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똑같은 질문을 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아랫 글을 보고 질문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빙빙 돌았던것도, 기드온과 300명이 항아리와 나팔을 들고 가서 승리했던 것 모두 인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A를 했기 때문에 A'라는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A라는 것을 함으로 전혀다른 B'라는 결과가 나와버리니,
이것들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으로 연결됩니다.
1. 이것을 믿음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아브라함, 라합의 믿음의 행동)
2. 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인간의 행동이 결부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우박으로 치시는 것처럼, 인간의 개입없이 행하시면 안되는 것인지요?
8월에 올렸던 질문들 입니다. 당시에 지웠던 것들인데, 다시 올려봅니다.
제목:설교에 있어서 적용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게시자 : 이근호
코멘트내용 :
1. 우선 설교 자체가 적용입니다. 설교할 수 있는 여건과 기회가 곧 하나님의 복음적용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남을 가르칠려고 해서는 아니되고 본인이 하나님에게 배우고 지시받는 자세로 설교에 임하면 그것이 곧 예수님께서 설교자를 앞장 세워 진리를 그 시대에 적용시키는 방식이 됩니다.
2. 신약성경은 예수님 자체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명령어만 따로 떼내어 적용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아니되고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를 증거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듣는 교인들이 자기 자신과 예수님의 현존을 직접 부딪힐 생각을 하지 않고 '명령어'만 따로 떼내어서 축복을 받아내는 수단으로 활용해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계산을 하면서 설교를 듣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예수님 앞에 서 봅시다"고 외쳐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현존과 실재성을 안 믿어지는 자들이 천국에서 뒤돌아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벌리시는 분류작업니다.
제목 :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게시자 : 이근호
코멘트내용 :
자신의 몸이 복음 증거용으로 활용당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꿈과 뜻은 따로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허락받지 못하고 매사가 십자가 복음 증거용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고난입니다. 이 고난으로 인하여 그동안 꿈꾸었던 모든 것이 악마와 그 하수인을 위한 마지막 파티장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제목 : 창세전 - 시간 - 창세전입니까?
게시자 : 이근호
코멘트내용 :
히브리서 1:10에 보면 기존의 창조 구조는 와해됩니다. 따라서 전과 후 라는 것이 의미없습니다. 마치 수박 알맹이기 빼먹고서는 껍질은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제목 : 예수님의 주님되심은 무엇으로 증거됩니까?
게시자 : 이근호
코멘트내용 :
1. 예수님의 주되심은 죄를 대속하셨기에 정립된 자리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예수님이 주되심으로 느껴지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으로 느낄 때입니다.
2. '의미없음'이라고 제가 제 일에 판정을 내리는 것도 십자가 앞에서 의미없는 일이 됩니다. 이것 안하고 저것 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의미 있는 것,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없는 저것 대신에 의미없는 이것 한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제목 : 믿음의 주체되신 예수님과 "나는 믿나이다"의 간극
게시자 : 이근호
코멘트내용 :
그것도 다른 사람을 고발하기 위해 그 사람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일을 벌려놓고 믿음을 칭찬하는 겁니다. 따라서 칭찬받은 그 사람은 결코 자신이 만들어낸 믿음이라는 것을 예수님 앞에서 자랑질을 못하는 겁니다.
제목 : 믿음의 주체되신 예수님과 "나는 믿나이다"의 간극
게시자 : 이영욱
코멘트내용 :
믿음을 칭찬하시는 것은 어떻게 볼수 있습니까?
제목 : 믿음의 주체되신 예수님과 "나는 믿나이다"의 간극
게시자 : 이근호
코멘트내용 :
1,2,3 에 대한 답 : 나무래야 우리 자신의 믿음이 거짓됨을 압니다. 우리 육에서 나와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육적 믿음'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 우리 죄로 죽었던 그 예수님의 믿음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늘 예수님 앞에서 자기 부인이 되지요.
제목 :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면, 물주는것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게시자 : 이근호
코멘트내용 :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지금 활동하고 있음을 드러내보이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이 가릴 수도, 막일 수도, 금지할 수도, 훼방할 수도 없는 형편임을 보이시는 겁니다.
제목 : 신학공부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게시자 : 이근호
코멘트내용 :
오락입니다. 교회 다니고, 교회 봉사하고, 농사 짓는 사람이 죽기 살기로 농사짓는 것과 체조선수가 죽기 살기로 체조하는 것도, 수영선수가 청춘을 다 바쳐 수용하는 것도 오락입니다. 사람은 주어진 세월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오락이 아닌 것은 태어난 것과 여자가 출산하는 것, 그리고 죽은 것입니다. 즉 저항될 수 없이 몸 자체에서 발생되는 것은 오락이 아니며, 오락이란 자아(주체)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 하는 짓이 다 오락입니다. 그냥 죽으면 되는데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단어의 의미는 오직 예수님의 몸의 주체할 수 없는 작업에 의해서만 제공된 것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서"(고전 15:10)
제목 : 그리스도 안
게시자 : 이근호
코멘트내용 :
자신이 돌로 처 죽어야 될 죄인인 것을 알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선하심이 언약으로 주어지기에 구약 때 그 '언약 안'이 신약에서는 '예수 안'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는 그것보다 더 큰 선하심은 없습니다. 새언약 안(=예수님 안)에 있는 자이기에 이런 혜택을 입는 겁니다. 그리고 '항상'이라고 하셨는데 '항상'이라는 느낌이 우리 자신을 분석할 때나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저녁 이맘 때면 '항상' 집에 있다"라고 식입니다. 즉 "나는 저녁 이맘 때면 내가 집에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인식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붙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사람들이 쓰는 개념으로 쓰지를 않습니다. "보라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 (마 28:20)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흔적이나 증거물을 찾지를 마시고 그냥 믿어지면 그만인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진실인 것을 내쪽에서 '인증샷' 가질 생각은 믿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것입니다.
제목 : 요한일서, 성도의 증거물
게시자 : 이근호
코멘트내용 :
예수님 안에만 영생이 있기에 그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어떻게 자기 안으로 집어넣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 요한일서입니다. 성도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성도를 다루시는 방식에 초점이 있습니다.
제목 : 요한일서, 성도의 증거물
게시자 : 이영욱
코멘트내용 :
그것이 어려움인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성령님이 어떻게 너희를 생명안으로 집어넣었는가를 알게하기 위하여"라고 말했다면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요.
제목 : 요한일서, 성도의 증거물
게시자 : 이근호
코멘트내용 :
그렇게 되면 성경 내용이 하나님 위주가 아니라 사람 위주가 될 공산이 있습니다.
제목 :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증거하는 것에 대하여
게시자 : 이근호
코멘트내용 :
예수님은 타인도 알아서 새롭게 조성해나가십니다. 말씀 증거를 통해서 그 주변에 배제된 타인들, 불신자를 새롭게 조성하십니다. 들판이 졸지에 주택단지로 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28) '나'와 '저희'는 우리 인간이나 우리 자신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이 스스로 정해나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