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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론 제12권
36) 팔해탈처(八解脫處)
8해탈(解脫)이라 하는 것은 색계에서 색을 관하는 것이 첫 번째의 해탈이며,
안으로 색에 대한 생각이 없이 외부의 색을 관하는 것이 두 번째의 해탈이다.
청정한 해탈을 신증(身證)하여 노닐 곳이 성취되는 것이 세 번째의 해탈이다.
또한 다음에는 비구가 모든 색에 대한 생각을 넘어서서 상대가 있는 생각[對想]이 소멸되고 뒤섞인 생각[雜想]을 하지 아니하여 무량공(無量空) 그 무량공의 세계에 노닐 곳이 성취되는 것이 네 번째의 해탈이다.
또한 다음으로 비구가 모든 무량공을 넘어서서 이 무량식처에서 노닐 곳이 성취되는 것이 다섯 번째의 해탈이다.
또한 다음에는 비구가 모든 무량식처(無量識處)를 넘어서서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 노닐 곳이 성취되는 것이 여섯 번째의 해탈이다.
또한 다음에는 비구가 모든 무소유처를 넘어서서 비상비불상처에서 노닐 곳이 성취되는 것이 일곱 번째의 해탈이다.
또한 다음으로 비구가 모든 비상비불상처의 세계를 넘어서서 상념이 소멸한 정수를 신증(身證)하여 노닐 곳이 성취되는 것이 여덟 번째의 해탈이다.
[문] 여덟 가지 해탈에 어떤 성품이 있는가?
[답] 처음 세 가지 해탈에는 탐욕하지 아니하는 성품이 있다.
다음 무량공처와 무량식처와 무소유처와 비상비불상처의 해탈에는 4음의 성품이 있다.
다음 멸진정해탈(滅盡定解脫)에는 행음(行陰)과 서로 호응하지 아니하는 성품이 있다.
그 경계를 말한다면 처음 세 가지 해탈은 욕계에 속해 있는 해탈인 동시에 또한 색계에도 속하는 해탈이다.
다음 무량공처와 무량식처와 무소유저의 해탈은 혹 무색계에 연계되기도 하고 혹 연계되지 아니하기도 한다.
다음 비상비불상처의 해탈과 멸진정해탈(滅盡定解脫)은 무색계와 연계되는 해탈이다.
다음 그 경지를 말한다면,
처음 두 가지 해탈은 초선의 경지와 2선의 경지며,
다음 정해탈(淨解脫)은 근본4선의 경지며,
무량공처의 해탈은 공처의 경지며,
무량식처의 해탈은 식처의 경지며,
무소유처의 해탈은 무소유처의 경지며,
비상비불상처의 해탈은 곧 비상비불상처의 경지며,
멸진정해탈도 비상비불상처의 경지다.
다음 그 근거를 말한다면,
처음 세 가지 해탈은 욕계에 근거하는 것이며,
무량공처해탈에서 비상비불상처해탈에 이르기까지는 삼계에 근거하는 해탈이며,
멸진정(滅盡定:想滅)해탈은 욕계와 색계에 근거하는 해탈이다.
그 수행을 말한다면,
처음 두 가지 해탈은 부정관(不定觀)을 수행하고
정해탈(淨解脫)은 정관(淨觀)을 수행한다.
무량공처해탈과 무량식처해탈과 무소유처해탈은 혹 열여섯 가지 행을 하기도 하고, 혹 열여섯 가지 행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비상비불상처해탈과 멸진성해탈은 행에서 벗어나는 해탈이나.
그 연을 말한다면,
처음 세 가지 해탈은 색음(色陰)과 연하고,
공처해탈에서 비상비불상처해탈에 이르기까지는 4제와 연하고,
멸진정해탈은 연이 없다.
그 의지(意止)를 말한다면,
처음 세 가지 해탈은 몸의 의지이고,
공처해탈에서 비상비불상처해탈에 이르기까지는 세 가지 의지이며,
멸진정해탈은 법(法)의 의지이다.
그 지혜를 말한다면,
처음 세 가지 해탈은 비록 본질적으로 지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등지(等智)와 서로 호응한다.
다음 공처해탈에서 무소유처의 해탈에 이르기까지는 혹 여섯 가지 시혜와 호응하기도 하고 혹 그렇지 아니하기도 한다.
다음 비상비불상처의 해탈도 하나의 등지이다.
다음 멸진정해탈은 지혜가 아니다.
그 정을 말한다면,
처음 세 가지 해탈은 본질적으로 정이 아니며 또한 정과 서로 호응하는 것도 아니다.
다음 공처해탈에서 무소유처해탈에 이르기까지는 혹 정(定)에 들기도 하고 혹 정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다음 비상비불상처의 해탈과 멸진정해탈은 정이 아니다.
그 받는 감각[痛]의 측면을 말한다면,
처음 두 가지의 해탈은 희근(喜根)ㆍ호근(護根)의 두 근(根)과 서로 호응한다.
다음 정해탈(淨解脫)에서 비상비불상처의 해탈에 이르기까지는 오직 한 가지 호근(護根)과 서로 호흡하고,
멸진정해탈은 받는 감각과 서로 호응하지 아니한다.
그 받는 감각[痛]의 측면을 말한다면,
처음 두 가지의 해탈은 희근(喜根)ㆍ호근(護根)의 두 근(根)과 서로 호응한다.
다음 정해탈(淨解脫)에서 비상비불상처의 해탈에 이르기까지는 오직 한 가지 호근(護根)과 서로 호흡하고,
멸진정해탈은 받는 감각과 서로 호응하지 아니한다.
[문] 8해탈은 과거라 말해야 하는가, 현재라 말해야 하는가, 미래라고 말해야 하는가?
[답] 과거라고도 말해야 하며, 현재라고도 말해야 하며, 미래라고도 말해야 한다.
[문] 과거의 연이라 해야 하는가, 미래의 연이라 해야 하는가, 현재의 연이라 해야 하는가?
[답] 일곱 가지의 해탈은 마땅히 과거에 연하고 미래에 연하고 현재에도 연한다고 말해야 하며, 마땅히 세간의 연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멸진정해탈은 연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문] 자기의 생각에 연하는 것이라 말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의 생각에 연하는 것이라 말해야 하는가, 생각에 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가?
[답] 일곱 가지의 해탈은 자기의 생각에 연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의 생각에 연하고 생각에 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멸진정해탈은 연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문] 그 이름이 연한다고 해야 하는가, 이치에 연한다고 해야 하는가?
[답] 일곱 가지의 해탈은 마땅히 이름과 연하고 이치와 연한다고 말해야 하나,
멸진정해탈은 연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해탈의 성품이다.
이미 종류와 모습과 본래의 성품을 말하였으니 마땅히 그 행을 설명하여야 한다.
[문] 왜 해탈이라 하며 해탈에 어떤 이치가 있는가?
[답] 어떤 문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이 해탈의 이치이다.
[문] 만약 문(門)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이 해탈치 이치라고 한다면, 어떤 해탈이 어떤 일에 있어서 그 일로 들어가는 문으로 향하지 않는 것인가?
[답] 처음 두 가지 해탈은 색계와 욕계에서 그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향하지 않는 것이고,
다음 정해탈(淨解脫)은 부정(不淨)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향하지 아니하는 것이고,
공처(空處)해탈에서 비상비불상처의 해탈에 이르기까지는 낮은 경지로 이어지는 문으로 향하지 아니하는 것이며,
멸진정(滅盡定)해탈은 두 가지 일에서 문으로 향하지 아니한다.
첫째는 마음이 영원히 멸하며,
두 번째는 문으로 향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마음이 영원히 멸한다는 것은 모든 마음이 단절되는 것이며,
문으로 향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모든 함께하는 연과 이어지는 문으로 향하지 아니하는 것 이다.
[문] 앞에서 설명한 ‘안으로 색에 대한 생각이 없이 외부의 색을 관한다’라고 하는 것은, 안의 색에 대한 생각이 없어지면, 곧 외부의 색을 관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외부의 색만 관하는 것이지, 내부에 색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가?
만약 안의 색에 대한 생각이 없어지면, 곧 외부의 색을 관하게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동시에 두 가지 마음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동시에 두 가지 마음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마음이 갈라진 것[破]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마음이 갈라졌다고 한다면, 어떻게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 존재한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또 만약 외부의 색만 관할 뿐 내부에 색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한다면, 이것은 경선의 내용과 어떻게 상통된 수 있는가?
경전에서는 말씀하시기를,
“안의 색에 대한 생각이 없이 외부의 색을 관한다”고 하셨다.
[답] 외부의 색을 관할 뿐 내부에 색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것은 없다.
[문] 만약 외부의 색을 관할 때 안의 색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것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경전의 말씀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안의 색에 대한 생각이 없이 외부의 색을 관한다”라고 하였다.
[답] 이 경전의 말씀은 선근(善根) 및 선근을 이루는 방편을 말씀하신 것이다.
가령 “안의 색에 대한 생각이 없다”라고 한 것은 선근을 이루는 방편을 말씀하신 것이고,
“외부의 색을 관한다”라고 한 것은 근본적인 선근을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중에서 말한 것은 먼저 헤아려서 분별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은 먼저 헤아려 분별한 다음에,
‘나는 마음 안에 색에 대한 생각이 없으니 마땅히 외부의 색을 관해야 한다’라고 헤아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안의 색에 내한 생각이 없이 외부의 색을 관한다’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부정(不淨)한 생각이 다하게 되면, 이것은 욕계의 색입(色入)의 경계인가, 아닌가?
만약 부정한 생각이 다하면 이것이 욕계의 색입의 경계라고 한다면, 이것은 경전에 나오는 존자 아나율(阿那律)의 이야기와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그 내용을 설명한다면 존자 아나율이 숲속을 유행하고 있을 때, 네 사람의 절묘한 천녀(天女)가 가장 묘한 색으로 화해서 존재 아나율이 있는 곳을 찾아와, 존자 아나율의 발아래 절하고 한쪽에 머물면서, 존자 아나율에게 말했다.
“아나율 존자시여, 우리들 네 사람의 묘한 천녀는 네 가지 일에 있어서 훌륭히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재능이 있습니다.
무엇이 네 가지 일인가?
하늘 세계의 색[天色]ㆍ하늘 세계의 옷[天衣]ㆍ하늘 세계의 장식[天飾]ㆍ하늘 세계의 음악[天樂]이 그것입니다.
아나율 존자시여, 우리들 네 사람의 묘한 천녀에게 마음에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면 하늘의 네 가지 일과 하늘 세계의 다섯 가지 욕망으로 화하여 함께 같이 즐겨봅시다”라고 하였다.
이때 존자 아나율은 문득 생각하였다.
‘나는 지금 4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차라리 부정(不淨)한 생각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곧 그 부정을 관하는 것이 좋겠다.’
그때 존자 아나율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곧 부정한 생각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총 네 사람의 묘한 천녀(天女)들의 추한 면을 관하였으나 끝내 부정관(不淨觀)에서 해탈을 얻을 수 없었다.
그때 존자 아나율은 네 사람의 천녀들에게 말하기를,
“여러 누이들은 모두 푸른빛이 되어라”라고 하였다.
[문] 왜 존자 아나율은 모든 누이들에게 모두 푸른빛이 되라고 하였는가?
[답] 존자 아나율은 생각하기를,
‘푸른빛은 지극히 좋은 빛깔인데 만약 모두가 같은 한 빛깔이 된다면 혹 부정관에서 해탈을 얻을 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네 사람의 묘한 천녀들은 존자 아나율이 시키는 말을 듣고 모두가 푸른 빛으로 화하여 존자 아나율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운고 장난쳤다.
이에 존자 아나율은 아직 부정관에서 해탈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존자 아나율은 다시 말하기를,
“여러 누이들은 모두 노란 빛깔이 되고 모두 붉은 빛깔이 되어라”라고 하였다.
[문] 왜 존자 아나율은 모든 누이들에게 모두 노란 빛깔이 되고 붉은 빛깔이 되라고 말하였는가?
[답] 존자 아나율은 생각하기를,
‘인연을 관하고 수행할 때 혹 그로부터 부정관에서 해탈을 얻을 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네 사람의 묘한 천녀들은 존자 아나율이 하는 밀을 듣고, 모두가 노란 빛깔ㆍ붉은 빛깔로 화하여 존자 아나율 앞에서 노래하며 춤추고 웃고 장난쳤다.
이에 존사 아나율은 아직도 부정관에서 해탈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존자 아나율은 다시 말하기를,
“여러 누이들은 모두가 흰 빛깔이 되어라”라고 하였다.
[문] 왜 존자 아나율은 네 사람의 묘한 천녀에게, “여러 누이들은 모두 흰 빛깔이 되어라”라고 말하였는가?
[답] 존자 아나율은 생각하기를,
‘흰 빛깔은 더러운 것을 관할 때 지극히 쉽게 관(觀)이 뒤따라 일어날 수 있는 빛깔이다.
만약 흰 빛깔이 된다면 혹 부정관에서 해탈을 얻을 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네 사람의 묘한 천녀들은 존자 아나율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 모두가 흰 빛깔ㆍ붉은 빛깔로 화하여 존자 아나율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웃고 장난쳤다.
이에 존자 아나율은 아직도 부정관에서 해탈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존자 아나율은 생각하기를,
‘이 색은 극히 묘한 색이로구나‘라고 생각하고,
이 생각을 하게 되자 곧 모든 근(根)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만약 부정한 생각이 다하게 되는 것이 욕계의 색입(色入)의 경계라고 한다면 이 경전의 내용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답] 존자 아나율이 비록 부정관에서 해탈을 언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오직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부정관에서 능히 해탈을 얻을 수 있고, 부처님ㆍ벽지불ㆍ성문승의 경우는 끝없이 제도(濟度)를 얻게 된다.
[문] 부처님의 몸에서도 부정(不淨)을 알 수 있는가, 없는가?
[답] 부처님의 몸이란 지극히 묘하고 지극히 좋아서 모든 부정관을 얻은 사람이 모두 와서 부처님의 몸에서 부정을 관한다 하더라도 끝내 부처님의 발가락 하나에서도 부정한 점을 관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지극히 묘한 부처님의 얼굴에서 부정한 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오직 부처님만이 부처를 관하시고 부정을 해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정을 생각한다고 하는 것에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개별적인 모습[別相]을 관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총체적인 모습[總相]을 관하는 것이다.
개별적인 모습을 관하는 사람은 끝내 부처님의 몸에서 부정을 해득할 수 없다.
그러나 총체적인 모습을 관하는 사람은 혹 부처님의 몸에서 부정을 알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 밖에 부정상(不淨想)에는 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허물어진 색[壤色]을 생각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행(行)에 연유하여 부정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허물어진 색에서 부정을 생각하게 되는 경우는 끝내 부처님의 몸에서 부정을 해득할 수가 없으나,
행에 연유하여 부정을 생각하게 되는 경우는 혹 부처님의 몸에서 부정을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라고 하였다.
[문] 정해탈(淨解脫)은 색으로 색을 관하는 것인가?
안의 색에 대한 생각이 없이 외부의 색을 관하는 것인가?
만약 색으로 색을 관한다고 한다면, 첫 번째 해탈과 세 번째 해탈에 어떤 차이가 있으며,
만약 안의 색에 대한 생각이 없이 외부의 색을 관하는 것이라 한다면, 두 번째 해탈과 세 번째 해탈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정해탈이라 하는 것은 안의 색에 대한 생각이 없이 외부의 색을 관하는 것이다.
[문] 만약 정해탈이 안의 색에 대한 생각이 없이 외부의 색을 관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해탈과 세 번째 해탈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명칭이 곧 차별이다.
하나는 두 번째 해탈이고 또 하나는 세 번째 해탈이라 부른다.
또 경지에도 역시 차이가 있다.
두 번째 해탈이란 초선(初禪)ㆍ2선의 경지며, 정해탈이라 하는 것은 근본4선의 경지다.
또 병폐를 제거하는 측면에서도 역시 차이가 있다.
두 번째 해탈은 색욕(色欲)을 제거하지만. 정해탈은 부정을 제거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 번째 해탈은 부정을 관함에 연유하여 결(結)이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이고,
정해탈이라 하는 것은 청정한 것을 관함에 연유하여 역시 결이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부정을 관함에 연유하여 결이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지만,
청정한 것을 관하고도 결이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이는 곧 기이한 일에 해탈한다.
두 번째 해탈과 세 번째 해탈은 이것이 차이점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여기서 정해탈은 지극히 묘하고 그 연도 역시 지극히 묘하다고 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정해탈은 지극히 묘하고 연도 지극히 묘한 것인가?
[답] 이것은 보통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청정하고 결백하여 스스로 기뻐하면서 묘천(妙天)에서 은 사람만이 능히 얻을 수 있는 경지다.
경의 설명에 따르면,
“한 기이한 비구가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와서 부처님의 발아래 절하고 물러나서 한쪽에 앉았다.
부처님은 그를 위하여 묘법을 설하셨으니 정진을 권유하시되 올바르게 정진케 하고자 가없는 방편을 연하여 정진을 권유하시고 잠자코 앉아 계셨다.
이에 그 비구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말씀을 듣고 마음속으로 큰 기쁨을 품게 되어 자리에서 일어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오른편 어깨를 드러낸 채 두 손을 마주잡고 부처님께 아뢰기를,
“유일하신 부처님이시여, 저에게 거처할 장소를 내려주시기 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아난 존자가 부처님 뒤에서 손에 불자(拂子)를 잡고 악귀의 침입을 털어내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그때 뒤를 돌아보시며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손님으로 온 비구가 한 승방에 함께 머물러 묵어가게 하라.”
부처님께서 그렇게만 말씀하시자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 손님으로 온 비구를 위하여 한 승방에 손님으로 온 비구와 함께 거처하게 되었다.
이때 손님으로 온 비구가 아난 존자에게 말씀드렸다.
“아난 존자시여, 나를 위하여 짐짓 지극하게 이 승방을 쓸고 물 뿌려서 모든 더럽고 나쁜 물건을 제거하고 비단깃발과 덮개를 걸어놓고 온갖 이름난 향을 사르고 갖가지 꽃을 뿌리고 넓고 큰 침상을 마련하여 극히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이에 아난 존자는 이 말을 듣고 나서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조금 전 어두울 때 찾아온 나그네 비구가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습니다.
‘아난 존자시여, 나를 위하여 이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물 뿌리고 모든 더럽고 나쁜 물건을 제거하고 비단 깃발과 덮개를 걸어놓고 온갖 이름난 향을 사르고 갖가지 궂을 뿌리고 넓고 큰 침강을 마련하여 극히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아난아, 속히 그 나그네 비구를 위하여 그의 말대로 해 주어라.”
바사닉왕(波斯匿王)이 아난 존자에게 항상 공양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게 되자 곧 바사닉왕의 왕궁을 찾아가서 온갖 갖출 물건을 갖고 와서 곧 그 방을 청소하고 물 뿌리고 모든 더럽고 나쁜 물건을 제거하고 비단 깃발과 덮개를 걸어 놓고 많은 이름난 향을 사르고 온갖 꽃을 뿌리고 넓고 큰 침상과 이부자리를 마련하여 극히 부드럽게 해놓았다.
아난 존자는 모든 것을 갖추어 마련하고 나서 그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에 나그네 비구는 그 승방 안에서 곧 그날 밤에 정해탈이 일어났고 3명[宿命明ㆍ天眼明ㆍ漏盡明]을 증득하고 6신통을 얻어 8해탈을 순서따라 혹 거꾸로 자유자재하게 터득하였고 새벽 아침에 신족통(神足通)을 일으켜 허공을 타고 떠나갔다.
이에 아난 존자가 이튿날 아침에 그의 방을 잦아가 보니 빈 방만 보이고 나그네 비구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에 아난 존자는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가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어제 어두울 때 온 나그네 비구가 그와 같은 명령을 한 다음 그 나그네 비구는 방을 비우고 떠나갔습니다.”
이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아난아, 그 나그네 비구를 잘못 알아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아난아, 그 나그네 비구는 그 방안에서 곧 그날 밤에 정해탈이 일어나 3명을 증득하고 6신통을 얻고 8해탈에 있어서 순차로 혹은 거꾸로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르러 새벽 아침에 허공을 타고 떠나갔느니라.
아난아, 그 나그네 비구는 청정 결백하여 스스로 기뻐하며 묘천(妙天) 가운데서 이곳에 찾아왔다.
만약 갖가지 곱급할 물건을 갖추지 아니하였더라면 그 비구는 끝내 그러한 해탈의 공덕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이야기로써 이는 보통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고, 오직 청정결백하고 스스로 기뻐하며 묘천 가운데서 온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경지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탈(淨解脫)은 극히 묘하고 인연도 역시 묘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무상정수(無想正受)와 멸진정수(滅盡正受) 이와 같은 두 가지 삼매는 모두 무심(無心)의 경지인데, 왜 멸진정수 해탈이라 내세우고, 무상정수는 해탈로 내세우지 않는가?
[답] 용맹하게 부지런히 수행하며 많은 방편을 만드는 것 그것을 해탈이라 내세우고
용맹하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수행하지 아니하며 많은 방편을 만들지 아니하는 것 그것은 해탈로 내세우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찍이 행하지 못하였고, 일찍이 얻지 못하였고, 일찍이 굴리지 못하였던 경지 그곳에 해탈이란 이름을 건립한다.
일찍이 행하였고, 일찍이 얻을 일이 있고, 일찍이 굴린 일이 있는 경지 그곳에는 해탈이란 이름을 건립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함께하지 아니하는 독자적인 경지 그곳에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우긴[고?],
함께하는 경지 그곳에는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우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법만을 얻을 수 있고 그 밖에 다른 법을 얻는 것이 아닌 것 그곳에 해탈이란 이름을 건립하고,
이 법 및 그 밖의 다른 법을 함께 얻는 경지 그곳에는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우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문] 무상정수도 이 같은 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답] 증거가 있다.
경의 설명에 따르면, 무상정수를 얻은 사람이 그 삼매에서 깨어나서 그가 멈추어 쉬고 있던 곳을 왕래하는데, 가사와 발우를 지니고 부드럽고 온화만 말을 갖추고 음식에 절제가 있었다.
이때 한 장로(長老)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오묘한 지혜와 관(觀)을 얻은 사람이었다.
그가 이 비구를 관하고 생각하기를,
‘저 비구는 극히 묘한 비구이며 위의와 예절을 갖추고 있으니 내가 한번 그가 어떤 공역을 얻었는지 관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고,
그를 관하고 나서 그가 범부(凡夫)이며 오직 무상정수만을 얻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이를 알고 나서 그는 삼매에서 일어나 그 비구를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의 이 경지는 묘한 경지가 아니다.
그대는 불법 가운데 있는 지극히 묘한 선근에서 벗어났으며 외도들과 같은 수행을 하고 있으니 그것을 무엇에 쓰겠는가?
이것은 곧 빨리 버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스님은 극히 많은 방편을 구하여 본래의 마음을 버리고자 하였으나 끝내 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내용을 설명하자면, 그 스님은 마침내 물러서서 굴복하기에 이르렀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끝내 본래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목숨이 끝나자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났다.
그런 까닭에 이것으로 무상정수는 이 법 가운데서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만이 얻을 수 있는 경지, 범부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경지 그곳에 해탈이란 이름이 건립된다.
오로지 범부가 얻는 경지로서 성인이 얻는 경지가 아닌 곳 그곳에는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우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두 가지 일 때문에 해탈이라 부른다.
첫째는 공연(共緣)이 상속하는 문으로 향하지 아니하는 일이고,
두 번째는 마음의 작용이 모두 끊어지는 일이다.
저 무상정수의 경우에는 공연이 상속하는 문으로 향해가지 아니할 수 없고 또한 마음의 작용을 모두 끊을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멸진정수(滅盡正受)에는 해탈이란 이름을 건립하지만,
무상정수(無想正受)에는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우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문] 왜 무색정(無色定)에는 구족하게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우고 4선의 경지에서는 구족하게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가?
[답] 이 4선의 경지란 거칠고 커서 볼 수 있는 경지다. 그런 까닭에 구족하게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우지 아니한다.
무색계의 정수는 지극히 미세하여 볼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구족하게 해탈이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이라는 것은 갖가지 모습이 있어 같은 모습이 아니고 서로 비슷하지도 아니하다. 그런 까닭에 그 모두에게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우지 아니한다.
그러나 무색계의 정수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은 한 모습이며 서로 비슷하게 닳았다. 그런 까닭에 그 모두에게 갖추어 해탈이란 이름을 건립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에는 많은 공덕이 있고 많은 묘법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 모두에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우지 아니한다.
그러나 무색정수라 하는 것은 많은 공덕이 없으며 많은 묘법도 없다. 그런 까닭에 그 모두에 해탈이란 이름을 건립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에는 온갖 선근으로 장엄된 경지다. 그런 까닭에 그 모두에게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울 수 없다.
그러나 무색정수라 하는 것은 갖가지 선근으로 장엄된 경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 모두에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선의 경지에서의 해탈은 오로지 유루(有漏)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경지에 해탈이란 이름을 내세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무색정(無色定)의 해탈은 유루ㆍ무루의 해탈이다. 그런 까닭에 그 모든 것에 해탈이란 이름을 건립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왜 4선의 경지의 해탈은 오로지 유루이며 무색정의 해탈은 유루ㆍ무루의 해탈인가?
[답] 4선의 경지에서의 해탈이라 하는 것은 알음알이[解]를 얻어 사유(思惟)하는 경지다.
무색정의 해탈이란 진실을 사유한다.
그런 까닭에 4선에서의 해탈은 오로지 유루이며,
무색해탈(無色解脫)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한 것이다.
[문] 무슨 이유로 8해탈 가운데서 정해탈(定解脫)과 멸진정(滅盡定)해탈은 신증(身證)한다고 하고 다른 해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답] 다른 해탈도 역시 그렇게 말한다.
《대인경(大人經)》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아난아, 만약 비구가 8해탈을 얻게 되면 순차로 흑은 거꾸로 자유자재하게 신증을 이루게 된다”라고 하셨다.
이것으로 다른 해탈의 경우도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문] 그것은 한 경전에서만 8해탈을 신증(身證)한다고 말한 것인데, 왜 다른 경전에서는 오직 두 가지 해탈만을 신증한다고 하였는가?
[답] 그 두 가지 해탈은 용맹하고 부지런한 수행으로 많은 방편을 만든다.
그런 이유 때문에 두 가지 해탈은 신증한다고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두 가지 해탈은 경계의 가장자리를 말한 것이다.
정해탈이라 하는 것은 색계의 가장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멸진정해탈이라 하는 것은 무색계의 가장자리를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두 가지 해탈은 경지의 가장자리를 말한 것이다.
정해탈이라 하는 것은 4선의 경지의 끝자리를 말한 것이고,
멸진정해탈이라 하는 것은 비상비불상처(非想非不想處)의 끝 경지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해탈이라 하는 것은 청정함을 관함으로 연하여 부처님께서 신증한다고 말씀하셨으며,
멸진정 해탈이란 심법(心法)이 아닌 것이기에 법신(法身)에서 생기고 심(心)에서 생기지 않으며, 법신의 세력에서 생기고 마음의 세력에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신증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대인경》에서 ‘8해탈을 신증하게 되면 노닐 곳이 성취된다’고 하신 것은 그 모든 노닐 곳이 바로 두 가지 해탈의 경지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정해탈과 멸진정해탈을 신증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설명한다면 이것이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8해탈을 말씀하시어 방향으로 심으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왜 부처님은 8해탈을 말씀하시어 방향으로 삼는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답] 중생들을 친화하기 위한 까닭에 교화를 받는 사람이 있게 되고 교화에 응해서 방향의 이름을 듣게 되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교화를 위해서 짐짓 8해탈을 말씀하시어 방향으로 삼으신 것이다.
나머지 다른 경전의 경우에도 교화를 위하여 진리를 말씀하시고 그것을 방향으로 삼으신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교화를 위하여 짐짓 8해탈을 설법하시어 그것을 방향으로 삼으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경선에 원인도 있고 연(緣)도 있다.
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바사닉(波斯匿)왕이 코끼리를 잡는 사람에게 알리기를,
‘너희들 코끼리를 잡는 사람들은 속히 들코끼리를 잡는 대로 나에게 알려라’라고 하였다.
이에 코끼리를 잡는 사람들이 왕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 빈 들판에 이르러 코끼리를 잡아 돌아와서 왕에게 아뢰었다.
‘오직 존귀하신 임금님께 보고합니다. 이미 코끼리를 삽아 얻게 되었으니 임금님의 처분에 따르겠습니다.’
이에 왕은 코끼리 조련사에게 알렸다
‘너 코끼리 조련사는 속히 이 들코끼리를 훈련하되 훈련이 끝나거든 돌아와서 나에게 알려라.’
그 코끼리 조련사는 왕의 명령을 받고 나서 들코끼리를 거느리고 이를 훈련시켜 훈련을 마친 다음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오직 존귀하신 임금님이시여, 명령하신 코끼리를 조련하는 일은 지금 이미 끝났습니다.’
이에 왕은 이 코끼리를 시험하기 위하여 코끼리 조련사에게 이를 몰게 하여 왕이 이 코끼리를 타고 성을 나섰다.
그랬더니 그 코끼리는 멀리 큰 암 코끼리의 무리를 보고 나서 날뛰며 달려 그쪽으로 향하였다.
코끼리 조련사는 있는 힘을 다하여 제어하였지만 코끼리를 제어할 수 없었고 그 코끼리에 덮여있는 고랑쇠가 끊어졌으나 이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이에 왕은 코끼리 조련사에게 말하였다.
‘너는 속히 이 코끼리를 돌려보내서 나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
이에 코끼리 조련사는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제가 있는 힘을 다하여 제어하려 하였으나 코끼리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임금과 코끼리 조련사는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들은 숙세(宿世)의 인연이 있어 때마침 코끼리가 나무 사이를 달려가게 되었다.
이에 코끼리 조련사가 나뭇가지에 매달리면서 그 나뭇가지를 임금에게 건네주었다.
이에 임금과 코끼리 조련사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땅으로 내려오고 코끼리는 날뛰며 달려가서 무리 속에 뛰어들었다.
이때 임금이 코끼리 조련사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떻게 정생왕(頂生王)에게 이같이 훈련받지 못한 코끼리를 타게 하였는가?’
그러자 코끼리 조련사가 두 손을 앞에 모아 공손히 대답하였다.
‘대왕이시여, 노여움을 거두어 주소서. 이 코끼리는 극히 잘 훈련된 코끼리입니다.’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어떻게 극히 잘 훈련되었다는 것을 아는가?’
이에 코끼리 조련사가 대답했다.
‘저 코끼리는 이미 인간이 먹는 음식에 습관이 들어 그가 빈 들판의 음식을 먹을 경우 그는 목숨을 보존할 수 없습니다.
그의 욕망이 멈추게 되면 스스로 되돌아올 것이니, 되돌아오게 되면 곧 임금님이 보시는 곳에서 훈련을 하겠습니다.’
이윽고 들코끼리는 욕망이 멈추게 되자 도로 왕성(王城)으로 되돌아왔으며,
코끼리 조련사는 코끼리를 거느리고 임금이 있는 곳에 이르러 코끼리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에게 만들어줄 물건이 있다.
너는 움직이거나 자리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
만약 참지 못할 경우에는 나는 곧 너를 다시 본래 있던 곳과 같은 곳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자 그 코끼리는 지혜가 있어 곧 그렇게 해도 좋다고 승낙하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다시 본래 있던 곳을 쳐다보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이에 코끼리 조련사는 큰 무쇠로 만든 목사슬을 코끼리의 목에 채우고 크게 달군 무쇳덩어리를 그의 정수리 위에 붙여 마치 벗나무 껍질을 태우듯 코끼리의 정수리를 불로 태웠으나 그 코끼리는 감히 움직이거나 자리를 바꾸지 못하였다.
이에 코끼리 조련사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보십시오. 코끼리의 훈련은 이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앞서 있었던 일은 누구의 허물인가?’
조련사가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그것은 마음의 허물입니다.’
이에 임금이 물었다.
‘왜 마음을 재어하지 못하는가?’
‘오직 형상만을 훈련할 수 있을 뿐 마음을 제어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자 코끼리 조련사는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두 손을 모아 얼굴은 기원정사쪽을 향해 바라보면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대왕이시여, 그 부처님이 이곳 기원정사의 급고독원에 머물고 게십니다. 그 분은 마음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에 왕은 부처님께 마음이 쏠려 부처님을 만나뵙고자 하였고 임금과 코끼리 조련사는 본래 타고 갔던 코끼리에게 되돌아와서 코끼리를 타고 곧 기원성사의 급고독원을 찾아갔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백천의 대중ㆍ권속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서 미묘한 법을 설법하고 계셨다.
이에 임금은 코끼리에서 내려 걸어서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렀고 부처님은 이때 방편으로 비유하여 설법을 하시니 이는 모든 성문(聲聞)ㆍ벽지불(辟支佛)이 랄 수 있는 법문이 아니었다.
임금은 점차 더욱 가까운 곳에서 부처님을 뵈려 하였고 이때 부처님은 이들을 보시고 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코끼리 조련사가 코끼리를 몰아 한 방향으로 달려가게 하여도 혹 동서남북과 여러 방향으로 달려가게 되고,
말 조련사가 말을 훈련하고 몰아서 한 방향으로 달려가게 하여도 혹 동서남북과 여러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게 되고,
소를 모는 사람이 소를 훈련시켜 몰아서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게 하여도 혹 소가 동서남북과 여러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게 된다.
그러나 위없는 보살과 사람을 몰고 가는 스승인 부처는 사람들을 몰고 모든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여기서 모든 방향이라 하신 것은 색계에서 색을 관하는 경지가 첫 번째 방향이고 마침내 멸진정해탈에 이르러 신증하여 노닐 곳이 성취되기에 이르기까지의 여덟 가지 방향을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경전에서 8해탈로 방향을 설명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해탈이 어찌하여 방향과 같은가?
[답] 다 같이 여덟 가지 일인 까닭에 방향으로 표현한 것이다.
해탈의 경지도 여덟 가지가 있고 방향도 역시 여덟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문] 방향의 경우 열 가지 방향이 있지만 해탈은 여덟 가지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 같이 여덟 가지 일이 있기에 방향으로 표현하였다고 말하는가?
[답] 그 코끼리 조련사는 능히 여덟 방향으로 코끼리를 몰 수 있지만, 끝내 아래 위 방향으로 코끼리를 몰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다같이 여덟 가지의 일이 있기에 방향으로 해탈을 표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치 코끼리가 어떤 방향을 연하여 달려가듯 이와 같은 이치로 교화를 받는 사람도 연 때문에 해탈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존자 구사는 설명하기를,
“해탈과 방향의 관계는 세 가지 일은 같고, 세 가지 일에서는 차이와 등급이 다르다.
세 가지 일이 같다고 하는 것은,
가령 코끼리가 달려가지 아니하면 향하는 방향을 제어할 수가 없다.
부처님도 역시 그렇다. 교화에 연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해탈의 결지가 눈앞에 나타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마치 코끼리가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고 다른 방향으로는 달려가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은 이치로 부처님도 교화를 받은 사람이 한 가지 해탈만 눈앞에 나타나게 하고 다른 해탈은 나타나지 아니하게 하는 것과 같다.
또 코끼리가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서 다른 방향과는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처럼,
부처님도 교화를 받는 사람을 위하여 한 가지 해탈만 눈앞에 나타나게 하시면, 다른 해탈과는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 일이 같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 세 가지 일에서는 차이가 나고 등급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코끼리는 한 방향에 이르지 아니하면 제어할 수가 없으나,
부처님은 한 지방에 머물고 계셔도 교화를 받는 사람을 위해서는 먼 곳의 사람까지 해탈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게 하실 수 있다.
또 코끼리는 몰아서 한 방향으로 달려가게 하면 다른 방향으로는 달려가게 할 수 없으나,
부처님은 교화를 받는 여덟 경지의 사람을 위해서 동시에 8해탈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게 하실 수 있다.
또한 코끼리는 몰아서 한 방향으로 달려가게 하면 다른 방향과는 멀리 떨어지게 되지만,
부처님은 교화를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가지 해탈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게 되면 다른 해탈도 가까운 시일 안에 익히고 배울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이 세 가지 일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8해탈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