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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성교론 제12권
현양성교론_2. 섭정의품_9. 해석을 알아야 할 종류(1)
해석을 알아야 할 많은 종류란, 다음의 온타남(嗢陀南=集施, 즉 게송)으로 말하리라.
체성(體性), 해석, 글, 뜻의 법과
등기(等起), 의미, 힐난을 풀이함이며 차제, 스승,
설중(說衆), 들음과 찬불(讚佛)의
약광(略廣), 학승리(學勝利)이네.
9.1. 체성
논하건대, 체성(體性)이란, 모든 경에서 체성이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글과 뜻을 말한다.
글은 바로 소의(所依)가 되고 뜻은 바로 능의(能依)가 된다고 알아야 하나니, 그와 같은 두 가지를 모두 알아야 할 대상(境界)이라고 이름한다.
9.2. 해석
해석이란, 대략 다섯 가지가 있다고 아라야 하나니,
첫째는 법이요,
둘째는 등기(等起)요,
셋째는 의미요,
셋째는 힐난을 풀이함이요,
다섯째는 차제(次第)이다.
9.3. 글
글이란, 대략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명신(名身=명사 자체)이요,
둘째는 구신(句身=구절 자체)이요,
셋째는 자신(字身=글자 자체)이요,
넷째는 말이요,
다섯 째는 형상[相]이요,
여섯째는 근기의 청함[機請]이다.
명신(名身)이란, 누구나 공동으로 알 수 있는 단어를 말함이다.
여기에도 대략 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붙인 명사요,
둘째는 사실 명사요,
셋째는 총체적인 명사요,
넷째는 개별적인 명사요,
다섯째는 뜻에 따른 명사요,
여섯째는 실없는 명사요,
일곱째는 쉬운 명사[易名]요,
여덟째는 어려운 명사요,
아홉째는 드러난 명사요,
열째는 숨은 명사요,
열 한째는 간략한 명사요,
열두째는 광범한 명사이다.
붙인 명사[假名]란, 안의 온갖 쌓임[蘊]에 대해서는 ‘나’ㆍ중생ㆍ생명 따위의 명사를 세우며 바깥의 온갖 물질에 대해서는 병(甁)ㆍ의복ㆍ수레 따위의 명사 세움을 말한다.
사실 명사[實名]란, 눈 따위, 물질 따위에 대해서 감관[根], 뜻[義] 따위의 명사를 세움을 말한다.
총체적인 명사[總名]란, 중생[有情], 물질[色], 느낌[受], 원소[大種] 따위의 명사를 말한다.
개별적인 명사[別名]란, 불우(佛友)ㆍ덕우(德友)ㆍ푸름ㆍ누름 따위의 명사를 말한다.
뜻에 따른 명사[隨義名]란, 형질을 지니고서 걸리기 때문에 물질이라 이름하며, 받아 들이기 때문에 느낌[受]이라 이름하며, 능히 비추기도 하고 능히 밝히기도 하기 때문에 해라 이름한 그와 같은 따위의 명사를 말한다.
실 없는 명사[戱論名]란, 가난한 이를 부자라 이름함과 같음이니 그와 같은 따위의 유는 뜻을 살펴보지 않고 다만 그런 명사만을 시설할 뿐이다.
쉬운 명사[易名]란, 모두가 함께 알 수 있는 명사를 말한다.
어려운 명사[難名]란, 앞의 쉬운 명사와 상반된 것을 말한다.
드러난 명사[顯名]란, 그 뜻을 알기가 쉬운 것을 말한다.
숨은 명사[隱名]란, 그 뜻을 알기 어려움이 달라미다명(達羅耶茶明) 주문과 같음을 말한다.
간략한 명사[略名]란, 하나의 글자로 된 명사를 말한다.
광범한 명사[廣名]란, 많은 글자로 된명사를 말한다.
구신(句身)이란, 명사와 글자에 의하여 해석한 내용이 만족됨을 말한다.
여기에도 다시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만족되지 못한 구절이요,
둘째는 만족된 구절이요,
셋째는 이룰 바 구절이요,
넷째는 능히 이를 구절이요,
다섯째는 머리 구절이요,
여섯째는 풀이하는 구절이다.
만족되지 못한 구절이란, 글도 완성도지 못하고 뜻도 완성되지 못함이니 그 외의 구절을 다시 가해야만 비로소 원만하게 된다. 예를 들면 「모든 악은 행하지 말며, 모든 선(善)은 받들어 행하며, 자기 마음을 잘 조복함이 바로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만일 「모든 악」이라고만 말한다면 곧 그에 부족함이 되며, 만일 다시 「모든 악은」이라고 말하여도 또 뜻에 부족함이 된다.
만일, 「모든 악은 행하지 말며」라고 갖추 말한다면 곧 두 가지 [글과 뜻]가 함께 만족하게 되리니 그를 곧 둘째의 만족된 구절이라고 이름한다.
이룰 바 귀적이란, 이른바 앞의 구절은 뒤의 구절을 기다리어 이루나니 「온갖 지어감[行]은 무상하여 생기고 없어짐이 있는 법일세, 생기면 반드시 없어지기에 저 고요함만이 낙이 되네」라고 말한 예를 든다면 그 중의 「온갖 지어감은 무상하여」라고 한 것은, 바로 이룰 바 구절이니 「생기고 없어짐이 있는 법일세」라고 한 구절로 말미암아 성립되기 때문이다.
머리 구절이란, 예를 들면 「착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그 것이다.
풀이 구절이란, 예를 들면 「정직한 대장부라 말 할만하다」라고 말한 것이 그것이다.
자신(字身)이란, 완전하거나 완전하지 못한 명사와 구절 두 가지가 의지할 바탕이 되는 49의 글자를 말한다.
이 중에 하고 싶음이 명사의 우두머리가 되고 명사가 구절의 우두머리가 되나니 구절에는 반드시 명사가 있기 마련이다. 만일 하나의 글자만으로는 곧 구절을 이루지 못한다. 또, 만일에 글자만으로는 명사가 성립되지 못하나니 곧 글자만으로는 명사가 없는 법이다.
【문】 무슨 인연 때문에 명사 따위의 세 가지 자체를 건립하였는가?
【답】 말의 촉감을 증가하여 거기에서 생기는 느낌[受]을 알아서 받아 들이도록 하기 위한 때문이다.
【문】 명사란 무슨 내용인가?
【답】 갖가지 사물을 지목하여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는 뜻으로 하여금 갖가지 모양을 만들려는 것이다. 또는 말을 전달함에 필요한 서술이므로 명사라고 이름한 것이다.
【문】 구절이란 무슨 내용인가?
【답】 명사를 포섭하고 나열해서 필경에 모르는 내용을 밝혀 줌이니 그러므로 구절이라고 이름한다.
[말과 글]
【문】 글이란 무슨 내용인가?
【답】 명사와 구절을 밝히며 서술함이니 그러므로 글이라고 이름한다.
바가범(婆伽梵)께서 「말을 증가하며 말의 길을 증가한다」고 그와 같이 널리 말씀하신 것과 같나니,
말을 증가함이란, 온갖 무리들이 함께 세운 바 명사를 말한다.
말의 길을 증가함이란, 온갖 무리들의 하고 싶음이 능히 그것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말씨[訶]란, 저오라 서로 응하는 말과 각기 다른 그 지방의 말을 의미함이니, 그의 의지하는 바가 되므로 「저 길」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시설함이란, 하나의 법을 분석함에 많은 종류를 건립함이니, 저의 의지하는 곳이되므로 저 길이라고 이름한다.
하고 싶음이 바로 이말씨[訶]요, 별다른 하고 싶음이 없나니, 이 말씨가 곧 말과 시설함을 증가하는 길이다.
저 명신(名身)따위에 대략 여섯 가지 의지하는 곳이 있으니,
첫째는 법이요,
둘째는 의(義)요,
셋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요,
넷째는 시간이요,
다섯째는 수자[數]요,
여섯째는 처소이니,
저것을 광범위하게 분별함은 문소성지(聞所成地)에서와 같다.
[말의 종류]
말이란, 대략 여덟의 분류가 있나니, 상수어(上首語)와 미묘어(美妙語)따위인데 저 말이 상응(相應)과 내지 상위분자량(常委分資糧) 따위의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능히 바른 법을 연설한다.
상수어(上首語)란, 열반(涅槃)의 궁(宮)에 나아감으로 첫머리를 삼기 때문이다.
미묘어(美妙語)란, 맑고 아름다운 음성이기 때문이다.
현요어(顯了語)란, 글과 말이 좋기 때문이다.
이해어(易解語)란, 교묘한 변재로 연설하기 때문이다.
낙문어(樂聞語)란, 법과 의(義)를 이끌어 말하기 때문이다.
무의어(無依語)란, 남이 자기를 믿어 주기를 희망함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역어(不逆語)란, 말이 정도를 알기 때문이다.
무변어(無邊語)란, 선교(善巧)가 많기 때문이다.
위의 여덟 가지 말에는 대략 세 가지 덕을 갖추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나아가는 자리의 덕이니 처음 한 가지를 의미함이요,
둘째는 자체의 덕이니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함이요,
셋째는 가행(加行)의 덕이니 그 밖의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상응(相應)이란, 명신ㆍ구신ㆍ문신을 차례로 잘 배치함을 말한다.
또, 네 가지 도리에 의하여 함께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돕는 벗[助件]이란, 능히 차례를 이루기 때문이며,
따라 순응[隨順]함이란, 차례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며,
맑음[淸亮]이란, 문장과 구절이 분명하고 청정하기 때문이며,
유용(有用)함이란, 여러 사람의 마음에 잘 파고 들기 때문이며,
서로 합함[相稱]이란 대중의 모임에 알맞기 때문이며,
알맞아 순응(順應)함이란 법에 맞고 의(義)를 이끌고 때에 순응하기 때문이며,
상위분자량(常委分資糧)이란 항상 닦고 잘 닦기 때문에 상위(常委)라 이름함이요,
저 분(分)이란, 바른 견해(正見) 따위를 말함이요,
자량(資糧)이란, 바로 저의 자량이기 때문이다.
형상(相)이란, 온갖 쌓임[蘊]과 서로 응하며 온갖 계(界)와 서로 응하며.
온갖 처(處)와 서로 응하며 연기(緣起)와 서로 응하며.
처(處)ㆍ비처(非處)와 서로 응하며.
념주(念住)와 서로 응함인 그와 같은 따위의 서로 응하는 말을 혹 성문(聲聞)이 연설하며,
혹 보살이 연설하며 혹 여래가 연설하시나니 그를 형상이라 이름한다.
근기의 청함[機請]이란, 근기가 청하여 물음으로 인하여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에 다시 근기 다위의 차별로 스물 일곱가지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
그 중에 근기의 차별로 말미암아 나누어져서 두 가지를 이루나니, 둔한 근기와 영리한 근기이다.
행(行) 차별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탐행(貪行) 따위를 말함인데 성문지(聲聞地)에서 말한 것과 같다.
품류(品類)차별에 두 가지가 있으니, 집에 있는 이와 집을 떠난 이이며,
원(願)의 차별에 세 가지가 있으니, 성문과 독각과 보살이며,
가구와 불가구(可求不可求)의 차별에 두 가지가 있으니, 열반법과 열반 아닌 법이며,
방편(方便) 차별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이미 바른 법에 들어감과, 아직 바른 법에 들어가지 못함과,
장애가 있음과, 장애 없음과,
이미 성숙 됨과, 아직 성숙 못됨과,
구박(具縛=번뇌의 속박 갖춤)과, 구박 아님과, 속박 없음이며,
종류 차별에 두 가지가 있으니, 사람과 사람 아님을 말한다.
그와 같은 여섯 가지 글에 관한 것을 통틀어 넷으로 포섭할 수 있다.
첫째는 말한 바이니 명신 따위와 형상(相)의 부분을 말한이요,
둘째는 위할 바이니 근기가 청함에 해당한 스물 일곱 가지 보특가라를 말함이요,
셋째는 능히 말함이니 말을 의미함이요,
넷재는 연설하는 이니 부처님과 보살과 성문을 말한다.
그와 같은 온각 것과 여섯 가지 모양으로 모두 글을 밝혀 나타내나니 만일에 한 가지만이라도 감하면 뜻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아니한다. 능히 밝히는 뜻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므로 글이라 이름한 것이다.
9.4. 뜻
뜻이란, 대략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의 뜻(地義)이요,
둘째는 모양의 뜻이요,
셋째는 작의(作意)의 뜻이요,
넷째는 처소(處所)의 뜻이요,
다섯째는 과환(過患)의 뜻이요,
여섯째는 승리(勝利)의 뜻이요,
일곱째는 다스릴바의 뜻이요,
아홉째는 간략한 뜻이요,
열째는 광범한 뜻이다.
지(地)의 뜻이란, 대략 5지(地)가 있으니,
자량지(資糧地)ㆍ방편지(方便地)ㆍ견지(見地)ㆍ수지(修地)ㆍ구경지(究竟地)이다.
또, 광범하게 분별하면 17지(地)가 있으니,
오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ㆍ의지(意地)ㆍ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ㆍ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ㆍ삼마희다지(三摩呬多地)ㆍ유심지(有心地)ㆍ무심지(無心地)ㆍ문소성지(聞所成地)ㆍ수소성지(修所成地)ㆍ성문지(聲聞地)ㆍ독각지(獨覺地)ㆍ보살지(菩薩地)ㆍ유여의지(有餘依地)ㆍ무여의지(無餘依地)이다.
모양의 뜻(相義)이란, 다섯 가지라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제 모양(自相)이요,
둘째는 공통된 모양(共相)이요,
셋째는 임시로 세운 모양(假立相)이요,
넷째는 원인 모양(因相)이요,
다섯째는 결과 모양(果相)이다.
그와 같은 다섯 가지 모양을 만일 널리 분별하자면, 사소성지(思所成地)에서와 같다.
다시 다섯 가지 모양이 있으니,
첫째는 차별(差別) 모양이요,
둘째는 유가(瑜伽) 모양이요,
셋째는 달라지는 모양이요,
넷째는 염오(染汚) 모양이요,
다섯째는 청정한 모양이니,
그 다섯 가지 모양은 앞의 곳곳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다시 다섯 가지 모양이 있으니,
첫째는 설명할 바의 모양이요,
둘째는 능히 설명하는 모양이요,
셋째는 그 둘이 서로 붙는 모양이요,
넷째는 집착하는 모양이요,
다섯째는 집착 아니한 모양이다.
설명할 바의 모양이란, 모양(相) 따위의 다섯 법을 말함이니, 5법장(法藏)에서 말한 것과 같다.
능히 설명하는 모양이란, 곧 저 법의 의지가 되는 명사 따위를 말함이니, 모든 법의 자체와 차별을 설명하기 위한 모든 말이다.
그것이 또한 변계소집(遍計所執) 자체를 능히 나타낸다고 알아야 한다.
그 변계소집(遍計所執) 자체에는 많은 종류의 명칭이 있나니,
분별로 두루 계교하는바[遍分別所計]라고 이름하며,
화합으로 이룬 바[和合所成]라고 이름하며,
더 증가하는 모양이라고 이름하며,
또 허망하게 집착한 바라고 이름하며,
또는 말로 나타내는 바라고 이름하며,
또는 문자(文字) 방편이라고 이름하며,
또는 음성만 있을 뿐이라고 이름하며,
또한 체상(體相)이 없는 것이라고 이름 하나니,
그와 같은 따위의 차별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그 둘이 서로 붙는 모양이란, 능히 설명함과 설명할 바가 서로 서로 붙어 있으며 변계소집의 자체인 집착이 의지하였음을 말한다.
집착하는 모양이란, 끝 없이 헤매는 온갖 어리석은 사람의 변계소집 자체인 집착과 그리고 그 수면(隨眠=번뇌)을 말한다.
집착 아니한 모양이란, 진리를 이미 본 이는, 실다히 깨달아 알아서 변계소집의 모양과 그리고 저 습기(習氣)를 해탈하고 바르게 분별하여 알고 있음을 말한다.
그에 적응 하는대로 분별함은 사소성지(思所城地) 따위에서와 같다.
작의(作意)의 뜻이란, 일곱 가지 작의(作意)가 있으니, 요달하는 모양(了相)따위를 말함인데,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일 광범하게 분별하면 성문지(聲聞地)에서와 같다.
다시 10지(智)가 있으니 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ㆍ법지(法智)ㆍ종류지(種類智)ㆍ타심지(他心智)ㆍ세속지(世俗智)ㆍ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인데, 만일 광범하게 분별하면 성문지에서와 같다.
또 6식신(識身)이 있으니, 이른바 안식(眼識)과 내지 의식(意識)인데, 앞에서 대략 해석함과 같고,
만일 광범하게 분별하면, 오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와 그리고 의지(意地)에서와 같다.
또 아홉 가지 변지(遍知)가 있으니, 말하자면,
욕심의 계박에서 괴로움과 쌓임(集)을 보아 끊을 바를 끊는 것이 처음 변지(遍知)요,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계박에서 괴로움과 쌓임을 보아 끊을 바를 끊는 것이 둘째 변지요,
욕심 계박에서 사라짐(滅)을 보아 끊을 바를 끊는 것이 셋째 변지요,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계박에서 사라짐을 보아 끊을 바를 끊는 것이 넷째 변지요,
욕심 계박에서 도(道)를 보아 끊을 바를 끊는 것이 다섯째 변지요,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계박에서 도를 보아 끊을 바를 끊는 것이 여섯째 변지요,
순하분결(順下分結)을 끊는 것이 일곱째 변지요,
색애(色愛)가 없어짐이 여덟째 변지요,
무색애(無色愛)가 없어짐이 아홉째 변지인데,
만일 광범하게 분별하면 삼마희다지(三摩呬多地)에서와 같다.
또, 3해탈문(解脫門)이 있으니, 말하자면,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인데 이것도 역시 삼마희다지에서 광범하게 설명함과 같다.
그 중에서 모든 법을 응당 관찰하되,
몇 가지 작의(作意)로 생각해야 하느냐,
몇 가지 지혜로 알 바이냐,
몇 가지 인식(識)으로 인식할 바이냐,
몇 가지 변지로 두루 알 바이냐,
몇 가지 해탈문으로 해탈할 바이냐 라고 하여,
그와 같은 따위의 한량 없는 관문(觀門)으로써 모든 법을 응당 관찰해야 한다.
처소(處所)의 뜻이란,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사의처(事依處)요,
둘째는 시의처(時依處)요,
셋째는 보특가라의처(補特伽羅依處)이다.
사의처(事依處)란,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인 사의처(根本事依處)요,
둘째는 방편을 얻는 사의처(得方便事依處)요,
셋째는 남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의처(愍他事依處)이다.
근본인 사의처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좋은 갈래요,
둘째는 나쁜 갈래요,
셋째는 물러나 떨어짐이요,
넷째는 승진함이요,
다섯째는 유전(流轉)함이요,
여섯째는 적멸(寂滅)이다.
방편을 얻는 사의처에 열 두 가지가 있으니, 열 두 가지의 행(行)을 말한다.
첫째는 애욕 행(行)이요,
둘째는 떠난 행이요,
셋째는 착한 행이요,
넷째는 착함 아닌 행이요,
다섯째는 괴로움인 행이요,
여섯째는 괴로움 아닌 행이요,
일곱째는 물러남을 따르는 행이요,
여덟째는 승진함을 따르는 행이요,
아홉째는 염오(染汚)인 행이요,
열째는 청정한 행이요,
열 한째는 자신만 이로운 행이요,
열 둘째는 남도 이로운 행이다.
남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의처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애욕을 떠나도록 함이요,
둘째는 나퉈 보임이요,
셋째는 가르쳐 지도함이요,
넷째는 칭찬하고 책려함이요,
다섯째는 기쁘게 위안함이다.
그 중에서 좋은 갈래란, 인간과 천상을 말하며, 나쁜 갈래란, 지옥 따위를 말한다.
물러나 떨어짐이란,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남과 견줄 수 없는 것[不方地]과 남과 견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남과 견줄 수 없는 것이라 함은 이른바 저절로 수명이 감퇴됨이니 수명과 같아서 몸과 기력과 안락함과 변재에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
남과 견줄 수 있는 것(方地)이란,
족성(族姓)이 감퇴되고 자재로움이 한창인 것이 감퇴되며,
권속이 줄어지고 말은 엄숙하지 못하며,
슬기는 못되고 어두워져서 능히 증득하지 못하며,
미묘하고 광대한 빛깔ㆍ향내ㆍ맛ㆍ닿임과 온갖 수승하고 미묘한 수용할 물건에 대해서도 마음에 기뻐하거나 좋아하지 아니함을 말함이니,
그와 같은 따위를 물러나 떨어짐이라고 이름한다.
승진함이란, 그 물러나 떨어짐과 정반대되는 그에 적응한 것이면 곧 승진함이라고 이름한다.
유전(流轉)함이란, 곧 그 좋은 갈래와 나쁜 갈래에 물러나 떨어지거나 승진함을 말한다.
적멸(寂滅)이란, 유여의(有餘依=有餘涅槃)와 무여의(無餘依=無餘涅槃)인 적멸계(寂滅界), 즉 열반 세계를 말한다.
욕심 행[欲行]이란, 열 가지 욕심을 이끌어 말한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떠난 행(行)이란, 곧 저 누리고 있는 사실에 관하여 무상하다고 알고서 애욕을 싫어하고 짐을 떠나 계율을 받아 지니며, 감관 따위를 수호함을 말한다.
착한 행이란, 보시와 계율과 닦음인 유루(有漏)의 선행(善行)을 말한다.
착함 아닌 행이란, 세 가지 나쁜 행을 말한다.
괴로움인 행이란, 몸을 드러내고 옷을 입지 아니하는 그와 같은 따위를 말함이니, 나아가서는 광범하게 말하기도 한다.
괴로움 아닌 행이란, 받아 쓰는 것이 여법(如法)하고 얻은 바 생활품도 향략에 관한 것을 보리고 이른바 욕락에 관한 것을 받아씀과, 그리고 스스로 고행(苦行)함에 관한 것을 받아 쓰는, 즉 두 쪽에 치우치는 것을 멀리 떠나서 중도(中道)를 부지런히 행하고법에 의지하여 의발(衣鉢)과 바른 생활품을 구함이다.
물러남을 따르는 행이란, 그를 만일 행하면 승진함의 따위에 능히 장애가 됨을 말한다.
승진함을 따르는 행과 정반대 되는 것을 말한다.
염오인 세 가지가 있으니,
업잡염(業雜染)ㆍ번뇌잡염(煩惱雜染)ㆍ유전잡염(流轉雜染)을 말한다.
그러한 것들에 아홉의 근본된 구절이 있는데,
업잡염에는 세 구절이 있으니,
첫째는 탐냄이요, 둘째는 성냄이요, 셋째는 어리석음이다.
번뇌잡염에는 네 구절이 있으니 넷의 뒤바뀜[四顚倒]을 말한다.
유전잡염에는 두 구절이 있으니, 무명(無明)과 유애(有愛)이다.
왜냐하면 세 가지 착한 뿌리 아닌 것으로 말미암아 가지 가지 업잡염을 내어 일으키기 때문이며,
넷의 뒤바뀜으로 말미암아 가지 가지 번뇌잡염을 능히 내기 때문이며,
무명으로 말미암아 집을 떠난 이의 가지 가지 유전잡염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며,
유애(有愛)로 말미암아 집에 있는 이의 가지 가지 유전잡염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청청한 행이란, 3학(學)과 5지(地)가 있다.
이 3학 따위에 또한 아홉의 근본된 구절이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말하자면, 증상계학(增上戒學)과 증상심학(增上心學)에 포섭되는 탐냄 없음과 성냄 없음과 어리석음 없음은 자량지(資糧地)ㆍ방편지(方便地)에 있으며,
증상혜학(增上慧學)에 포섭되는 넷의 뒤바뀜이 없는 밝음[四無顚倒明]과 해탈(解脫)은 견지(見地)ㆍ수지(修地)ㆍ구경지(究竟地)에 있다.
자신만 이로운 행이란, 스스로 이익을 추구하는 행, 즉 자리행(自利行)을 말함이니,
성문(聲聞)과 독각(獨覺) 같은 이는 그가 비록 어느 때에 혹 이타행(利他行)을 일으키는 하나 그러나 본래에 목적했던 소원은 자신만 이롭게 하기 때문에 또한 자신만 이로움이라고 말한다.
남도 이로운 행이란, 이타행(利他行)을 말함이니, 부처님과 보살 같은 이는 필경에 한량없는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그리하여 그를 광범하게 말하였다.
애욕을 떠나도록 함이란, 여섯 가지 흑품(黑品=나쁜 것)인 온갖 행을 꾸짖고 헐뜯으며, 그의 허물을 보이어서 애욕을 떠나도록 함이다.
나퉈 보임이란, 백품(白品=희고 깨끗한 법)인 행을 받아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네 가지 진실한 도리를 나퉈 보임이다.
가르쳐 지도함이란, 이미 믿고 이해하게 된 것을 나퉈 보이어 학처(學處)에 대해서 바르게 받아 들이고 바르게 행하여 그로 말미암아 저에 자재로움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은 지금에 그와 같고 그와 같은 일을 응당 바르게 해야 하고 응당 따르고 배워야 한다」고 함이다.
칭찬하고 책려함이란, 저 중생이 만일 그 아는 바와 행하는 바와 얻은 바에 대하여 마음에 물러서려고 하면, 그때에는 그의 마음을 칭찬하고 책려하여 그 아는 바와 행하는 바와 얻은 바에 대하여 향상하는 힘이 생기게 함이다.
기쁘게 위안함이란, 저 중생이 법에 대하여 법을 따르고 용맹하고 바르게 행하면 곧 응당 사실대로 칭찬하여 그로 하여금 기뻐하도록 함이다.
또 다음으로 애욕을 떠나게 하며, 나퉈 보임이라 함은,
혹 애욕을 떠나도록 하고 나퉈 보이지 아니하며,
그로 하여금 애욕을 떠나도록 하여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말한 바 응당 하지 말라고 한 것을 그대는 앞으로 반드시 다시 해서는 안된다」고 하며,
혹 그를 두렵게 하여 말하되,
「그대가 만일 그런 일을 한다면 나도 당연히 할 줄을 알았으리라」고 하며,
혹 다시 그에게 요구하기를,
「그대가 만일 나의 친애하는 벗이라면 반드시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혹 다시 애욕을 떠나게 하지 아니하고 처중(處中)한 것 같이 보임은, 중생의 공덕과 허물을 보이기만 하고 그를 막아서 허물을 짓지 않게 하지 않음이며,
혹 또는 나퉈 보이기도 하고 또는 애욕을 떠나게 함이 있음은, 만일 그의 허물을 보이면 그로 하여금 허물을 멀리 떠나게 되리라는 여김이다.
가르쳐 지도함이라 함은, 처음에는 받아 배우지 아니했던 것을 그로 하여금 받아 배우도록 함이요,
칭찬하고 책려함이라 함은, 배운 뒤에 승진하지 못한 것을 그로 하여금 승진하게 함이요,
기쁘게 위안함이라 함은,
다섯가지 수승한 이익이 있나니
첫째는 그로 하여금 자기가 증득한 것에 마음을 결정하도록 함이요,
둘째는 그로 하여금 저 증득할 바 수승한 덕에 대하여 마음을 내어 나아가 구하도록 함이요,
셋째는 비방하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처중(處中=중간)에 머물도록 함이요,
넷째는 믿지 않는 이로 하여금 마음에 청정한 믿음을 내도록 함이요,
다섯째는 이미 믿는 이로 하여금 갑절이나 더 증가하도록 함이니,
만약 다른 사람의 착한 일을 기뻐하거나 위안함이 있다면 응당 그 사람은 하는 일이 증가되며, 능히 열의중천(悅意衆天=뜻이 기쁜 여러 천상)에 태어날 업을 얻을 것이요,
만일 목숨이 마친 후에는 저기에 날 적마다 항상 뜻에 기쁜 미묘한 음성를 듣게 되어 뜻에 기쁘지 않음이 없으리라.
또 다음은 애욕의 행으로,
혹 능히 좋은 갈래에 남을 얻음이 있나니, 애욕을 위해서 후생의 착한 업을 지음이요,
혹 나쁜 갈래에 남을 얻음이 있나니, 옳지 못한 법으로써 모든 애욕을 받아 들임이다.
떠난 행인 행을 만일 헐거나,
범하면 능히 나쁜 갈래에 가게되고,
만일 허거나 범함이 없으면 능히 좋은 갈래에 나게 되며,
그리고 적멸자량(寂滅資糧)을 짓는 착한 행은,
능히 좋은 갈래에 나게 되고 적멸의 자량이 되며,
착함 아닌 행은 나쁜 갈래에 나게 된다.
괴로움인 행은 사뙤 소견에 의하여 자신을 괴롭힌 것이므로 능히 나쁜 갈래에 나게 되며,
괴로움이 아닌 행은 능히 적멸의 자량이 되고 좋은 갈래에 나게 된다.
물러남을 따르는 행은 능히 물러나 떨어짐을 얻게 되며,
승진함을 따르는 행은 능히 승진함을 얻게 되며,
염오인 행은 유전(流轉)함을 능히 얻게 되며,
청정한 행은 능히 적멸을 증득하며,
자신만이 이로운 행은 오직 자기만 좋은 갈래에 나게 되거나 승진하게 되거나 적멸을 증득하게 되며,
남도 승진하고 적멸(寂滅=열반)을 증득한다.
그와 같은 사의처(事依處)의 셋 중 근본사의처[根本事依處]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좋은 갈래와 내지 적멸 그것이다.
방편을 얻은 사의처[得方便事依處]에 열 두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열 두 가지의 행[十二種行]이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의처[愍他事依處]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중생을 슬피하고 불쌍히 여기는 다섯 가지이다.
그 중에서 근본사의처(根本事依處)의 뛰어난 힘으로 말미암아 열 두 가지 행에 의함이니, 그 적응하는 대로 남들로 하여금 애욕을 떠나게 하며, 나아가서는 기쁘게 위안한다.
시의처(時依處)란,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과거의 언의(言依)요,
둘째는 미래의 언의(言依)요,
셋째는 현재의 언의(言依)니 경에서 광범하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보특가라의처(補特伽羅依處)란, 둔한 근기 따위의 스물 일곱 가지로 자주 갈래에 헤매는 중생[數取趣]을 말함이라고 알아야 한다.
위에서 말한 바, 「사의처(事依處)ㆍ시의처(時依處)ㆍ보특가라의처(補特伽羅依處)에 관해서는 부처님ㆍ바가범(婆伽梵)께서 그 세 곳[處]에 의지하여 성교(聖敎)를 유포 하셨기 때문에 의처(依處=의지하는 곳)라고 이름한 것이다.
과환(過患)의 뜻이란, 응당 헐뜯거나 싫어 할 것에 대해서, 헐뜯거나 싫어할 법과 중생을 말함이다.
승리(勝利)의 뜻이란, 간략하게 말하면 칭찬할만한 것에 대해서, 칭찬하는 법과 중생이 그것이다.
다스릴 바의 뜻이란, 대략 말하면 온갖 잡염(雜染)의 행(行)이다.
능히 다스리는 뜻이란, 온갖 청정한 행을 말함이니 탐냄은 바로 다스려야 할 것이요,
부정(不淨)은 바로 능히 다스림이며,
성냄은 바로 다스려야 할 것이요,
자비(慈悲)는 능히 다스림이니, 그와 같은 따위를 모두 그런식으로 알아야 한다.
간략한 뜻이란, 온갖 법을 연설함에 있어 공통적인 종류의 뜻을 말한다.
광범한 뜻이란, 온갖 법을 연설함에 있어 개별적인 종류의 뜻을 말한다.
또는 불요의경(不了義經)을 연설하기 때문이며, 요의경(了義經)을 연설하기 때문이다.
또 다음으로 간략한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명략(名略=명칭이 간략함)이요,
둘째는 의략(義略=의미가 간략함)이다.
광범한 뜻에도 역시 두 가지이니,
명광(名廣=명칭이 광범함)과 의광(義廣=의미가 광범함)인데,
바가범께서, 「사리자(倉利子)야, 나는 능히 바른 법을 광범하게 연설하며 간략하게 연설하지마는, 그러나 깨닫고 이해하는 이는 매우 보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저 경 중에 장행(長行)은 글이 광범하고 뜻은 간략하며, 가타(伽他)는 뜻이 광범하고 글은 간략하다.
그 열 가지 뜻을 거두기 위하여 중간에 온타남을 말하리라.
온갖 지(地)와 모양[相]과 작의(作意)와
의처(依處)와 덕과 덕 아님과
다스릴 바와 능히 다스림에 대한
간략함과 광범한 뜻을 알아야 하리.
또 다음으로 그와 같이 불교의 체성에 관하여 열 가지 뜻을 대략 설명하였으니,
법을 연설하는 이들은,
응당 성교(聖敎)에 의하여 열 가지가 구비되었는가,
구비되지 아니했는가를 찾아 보아야 한다.
이미 자신이 찾아서 안후에는 응당 남들을 위하여 연설해야 한다.
그와 같이 글 뜻의 체성을 세웠으니, 법을 연설하는 이는 응당 다섯의 형식[五相]을 따라 순응하여 온갖 불경(佛經)을 해석해야 한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응당 간략히 법요(法要)를 연설하고,
다음에는 응당 뜻을 해석하고,
다음에는 응당 힐난을 풀이하고,
다음에는 응당 차제(次第)를 분변해야 한다.
법이란, 대략 열 두가지가 있나니, 계경(契經) 따위의 12분교(分敎)를 말한다.
계경(契經)이란, 깁거나 꿰매는 뜻을 말함이니 흔히 장행(長行=줄글)으로서 직접 말하여 모든 법의 체성을 포섭한다.
응송(應頌)이란, 장행 뒤에 거듭 게송으로 된 것이며, 말한 바 불요의경(不了義經)을 대략 간추렸다.
기별(記別)이란, 대략 들어 말했던 바 뜻을 널리 분별하며, 또는 목숨을 마친 제자의 태어날 곳을 예언한 것이다.
풍송(諷頌)이란, 그저 하나의 구절로 말하거나, 혹 세 구절, 네 구절, 다섯 구절, 여섯 구절 따위로 말한 것이다.
자설(自說)이란, 누가 청하지 않더라도 말씀하신 것을 말함이니,
제자로 하여금 수승한 이해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며,
상품(上品)으로 교화할 중생을 수승한 진리에 편히 머물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냥 저절로 연설함을 자설이라고 이름하나니, 경에서, 「세존(世尊)께서 지금 저절로 말씀하신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인연(因緣)이란, 청하여 물음으로 인하여 연설하심을 말함이니,
경에서, 「세존께서는 어느 때, 몰력가라자(沒力伽羅子)로 인하여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법요(法要)를 연설하셨으며,
또 별해탈(別解脫)의 증상도(增上道)인 비나야(毘奈耶)에 있는 말씀에 의하시나니,
말하자면 그와 같고 그와 같은 인연에 의하며,
그와 같고 그와 같은 사실에 의하여 세존께서는 그와 같고 그와 같은 말씀을 연설하셨다」고 말한 것과 같나니, 그를 인연이라고 이름한다.
비유(譬喩)란, 비유가 있는 경을 말함이니, 비유로 인하여 은밀한 뜻이 밝아지기 때문이다.
본사(本事)란, 본생(本生)을 제외한 외에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연설한 것을 말한다.
본생(本生)이란, 자기 몸이 과거 세상에서 보살행(菩薩行)을 행할 적의 온갖 본생(本生)의 일을 말한다.
방광(方廣)이란, 보살도(菩薩道) 연설한 것을 말함이니, 十지(地)의 (四)보살행(菩薩行) 따위를 말함과 또는 여래의 140불공불법(不共不法)을 말한 것이다.
이를테면, 넷의 일체종청정(一切種淸淨)과 나아가는 일체종묘지(一切種淸淨)를 말한 것이다.
보살지(菩薩地)에서 광범하게 말한 것과 같다.
또는 법이 한량없기 때문이며 의미가 깊고 넓기 때문이며,
시간이 장구하고 멀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아주 용맹스럽게 3대겁(大劫), 아승기나(阿僧企那)를 경과해야 비로소 원만하게 성취하게 되나니,
그러므로 방광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희기한 법이란, 부처님이나, 그리고 제자들이 희기한 법 연설함을 말함이니, 모든 경에서 희유한 일로 인하여 말씀을 하시게 된 것과 같다.
논의(論議)란, 모든 경에 포섭되는 바 마달인가(摩因履本=本母)를 말함이다.
또는 모든 요의경(了義經)을 모두 마달리가라고 이름하나니,
이른바 여래께서 스스로 모든 법의 체상(體相)을 널리 분별하신 것이며,
또는 모든 제자들이 이미 성인의 발자취를 보고 자기의 증득한 것에 의하여 뒤바꿈 없이 모든 법의 채상을 밝혀 보인 것이 그것이니, 또한 마달리가라고 이름한다.
마달리가를 아비달마(阿毘達磨)라고도 이름하나니,
마치 세상의 온갖 글[書]과 산수와 시(詩)와 논(論)에 모두 본모(本母)가 있는 것과 같다.
경중에서 법의 모양을 연구함에 관하여 지니고 있는 말도 역시 그와 같다.
또, 세상에 만일 모든 글자와 본모(本母)가 없으면 글자가 밝게 알려질 수 없듯이,
그와 같은 12 분교중에서도,
만일 모든 법의 체상을 건립하지 아니하면 법이 분명해지지 않거니와,
만일 건립하면 모든 법의 제 모양과 공통된 모양이 모두 밝게 드러나며,
또는 다시 혼잡됨이 없는 법의 모양을 능히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곧 이 마달리가를 아비달마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 마달리가에 의하여 그 밖의 모든 경의 뜻을 해석한 것이면 또한 오파제사[鄔波第鑠]라고 이름한다.
9.5. 등기
등기(等起)란,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사등기(事等起)ㆍ시등기(時等起)ㆍ보특가라등기(補特伽羅等起)를 말한다. 의처(依處)가 다르기 때문인데 경에서,
「그와 같은 때에 그와 같은 보특가라를 위하여 그와 같은 행에 의하여 그로 하여금 애욕을 떠나도록 하여 내지 기쁘게 위안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9.6. 의미
의미[義]란,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체적인 의미요,
둘째는 차별된 의미이다.
전체적인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요의경(了義經)을 이끌어 말함이요,
둘째는 사법(事法)을 분별함이 완성됨이요,
셋째는 행(行)이요,
넷째는 결과[果]이다.
행(行)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삿된 행(行)과 바른 행을 말한다.
결과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나니, 삿된 행의 결과와 바른 행의 결과이다.
차별된 의미에도 또한 네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차별된 명칭을 분별함이요,
둘째는 자체상(自體相)을 분별함이요,
셋째는 명칭과 말을 풀이함이요,
넷째는 의문(義門)의 차별이다.
명칭과 말을 풀이함에는 다시 다섯가지 방편으로 말미암나니,
첫째는 형상으로 말미암아서요,
둘째는 자체로 말미암아서요,
셋째는 업으로 말미암아서요,
넷째는 법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다섯째는 인과(因果)로 말미암아서이다.
의문(義門)의 차별에도 또한 다섯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자체(自體) 차별이요,
둘째는 계(界) 차별이요,
셋째는 시(時) 차별이요,
넷째는 위(位) 차별이요,
다섯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 차별이다.
자체(自體) 차별이란,
물질[色] 자체에는 열의 색처(色處)의 차별이 있음을 말함이요,
느낌[受] 차별에는 3수(受)의 차별이 있음을 말함이요,
생각[想] 자체에는 여섯의 생각 차별이 있음을 말함이요,
지어감[行] 자체에는 셋의 지어감 차별이 있음을 말함이요,
인식[識] 자체에는 6식(識)의 차별 있음을 말함이니,
그와 같은 따위들을 자체 차별이라 한다고 알아야 한다.
계(界) 차별이란,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시(時) 차별이란, 과거ㆍ미래ㆍ현재를 말한다.
위(位) 차별이란, 차별이 스물 다섯 가지라고 알아야 하나니,
하(下)ㆍ중(中)ㆍ상(上)의 3위(位)와,
괴로움ㆍ즐거움ㆍ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님인 3위(位)와,
선ㆍ악ㆍ무기(無記)인 3위(位)와,
들음ㆍ생각함ㆍ닦음인 3위(位)와,
증상계(增上戒)ㆍ증상심(增上心)ㆍ증상혜(增上慧)인 3위(位)와,
안과 바깥인 2위(位)와,
능히 취함[能取]과 취할 바[所取]인 2위(位)와,
다스릴 바[所治]와 능히다스림[能治]인 2위(位)와,
현전(現前)과 현전 아닌 2위(位)와,
원인과 결과인 2위(位)를 말한다.
보특가라 차별이란, 앞에서 말했던 스물 일곱 가지라고 알아야 한다.
9.7. 힐난
힐난을 풀이함이란, 자기가 힐난을 시설했거나 만일 남이 힐난을 했거나 간에 모두 응당 풀이해야 한다.
힐난에는 대략 다섯 가지 원인이 있다고 아라야 한다.
첫째는 분명하지 못한 것을 분명하도록 하기 위한 때문이니,
「이 글에는 어떤 뜻이 있느냐」라고 말함과 같다.
둘째는 말이 서로 어기기 때문이니,
「무슨 까닭으로 바가범께서는 앞 뒤의 말이 다르냐」라고 말함과 같다.
셋째는 이치가 서로 어기기 때문이니, 드러나게 보여줌이 있는 것과 같다.
넷째는 도리가 서로 어기는 뜻을 4부정(不定)으로 밝혀 보이기 때문이니,
「무슨 까닭으로 바가범께서는 하 가지 의미에 대하여 가지 가지 다른 문(門)의 차별로 밝혀 보이시는가」라고 말함과 같다.
다섯째는 필경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니,
「안에 ‘나’의 자체에는 어떠한 모양이 있기에 항상 영원하고 변치 아니하여 제 성품에 바르게 머무르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은 그러한 따위들이다.
앞에 말한 다섯 가지 힐난에 대하여 그의 차례대로 응당 해석해야 하나니, 말하자면,
분명하지 못한 뜻에 대한 힐난을 방편껏 밝혀서 분명해지게 하여 말이 서로 어기는 힐난에 대해서도 따라 순응하여 회통(會通)해야 한다.
말이 서로 어기는 힐난에 대해서 따라 순응하여 희통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하여 부정(不定)으로 밝혀 보임에 대한 힐난과 필경에 볼 수 없는 힐난에 대해서도 역시 그와 같이 하며,
이치가 서로 어기는 힐난에 대해서는 혹 흑교(黑敎)의 도리로써 판결하며,
또 다시 네 가지 도리를 밝혀 보이며,
혹 원인과 결과와 서로 응하는 도리를 밝힌 것이니,
이 말은 결과를 밝힘이요, 혹 다시 원인을 밝힘이다.
또, 묻고 힐난함에 대해서는 응당 사기답(四記答)을 시설해야 하나니,
제1의 결정기(決定記)란, 이치대로 묻는 이를 위하여 뒤바뀜 없이 모든 법의 체상(體相)을 건립함을 말한다.
제2, 분별기(分別記)란, 이치대로 묻는 이와 이치에 어긋나게 묻는 이를 위하여 차별 형상을 열거 보임을 말한다.
제3, 반힐기(反詰記)란, 실 없는 이론과 다투는 이론을 그치고 쉬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4, 묵치기(默置記)란, 네 가지 원인이 있나니 체성이 없기 때문이며,
내지 저 형상은 법이 으레 그러하기 때문인데,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만일 그를 광범하게 분별하자면 사소성지(思所成地)에서와 같다.
또, 어떤 이가 만일,
「여래가 입멸(入滅)하신 후에는 있는 것이 되는가, 없는 것이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것은 세속체(世俗諦)와 승의체(勝義諦=出世間의 진리)의 이취이어서 모두 말할 수 없는 것이므로 묵치(默置)한다.
즉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나니, 승의체로 보면 여래가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음이요,
만일 세속체의 소의(所依)가 능의(能依)로 본다면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그리고 단멸과(斷滅果)는 진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가 입멸하신 후에 있다, 없다」라고 하는 따위를 말한 수 없다.
9.8. 차제
차제(次第)란,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원만함의 차제요,
둘째는 해석함의 차제요,
셋째는 능히 이루는[能成] 차제다.
그 셋의 차제를 밝히기 위하여 간략히 성교를 인용하겠다.
예를 들면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집을 떠날 때는 한창 아름다웠으니, 한창 제일 아름다웠고 가장 최고로 항상 아름다웠도다」라고 하신 그 말씀은 곧 한창 아름다움을 밝히심이니,
이는 원만함의 차제다.
또 다시 말씀하시기를,
「일찌기 우리 부왕 정반왕(淨飯王) 궁에 있을 적에는 얼굴이 젊고 단정했다」고 내지 널리 말씀하신 그 말씀도 곧 한창 아름다움을 밝히심이니,
이는 해석함의 차제다.
또 말씀하시기를,
「무슨 뜻에서 한창 아름다울 적에 집을 떠났는가? 늙음ㆍ병듬ㆍ죽음 따위의 법을 보므로 말미암아서」라고 하신 그 말씀은,
곧 능히 이루는 차제를 밝히심이다.
또, 다시 경에서 모든 법을 대략 말씀하실 적에,
「3수(受)는 괴로움ㆍ즐거움ㆍ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님이라」고 말씀하신 그와 같은 따위는 그 중에 오직 원만함의 차제만을 밝힘이니,
그 밖의 글귀로 말미암아 그 수(受)를 원만하게 하기 때문에 원만이라고 이름한다.
그 수(受)와 같이, 4성체(聖諦) 중에서도 먼저는 처음 구절[圓滿次第]을 설명하고,
그 후에 차례로 수순(隨順)하여 분석함[解釋次第]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
능히 이루는 차제에 두 가지가 있으니,
혹은 앞의 구절로써 뒤의 구절을 성립하며,
혹 뒤의 구절로써 앞의 구절을 성립하나니,
해석함의 차제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
9.9. 스승
스승이란, 열 가지 법을 성취해야만 설법하는 스승으로서 온갖 모양이 원만함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을 말함이다.
첫째는 법과 의(義)에 능함이니, 여섯 가지 법과 열가지 의(義)에 대하여 잘 이해하고 알음이요,
둘째는 능히 광범하게 연설함이니, 많이 듣고서 듣고 지니어 그 지식이 쌓여 모임이요,
셋째는 두려움 없음을 갖춤이니, 찰제리[刹帝利] 따위의 훌륭한 대중 가운데에서 바른 법을 연설하되, 겁냄과 두려움이 없고, 또는 그로 인하여 소리가 목 쉬거나 째지지 아니하고, 겨드랑에는 땀이 흐르지 않고 기억을 상실하지 아니함이요,
넷째는 말과 말씨가 좋고 교묘함이니, 말이 공교롭고 원만하고 8분(分)을 성취하고 말과 말씨가 구족되어 대중에 처해서 설법함이다.
어공(語工)이 원만함이라 함은, 글과 구절에 서로 응하여 돕는 유들이라고, 내지 널리 말한 것이 그것이다. 8분(分)을 성취함이라 함은, 상수(上首)와 미묘(美妙)따위를 말한다고 내지 널리 말한 것이 그것이다.
다섯째는 좋은 방ㅍ현으로 말함이니, 스무 가지 좋은 방편으로 연설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느 때에나 은근하고 정중하다는 따위이다.
여섯째는 법과 법을 따라 행함을 갖추 성취함이니, 말을 듣는 것만으로 최고를 삼는 것이 아니라 요는 말과 같이 행함을 말한다.
일곱째는 위의(威儀)가 구족함이니,
바른 법을 연설할 때에 손과 발이 어지럽지 아니하고,
머리를 흔들거나 눈썹을 움직이지 아니하며,
입과 얼굴과 4지(肢)가 고치거나 변함이 없으며,
나아가고 멈추고 가고 오는 것이 단정 엄숙하고 점찮함을 말한다.
여덟째는 용맹하고 부지런함이니,
항상 듣지 못했던 법 듣기를 좋아하고,
이미 들은 법에는 더욱 더 분명하고 청정하게 하고,
유가(瑜伽)를 버리지 않고 작의(作意)를 버리지 아니하여,
마음에 안의 사마타(奢摩他)를 버리지 않음을 말한다.
아홉째는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음이니, 말하자면 4중(衆)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널리 연설하되 몸과 마음에 게으름이 없음이다.
열째는 참는 힘을 갖춤이니, 꾸짖거나 조롱하거나 가책하되 끝내 보복하려고 하지 아니하며, 만일 경멸함을 당하더라도 분내거나 슬퍼하지 아니하고 내지 널리 연설함을 말한다.
9.10. 설중
설중(說衆)이란, 5중(衆)에 처해 있으면서 여덟가지 말을 연설함을 말함이니,
무엇이 여덟가지인가?
첫째는 기쁘고 즐길만한 말이요,
둘째는 잘 개발하는 말이요,
셋째는 힐난을 잘 풀이하는 말이요,
넷째는 잘 분석하는 말이요,
다섯째는 잘 순응하여 드는 말이요,
여섯째는 그 외의 증거를 인용하는 말이요,
일곱째는 훌륭한 변재의 말이요, 여덟째는 종취(宗趣)를 따르는 말이다.
5중(衆)이라 함은,
첫째는 집에 있는 대중이요,
둘째는 집을 떠난 대중이요,
셋째는 청정하게 믿는 대중이요,
넷째는 사뙤고 원망하는 대중이요,
다섯째는 중간의 평범한 대중이다.
기쁘고 즐길만한 일이란 다섯 가지 모양이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증득한 원인이 있음이요,
둘째는 비유가 있음이요,
셋째는 어업(語業)이 구족함이요,
넷째는 글과 글자와 구절이 아름다움이요,
다섯째는 말과 말씨가 분명함이다.
잘 개발하는 말이란 깊고 은밀한 뜻을 열어 보여 분명하게 나타나도록 하고 거치르게 드러난 뜻을 분변하여 깊게 함이다.
힐난을 잘 풀이하는 말이란, 능히 다섯 가지 힐난을 잘 해석함이니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고 알아야 한다.
잘 분석하는 말이란, 밤낮의 법을 분석하되 하나의 도리를 증가하여 열 가지에 이르며, 혹 다시 그를 초과하여 잘 분별하며, 「하나의 법에 의하여 두 가지, 세 가지 인 4념주(念住) 따위를 건립함」과 같고, 내지 널리 말한 그것이다.
잘 순응하여 드는 말이란, 오직 계경(契經)ㆍ응송(應頌) 따위의 12분교(分敎)만을 잘 밝혀 해석하고, 끝내 사도(邪道)와 이론(異論)을 이끌어 들이지 아니함이다.
그 외의 증거를 인용하는 말이란, 딴 경을 이끌어서 자기가 말한 것을 성립 시킴이다.
훌륭한 변재의 말이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따라 뜻을 잘 분별함이다.
종취(宗趣)를 따르는 말이란, 마달리가(摩怛履迦)에 이해서 분별하여 분명히 보이며, 혹 그 외의 뒤바뀜이 없이 말하는 이가 말한 바 말과 교리에 의하여 이치대로 해석함을 말한다.
다시 다음 집에 있는 대중을 대해서는, 응당 온갖 나쁜 행을 헐뜯고 착한 행을 칭찬함에 의하여 그 앞에서 설법하여 그들로 하여금 악을 그치고 선에 나아가 닦도록 하며,
집을 떠난 대중을 대해서는, 응당 증상계(增上戒) 따위의 3학(學)에 의하여 그 앞에서 설법하여 그들로 하여금 빨리 닦아서 원만하게 하며,
청정하게 믿는 따위의 대중을 대해서는, 응당 성교(聖敎)의 광대한 위덕에 의하여 그 앞에서 설법하여 그 차례대로 그들이 갑절이나 증가하도록 하며,
중간 평범한 대중들로 하여금 청정한 믿음을 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