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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忠門 능파정공파 10세 정언우(鄭彦佑) 家
전란에 창의(의병을 일으킴)하여 대이어 구국하고, 효자열부를 연이어 배출한 가문이다
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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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파정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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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栗谷門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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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貅) 사헌지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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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仁良 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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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彦佑 창의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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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訔秀 창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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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民 창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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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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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誼民 창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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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命世 증좌승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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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仁恭 생진구중 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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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應春 증군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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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華震 증판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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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溢萬 증좌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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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顯元 수동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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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顯佑 수동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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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命世 증좌승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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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台僑 (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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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동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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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相僑 증참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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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昌垕 효자창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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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顯元 수동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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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엽 (致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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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후 (宅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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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영 (斗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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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履豊 수부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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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致重 수첨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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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구 (宅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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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민 (宅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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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경 (斗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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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 (履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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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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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致復 성균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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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宅敏 생부치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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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학 (斗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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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 (履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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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垙) 文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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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顯佑 수동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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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욱 (致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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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창 (宅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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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량 (斗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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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履弘 水原金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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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대 (致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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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좌승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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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순 (致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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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宅燁 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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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성 (斗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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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履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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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斗七 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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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履澤 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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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載烋 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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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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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 부 | 성명(자, 호) | 주요 행장 |
8 | 응종 (應鍾) | 정휴(鄭貅) 군맹(君猛) 능파정(凌波亭) (1495~1558) |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배광산이씨(配光山李氏) 부 수찬(修撰) 열(烈) |
9 | 휴(貅) | 정인량(鄭仁良) 원필(元弼) (1535 ~ ?) | 선조 계유(1573년) 생원(生員) 수은 강항1)이 만사에 쓰기를 덕과 의를 크게 칭송하였다
睡隱 姜沆1)輓詞 盛稱德義 |
9 | 휴(貅) | 정인공(鄭仁恭) 사성(士誠) 월곡(月谷) (1545~1602) | 명종 갑자년(1564년)에 생원 진사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책을 벗삼아 은거하며 벼슬살이에 나가지 아니했다
明宗甲子 生進俱中 琴書自娛隱居不仕 |
10 | 인량 (仁良) | 정언우(鄭彦祐) 종언(宗彦) 둔암(遯菴) (1552 ~ ? ) 倡義 | 어버이 묘소에 여막 살이 하며 효도를 다하였다.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청주에서) 순절하였다. 공적은 「예조문첩」과 「호남절의록」에 실렸다
居廬盡孝 壬亂倡義殉節(于淸州)事蹟俱載禮曹文帖及湖南節義錄 |
10 | 인공 (仁恭) | 정응춘(鄭應春) 화경(和慶) (1594~1657) | 증손자 현원이 수동지중추부사로 귀하게 되어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 以曾孫 顯元貴 贈軍資監正 |
11 | 언우 (彦祐) | 정은수(鄭訔秀) 경헌(景獻) 미능재(未能齋) (1567 ~ 1612) 倡義 | 이율곡 문인으로 임진왜란에 부친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를 전전하였으나 부친이 청주에서 순절하시자 대신 병을 통솔하여 경성에 이르렀다. 군자감 정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반장하여 나주에 머물며 여묘하였는데 묘 옆에 호랑이가 와 같이 지키니 기이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묘 앞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켜 “충효송”이라 불렀다. 그 행적이 「금성지」, 「호남절의록」에 실렸다
李栗谷門人 宣祖壬辰 從父倡義轉戰 淸州親竟歿節 代領其兵直到京城 除軍資監正不就 反葬羅州居廬墓側 有虎來同守之異 鄕人稱其墓前松曰忠孝松 事載「錦城誌」及「湖南節義錄」 |
10 | 응춘 (應春) | 정화진(鄭華震) 경여(卿汝) (1633~1695) | 손자 현원이 수동지중추부사로 귀하게 되어 장례원 판결사에 증직 되었다 以孫顯元貴 贈掌隷院判決事 |
12 | 은수 (訔秀) | 정안민(鄭安民) 낙천(樂天) 태화당(太和堂) 倡義 | 병자호란에 동생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정홍명을 따라 군막에서 방략을 수립하였다. ⌜호남절의록⌟과 ⌜예조문첩⌟에 실렸다.
仁祖丙子(1636년)與二弟倡義從鄭弘溟 幕以糾畵方略 事載「湖南節義錄」及⌜禮曹文帖⌟
* 정홍명(鄭弘溟) : 1582∼1650
아버지는 우의정 정철(鄭澈)이며,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공주까지 몽진 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하였다. 1646년 대제학이 되었으나 곧 병이 들어 귀향하였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제자백가서에 두루 정통했으며, 고문(古文)에도 밝았다. 하지만, 김장생의 영향으로 경전(經傳)을 으뜸으로 삼았고, 예학에도 밝아 김장생의 학통을 이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12 | 은수 (訔秀) | 정의민(鄭誼民) 공보(公甫) 지헌(遲軒) (1602~1643) 倡義 |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 이르러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남쪽 고향으로 내려와 자적하며 살았다. 인조 계미년(1643년)에 졸하였다. 증손 창후(壽同樞)가 귀하게 되어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행적이 ⌜예조문첩⌟에 실렸다.
仁祖丙子(1636년)倡義旅到淸州 聞和成痛哭南下 屛跡溪陽琴書魚樵逍遙以終仁祖癸未 以曾孫昌垕貴 贈司僕寺正 事載⌜禮曹文帖⌟ |
12 | 은수 (訔秀) | 정희민(鄭熙民) | 수 부호군(壽 副護軍) * 족보에 二男 세탁(世倬 : 進士), 세경(世卿)이 기록되고 있으나 실계(失系) |
12 | 화진 (華震) | 정일만(鄭溢萬) 달원(達元) (1659~1719) | 아들 현원이 수동지중추부사로 귀하게 되어 한성부 좌윤에 증직 되었다 以子顯元貴 贈漢城左尹 |
13 | 의민 (誼民) | 정명세(鄭明世) 군임(君任) (1631~1713) 老典 | 수 용양위부호군(壽 龍驤衛副護軍) 손자 창후가 귀하게 되어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以孫昌垕貴 贈左承旨 |
13 | 일만 (溢萬) | 정현원(鄭顯元) 문백(文伯) (1680~1761) 老典 | 영조 기묘(1759년) 수 첨지중추부사(壽 僉知中樞府事) 영조 경진(1760년) 승 동지중추부사(陞 同知中樞府事) |
13 | 일만 (溢萬) | 정현우(鄭顯佑) 도겸(道謙) 담약정(淡若亭) (1708~1788) 老典 | 정조 정미(1787년) 수 용양위부호군(壽 龍驤衛副護軍) 정조 무신(1788년) 승 동지중추부사(陞 同知中樞府事) 뜻과 행실이 고결하고 학문에 깊이 정진하여 선비와 벗으로부터 존경받았다 志行高潔 學文精深 士友推重 |
14 | 명세 (明世) | 정상교(鄭相僑) 국구(國耈) 눌정(訥亭) (1663~1740) 隱士 | 계산에 은거하며 시와 술을 벗 삼아 자족하였다 遯居溪山詩酒自娛 아들 창후가 귀하게 되어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以子 昌垕貴 贈戶曹參判 |
14 | 현원 (顯元) | 정치중(鄭致重) 덕윤(德潤) (1722~1803) 老典 | 수첨지중추부사(壽 僉知中樞府事), 수 82세 |
14 | 현원 (顯元) | 정치복(鄭致復) 덕이(德以) (1730~1797) |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며 문학이 훌륭하였다. 계유년(1773년) 생원에 합격하였다. 孝友純至 文學贍富 癸酉 成均生員* * 족보에는 “成均進士”로 기록되었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방목상 기록은 생원으로 되어있어 방목에 따르는 것이 타당할 듯함 |
14 | 현우 (顯佑) | 정치대(鄭致大) 보행(普行) (1752~1824) | 천품이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하여 향리에서 조정에 여러번 천거하였다 誠孝根天 友愛益敦 鄕道累薦 |
14 | 현우 (顯佑) | 정치순(鄭致淳) 찬보(燦甫) 모당(慕堂) (1760~1829) 贈 恩典 | 부친병환에 대변 맛보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넣어 드리고 상을 당함에 죽 먹으며 여묘할 때 호랑이가 묘를 지키니 기이하였다. 향도가 여러 번 천거하여 영조 신미년(1751년)에 효행으로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되었다 親癠嘗糞斫指 丁艱啜粥廬墓有虎衛之異 鄕道累薦 英祖辛未(1751년) 以孝贈童蒙敎官 朝奉大夫 |
15 | 상교 (相僑) | 정창후(鄭昌垕) 복(復) 청취옹, 북헌 (淸翠翁, 北軒) (1694~1775) 倡義 老典 | 어버이 병환에 신단을 구하여 목숨을 연장했다. 영조 무신년(1728년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수령 구윤명이 그 공적을 칭송하는 증시를 하였다. 도리와 정성을 다하여 효도하므로 강신도 감탄하였다. 문명이 높은데도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므로 모두 이를 칭송하였다. 계사년(영조49년, 1773년)에 천수로 첨지하고 갑오년(영조50년, 1774년)에 동지로 승자하였다. 유고가 남아있고 에 행적이 실렸다
親癠得神丹延壽 英祖戊申(1728년)倡義旅勤王 本倅具公允明贈公詩 以窮道誠孝感江神 半世文章傾俗類等語獎詡之 癸巳壽僉知中樞府事 甲午陞同知中樞府事 有遺稿 事載「禮曹文帖」 |
15 | 상교 (相僑) | 정택엽(鄭宅燁) 성후(聖厚) 초암(楚岩) (1778~1859) 隱士 恩典 | 지조가 굳건하고 행실이 확실하였고 문장과 글이 능란하였다. 만년에 초산에 은거하여 유연자적하며 살았다. 학행이 탁월하여 조정에 천거하니 좌승지에 이르렀다
操履堅確 文詞贍富 晩隱楚山悠然自適 以學行薦 至左承旨 * 승정원일기에 기록이 없음 |
16 | 택여 (宅呂) | 정두량(鄭斗量) (1824~1887) | 6년 여막 살이에 동네에서 흠복하였다 六年居廬 鄕里欽服 |
16 | 택엽 (宅燁) | 정두칠(鄭斗七) 운집(雲集) 남강(南岡) (1819~1883) | 학문에 독실하였고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간 우애도 돈독하였다 學力純實孝友敦篤 贈戶曹參判* * 증직사유와 거증이 필요한 것으로 보임 |
17 | 두영 (斗榮) | 정이풍(鄭履豊) 국헌(國憲) (1805~1884) 老典 | 생부 두천(斗千)
수 용양위부호군(壽 龍驤衛副護軍), 수 80세 |
17 | 두경 (斗慶) | 정이창(鄭履昌) 재진(載珍) (1811~1866) | 어머님의 눈이 보이지 않으므로 자정수(자정 때에 길어서 먹는 물)를 길어 마시게 하니 마침내 눈이 보이게 되었다
母夫人眼眚 汲子井水奉先 竟得快蘇 |
17 | 두량 (斗量) | 정이홍(鄭履弘) 인수(仁秀) (1851~1904) 配 水原金氏 (1850~1916) 烈婦 | 배 수원김씨(配 水原金氏)
남편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 진혈하여 목숨을 연장하고, 상을 당하여 남편의 부탁으로 따라 죽지 아니하고 여린 자식의 교육에 힘써 집안을 세웠다. 남편 돌아간 날에 조용히 돌아가셨다. 향도에서 누차 천거하였다.
所天病革脂血延縷 及艱以夫子遺託 未卽下從 敎育幼孤樹立門戶當夫諱日從容就義 鄕道累薦 |
17 | 두칠 (斗七) | 정이택(鄭履澤) 영수(永壽) 모은(茅隱) (1848~1923) 隱士 | 천성이 영민하고 행실이 순수하고 삼가며 검소하게 가정을 꾸리고 자녀에 도의를 교육하였다. 깊은 시골에 은거하여 세상과 오래 동안 떨어져 지냈다
天姿明敏行誼純謹 勤儉治家敎育有方 遯跡林泉與世長謝
1891년(辛卯) 광릉참봉 행 사복시정(光陵參奉行 司僕寺正)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18 | 이주 (履周) | 정용(鄭墉) 대규(大珪) (1830 ~ ?) | 고종 계사(1893년) 음 참봉(蔭 參奉), 승 가선공조참판(陞 嘉善 工曹參判)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18 | 이창 (履昌) | 정선(鄭墡) 찬오(贊五) (1829~1876) | 어버이 병에 손가락을 베어 진혈하여 연명케 하므로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親癠指血延縷 鄕里稱頌 |
18 | 이창 (履衡) | 정광(鄭垙) 문찬(文贊) 풍암(風菴) (1854~1914) | 문행이 진실되고 독실하므로 세상사람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칭송하였다. 수승 통정대부(壽陞 通政大夫) 文行純眞 世人稱效 * 수직은 61세로 대상이 아니고, 일제강압기로서 타당치 않음 |
18 | 이택 (履澤) | 정재휴(鄭載烋) 진숙(珍淑) 옥재(玉齋) (1882~1951) 隱士 | 연재 송병선 선생의 문인으로서 한일합방 시에 순창 내동에 머물며 시를 읽고 독서하며 생애를 마쳤다 淵齋 宋秉璿3)先生門人 韓日合邦時 入淳昌內洞屯門下 吟詩讀書終身
* 송병선(宋秉璿) : 1836~1905 호 연재(淵齋), 학자, 순국지사,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 1877년(고종 14) 태릉참봉, 경연관(經筵官)·서연관(書筵官)·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소를 두 차례 올렸다. 이듬해에는 무주 설천면 구천동 산 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19 | 재근 (載根) | 정원석(鄭源錫) 여명(汝明) 복재(復齋) (1886~1906) | 나이 20세의 묘령에 뜻을 세우고 경서와 학문에 밝았으나 불행히 일찍 세상을 뜨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했다
妙年立志經學高明不幸早世人皆嗟惜 |
강항(姜沆, 1582∼1650)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 영광 출신.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으로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가주서를 거쳐 1595년 교서관박사가 되고, 1596년 공조좌랑과 이어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1597년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참판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져 남원이 함락당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인을 모았다.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해로로 탈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출석사(出石寺)의 중 요시히도(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1598년 오사카(大阪)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후지와라(藤原惺窩)·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지와라는 두뇌가 총명하고 고문(古文)을 다룰 줄 알아 우리나라의 과거 절차 및 춘추석전(春秋釋奠)·경연조저(經筵朝著)·공자묘(孔子廟) 등을 묻기도 하고, 또 상례·제례·복제 등을 배워 그대로 실행, 뒤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일본 억류 중 두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1600년에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다.
1602년 대구교수(大邱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곧 사직했으며,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1882년(고종 19)에 이조판서양관대제학(吏曹判書兩館大提學)이 추증되) 성주 아카마쓰(赤松廣通)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저서로는 『운제록(雲堤錄)』·『강감회요(綱鑑會要)』·『좌씨정화(左氏精華)』·『간양록(看羊錄)』·『문선찬주(文選纂註)』·『수은집』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