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이야 언제든
연둣빛 꽃바람 부는 봄이라야 하지
- 정금미 선생님
“기차가
해진 신발을 벗고 역사에 섰다
기적도 없이 억새 운다 지난여름 한때는
자유이던 벗들 한 시절 스스로 혁명이던 동지들
여기저기 맨발이다
바람도 없이 억새 운다 안녕,
그대 어질고 착한 이들 하얗게 세어
성자처럼 돌아오는 날 있으리라“
졸시 「억새」중에서
청춘의 계절
우리는 매일 기차를 탔습니다.
누구에게도 길을 묻지 않고 아무도 알 수 없는 그 길로
우리는 훌쩍 밤기차를 탔습니다.
뜬눈으로 새벽기차를 기다렸습니다.
기차는 칸칸이 별을 싣고 까마득히 먼 나라로
가늘고 긴 몸뚱이를 뒤척였습니다.
북두칠성 같은 꿈이었습니다.
1989년 그날 우리는
온전히 젊었고 한없이 순수했으며 철없이 행복했습니다.
철마의 심장으로 칙칙거리며 온 날을 폭폭거렸습니다.
미지의 투구를 쓰고 미답의 갑옷을 걸치고
전의의 안장을 높여서 매섭게 잔등을 올랐습니다.
워워~ 전열을 가다듬고 두두두두~ 전선을 휘몰아쳤습니다.
전교조 영토에 큰 성을 쌓고 승리의 깃발을 높이 꽂는
임전무퇴의 불구덩이 여름이었습니다.
“어떤 나무와도 비교하지 마셔요
무언 꽃으로도 돌아보지 마세요
여린 잎에 단풍 들고 드는 햇살받이로 호젓하니
나는 산등성이 켠 듬직히 언덕배기를 사랑한답니다“
제 마당 곳곳에 심어놓은 정금나무 곁에서
나는 자주 정금미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들에서도 튼튼하고 뜰에서도 씩씩한 자존감으로
양지쪽이면 더 낫고 온 그늘이라도 괜찮아요.
비록 숲정이 비좁은 이 그늘이 내 자리라 하여도
아이들 뛰노는 교정만은 밝고 너그러워야 하니까요.
못난 아이들 어깨 들어주고 잘난 아이들 부드러이 눅여주고
더딘 발들 맞추고 찬 손들 어루어
노래하며 춤추며 학교에 가는 꿈.
앞집 석이 뒷집 돌이 모두모두 나와라.
교실이야 언제든 연둣빛 꽃바람 부는 봄이라야 하지.
평등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고 자재로이
이 세상 모든 어린이들은 싹 다 행복해야 해.
내 지금 싸움은 바로 이 때문이지.”
이렇게 가만히 다가앉으면
정금나무 나직이 내 귀를 열어줍니다.
그해 여름 노오란 반팔 참교육 티를 갈아입고
하늘 한 장 덮고 땅 한 장 깔아
한 열흘 밤낮으로 배고픈 적 있었지요.
전교조 사수를 위한 명동단식.
신헌경선생님 박귀동선생님 방의순선생님 송태웅선생님
박영희선생님 김미숙선생님 그리고 정금미선생님...
코앞에서 체포되어도 풀려나면 다시 포위망을 뚫었고
굶어죽겠다고 또다시 담장을 넘고 위장 잠입을 시도하였죠.
참교육의 신념으로 똘똘 뭉친 우리들의 사상은
얼마나 열열했으며 얼마나 저돌적이었는지 모릅니다.
폭염과 장마에 지쳐 쓰러지면서도
스티로폼 한 장으로 난바다의 파도를 다 해쳐 나왔습니다.
아침으로 도깨비 빤스 율동도 하고
낮으로 목이 터져라 구호 외치고
밤마다 별빛다운 전교조 사랑 기쁜 노래를 함께 불렀죠.
이걸 다 참아내고도 남은 전사의 심장
학교보다 낫고 교육부보다 실하고 공권력 보다 강한
여자 사람, 정금미 선생님입니다.
당신의 오랜 동지들 더불어 오늘은
곱게 단풍들어 오셨군요.
참교육 실천 한평생 무심한 세월의 한 목도리
벗어던지고 흰나비처럼 훨훨 날아오세요.
흘러간 모든 순간들에 경배하고
잊어진 옛 추억에 붉은 꽃송이들 뿌려서
인생 2막 대단원의 새 자유를 만끽하세요.
산수유꽃 벌나비 분분할 적
구례 땅 어느 야트막한 산자락을 눌러 앉아
토방 끝 가차이로는 정금나무를 심고
장독대 허름한 켠으로 토란잎 하나 꺾어
부드러운 바람무늬 부채 하나 만드세요.
붉은 연꽃 몇 떨기는 사립 쪽으로 띄워
저물어가는 노을 한 자락 길게 태워보시거나.
그 두메 혹 날라와 더불어 주신다면
구름 한 망토 집어타고 슈퍼맨으로 날아가겠습니다.
우리 함께했던 수많은 날들이여!
불꽃 시절 저마다 생각이 많았고
쫓고 쫓기던 시절 서로 간 마음들 앞섰고
무겁고 힘들어 눈물 나던 시절
손이 못 따르고 말이 빗나가며 발이 더디었던
한 꽃밭 가득 가엾습니다.
마음의 격정 속을 맴돌며 회한의 단풍 빛만 붉어집니다.
정금나무 꽃처럼 맑게 작게 고개를 숙입니다.
저로 인해 혹 아팠을 것들 있으면 오늘부로 한 꺼풀 용서바랍니다.
정금미 동지 평생 숙원 참교육의 여일한 노정을 빌려
품이 적고 성이 어둔한 제 지난 가난을 고백합니다.
바람도 없이
모두들 억새꽃으로 하얗게 세어 돌아왔습니다.
이제 방금 역사를 빠져나온 맨발의 정금미 선생님.
오늘만은 우리 성자처럼 환히 웃으며
선배 동지들과 사진 한 방 멋지게 찍어봅시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단군기원
2568년 2월 23일
김진수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