실재성의 인간들” 안에서, 변증법과 변증론자를 고발한다. 즉 도대체 믿어왔었던 모든 것의 회화(그림)이라고[고발한다]. (211, 317) [좀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신화(6살 짜리의 믿음의 이야기)이다. 요강공주가 대표적일 것이다.]
§5.11.4. 긍정하는 것은 짐을 나르는 것도 떠맡는 것도 아니다. 317 (Affirmer n’est pa porter ni assumer. 211) - [권능을 창발, 발명하는 것이다.]
니체는 세 가지를 말하고 싶어한다. 1) 존재, 진리, 실재는 허무주의 화신들(avatars)이다. 그것은 삶을 부정의 노동에 종속시키고, 삶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삶의 사지를 자르고, 삶을 부정하며, 삶을 반응적으로 반드는 방식이다. .. 2) 수락[맡음]으로서 긍정, 즉 있다는 것의 긍정, 진리의 진실성으로서 긍정, 실재의 긍정성으로서 긍정은 거짓 긍정이다. 그것은 나귀의 예이다. ... 3) 긍정의 거짓 개념화는 여전히 인간을 보존하는 방식이다. 존재가 짐인 한, 반응적인 인간은 짐을 지기 위해 거기에 있다. 존재가 사막에서보다 더 잘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인간이 자신을 더 잘 보존할 곳은 어딜 것인가? “최후의 인간은 가장 오랫동안 산다.” 존재의 태양 아래서, 그는 사막에서 수동적 소멸을 오랫동안 꿈꾸기 위해서, 그곳에 틀어 박혀서 죽음을 갈구할 정도로 약해진다. (211, 317-318)
긍정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의 짐을 떠 맡는 것도 책임지는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것을 해방시키고,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 그의 모든 권능(puissance) 속에는 긍정하는 것, 긍정 자체를 긍정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의 힘들(forces)을 능가하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사자도 그것을 아직까지 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를 위해서 자기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사자의 권능(la puissance du lion)이 할 수 있는 것이다.” (212, 319) .
§5.11.5. 존재의 이론에 반대하여(Contre la théorie de l’être.) [형상형이상학에 반대하여]
니체의 주장은 이렇게 요약된다. 아니오(non)라고 말할 줄 모르는 예(le oui, 나귀의 예)는 긍정의 희화화(une caricature, 풍자)이다. .. 그와 반대로 디오니소스의 예(le oui)는 아니오(non)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 긍정이고 허무주의를 극복했고, 자율적인 모든 힘에 대해 부정적인 것을 빼앗았다[긍정을 활성화했다]. (213, 320)
§5.12 이중적 긍정: 아리아드네 320 (La double affirmation: Ariane 213)
- 긍정의 긍정(이중 긍정)(L’affirmation de l’affirmation (double affirmation).) / 아리아드네의 불가사의, 미로(Le mystère d’Ariane, le labyrinthe.) / 긍정된 긍정(둘째 권능) (L’affirmation affirmée (seconde puissance).) / 차이, 긍정, 영원회귀(Différence, affirmation et éternel retour.) / 디오니소스의 의미(Le sens de Dionysos.)
§5.12.1. 긍정의 긍정(이중 긍정) 320 (L’affirmation de l’affirmation (double affirmation). 213)
이 모든 권능(puissance) 속에서 긍정이란 무엇인가? 니체는 존재의 개념을 제거하지 않는다. 그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안한다. [권능의] 긍정은 존재이다. (213, 320-321)
이 긍정은 자기 자신과는 다른 어떠한 대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대상인 한에서 존재이다. 긍정의 대상으로서 긍정, 이것이 존재이다. (214, 321)
첫째 긍정(생성)은 존재(être)이지만, 둘째 긍정은 대상으로서만 존재이다. 그 두 긍정은 총체적으로 긍정하는 권능을 구성한다. 그 권능이 필연적으로 이중적이라는 것은 상징적인 높은 범위의 문맥들 속에서 니체에 의해 표현된다. (214, 321)
1) 짜라투스트라의 두 동물들, 독수리와 뱀. 영원회귀의 관점에서 해석된 독수리는 대년(la grande année)처럼, 즉 우주적 주기(la période cosmique)이고, 뱀은 이 큰 주기 속에 삽입된 개별적인 숙명(la destinée)와 같다. (214, 322) [우주 대년(대우주) 인간 운명(소우주)]
§5.12.2. 아리아드네의 불가사의, 미로 322 (Le mystère d’Ariane, le labyrinthe. 214)
2) 신적인 부부, 디오니소스-아리아드네. “도대체 나를 제외한 누가 아리아드네가 누구인지 알겠는가?” 그리고 틀림없이 아리아드네의 불가사의는 의미의 다수성을 갖는다. (214, 322)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사랑했다. 테세우스는 우월한 인간의 표상이다. 그는 고귀하고 영적인 인간이며, 짐을 떠맡고 괴물들을 물리치는 자이다[국가주의 상징]. .. 그러나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은 아리아드네[생성의 상징]는 그것에 고유한 전환이 도래하는 것을 느낀다. 즉 이롭고 긍정적이며 해방된 힘인 아니마(l’Anima)이다. (214, 322) [19세기 산업사회에서 국가주의 인간들이 넘쳐나는데, 여성인 아리아드네에게서 긍정을 찾은 것이고, 진정으로 여성에 대한 진지한 의미(긍정의 긍정)를 말했다는 점에서 니체도 여성주의자에 속할 수 있다. (52QLI)]
디오니소스와 관련해서 아니마인 아리아드네는 둘째 긍정과 같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 어떤 다른 긍정을 요구한다. 디오니소스적 생성은 존재이고 영원이지만 상응하는 긍정 자체는 긍정될 때에 한에서 이다. [첫째긍정으로서] 존재의 영원한 긍정, 나는 영원히 너의 긍정이다. 영원회귀는 생성과 존재를 “최대한 접근시키고”, 그것은 서로를 서로에 의해 긍정시킨다. 또 접근을 행하기 위해서는 둘째 긍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원회귀 자체는 결혼반지이다. 그래서 디오니소스적 우주, 즉 영겁회귀는 결혼반지(un anneau)이며, 결혼식의 거울(un miroir)인데, 그 거울은 거기에[우주에] 스스로 비쳐볼 수 있고 또한 스스로를 비추면서 그것[우주]을 반영할 수 있는 영혼(아니마)을 기다린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는 한명의 약혼녀(fiancée)를 원한다. (215, 323)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리잡고 있는 지점에 따라서 결혼은 의미와 배우자를 바꾼다는 것을 주목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성된 영원회귀에 따라서 짜라투스트라 자신은 약혼자로, 영원은 사랑받는 여인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회귀를 구성하는 것에 의해서 디오니소스는 첫째 긍정, 생성, 존재이지만, 바로 둘째 긍정은 대상일 따름인 존재로서의 생성이다. 아리아드네는 그 둘째 긍정이고, 아리아드네는 약혼녀, 애인인 여성의 권능(la puissance feminie anante)이다.) (215, 323-324) [들뢰즈가 약혼녀, 여성 권능을 괄호에 넣어서 설명을 부과한 것은 의미 있을 것이다. “천개의 고원”의 ‘제11장 1837년: 리토르넬로에 대해’에서 노래를 이야기하면서 아리아드네와 오르페우스를 언급한다. 물론 11장의 주제는 슈만이며, 이 시기부터 여성과 어린애가 주제 또는 소재로 널리 퍼진다.]
§5.12.3. 긍정된 긍정(둘째 권능)(L’affirmation affirmée (seconde puissance).)
3) 미로 또는 귀들(Le labyrinthe ou les oreilles). 미로는 니체 저작 속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이미지이다. 그것은 우선 무의식, [미로] 자신(soi)을 가리킨다. 아니마만이 우리는 무의식과 화해할 수 있고, 우리에게 그의 탐색을 위한 길잡이 실(un fil)을 제공할 수 있다. 둘째로 미로는 영원회귀 자체를 가리킨다. 순환적인 그것은 잃어버린 길이 아니라 우리를 존재하고 존재했고 존재할 동일한 순간에, 동일한 지점에 다시 데려다 주는 길(le chemin)이다. (215, 324)
미로는 생성이자 생성의 긍정이다. .. [아리아드네의] 실은 부정과 원한의 실 도덕의 실이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자신의 비밀, 즉 진짜 미로는 디오니소스 자인이며 진짜 실은 긍정의 실이라고 알려준다. “나는 너의 미로다.” (215-216, 324)
§5.12.4. 차이, 긍정, 영원회귀 325 (Différence, affirmation et éternel retour. 216)
우리가 긍정과 부정을 권능의지의 성질로 간주할 때, 그것들이 일의적 관계를 가지 있지 않음을 이해한다. 부정은 긍정에 대립하지만(s’opposer), 긍정은 부정과 다르다(différer, 차이 있다). (216, 325)
대립(l’apposition)은 부정과 긍정의 관게일 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부정의 본질이다. 그리고 차이(la différence)는 있는 그대로의 긍정의 본질이다. 긍정은 자기 자신의 차이의 향유(jouissance)와 놀이(jeu)이며, 그것은 마치 부정이 그것에 고유한 대립의 고통(douleur)과 노동(travail)인 것과 같다. 긍정은 첫 번째로는 다자(le multiple)로서, [두번째로] 생성으로서, [세번째로] 우연(le hasard)으로서 제기된다. 다자란 어떤 것과 다른 것의 차이이고, 생성은 자신과 차이이며, 우연은 “모두의 사이에서” 차이 또는 분배적(distributive) 차이이다. 그리고 긍정은 이중화되고(se dédoubler), 차이는 긍정의 긍정 속에서 반사[반영]된다. (216, 325)
... 다시 이중화된 긍정, 즉 자기의 가장 높이 고양된 권능의 차이[심층의 차이]. [이 차히에서], 생성이 존재이고, 다자가 일자이고, 우연(le hasard)이 필연이다. 즉 생성의 긍정은 존재의 긍정, 등등이다. (217, 325) [긍정의 이중화에서 존재론으로 설명한 것이다. 다음은 인식론으로 설명한다.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에서 이중적으로 설명하였듯이.]
첫째 생성의 긍정은 둘째 긍정의 [인식적] 대상인데, 그 둘째 긍정은 첫째 긍정을 새로운 권능으로 운반한다. 존재는 생성으로, 하나는 다수로, 필연은 우연으로 이야기된다. (217, 325)
§5.12.4-1. 디오니소스의 의미 (Le sens de Dionysos. 217)
우리가 긍정을 긍정의 일체 안에서 고찰하려고 때, 우리는 표현의 편의를 제외하고 긍정하는 두 권능들의 현존과 구별된 두 긍정들의 현존을 혼동해서 안된다. 생성과 존재는 한 권능에서 다른 권능으로 단지 이동하는 동일한 긍정이다. 그러한 한에서 첫째 긍정은 둘째 긍정의 대상이다. 첫째 긍정은 디오니소스, 즉 생성이고 둘째 긍정은 아이라드네, 즉 거울, 약혼녀, 반사(반영)이다. 첫째 긍정의 둘째 권능은 영겁회귀 또는 생성의 존재이다. 그것은 긍정 속에서 차이를 발전시키고, 긍정의 긍정 속에서 차이를 반영하시키며, 긍정된 긍정 자체 속에 그것을 지나가게 만드는 미분적 요소로서 권능의지이다. 가장 고귀한 힘으로 고양되고, 반영되며, 발전된 디오니소스, 이것이 영원회귀에서 원리로 쓰이는 디오니소스적 의지의 측면들이다.(217, 326)
§5.13 디오니소스와 차라투스트라 326 (Dionysos et Zaratustra, 217)
- 선별로서 존재(L’être comme sélection.) / 차라투스트라와 전환: 사자(Zaratustra et la transmutation: le lion.) / 전환에서 영원회귀까지, 그리고 그 반대로(De la transmutation à l’éternel retour, et inversement.) / 웃음, 놀이, 춤(Le rire, le jeu, la dance).
§5.13.1. 선별로서 존재 326 (L’être comme sélection. 217)
영원회귀의 교훈은 부정의 회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존재가 선별(la sélection)임을 의미한다. 긍정하는 것 또는 긍정되는 것만이 되돌아 온다. 영원회귀는 생성의 재생산이며, 생성의 재생산은 또한 적극적 생성의 생산이다. 다음인간[초인]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아이(enfant)이다. (217, 326)
니체의 사변적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생성, 다자, 우연은 어떠한 부정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차이는 순수 긍정이다. 되돌아오는 것은 모든 부정을 배제하는 차이의 존재이다. (217-218, 326) .
루크레티우스 이래(스피노자는 제외하고) 사람들은 결코 철학을 특징짓는 비판적 계획을 그렇게 멀리까지 진전시키지 못했다. 루크레티우스(Lucretius, 전99-전55경)가 영혼의 혼란(le trouble)을 고발하면서 또 자신들의 권능에 근거하기 위하여 이 혼란을 필요로 한 자들을 고발할 때, 스피노자(Spinoza, 1632-1677)가 슬픔을, 모든 슬픔의 원인들을, 이 슬픔 가운데서 자기 권능을 기초하고자 하는 자들을 고발하자 할 때, 니체(Nietzsche, 1844-1900)가 원한을, 가책을, 이것들(원한과 가책)에 봉사하게 원리로 삼는 부정적인 것의 권능을 고발할 때, 즉 철학의 “비현실성(inactualité)”은 스스로를 대상으로 삼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 불행한 의식이 있다. 이 불행한 의식은 인간의 예속화이며, 동시에 원한다는 것의 함정이며, 사유에 있어서 모든 저속함의 기회이다. 부정의 지배는 우리를 그들 자신의 목적에 예속시키는 바보들, 교회들, 국가들의 지배이다. (219, 327)
결국 신의 죽음이 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또 즐거운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부정적인 것을 추방하고 반응적인 것을 내쫓는 시간이, 즉 능동적-생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시간은 정확히 영겁회기의 시간이다. (218, 328)
§5.13.2. 차라투스트라와 전환: 사자 218 (Zaratustra et la transmutation: le lion. 327)
부정적인 것은 존재의 문들에서 숨을 거둔다. 대립은 자기의 노동을 멈춘다. 차이는 자기의 놀이를 시작한다. .. 니체는 부정적인 것이 개종되는(converti) 지점을 전환(la transmutation)이라고 부른다. 부정적인 것은 자신의 권능과 자신의 성질을 상실한다. 부정은 자치적 힘, 말하자면 권능의지의 성질이기를 멈춘다. 전환은 권능의지 속에서 부정적인 것을 긍정에 연관시킨다. .. 더 이상 대립의 노동도 부정의 고통도 없고, 차이의 전쟁 놀이와 파괴의 긍정과 환희(joie)가 있다. (218-219, 327-328)
짜라투스트라의 모든 역사는 니힐리즘과 다시 말하면 악마와 자기(짜)와의 연관들 속에 있다. 악마(le démon)는 부정의 정신, 외관상 대립하는 다양한 역할들을 충족시키는 부정하는 권능(puissance de nier)이다. 때로는 악마가 자기에게 책임 지워진 무게가 긍정성 자체이라고 인간에게 암시하면서, 악마는 인간에 의해 자신(악마)을 짊어지게 만든다. 때로는 반대로 악마는 인간에게 모든 힘들과 모든 원함을 박탈하면서 인간 그 넘어로 뛰어 넘는다. (219, 328)
모든 관점에서 전환은 짜라투스트라가 악마와 다른 것처럼 무의 의지와 다르다. .. 짜라투스트라는 반응적 인간을 넘어서서 알려진 가치들의 파괴자이며, 최후의 인간을 넘어서서 멸망을 원하거나 극복되길 원하는 인간이다. 짜라투스트라는 긍정을 의미하며, .. 부정적인 것을 하나의 양태(un mode)로 만들며, .. 짜라투스트라의 신호(le signe)는 사자의 신호이다. 짜라투스트라의 첫째 책은 사자 위에서 열리고, 마지막 책은 사자 위에서 닫힌다. (220, 329)
§5.13.3. 전환에서 영원회귀까지, 그리고 그 반대 330 (De la transmutation à l’éternel retour, et inversement. 220)
마찬가지로 짜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와, 전환은 영원회귀와 복잡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어떤 관점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의 원인이고 초인의 아버지이다. .. 알려진 모든 가치의 파괴자, 성스러운 아니오를 가진 사자는 최후의 변신을 준비한다. 그는 아이가 된다. 손을 사자 갈기 속으로 뻗은 채, 짜라투스트라는 자기 아이가 가까이 있음을, 초인이 도래함을 느낀다. (220, 330)
짜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에 복종한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나보다 더 당당한 자를 기다린다. 나는 그에 반대해서 스스로 파괴될 가치조자 없다.” 안티크리스의 삼위일체 - 디오니소스, 아리아드네, 짜라투스트라 - 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아리아드네의 조건부 약혼자이지만,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의 어떤 조건에서도 좌우되지 않는 약혼녀이다. (220, 330)
사실, 영원회귀와 초인은 두 계보학의 교차점에 있고, 같지 않은(inégale) 두 생성계보의 교차점에 있다. (221, 331)
한편, 이것들(영원회귀와 초인)은 조건 짓는 원리로서 짜라투스트라에 속한다. .. 다른 한편 이것들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원리로서 디오니소스에 속한다. (221, 331)
짜라투스트라의 성좌는 사자의 성좌이지만, 디오니소스의 성좌는 존재의 성좌이다: 놀리꾼-아이의 예는 사자의 성스러운 ‘아니오’보다 더 심오하다. 짜라투스트라는 전적으로 긍정적이다. 그가 아니오라고 말할 때 조자 그러하다. (221, 331).
§5.13.4. 웃음, 놀이, 춤(Le rire, le jeu, la dance).
짜라투스트라는 권능의지 속에서 부정을 긍정에 연관시킨다. 또 권능의지는 그것의 존재이유로서 긍정에 연관되어야만 하고, 또 긍정은 그것의 고유한 이유를 생산하고 반영하고 발전시키는 요소로서 권능의지에 연관되어야만 한다. 디오니소스의 임무가 그러하다. .. 짜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를 규정한다. .. 디오니소스의 규정은 다른 본성(nature)이다.(221, 331-332)
그러므로 사람들은 니체의 모든 개념이 같지 않은(inégale) 두 생성계보의 교차점에 있다는 거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영원회귀와 초인뿐만이 아니라, 웃음, 놀이, 춤도 마찬가지이다. 춤은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전환시키고, 웃음은 고통을 기쁨으로 전환시키며, (주사위) 던지기 놀이는 저속한 것을 고귀한 것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에 연관된 춤, 웃음, 놀이는 반영와 발전의 긍정하는 권능이다. 춤은 생성과 생성의 존재를 긍정하고, 웃음과 폭소는 다자와 다자의 일자를 긍정하고, 놀이는 우연(le hasard)와 우연의 필연을 긍정한다. (222, 332)
*§6.결론 333-337 (Conclusion 223-226)
[들뢰즈는 니체에서 형상형이상학의 두 관점 수학과 물리학에 대해 부정하는 하는 능동적권능과 반응적 권능을 살려서, 이중 부정을 통한 새로운 계통발생(계보학)을 수립하였다고 본다. 니체에서 생물학과 심리학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경구들과 니체 자신이 만든 우화들을 통해서 순수 긍정의 원리인 권능의 의지를 구해냈다. 그 권능의 의지의 삶은 짜라투스트라에게 투영하다가 디오니소스 찬가로 나아가며, 일반적으로 불가사의로 여기는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삶을 예시로 전하고자 한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에게 그런 삶을 살게 하면서 인간 누구에게나 아제 인간을 형성할 권능이 있다고 한다. (52PKE)
현대[19세기]철학은 활기차고 활발한 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신에 대한 위태로움도 내포하고 있는 혼합물들{les amalgammes)을 내 보인다. 그것은 존재론과 인류학, 무신론과 신학의 기괴한(bizarre, 이상스런) 혼합(le mélange)이다. 약간의 크리스트교적 정신주의, 약간의 헤겔적 변증법, 약간의 현대 스콜라주의인 현상학, 약간의 니체적인 번득임(fulguration) 등을 다양한 비율로 배합해서 이상한 조합(d’étranges combinaisons)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사람들은 맑스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즉 유물론자들]과 또한 헤겔과 니체가 원을 그리는 춤(강강술래, 원무圓舞)에서 손잡고 있음을 본다. 그 원무는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것(dépassement)을 축하하고 심지어는 소위 말하는 철학의 죽음을 축하한다. (223, 333)
사실 니체가 형이상학을 “넘어서려고(dépasser)” 표현적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자리(Alfred Jarry, 1873-1907) 또한 어원론을 불러오면서 “파타피직(pataphysique)”이라 불렀던 것 속에서도 그러하다. (223, 333)
헤겔과 니체 사이에는 어떤 타협도 불가능하다. 니체 철학은 중요한 논쟁적 효과를 갖는다. .. 니체가 칸트주의와 비관주의[쇼펜하우어] 그물망 속에 있는 듯이 이해했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를 확립하는 것이고, 사유를 짓누르는 짐들로부터 사유를 해방하는 것이다. 세 가지 관념들이 변증법을 정의한다: [1]대립과 모순 속에서 나타나는, 이론적 원리소서 부정적인 것의 능력(un pouvoir du négatif)에 대한 관념; [2]고통과 슬픔에 대한 가치 관념, 즉 분리 속에서 또 분열 속에서 드러나는 실천적 원리로서 “슬픈 정념들”에 대한 가치화 작업(la valorisation); [3]부정 자체의 이론적이고 실천적 생산물로서 실증성의 관념. (223-224, 334)
만약 변증법이 대립과 모순 속에서 자신의 사변적 요소를 발견한다면, 우선 그것이 차이의 거짓된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우牛)의 눈처럼, 변증법은 차이의 전도된 이미를 반영하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바로 차이에 대한 사색이지만, 그것은 차이에 대한 이미지를 뒤집는다. (224, 334)
도처에 슬픈 정념이 있다. 또 불행한 양심은 모든 변증법의 주체이다. 변증법은 우선[첫째로] 삶에 대항하는 반작용 속에서 삶을 심판하고 그것을 제한하며, 그것을 가늠하길(mesurer) 원하는 이론적 인간의 사유이다. 둘째로, 변증법은 삶을 부정의 노동에 종속시키는 사제의 사유이다. .. 이런 의미에서 변증법은 소위 크리스트교적 이데올로기이다. 결국[셋째로] 변증법은 그 자체로서 반응적 삶과 우주의 반응적 생성을 표현하는 노예의 사유이다. (224, 335) [변증법의 세 가지 관념에 대한 다른 방식의 설명인데, 인류학적, 종교적, 사회(문화)적 설명이다. 이 셋은 인간본성(인성론) 측면에서 우월한자들이 선하다고 할 때이고, 이 방식을 다른 삶의 영역에 적용하려고 들 때, “못땟다(mechant)”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52QMB)]
사자의 털을 덮어쓴 나귀는 니체가 “이 시대의 인간”이라고 부르는 자다. (225, 335)
니체의 위대함은 원한과 가책이라는 이 두 식물을 고립시킬 수 있었던 것에 있다. .. 니체는 변증론자들이 보편자와 개별자에 대한 추상적 입장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렀음을 비판한다. 즉 그들은 징후의 포도들이었다. 변증론자들은 전형적인 모순적 의문인 “무엇?”이라는 의문의 범위 안에서 나아갔다. .. 모든 상황 속에서 니체는 “누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그 누구인 자는 바로 디오니소스이다. 그 누구인 것은 바로 생성학[계보학]의 원리로서 권능의지이다. .. 이 권능의지는 다자의 긍정의 원리, 증여의(donateur) 원리, 또는 주는 미덕(la vertu qui donne)이다. (225, 335-336)
다자(le multiple), 생성, 우연(hasard)이 순수 긍정의 원리라는 것, 그것이 바로 니체 철학의 의미이다. 다자의 긍정이 사변 명제인 것처럼, 다양의 기쁨(la joie du divers)은 실천 명제이다. (225, 336)
[[다수(le multiple, 다자, 다질), 생성(le devenir), 우연(le hasard)이 순수 긍정의 원리(objet d'affirmation pure)라는 것, 그것이 바로 니체 철학의 의미이다. 다수[다질]의 긍정이 사변 명제인 것처럼, 다양의 기쁨(la joie du divers)은 실천 명제이다. 놀이꾼(le joueur)은 [아직] 충분히 긍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연 속에 부정을, 생성과 다수 속에 대립을 개입시키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놀이에서 진다. 진정한 주사위 던지기는 주사위 던지기를 다시하게 하는 승리의 수를 필연적으로 낳는다. 사람들은 우연과 우연의 필연을 생성과 생성의 존재를, 다질과 다질의 하나를 긍정한다. 긍정은 둘로 나뉘고(se dédoubler) 계속해서 그것의 가장 고귀한 권능(puissance)에 인도되어 배가 된다(redoubler). 차이는 사색되고 반복되거나 재생산된다. 영원회귀(l'éternel retour)는 그 가장 고귀한 권능이며, 온의지(la Volonté) 속에서 자신의 원리를 찾는 긍정의 종합이다. 즉 부정의 무게에 반대하여 긍정하는 것의 가벼움[경쾌함], 변증법의 노동에 반대하여 권능 의지의 놀이[주사위 놀이], 그 유명한 부정의 부정에 반대하려 긍정의 긍정이다. (336-337) - [주사위 놀이의 승리는 파스칼의 내기에 대한 비판이다. 파스칼은 내기에서 신을 믿는 쪽이 이긴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파스칼이 교황청에 반대자였지만 파라노이아 경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간파한 것이 니체이다. (50VKI) / 진정한 주사위 던지기는 주사위 던지기를 다시하게 하는 승리의 수를 필연적으로 낳는다. 사람들은 우연과 우연의 필연을 생성과 생성의 존재를, 다질과 다질의 하나를 긍정한다. - 지금까지 상층철학에서 부정성이 긍정성으로 등장한다. 우연이 필연이고, 생성이 존재이며, 다질이 하나이다. 이 하나가 벩송의 첫 작품의 주제였는데, 이 다양체[다질체]로서 하나가 인격성이며, 요즘 의미화 작업에서 말하는 주체이다. 그 분절된 하나하나가 표면의 바깥에서 개별화이다.(50VKI)] [우연과 우연의 필연성은 보르헤스 작품들과 카프카의 일부 작품에 나타난다.(50VKJ)] ]]
사람들은 우연과 우연의 필연을, 생성과 생성의 존재를, 다자와 다자의 일자를 긍정한다. 긍정은 둘로 나뉘고(se dédoubler), 계속해서 긍정의 가장 고귀한 권능에 인도되어 다시 이중화한다(redoubler). .. 부정적인 것의 무게에 반대하여 긍정하는 것의 가벼움, 변증법적 노동에 반대하여 권능의지의 놀이들, 그 유명한 부정의 부정에 반대하여 긍정의 긍정. (225, 336-337)
부정은 우선 권능의지의 성질로서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 그런데 인간사는 허무주의, 부정, 반작용의 역사이다. 그러나 허무주의의 긴 역사는 역사의 완성에 이르렀다. 즉 부정이 반응적 힘들 자체로부터 등을 돌리는 최종 지점에 도달한다. 이 지점이 전환, 또는 가치전환을 정의한다. (226, 337)
왜냐하면 권능의지는 긍정되는 것만 되돌아 오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부정을 개종시키고, 긍정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위해서 존재하고 한쪽이 다른 한 쪽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영원회귀가 존재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존재는 선택(sélection). 긍정은 권능의지의 유일한 성질로서, 작용(행위)은 힘(force)의 유일한 성질로서, 적극적 생성은 권능과 원함의 창조적 동일성으로서 남아있다(demeurer). (226, 337)
(lu, 5:32, 52PLE) (29:31, 52Q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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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6 고다마 싯달다(sanskrit: Siddhārtha Gautama, pāli: Siddhattha Gotama), dit Shakyamuni (« sage des Śākyas ») 전566-452. 방랑하는 수도자들의 공동체를 세운 자. 각성한 자, 붓다(le Bouddha (« l’Éveillé »).
99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전99-전55경) 고대 로마의 시인·철학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
6 예수(Jésus-Christ (le Christ, 전6경-후30경) 나자렛의 예수(Jésus de Nazar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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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울/사울(Paul de Tarse ou saint Paul, 5경-67경) 유대인으로 사울. 예수-크리스트의 사도, 첫 12제자에 속하지는 않는다.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포르투갈계 유대인 계통의 네델란드 철학자.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1677)
1763 리히터(Johann Paul Friedrich Richter 1763–1825), 필명 장-폴(Jean Paul) 독일 작가. Jean Paul, Choix de rêves, traduction d'Albert Béguin. [Träume, Reisen, Humoresken (?)]
1770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프랑스 혁명에서 인민의 자유를 너머 멀리서 바라보면서 인간의 정신이 신의 인격에 이를 것으로 만든 또 하나의 토마스 주의자로 철학을 하였다. 그는 프러시아 통일의 영광을 만들기 위하여 루터파 교리에 맞추어 신의 절대성을 강조한 근대판 교부 철학자이다.
1804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 1804-1872) 독일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이다.
1806 슈미트(Johann Kaspar Schmidt, 1806–1856), 필명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그는 허무주의, 실존주의, 정신분석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아나키즘, 특히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주저, 유일자와 그 소유(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1845)(The ego and its own, 유일한 자와 그의 것).
1809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 1809-1882) 독일 출신의 신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청년 헤겔파(헤겔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 젊은 시절의 카를 마르크스도 바우어의 영향 아래에서 헤겔 철학을 배웠다. 유일자 사상을 전개한 막스 슈티르너와의 관계, 그리고 무신론적인 사상, 국가와 종교의 분리, 유럽 세계가 붕괴할 것이라는 예언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동생인 에드가 바우어 또한 청년 헤겔파를 대표하는 사상가.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유태인 출신으로 독일인이다. 인간의 자의식이 자유의 절대성을 확립하기보다, 사회라는 공시태가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역사적으로 자유를 점점 더 실현한다고 보았다. 이 공시태를 노동과 생산을 중심으로 생산양식이라고 한다. 이 양식의 최종은 공산주의 양식이다. 인간 본성자체가 이런 변화와 발전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루소 다음으로 낙관적이다. 신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자연주의 전통에 선)인간론이다.
1873 자리(Alfred Jarry, 1873-1907) 프랑스 시인, 소설가, 극작가. 소묘가, 판화가. ENS 세 번 시도했으나 낙방했다. Dans l’ouvrage 파타피직의 학자인 포스트롤 박사의 몸짓들과 의견들(Gestes et opinions du docteur Faustroll, pataphysicien(1897-1898, 작성, 사후출판)[Gestes et opinions du docteur Faustroll, pataphysicien. Roman néo-scientifique (18980) / 그는 파타피직을 상상적 해결의 과학이라 정의 한다. 즉 대상들의 잠재성에 의해 묘사된 대상들의 성질들을 상징적으로 윤곽들(aux linéaments)에 맞게 일치하게 하는 과학을 말한다.
1888 발(Jean André Wahl, 1888-1974) ENS, 1910교수자격시험 1등, 유대인, 프랑스 철학자, 소르본 교수. Le Malheur de la conscience dans la philosophie de Hegel, 1929.
1901 베겡(Albert Béguin, 1901-1957) 스위스 작가, 문학 비평가, 편집자. 앙리 벩송: 수집된 시론들과 증언들(Henri Bergson, Essais et Temoignage recueillis, 1943) 편집자.(아마도 유대인?)
1907 이뽈리트(Jean Hyppolite, 1907-1968) 프랑스 철학자.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 ENS, 1929년 교수자격 1등 보봐르, 2등 사르트르, 3등 이뽈리드 4등 뽈 니잔. Genèse et structure de la « Phénoménologie de l'esprit » de Hegel. 1946 / Le coup de dés de Stéphane mallarmé et le message, Les Etudes Philosophiques 13 (4):463 - 468 (1958)
1908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와 함께 프랑스 현대 철학의 양대 산맥으로, 현상학과 실존주의를 연구. 변증법의 모험들(Les Aventures de la dialectique, 1955)
1914 아르봉(Henri Arvon, né Heinz Aptekmann, 1914-1992) 프랑스 철학자. 독일 유대계 프랑스로(1933), 관념들의 역사가. 아나키즘과 자유운동의 역사 전문가. 실존주의 원천들에서: 막스 슈티르너(Aux sources de l’existentialisme: Max Stirner, 1954).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또는 성스러움의 변형(Ludwig Feuerbach ou la transformation du sacré, 1957).
1918 알뛰세(Louis Althusser, 1918-1990) 프랑스 철학자. 알자스 카톨릭가계 출신으로 알제리 거주, 프랑스 공산당원. ENS에서 그의 스승은 기똥(Jean Guitton, 1901-1999). 아내 살해(Le meurtre d'Hélène Rytmann, 1980)
1918 비로(Henri Birault, 1918-1990) ENS, 프랑스 철학자. 칸트, 니체, 하이데거 전문가. 「헤겔의 존재론적이고 신학적인 논리학과 변증법(L’Onto-theo-logique hegelienne et la dialectique」, in Tijdschrift vooz philosophie, 1958
(31:32, 52Q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