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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21권
34. 초품 중 8배사의 뜻을 풀이함
1. 8배사
8배사(背捨)23)라 함은,
안에도 색이 있고 밖으로도 또한 색을 관[內有色外亦觀色]하나니 이것이 첫 번째 배사이고,
안에는 색이 없고 밖으로만 색을 관[內無色外觀色]하나니 이것이 두 번째 배사이며,
맑은 배사를 몸으로 증득[淨背捨身作證]하나니 이것이 세 번째 배사이며,
4무색정(無色定) 및 멸수상정(滅受想定)24)의 이들 다섯을 합하여 8배사가 된다.
배(背)25)란 5욕(欲)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며, 그 집착하는 마음을 여의기 때문에 배사라 부른다.
[첫 번째 배사]
안팎의 색(色)을 무너뜨리지 않고, 안팎의 색상(色相)을 멸하지 않으면서 이 부정(不淨)한 마음으로써 색을 관(觀)하나니, 이것을 첫 번째 배사라 부른다.
[두 번째 배사]
안의 색을 무너뜨리고 안의 색상(色相)은 없앴으나 밖의 색을 무너뜨리지 않고 밖의 색상은 없애지 않으면서 이 부정한 마음으로써 바깥의 색을 관하나니, 이것이 두 번째 배사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가 부정함을 관찰하는 것이니,
첫째는 안을 관하고 밖을 관하며,
두 번째는 안은 보지 않고 바깥만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에게는 두 가지 행(行)이 있기 때문이니, 곧 탐애하는 행[愛行]과 소견의 행[見行]이다.
탐애가 많은 이는 쾌락에 집착해 대개 밖에 있는 결사(結使)26)의 행에 속박되고,
소견이 많은 이는 대개 신견(身見)27) 등의 행에 집착해 안으로 결사에 속박을 당한다.
이 때문에 탐애가 많은 이는 밖의 색이 부정함을 관하고,
소견이 많은 이는 자기 몸이 부정함을 관해 무너뜨리고 깨뜨려버린다.
또 수행하는 이는 처음에는 마음이 아직 미세하지 못하여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매어 두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안팎의 관(觀)을 점점 익히고 조복시켜 부드러워지면,
능히 안으로 색상을 무너뜨리고 다만 밖을 관하는 것이다.
【문】 만일 안으로 색상이 없다면 누가 밖을 관하는가?
【답】 이것은 득해의 길[得解道]이지 실제의 길[實道]은 아니다. 수행자는 미래에는 죽어 불에 타거나 벌레에게 파 먹히며 흙 속에 묻혀 모두 닳아 없어지는 것을 생각한다.
만약에 현재에도 역시 이 몸을 분별해 작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찰한다. 이것을 일컬어 안으로는 색상이 없고 밖으로 색을 관한다고 하는 것이다.
【문】 두 가지의 승처(勝處)28)에서는 안팎의 색을 보고,
여섯 가지의 승처에서는 다만 밖의 색만 볼 뿐이며,
한 가지 배사(背捨)에서는 안팎의 색을 보고,
두 가지 배사에서는 다만 밖의 색만 볼 뿐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안으로는 색상을 무너뜨리면서 밖의 색은 무너뜨릴 수 없는가?
【답】 수행자는 눈으로 이 몸에 죽음의 모습[死相]이 있음을 보고, 미래에 죽는 모습을 취하여 그로써 지금의 몸을 관찰한다.
곧 바깥의 4대(大)29)는 소멸되는 모양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 없다고 관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밖의 색이 무너진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또 색계(色界)30)를 여의는 이때에도 역시 밖의 색을 보지 않는다.
[세 번째 배사]
맑은 배사를 몸소 증득한다[淨背捨身作證] 함은, 부정한 것에 대해 청정하다고 관찰[淨觀]한다는 것이니, 8승처(勝處)31)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앞의 여덟 가지 일체처(一切處)에서는 청정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및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을 관하는데, 청색을 관찰하기를,
마치 푸른 연꽃과 같이, 마치 금정산(金精山)과 같이, 마치 우마가꽃[憂魔伽華]32)과 같이, 마치 참으로 푸른 바라내옷[婆羅捺衣]33)과 같이 하며,
황색ㆍ적색ㆍ백색을 관찰하면서 각각의 색을 따름도 역시 이와 같다.
이것을 통틀어 맑은 배사[淨背捨]라 한다.
【문】 만일 통틀어 그것이 맑은 배사라면 일체처(一切處)는 설명하지 않아야 하리라.
【답】 배사는 처음 행하는 것이고, 승처는 중간에 행하는 것이며, 일체처는 오랫동안 행할 때의 것이다.
부정관(不淨觀)34)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정함의 관찰[不淨]이고,
둘째는 청정함의 관찰[淨]이다.
부정함의 관찰 가운데에는 두 가지 배사와 네 가지 승처가 있으며,
청정함의 관찰 가운데는 하나의 배사와 네 가지 승처와 여덟 가지 일체처가 있다.
【문】 수행자가 부정한 것을 청정하다고 여긴다면 뒤바뀐 것이라 하거늘, 맑은 배사[淨背捨]라는 관이 어떻게 뒤바뀌지 않은 것이겠는가?
【답】 여색(女色)의 부정함을 망령되게 보아 청정하다 한다면 이것을 뒤바뀐 생각이라 한다.
하지만 맑은 배사라는 관은 일체가 실로 청색(靑色)이라고 관찰하며, 광대하기 때문에 뒤바뀐 것이 아니다.
또 마음을 조복하기 위하여 정관을 오래 익히면 부정관은 마음으로 싫어하게 된다.
이 때문에 정관을 익히는 것은 뒤바뀐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안에서는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수행하는 이는 먼저 부정함을 관찰하되, 몸의 안팎에 있는 부정함을 따라 마음을 관찰 가운데 매어 두는데, 이때 싫증을 내면서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진다.
곧 자기 자신도 놀라 깨치면서,
“나에게는 눈이 없다. 이 몸도 이와 같거늘 어찌 집착을 일으키겠는가”라며,
마음을 가다듬고 진실로 관하여 다시는 착오가 없게 된다.
마음이 이미 조복되어 유연해지고 몸의 거죽과 살과 피와 골수의 부정함을 제거하여 물리치고자 하니, 오직 흰 뼈만이 남아 있게 되어 마음을 뼈로 된 사람[骨人]에게 매어 둔다.
만일 마음이 바깥으로 내닫고 흩어지면 그것을 거두어 돌아오게 한다.
깊이 마음을 거두는 까닭에 뼈에서 백골의 유광(流光)을 보게 되는데, 마치 흰 마노[珂]나 조개[貝]와 같이 능히 안팎의 모든 물건을 비추게 된다.
이것이 맑은 배사[淨背捨]의 첫 문이 된다.
그런 뒤에 뼈로 된 사람이 흩어져 소멸하는 것을 관하는데, 다만 뼈의 광명만을 보고 바깥의 정결한 색상(色相)을 취한다.
또 금강ㆍ진주ㆍ금ㆍ은 등의 보물이나 혹은 청정한 땅 혹은 맑은 물이 마치 연기나 장작도 없는 정결한 불과도 같으며,
혹은 맑은 바람에 먼지가 없게 되면 모든 청색은 마치 금정산(金精山)과 같고,
모든 황색은 첨복화(瞻蔔花)와 같고, 모든 적색은 붉은 연꽃과 같고, 모든 백색은 마치 흰 구름 등과 같아진다.
이러한 모양을 취하여 마음을 정관(淨觀)35)에 매어서 이 모든 색을 따르면 저마다 청정한 광휘가 있게 된다.
이때 수행하는 이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껴 온몸에 두루 채우니, 이것을 맑은 배사라 한다.
청정함을 연(緣)하는 까닭에 맑은 배사라 하며,
두루 온몸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까닭에 몸으로 증득한다[身證]고 한다.
이런 마음의 즐거움을 얻고 5욕을 등져 버리면 다시는 기뻐하거나 즐거워함이 없나니 이것을 배사라 한다.
그러나 아직 번뇌가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에 혹은 결사(結使)의 마음이 생겨나고 따라서 청정한 색(色)에 집착하기도 하는데, 다시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런 집착을 끊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정관(淨觀)은 마음의 생각[心想]에서 생겨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환술사[幻主]가 환술로 만들어낸 물건을 관찰해 그것이 자기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는 마음에 집착을 내지 않은 채 능히 반연되는 대상을 따르지 않는 것과 같다.
이때에 배사(背捨)는 변하여 승처(勝處)라 부르게 된다.
비록 정관에 있어서는 뛰어나다 하더라도 아직 광대하지는 못하다.
이때 수행하는 이는 도리어 청정한 모양[淨相]을 취하여 배사의 힘 및 승처의 힘을 이용하는 까닭에 이 청정한 지(地)의 모양을 취하고 점차로 시방의 허공에 두루 차게 한다.
수(水)ㆍ화(火)ㆍ풍(風) 역시 그러하다.
청색 모양[靑相]을 취하여 점차로 광대하게 하면서 역시 시방의 허공에 두루 차게 한다.
황색ㆍ적색ㆍ백색도 역시 그와 같다.
이때 승처는 다시 변해 일체처가 된다.
이 세 가지 일은 하나의 의미이니, 옮겨가고 변하여 세 가지의 이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문】 이 세 가지 배사와 여덟 가지 승처와 열 가지 일체처는 곧 실관(實觀)인가, 아니면, 득해의 관[得解觀]인가?
만일 실관이라면, 몸에는 피부와 살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백골로 된 사람만을 본다는 것인가?
또 서른여섯 가지 물건[三十六物]36)이 합해서 몸을 이루거늘 무엇 때문에 분별해서 산관(散觀)하는가?
4대(大)는 각각 스스로의 모양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세 가지 대는 없애고 지대(地大)37) 하나만을 관하는가?
네 가지 색깔이 모두 청색은 아니거늘 무엇 때문에 모두 청색의 관만을 짓는가?
【답】 실관도 있고 득해관도 있다.
몸의 모양은 실로 청정하지 않은 것이므로 이것은 실관이 된다.
바깥 법에서는 청정한 갖가지 색상(色相)이 있으니, 이것은 실로 정관(淨觀)이 되지만,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은 것은 바로 실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약간의 청정한 것으로써, “일체가 모두 청정하다”고 널리 관하고,
이 한 웅큼의 물을 취하여 “일체는 모두 물이다”고 두루 관하며,
이 약간의 푸른 모양을 취하여 “일체가 모두 푸르다”고 두루 관하니,
이러한 것들은 바로 득해관으로 실관이 아니다.
[4무색의 배사]
네 가지 무색의 배사38)는 4무색정(無色定) 중의 관찰과 같으니, 배사를 얻고자 해서 먼저 무색정으로 들어간다.
무색정은 바로 배사의 첫 문이니, 색이라는 대상39)을 등져버리면 한량없는 허공처(虛空處)40)이다.
【문】 무색정도 역시 그러하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범부는 이 무색정을 얻으면 바로 색이 없다[無色]고 여기지만,
성인은 깊이 마음으로 무색정을 얻으면 한결같아 다른 생각을 내지 않으니, 이것을 배사라 한다.
나머지 식처(識處)41)ㆍ무소유처(無所有處)42)ㆍ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43)도 역시 그와 같다.
[멸수상배사]
느낌[受]과 생각[想]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을 등져 없애면 이것을 멸수상배사(滅受想背捨)44)라 한다.
【문】 무상정(無想定)45)은 무엇 때문에 배사라 부르지 않는가?
【답】 삿된 소견[邪見]을 지닌 이는 모든 법의 허물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곧장 선정[定] 가운데 들어가서 이것을 열반(涅槃)이라 여기나,
선정에서 일어날 때는 도리어 후회하는 마음을 내면서 삿된 소견에 떨어지게 되는데, 이런 까닭에 배사가 아니다.
느낌과 생각이 사라지면 산란한 마음을 싫어하기 때문에 정에 들어가 휴식하는 것이 마치 열반의 법을 닮았고, 몸 가운데 드러나고 몸으로 얻기 때문에 몸으로써 증득한다[身證]고 한다.
2. 8승처
8승처(勝處)라 함은,
안으로 색상이 있고 밖으로 색이 적음을 관[內有色相外觀色少]하면서 혹은 아름답거나[好] 혹은 추하거나[醜] 간에 이 색을 두드러지게 알고[勝知] 두드러지게 관[勝觀]하니, 이것을 첫 번째 승처라 한다.
안으로 색상이 있고 밖으로 색이 많음을 관[內有色相外觀色多]하면서 혹은 아름답거나 혹은 추하거나 간에 이 색을 두드러지게 알고 두드러지게 관하니, 이것을 두 번째 승처라 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도 역시 그와 같다.
다만 안으로 색상이 없고 밖으로 색을 관[內有色相外觀色]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또한 안으로 색상이 없고 밖으로 모든 색인 청ㆍ황ㆍ적ㆍ백을 관하니,
이것이 여덟 가지의 승처이다.
안으로 색상이 있고 밖으로 색을 관한다 함은,
안 몸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바깥 대상이 적음을 보는 것을 말한다.
대상이 적은 까닭에 적다[少]고 하나니, 관하는 도[觀道]가 아직 다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적은 인연을 관한다. 곧 많은 대상을 관하게 되면 거두기 어려울까 두렵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마치 사슴을 놀게 할 때에 아직 길들이지 못했으면 멀리 내놓는 것은 옳지 않는 것과 같다.
아름답거나 혹은 추하다 함은,
처음 배우는 이가 마음을 대상 가운데 매어 두거나 혹은 미간, 혹은 이마, 혹은 코끝에다 두고서 안몸[內身]의 청정하지 않은 모양과 안몸 가운데 있는 청정하지 않은 모양으로 바깥의 모든 색의 착한 업보(業報)를 관하기 때문에 아름답다[好] 하고, 착하지 않은 업보이기 때문에 추하다[醜]고 한다.
또 수행하는 이가 스승으로부터 받은 바 그대로 바깥 대상의 갖가지 부정함을 관하면 이것을 추한 색이라 하며,
수행하는 이가 때로는 억념하기를 잊어버리는 까닭에 청정한 모양[淨相]을 내면서 청정한 색을 관하면 이것을 아름다운 색이라 한다.
또 수행하는 이가 자기 몸 속에 마음을 한 곳에다 매어 두고 욕계(欲界)의 색을 관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히 음욕을 내는 것이고,
둘째는 능히 성을 내는 것이다.
능히 음욕을 낸다 함은 바로 청정한 색으로, 일컬어 아름답다[好]고 한다.
능히 성을 낸다 함은 바로 청정하지 않은 색으로, 일컬어 추하다고 한다.
대상에 대해 자재롭고 두드러지게 알고, 두드러지게 보는 것이다.
수행하는 이가 음욕을 낼 수 있는 단정한 색(色)에 대해 음욕을 내지 않고,
성을 낼 수 있는 나쁜 색에 대해서 성을 내지 않으면서,
다만 색을 관찰하기를,
“4대(大)가 인연화합하여 생긴 것이며, 마치 물거품과 같아 견고하지 않다”고 본다.
이것을 일컬어 혹은 아름답다고 하고 혹은 추하다고 한다.
승처(勝處)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이 청정하지 않은 문 가운데 머무르면서 음욕과 성냄 등의 모든 결사가 온다 해도 아직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면, 이것을 승처라 하는 것이다.
이는 청정하지 않은 가운데서 청정하다고 여기는 뒤바뀐 생각 등의 모든 번뇌의 적을 이기기[勝] 때문이다.
【문】 수행하는 이는 어떻게 안으로 색상(色想)을 없애고 밖으로 색(色)을 관하는가?
【답】 이 8승처는 깊이 정(定)에 들어가서 마음이 조복되고 유연해진 자라야 얻을 수 있다. 수행하는 이는 간혹 안몸의 부정함을 보기도 하고 또한 바깥 색의 부정함을 보기도 한다.
부정관(不淨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서른여섯 가지 물건[三十六物] 등의 갖가지 부정함이고,
둘째는 내외의 피부와 살과 5장(藏)을 제외하고 다만 백골을 관하기를 마치 마노46) 같고 눈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이 서른여섯 가지의 물건에 대한 관을 추하다 하고,
마치 마노와 같고 눈과 같다고 관하는 이것을 아름답다고 한다.
수행하는 이는 안팎으로 관을 할 적에 마음이 산란하면 선정에 들기 어려우므로 자기 몸의 모양을 제외하고 다만 바깥의 색만을 관하는데, 이는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한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는 해탈하는 관[解脫觀]47)을 얻음으로써 이 몸은 죽으며, 죽은 뒤에는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혀 벌레에게 파먹히며 결국은 없어지는 것을 보는데, 이때에 벌레와 불만을 보고 몸을 보지 않으면,
이것을 안으로 색상이 없고 밖으로 색을 관한다고 한다.
수행하는 이가 가르침대로 받아들여 “몸은 뼈로 된 사람[骨人]이다”고 관하다가,
만일 마음이 바깥으로 흩어지면 도로 뼈로 된 사람의 인연 속으로 거두어 들인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처음 행을 익히면서 아직은 미세한 인연을 관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적은 색[少色]이라 한다.
그리고 수행하는 이의 관하는 도[觀道]가 점차로 깊어지면서 더욱 자라면 이 뼈로 된 한 사람으로써 염부제(閻浮提)의 모든 사람이 바로 뼈로 된 사람이라고 두루 관하나니, 이것을 많다[多]고 하며,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뼈로 된 한 사람을 관하므로, 수승하게 알고 수승하게 본다[勝知勝見]고 한다.
또 뜻에 따라 5욕 중에서 남녀의 모양과 정결한 모습을 능히 이기는 까닭에 승처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건강한 사람이 말을 타고 도적을 잘 물리쳐서 능히 무찌르면 이것을 수승하다 하는 것과 같고,
또 그 말을 잘 제어(制御)하여도 이것 역시 수승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스스로 부정관 가운데서 적은 것은 많게 하고 많은 것은 적게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승처라 하고,
또한 5욕의 도적을 깨뜨릴 수 있으므로 역시 승처라 한다.
안으로 아직 무너뜨리지 못한 채 밖으로 색을 관하면 많거나 적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간에 이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승처이다.
안으로 몸을 무너뜨려 색상이 없어지고 밖으로 색을 관하면 많거나 적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간에 이것이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승처이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어 깊이 정(定) 중에 들어가서 안의 몸을 무너뜨리고 바깥의 깨끗한 대상[緣]인 청색은 청색으로, 황색ㆍ적색ㆍ백색은 황색ㆍ적색ㆍ백색으로 관하는 것이 나중의 네 가지 승처이다.
【문】 이 나중의 네 가지 승처와 열 가지 일체처 중에 있는 청색 등의 네 가지 곳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청색의 일체처[靑一切處]는 온갖 것에 두루 반연해 능히 푸르게 만든다.
이 승처는 많거나 적거나 간에 뜻을 따라 관하되 다른 마음이 빼앗지 못하게 하고 수승하게 이 대상을 관하는 것을 승처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전륜성왕(轉輪聖王)은 두루 사천하(四天下)에서 수승하며 염부제의 왕은 한 천하에서만 수승한 것처럼,
일체처는 두루 온갖 인연에서 수승하며,
승처는 다만 적은 색을 관하는 데에 수승할 뿐 온갖 인연에 두루 수승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등으로 간략하게 8승처를 설명했다.
3. 10일체처
10일체처라 함은 배사와 승처에서 이미 설명하였나니, 이것은 대상에 두루하고 가득 차기 때문에 일체처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는 일체처라 하지 않는가.?
【답】 이 득해(得解)의 마음은 안온하고 즐거우며 광대하고 한량없고 끝이 없는 허공처(虛空處)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한 바이니, 일체처 안에는 모두가 식(識)이 있어서 온갖 법을 신속히 반연하기 때문에 온갖 법 중에는 모두가 식이 있다고 본다. 이 때문에 두 곳에서는 일체처가 성립된다.
그러나 무소유처 안에는 광대할 만한 물건도 없고 또한 쾌락을 얻을 수도 없으며, 부처님께서도 역시 이 무소유처를 끝이 없고 한량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비유상비무상처는 마음이 둔(鈍)한지라 모양을 취하여 광대하게 하기도 어렵다.
또 허공처는 색계(色界)에서 가깝고 또한 색을 반연할 수도 있으며,
식처(識處)는 능연(能緣)48)으로 색을 반연한다.
또 식처가 일어나서 제4선(禪)에 뛰어들 수도 있고 제4선이 일어나서 식처에 뛰어들 수도 있지만,
무소유처와 비유상비무상처는 무색(無色)의 인연과는 멀기 때문에 일체처가 아니다.
이 세 가지 법은 모두가 행(行)하여 승처를 얻는다.
일체처 이것은 유루(有漏)요 처음의 세 가지 배사와 일곱 번째ㆍ여덟 번째의 배사는 바로 유루이지만, 그 나머지는 혹 유루이기도 하고 혹 무루(無漏)이기도 하다.
처음의 두 가지 배사와 처음의 네 가지 승처는 초선(初禪)과 3선(禪) 중에 속하고 맑은 배사[淨背捨]와 나중의 네 가지 승처와 여덟 가지의 일체처는 제4선 중에 속한다.
두 가지의 일체처를 곧 공처(空處)라고 하며,
공처는 식처를 포섭하고 식처는 앞의 세 가지 배사와 여덟 가지의 승처와 여덟 가지의 일체처를 포섭한다.
모두가 욕계(欲界)를 반연하지만 나중의 네 가지 배사는 무색계(無色界) 및 무루법(無漏法)의 모든 묘한 공덕을 반연하며 근본(根本) 중에 있으면서 착하다.
무색(無色)의 근본은 아래 지위[地下]를 반연하지 않는다.
멸수상정(滅受想定)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아니므로 반연함이 없으며,
비유상비무상처의 배사는 다만 무색의 4음(陰)과 무루의 법만을 반연한다.
4. 9차제정
9차제정(次第定)이라 함은,
초선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차례로 제2선에 들면서 다른 마음으로 들어갈 수는 없게 하는데 착하기도 하고 때가 끼여 있기도 하다.49)
이와 같이 하여 멸수상정(滅受想定)50)까지 이르게 된다.
【문】 그 밖의 것도 역시 차제(次第)가 있거늘 무엇 때문에 9차제정만을 말하는 것인가?
【답】 다른 공덕에서는 모두가 다른 마음이 사이에서 생기기 때문에 차제가 아니다. 이 안에서는 깊은 마음과 지(智)와 행(行)이 날카로운 이는 스스로 그 마음을 시험하면서 1선(禪)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다음에는 2선으로 들되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이런 공덕에서 마음이 유연해지고 법애(法愛)를 잘 끊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이어간다.
이 차제정에서 두 가지는 바로 유루이며 일곱 가지는 혹 유루이기도 하고 혹 무루의 선[無漏禪]이기도 하다.
중간이거나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면 견고하지가 않다. 또 이것은 성인이 얻을 것이다.
또 이 큰 공덕은 변두리 지위[邊地]에 있지 않나니, 그러므로 차제가 없다.
8배사와 8승처와 10일체처와 9차제정을 성문(聲聞)의 법 가운데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23)
범어로는 Aṣṭa-vimokṣa. 초선(初禪)ㆍ제2선ㆍ제4선ㆍ4무색정ㆍ멸진정(滅盡定)에 이르는 8단계의 선정관법을 말한다. 8해탈(解脫)이라고도 한다.
24)
범어로는 saṁjñāveditanirodhasamāpatti. 느낌과 생각이 지멸한 경지이다.
25)
범어로는 vimokṣa. 곧 ‘해탈’을 의미한다.
26)
범어로는 각각 saṃyojana, anuśaya. 결(saṃyojana)은 ‘얽어 맴’을, 사(anuśaya)는 내면에 깃든 악한 성향을 가리킨다. 결과 사는 모두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27)
범어로는 satkāya-dṛṣṭi. 유신견을 말한다. 5온이 화합해 이루어진 몸에 대해 나 혹은 내 것이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집착, 또는 몸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로, 이 sat를 경량부에서는 무상하고 무너지는 것으로 보며, 설일체유부에서는 실제의 존재[實有]로 본다.
28)
범어로는 abhibhāyatanāni. ‘뛰어난 지(知)와 견(見)을 일으키는 곳’이란 뜻이다.
29)
범어로는 caturmahābhūta. 4대란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로, 견고함을 본질로 하는 지대(地大, pṛthivi-dhātu)ㆍ습기를 모으는 수대(水大, ab-dhātu)ㆍ열을 본질로 하며 성숙작용을 지니는 화대(火大, tejo-dhātu)ㆍ생장작용을 하는 풍대(風大, vāyu-dhātu)를 말한다.
30)
범어로는 rūpa-dhātu. 욕계에서의 본능적 욕망을 여의고, 오직 순수한 물질로만 이루어진 생존계를 가리킨다.
31)
범어로는 aṭṭha abhibhāyatanāni. 8해탈(解脫)을 닦은 뒤 숙달된 관상법(觀想法)으로 자유롭게 정ㆍ부정의 경지를 관찰 하는 것을 말한다.
32)
범어로는 Umākāpuṣpa.
33)
바라나시산 비단으로 짠 옷을 말한다.
34)
범어로는 aśubhāvanā. 5정심관(停心觀) 가운데 하나. 번뇌와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 육체의 부정한 특징을 관찰하는 관법. 예를 들어 버려진 시신이 차례로 썩어가서 이윽고 백골이 되고 흙으로 돌아가기까지를 관찰한다. 그 관찰의 단계를 아홉으로 나눈 것이 9상(相)이며, 열로 나눈 것이 10상(相)이다.
35)
범어로는 śubhabhāvanā. 부정관(不淨觀, aśubhāvanā)의 상대되는 개념이다.
36)
36물(物)이란, 몸 안에 있는 서른여섯 가지 부정한 요소들을 말한다. 곧 머리칼ㆍ털ㆍ손톱ㆍ이빨ㆍ눈곱ㆍ눈물ㆍ침ㆍ가래ㆍ소변ㆍ대변ㆍ때ㆍ땀과 간ㆍ쓸개ㆍ창자ㆍ위ㆍ비ㆍ신장ㆍ심장ㆍ폐ㆍ생장(生藏)ㆍ적담(赤痰)ㆍ백담(白痰)과 피(皮)ㆍ부(膚)ㆍ피ㆍ살ㆍ근육ㆍ핏줄ㆍ뼈ㆍ골수ㆍ지방ㆍ고(膏)ㆍ뇌ㆍ막 등이다.
37)
범어로는 pṛthivīmahabhūta. 물질의 굳은 성질을 말한다.
38)
범어로는 ārūpyavimokṣa. 곧 무색정을 대상으로 해서 얻는 해탈이다.
39)
범어로는 rūpyālambana. 곧 색이라는 대상을 말한다.
40)
범어로는 ākāśānantyāyatana. 공무변처(空無邊處)라고도 한다.
41)
범어로는 vijñānānantyāyatana.
42)
범어로는 ākiñcanyāyatana.
43)
범어로는 naivasaṁjñānāsaṁjñāyatana.
44)
범어로는 saṁjñāveditanirodhavimokṣa. 느낌과 생각이 멸해 얻게 되는 해탈의 상태이다.
45)
범어로는 asaṁjñisamāpatti.
46)
범어로는 śaṅkha. 법라패를 말한다.
47)
범어로는 ādhyātmika-saṁjñā.
48)
범어로는 ālambanābhibhavana. 객관을 인식하는 주관, 곧 주체를 말한다.
49)
곧 제2선의 상태란 5개(蓋)를 여의어 불선법을 떠난 까닭에 착하다고 하며, 아직 거칠고 세밀한 마음작용[尋司]이 남아 있는 까닭에 때가 끼여 있다고 하는 것이다.
50)
범어로는 saṁjñāveditanirodhasamāpatti. 곧 느낌과 생각이 모두 지멸한 상태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