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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주막
ㅡ박달재에서
이기철
주막은 주막이 아니라 酒幕이라 써야 제격이다
그래야 장돌뱅이 선무당 미투리장수가 다 모인다
그래야 등짐장수 소금쟁이 도붓장수가 그냥은 못 지나가고
방갓 패랭이 짚신감발로 노둣돌에 앉아 탁주 사발을 비우고 간다
그래야 요술쟁이 곡마단 전기수들이 주모와 수작 한번 걸고 간다
酒幕은 으슬으슬 해가 기울어야 제격이다
번지수가 없어 읍에서 오던 하가키가
대추나무 돌담에 소지처럼 끼어 있어야 제격이다
잘 익은 옥수수가 수염을 바람에 휘날려야 제격이다
돌무지 너머 참나무골에 여우가 캥캥 짖고
누구 비손하고 남은 시루떡 조각이
당산나무 아래 널부러져 있어야 제격이다
시인 천상병이 해가 지는데도 집으로 안 가고
나뭇덩걸에 걸터앉아 손바닥에 시를 쓰고
그 발치쯤엔 키다리 시인 송상욱이 사흘 굶은 낯으로
통기타를 쳐야 제격이다
주막은 때로 주먹패 산도적이 공짜 술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아야 제격이다
주막, 주먹 왈패 풍각쟁이 벙거지들이 다 모인 酒幕
지까다비 면소사 고지기 벌목장들이 그냥은 못 가고
탁주 한잔에 음풍농월 한가닥 하고야 가는 酒幕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인생에 진 사람들이
인생의 얼굴을 몰라 아예 인생이 뭐냐고 물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무명 베옷 기운 등지게 자락을 보이며 떠나가는 酒幕
ㅡ『영원 아래서 잠시』(민음사, 2021)에서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살아생전 즐겨 불렀던 노래가 <번지 없는 주막>이었다.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이 부른 이 노래는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궂은 비 내리는 이 밤이 애절구려/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어느 날짜 오시겠오 울던 사람아”가 제1절이다. 1940년에 발표된 곡으로 일제감정기 말기에 우리 민족의 한을 달래준 노래이기도 하다. 이기철 시인의 이 시는 제목이 ‘술집’이나 ‘호프집’이 아니고 ‘주막’이다.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을 ‘주막’이라고 불렀던 시절은 아무래도 조선조 말이나, 대한제국 시대, 일제강점기 정도까지가 아니었을까. 미군정기를 거쳐 한국전쟁 이후에는 酒幕이라는 한자어가 사라지고 술집이 대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주점이나 요정은 50~60년까지도 씌어졌던 듯하다.
시인은 앞부분에서 어떤 이들이 주막에 와서 목을 축이고 가는지 살펴보고 있다. 독자에 따라 박경리 작 『토지』의 공월선이나 김주영 작 『객주』의 천소례를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갓 패랭이 짚신감발”은 주막에 온 사람들의 생김새와 차림새에 대한 묘사다. ‘전기수(傳奇叟)’는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이야기책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던 사람으로 시장을 돌면서 삼국지나 수호지, 고금소총의 주요 장면을 읽어주면 장 보러 온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동전을 던져주기도 했다. 하가키(はがき)는 엽서의 일본어이다. 즉, 이 시의 시대적 배경이 일제강점기를 포함한다는 생각을 더욱 하게 만든다.
낱말풀이를 해보자. 왈패: 말이나 행동이 단정치 못하고 수선스럽고 거친 사람. 풍각쟁이: 시장이나 집집이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여 돈을 구걸하는 사람. 벙거지: 병졸이나 하인이 쓰던 모자. 즉, 신분이 낮은 사람. 지까다비(じかたび): 작업화. 면소사: 면사무소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 고지기: 일정한 건물이나 물품 따위를 지키고 감시하던 사람. 창고지기. 벌목장: 벌목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 이런 사람들이 주막에 와서 목을 축이고 갔었다.
그런데 이기철은 두 사람을 호명한다. 멀쩡하게 시와 평론을 쓰던 천상병은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간 고문받고 나와서 ‘천원만 천원만’을 외치고 다니는 넋 나간 주정뱅이가 되고 말았다. 송상욱은 이 시대의 음유시인으로 시단의 싱어송라이터 3인 이제하ㆍ송상욱ㆍ 한강 중 한 명이다. 송상욱의 노래를 못 들어본 문인은 간첩이다. 19세기에서 걸어나온 송상욱 시인이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면 그곳은 술집이나 포차가 아니라 주막이 된다. 어떤 근엄한 모임도 주막 분위기로 바꿔놓는다.
이기철 시인은 평소에 뵈면 무척 얌전하시다. 술 잘한다는 얘기를 못 들었는데 주막의 분위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이상하다. 불가사의하다. 주막에서는 노래를 잘해야 제격인데 이기철 시인은 노래를 잘하시나? 혹시 <울고 넘는 박달재>를?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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