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험한 속죄함
나는 청년시절부터 유별나게 교회를 다녔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는 더 열심히 봉사를 했다. 새벽기도에 빠짐없이 나가고 철야기도회에도 나가서 통성기도 하다가 방언기도를 체험하였다. 아마 내가 예수 믿은 이후로 방언을 처음 할 때의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더 많은 은사를 얻기 위하여 금식기도를 자주 하였기에 바싹 야윈 몰골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많은 능력도 체험했다. 병든 자도 고치고 기도응답도 받은 것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나님께 더 크게 쓰임을 받고자 기도원에도 자주 올라갔다. 김천 용문산 기도원, 부산 감람산 기도원, 순복음 오산리 기도원, 한얼산 기도원, 포천 할렐루야 기도원등 많은 기도원에 다녔다. 하산하여 약간 갈증을 느낄 때면 또 올라갔다. 그런데 어느 날 부흥강사의 설교를 듣는 중에 이런 의아심이 일어났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도원이 있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나에게 있어서는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다. 아니 기도원이 없었다면 조지뮬러, 존 번연, 허드슨 테일러 같은 사람은 어떻게 영적 갈증을 채웠을까? 또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였을까? 과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 바르게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기도원이나 교회집회에 찬석해서 열광적으로 찬송하고 소리치며 기도하면 성령충만하고 도시에 내려가서 살다 보면 어느새 세상사람과 같아지는 것일까?
여러 목사님 강사님, 은사자들에게 상담해 보았는데 답도 가지각각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 저 방법이 나의 시간과 힘만 빼앗아 간 결과가 되고 말았다. "아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 어느 날 존 번연의 책을 읽다가 나는 그 분에 비해서 구원의 확신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인이라면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확신의 강도와 깊이가 다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구원확신은 자기 영흔을 지옥에서 끌어내는데 아무런 유익이 없다.
하여튼 나는 더 확실하고도 분명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구원과 관계되는 세미나, 집회, 책들, 모조리 참석하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대일 제자훈련도 받았다. 구원과 관계되는 성경구절도 많이 외우고 항상 믿습니다하면서 확신을 간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순간적으로는 기쁨을 주지만 영구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면 구원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구원이 무엇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갈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 문제를 지나가 버린다. 이것은 영혼을 가지고 모험하는 것이다.
나도 잘 알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친다는 것이 양심을 괴롭혔다. 밥벌이를 하려면 차라리 막노동을 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 떳떳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도 알고 체험하고 실제화되지 않는 성경구절을 가르치며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갈등의 세월을 보내던 중 1987년 겨울에 나는 새롭게 거듭났다. 그날 밤 나는 주님이 버리시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니 이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회개에 합당한 태도와 삶과 기도를 들으시고 예수님은 속죄의 은혜를 부으셨다. 용서하신다는 증거의 성령을 한량없이 부으셨다. 그 시절에 나는 회개에 합당한 삶이 이미 바탕이 된 가운데 진심으로 기도드리고 있었다.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 얻을 자의 조건을 모두 수용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떤 불이익이 돌아온다 할지라도 구원의 은혜만 받을 수 있다면 다 포기할 수 있다는 자세로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주님 용서하소서! 당신의 죽음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이루실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고귀한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 알겠습니다. 그 귀하신 사랑에 비하면 간음하다 잡힌 창녀보다 더러운 내가 당신을 늘 거역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버러지보다 못한 죄인을 용서하소서!"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나도 기도내용이 바뀌기 시작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같은 죄인도 용서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었군요. 2000년 전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주님! 당신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 죄 때문에 조롱 받으시고 매 맞으셨습니다." 그러다 그 주님을 보고 못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의 소리 가운데는 나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님을 못박은 사람 중의 하나가 곧 나였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못박는 죄를 계속 범하고 살아온 사람이 나의 자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밤 이후 나에게는 세상이 달라진 상태가 되었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고 내가 변한 것이었다.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마음속에서부터 솟구치기 시작했다. 세상 것이 모두 나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었다. 전에 항상 혼돈되던 성경구절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성경에서 나에게 죄책을 가져다주던 성경구절이 다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나는 의인이요 원죄, 조상죄로 인한 저주, 내가 범한 죄로 인한 형벌의 두려움 등 모든 것이 일순간에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너는 의인이다. 너의 죄는 예수님의 피로 사함을 받았고 씻겼다. 이제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음성만이 영혼 속에서부터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 모든 체험이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진리가 체험화된 것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발견해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필자의 구원의 체험이요, 속죄의 경험이요, 칭의의 경험이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증명되고 역사 속에 모든 신앙가들에 의해서도 계속하여 더욱 더 확실시되는 동일한 증거들이 신학과 교회사를 연구하고 할수록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믿음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주도 하나이기 때문이다(엡 4:3-6).
필자가 신학교에 다닐 적에 큰 목회를 40년 이상 해 오신 분이 계셨다. 그 분은 항상 말씀하시길 "내 목회경험으로는 사람의 천성은 죽을 때까지 변할 수 없다. 사람은 영은 구원을 얻지만 혼(정신사상)은 영원히 변화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읽어볼 때에는 분명히 성화에 대한 교리가 발견되었다. 사람에게 가치관의 변화, 우주관의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기독교라면 더 믿어야 할 가치가 무엇이 있으랴!
하지만 신약성경 로마서 1장에서는 복음에서 하나님의 의가 숨어 있는데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간다고 하였으며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른다"고 하였다.
이런 기묘한 현상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믿는 원인은 영적 수건이 벗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고후 3:16). 또 로마서 1장 16절에서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다시 고린도전서 1장24절에서는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무궁무진한 진리가 숨겨져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지식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가 제한받게 해서는 안되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노 목사님은 십자가의 속죄의 능력을 경험한 목사님은 아닐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첫댓글 이 내용을 요약해서 지금 영상으로 구원 간증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밤에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