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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13권
12. 정론[4]
12.15. 무변공처품(無邊空處品)
온갖 물질의 형상을 초월하여 대상 있는 형상을 끊고 온갖 다른 형상을 생각지 아니하면 끝없는 허공의 처소에 든다.
물질의 형상이라 함은 빛깔과 냄새와 맛과 닿임의 모습을 말한다.
수행하는 이가 무슨 까닭에 여기를 초월하려는 것일까?
말하자면 이러한 물질 가운데는 대상이 있고 장애가 있으며 여러 가지 다른 형상이 있는 것이니, 종이나 북 따위가 그것이다. 이 모든 현상은 바로 갖가지의 번뇌와 갖가지의 업과 갖가지의 고통의 원인이다. 이 때문에 초월하려는 것이다.
만일 온갖 물질의 형상을 초월하면 바로 대상이 있는 형상이 없어진다.
대상이 되는 형상이 없어지면 바로 다른 형상도 없어진다.
여기서는 간단히 말하기 때문에 이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이것이 없어진다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온갖 물질의 형상이란 바로 이는 안식의 의지할 바의 모습이며 대상이 있는 형상이란 바로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식의 의지할 바 모습이며, 다른 형상이란 바로 의식의 의지할 바 모습이다”라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일 대상 있는 형상을 없앴다 하면 이미 물질이 포함되었으니 무엇 때문에 별도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또 물질과 상대되는 형상을 여의고는 별도로 의식의 의지할 바의 물질이 없다. 그러므로 따로 다른 형상을 말하지 않아야 하며 먼저의 설명과 같아야 한다.
끝없는 허공의 처소에 든다 함은 수행하는 이가 물질현상의 핍박과 요란에 지쳤기 때문에 끝없는 허공을 관찰하여 안으로는 눈과 코와 목구멍 등의 빈 모습을 취하고, 밖으로는 샘구멍이나 문간 쪽이나 나무사이 들의 빈 모습을 취하며,
또 “이 몸이 죽으면 무덤 사이에 버려지고 불에 타서 없어지며 혹은 날짐승ㆍ길짐승이 뜯어 먹고 벌레가 송장 속에서 쏟아져 나온다”고 관찰하기 때문에
이 몸은 먼저부터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 이 허공의 선정은 무엇으로 반연을 삼는가?
[답] 처음에는 허공을 반연하다가 그것이 성취되면 자신의 모든 쌓임을 반연하고 또한 따른 사람의 모든 쌓임도 반연한다.
왜냐하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
“물질에 괴로움을 겪는 중생이야 말로 불쌍하구나”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이다.
[문] 이 선정은 어떤 중생을 반연하는가?
[답] 온갖 중생을 다 반연한다.
[문] 이 수행하는 사람은 물질의 현상을 다 떠났거니 어떻게 욕심 세계나 형상 세계의 중생을 반연할 수 있는가?
[답] 이 수행하는 이는 물질을 반연하기는 하되 다만 물질 중에서는 마음이 환히 트이지 않아서 즐기지도 아니하고 애착하지도 아니할 뿐이다.
경전 중의 말씀에서
“만일 성인이 다섯 가지 욕심을 깊이 보고 생각하면 그 안에서는 즐거워하지도 않고 통하지도 않고 애착하지도 않으면서 그 곳에 빠져서 타락할 것을 무서워하는 것이 마치 새가 살과 깃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여기거니와 만일 열반을 생각하면 마음이 바로 환희 트이게 된다”고 함과 같다.
이 사람도 그와 같이 와서 역시 물질을 반연하기는 하나 탐내며 즐기지는 아니한다.
또 마치 수행하는 이가 물질의 현상을 여의였다 하나 허공의 끝으로써 4선을 반연한 것과 같고 형상 없는 선정이 샘 없는 물질을 반연한 것과 같이 이 중에서는 번뇌가 아닌 곳을 초월함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선정도 그러하여야 한다.
[문] 허공은 그것이 색입(色入)의 성품이다. 어떻게 이것을 반연하여 물질의 형상을 초월할 수 있는가?
[답] 이 선정은 함이 없는 허공을 반연하기 때문에 물질을 초월할 수 있다.
[문] 이 선정은 함이 없는 허공을 반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선정의 방편 중에서는 눈[眼] 등 안의 허공을 반연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함이 있는 허공[有爲虛空]만을 반연하는 줄 알겠다.
또 경전 중에서는 함이 없는 허공의 모습은 말하지 않고 함이 있는 허공의 모습만을 말씀하였으니, 이른바 형상 없는 곳을 허공이라 한다. 그러므로 함이 없는 허공은 없다.
[답] 물질의 성품은 “허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전 중에서는 허공은 빛깔이 없으면서 볼 수도 없고 상대할 수도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문] 또 어떤 경전에서는 말하기를
“밝은 것으로 인하여 허공임을 안다”고 하였다.
물질을 제외한 그 밖의 밝은 것으로 인하여 알만한 것이 없으리라.
[답] 빛깔이 없는 것을 허공이라 하며, 모든 물질은 밝음으로 인하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밝음으로 인하여 물질이 없는 것을 알지만, 허공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 어둠 속에서도 허공을 아는 것이니, 장님은 손으로 만져서도 허공인 줄을 알며 또 지팡이로써도 이것이 허공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알아라. 허공은 그것이 물질의 성품이 아닌 것이다. 물질이란 이러한 따위의 인연으로는 알 수 없다.
또 물질은 대상이 있으나 허공은 대상이 없다.
또 불등으로 물질을 다 없앨 수 있으나 허공만은 없앨 수가 없다. 만일 허공이 없어진다면 다시 무슨 법이라 할 것인가?
[문] 만일 물질이 생길 때에는 허공은 없어진다.
마치 담장을 세우게 되면 그 부분에 다시는 허공이 없는 것과 같다.
[답] 그 중에서 물질이 생기면 그 물질은 마침내 없어지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물질을 허공이라 함이 없는지라 다시없다 할 수 있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이 허공을 없애지 않는다.
또 그대는 허공은 바로 물질이라고 하지만 이 안에서는 물질이 되게 할 만한 인연이 없다.
[문] 현재에도 문이 뚫린 쪽의 허공을 본다. 현재에 보는 사실 중에는 인연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답] 허공은 나투어서 볼 수가 없다는 것을 먼저 이미 말하였기 때문이니, 이른바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다고 말한 것 따위이다.
[문] 만일 허공 그것이 물질이 아니라면 이는 어떤 법인가?
[답] 허공은 없음의 법이라 한다. 다만 물질이 없는 곳을 허공이라 하기 때문이다.
[문] 경전 중에서
“여섯 가지로 인하여 중생은 몸을 받는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허공은 볼 수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상이 없는 것”[不可見無色無對]이라 하였다.
만일 없는 법이라면 그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으리라. 토끼 뿔을 볼 수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상이 없는 것이라 말씀하지는 않는다.
[답] 만일 실지로 있는 법이면 다 의지할 바가 있다. 마치 이름은 물질을 의지하고 물질도 이름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허공은 의지가 없다. 그러므로 알아라. 없는 법이다.
그대는 허공의 요소를 말하나 그도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물질은 물질을 장애하기 때문이다. 물질은 다른 물질이 없음을 얻기 때문에 더욱 자라게 된다.
이런 뜻 때문에 부처님은 여섯 종류로 인하며 중생이 몸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대는 “허공은 빛깔도 없고 형체도 없고 상대도 없다”고 하고,
또한 모든 물질을 파괴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지만 허공의 형상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구나.
그대는 “토끼 뿔을 볼 수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상도 없다”고 말하지만 그도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허공으로 인하여 일을 하고 가고 오고 하는 등의 일이 있게 되지만 토끼 뿔 따위 안에는 이러한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문] 마음도 이와 같아서 빛깔도 없고 형체도 없고 상대도 없으니,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답] 마음에는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니, 능히 반연을 붙잡는다.
허공은 하는 일이 없으며 다만 없기 때문에 하는 일이 있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없는 법임을 알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선정은 처음에 허공을 반연한다.
[문] 이 선정은 어느 자리[地]를 반연하는가?
[답] 온갖 자리를 다 반연하며 또는 사라짐과 도를 반연한다.
[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무형세계 선정은 비록 사라짐을 반연한다 하더라도 다만 비지(比智)의 갈래의 사라짐을 반연할 뿐이요, 현지(現智)의 갈래의 사라짐을 반연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은 어떠한가?
[답] 온갖 사라짐을 다 반연한다.
현재 법의 지혜로는 현재 자기 자리의 사라짐을 반연하고
현재 법의 지혜로는 현재 자기 자리의 사라짐을 반연하고,
비지로서는 그 밖의 사라짐을 반연한다.
도에도 그와 같은 것이니, 온갖 법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문] 무형 세계에 나는 중생은 다른 세계의 마음을 일으키는가, 일으키지 않는가?
[답] 다른 세계의 마음과 샘 없는 마음까지도 일으킨다.
[문]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죽지 않는가?
[답] 업의 과보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마치 욕심 세계나 형상 세계에서도 신통력 때문에 다른 물질과 다른 마음에 머무르면서도 죽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그 중에서도 역시 그렇다.
[문] 끝없는 허공의 선정은 허공인 곳의 선정과 온갖 다른 곳의 선정과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허공의 선정에 들려 하는 방편의 도를 온갖 것[一切]이라 하며, 선정에 인과가 있다.
이 자리의 온갖 샘 있음과 샘 없음이거나 선정과 선정이 아닌 것이거나 더러움과 깨끗한 것이거나 간에 모두를 끝없는 허공의 처소라 한다.
12.16. 삼무색정품(三無色定品)
온갖 끝없는 허공이 처소를 지나서 식이 끝없는 처소[無邊識處]에 들어가면 수행하는 이는 물질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에 또한 물질을 다스리는 법을 버리는 것이
마치 사람이 강물을 건넌 다음에는 배까지도 버리고 가는 것과 같고
또는 도적을 피한 다음에는 더욱 멀리 달아나고자 하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도 역시 그러하여 공으로 인하여 물질을 깨뜨린다 하더라도 더욱 멀리 버리고자 한다.
식이 끝없는 처소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식으로써 끝없는 허공을 반연할 때면 식이 끝이 없다. 그러므로 허공을 버리고 식을 반연한다.
또 물질로 인하여 피곤해졌기 때문에 허공을 반연하는 것처럼 허공 때문에 피로한지라 휴식하려 하여 식만을 반연한다.
또 이 사람은 식으로 허공을 반연하기 때문에 식이 더 수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식만을 반연한다.
수행하는 이는 식으로써 반연을 따르고 시절을 따르기 때문에 끝없는 피로가 있으면 싫증내고 여의면서 도리어 식을 깨뜨리려 한다.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처소(無所有處)에 들어서는 생각하기를
“식이 있음에 따라서 고통이 있다. 내가 만일 끝없는 식이 있으면 반드시 끝없는 고통이 있으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식을 반연하는 마음을 껴잡는다. 마음은 미세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또 생각하기를
“아무것도 없음이 바로 생각[想]이다.
생각이란 괴로운 것이니, 마치 앓는 것과 같고 부스럼과도 같다.
만일 생각이 없으면 그는 또 어리석은 것이다. 내가 만일 아무것도 없음을 본다면 그는 곧 있는 것이 된다. 이 때문에 모든 생각에서 해탈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행자는 생각을 걱정거리로 여기고 생각이 없는 것을 어리석다고 보는지라 적멸하고 미묘한 것이니 이른바 생각도 생각 아님도 아닌 처소[非想非非想處]이다.
범부는 항상 생각 없음[無想]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어리석게 된다. 이러기 때문에 마침내 마음을 없애는 자가 없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생각이 없는 중생도 마음을 없앤다”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일 형상 세계 중에는 무엇 때문에 할 수 없겠는가?
[문] 형상 세계에는 형상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없앨 수 있으나 무형 세계 중에서는 먼저 이미 형상을 없앴고 지금 다시 마음을 없앤 것이니, 만일 형상과 마음이 함께 없어짐을 보면 놀라고 기절하리라.
[답] 만일 그 안에 있으면서 없앨 수 없다면 이 세계에서도 나서는 없앨 수 있어야 하리니 마치 생각 끊는 선정[滅盡定]에서와 같다.
[문] 이 없애는 마음의 결과는 생각 없음[無想]이다. 그러므로 만일 형상과 마음을 없애면 그는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답] 생각 끊는 선정에서도 역시 마음 있는 과보가 있으며 이 일도 또한 그렇다.
또 만일 과보가 끊어지지 않는다면 또한 과보에 머무른다 할 것이니, 마치 변화하는 데 있는 물질이 변화하는 마음 가운데서 도로 과보를 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영원히 없어진다고는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형상 세계 중에서는 마음을 없앤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만일 말하게 되면 무형 세계 중에서도 역시 말해야 한다.
또 생각 없는 선정[無想定] 중에서는 마음은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이는 반드시 마음을 싫증내며 여의기 때문에 마음을 없앨 수 있다.
만일 마음을 싫어하면 오히려 무형 세계 안에서조차도 나지 아니해야 하겠거든 더군다나 형상 세계에서 나겠는가?
또 범부는 마음에 깊이 나라는 생각을 낸다.
경전 중에서
“범부는 오랜 세월 동안 이 마음에 탐착하여 그것을 나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남음없이 싫증내어 여읠 수는 없다.
또 경전 중에서
“외도는 세 가지 집착을 끊어 없애는 것을 말하면서도 아어취(我語取)를 끊는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음을 없애지 못한다.
또 인연법을 바르게 알면 마음의 공함을 얻는다.
원유경(猿喩經)에서 말하기를
“범부는 혹시 몸을 여윌 수는 있되 마음을 여의지는 못하나니, 차라리 몸의 항상함을 관찰할지언정 마음의 항상함을 관찰하지 말라.
왜냐하면 눈은 그 몸에 혹 10년이나 내지 백 년 동안 머무른 것을 보지만 이른바 마음이거나 뜻이거나 식은 생각 생각에 생멸하고 변천하므로
마치 원숭이가 나무를 붙잡고 올라가서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아 다니면서 한 군데 멈추어 있지 아니함과 같다.
만일 거룩한 제자라면 그 중에서 인연법을 똑바로 관찰하기 때문에 무상함을 깨닫는다”고 함과 같다.
또 인연법을 알면 느낌[受]의 차별 때문에 식을 분별하지만 여러 외도들은 인연을 분별하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마음을 없앨 수 없다.
또 범부는 물질을 여의지만 마음을 여의지 못하기 때문에 해탈을 얻지 못한다. 만일 한꺼번에 마음을 없앨 수 있다면 또 무엇 때문에 해탈을 얻지 못하는가?
또 범부는 없앰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열반 안에서 마침내 안온하고 적멸하다는 생각을 내지 못한다.
경전의 말씀에서
“나도 없고 나의 소유도 없다 하는 그것을 범부는 몹시 두려워하는 곳이다”라고 함과 같다.
또 생각없는 가운데서 어리석은 마음을 낸다. 만일 열반에서 적멸하고 안온하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면 어떻게 마음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
또 범부의 법은 반드시 웃 경지로 인하여 아래 경지를 버린다. 그러므로 마음을 없애는 인연이 없다.
다만 선정의 힘으로써 미세한 생각이 앞에 나타날지라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생각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만일 거친 생각이 떠오르면 이내 퇴타한다. 마치 지혜가 적은 사람이면 지혜가 없다고 말함과 같고 음식이 조금 짜면 짜지 않다고 말함과 같으며 혼미하여 기억을 잃어버림과 같으며 땅에 묻힌 벌레와 어름에 쌓인 고기와 같으며 생각도 생각 아님도 아닌 곳을 말함과 같이 이 중에서도 또한 그렇다.
비록 사실은 생각이 있을 지라도 세속에 따르기 때문에 생각이 없다 한다.
12.17. 멸진정품(滅盡定品)
온갖 생각도 생각 아님도 아닌 곳을 뛰어나서 몸으로 생각과 느낌의 사라짐[想受滅]을 증득한다.
[문] 무엇 때문에 모든 선(禪)의 가운데서는 온갖 것을 뛰어나다고 말하지 않고, 무색의 선정 가운데서는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나는 모든 선정 중에는 다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과 기쁘고 즐거운 법이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온갖 것을 뛰어나다고 말하지 아니한다.
[문] 끝없는 허공의 곳에는 물질과 마음이 있다고 하는 그 일은 이미 밝혔다.
그러므로 무색의 가운데서도 역시 온갖 것을 뛰어나다고 말하지 아니해야 한다.
[답] 만일 끝없는 허공의 선정가운데 들면 물질과 마음은 벗어날 수는 있되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 따위의 법을 해탈할 수는 없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뛰어난다 사라진다 가라앉는다고 말을 하면 모두 뜻은 하나이면서 이름만 다를 뿐이다”라고 한다.
또 무형 세계 중에서는 선정 마음이 견고하나, 그 아래 세계 중에서는 마음의 산란으로 무너진다. 그러므로 온갖 것을 초월한다고 말하지 아니한다.
[문] 만일 다 같이 가시덤불이 있어서 이른바 물질의 형상 등이라 말한다면 무엇 때문에 마음은 견고하다고 말하는가?
[답] 비록 다 같이 가시덤불이라고 말할지라도 역시 제4선을 움직임이 없음[無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무형 세계 선정 중에는 선정의 힘이 크기 때문에 견고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문] 배우는 이는 생각 끊는 선정을 얻지 않아야 하리니 아직은 온갖 생각도 생각 아님도 아닌 곳을 뛰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답] 배우는 사람은 생각도 생각 아님도 아닌 곳에서 온갖 법이 사라짐을 보기는 하나, 다만 아직 그것을 생기지 않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뛰어났다고만 말하게 된다.
[문] 만일 여기의 뜻이 열반으로써 사라짐을 삼는다면 그대가 먼저 말하기를 “9차제정(次第定) 중에서의 사라짐 바로 심왕(心王)과 심수(心數)의 사라짐이다”라는 것과 서로 위반된다.
[답] 끊는 선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번뇌가 다한 것이요,
둘째는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이다.
번뇌가 다한 이는 해탈의 속에 있거니와 번뇌가 다하지 못한 이는 아직 차제정 가운데에 있다.
첫째는 번뇌를 다하였기 때문에 끊는 선정이라 하고,
둘째는 심왕과 심수의 법을 없앴기 때문에 끊는 선정이라 한다.
번뇌를 없앤 그것은 여덟째 번의 해탈로서 아라한과라고도 말한다. 아라한과는 온갖 생각을 다 끊어서 다시 나지 않게한다는 것이지마는 이 중에서는 모든 생각을 끊었다 하더라도 나머지 번뇌가 있기 때문에 다시는 나지 않게 할 수가 없다.
[문] 만일 수행하는 이가 9차제정으로써 마음을 없앨 수 있다면 수다원들은 어떻게 마음의 사라짐의 법을 증득할 수 있는가?
[답] 9차제정 중의 사라짐을 큰 사라짐이라 한다.
만일 사람이 모든 선정을 잘 닦으면 도 닦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라짐을 얻을 수 있으나 만일 이러한 힘이 없으면 다만 사라짐만이 있을 뿐이어서 이와 같이 큰 힘이 될 수는 없는지라 차제정을 설명한다.
그 밖의 곳에서도 또한 마음의 사라짐이 있다. 제4선 중에서도 심왕과 심수의 법을 없애서 생각 없는 곳에 들어감과 같거늘 초선 등의 가운데라 하여 무엇 때문에 사라짐이 없겠는가?
또 그 밖의 곳에도 또한 마음을 없애는 이치가 있어야 한다.
경전 중에서
“수다원 등은 다 사라짐을 증득할 수 있다. 다만 마음의 사라짐 만을 사라짐이라 하면 다시는 그 밖의 법에는 사라짐이 없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이 아홉 가지 경지를 여의는 것 또한 마음의 사라짐이 있다.
[문] 만일 생각 끊는 선정이 온갖 심왕과 법을 다 끊는다면 어찌하여 생각과 느낌의 사라짐만을 말하는가?
[답] 온갖 마음을 모두 느낌이라고 한다.
이 느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생각의 느낌이요,
둘째는 지혜[慧]의 느낌이다.
생각의 느낌을 함이 있는 법을 반연하는 마음[有爲緣心]이라 하는데 생각으로써 붙인 이름의 법 중에서 지어가기 때문이다.
붙인 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합으로 인한 붙인 이름이요,
둘째는 법의 붙인 이름이다.
그러므로 온갖 함이 있는 법을 반연하는 마음을 모두 생각이라 한다.
지혜의 느낌을 함이 없는 법을 반연하는 마음[無爲緣心]이라 한다.
그러므로 만일 생각과 느낌의 사라짐이라고 말하면 온갖 것의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 된다.
[문] 온갖 심왕과 심수의 법 중에서는 느낌과 생각이 가장 뛰어나다. 그러므로 특별히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번뇌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다.
첫째는 애착하는 부분이요,
둘째는 인식하는 부분이다.
느낌은 애착하는 부분을 내고, 생각은 인식하는 부분을 낸다.
또 욕심 세계와 형상 세계 가운데서는 느낌이 뛰어나지만 무형 세계 가운데서는 생각이 뛰어나다. 그러므로 두 종류만을 말한 것이다.
또 모든 식의 처소[識處] 가운데서는 느낌과 생각만을 말한다. 식의 처소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바로 지어간다[行]고 한다.
또 만일 “느낌과 생각의 사라짐”이라고 말하면 곧 온갖 심왕과 심수의 사라짐을 말한 것이니, 모든 심수는 서로가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답] 그렇지 않다. 그대가 “뛰어나기 때문에 특별히 말한다”고 하면 응당 마음을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경전 중에서 마음을 으뜸이라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두 가지 번뇌의 의지할 바이기 때문이며 또한 마음의 차별이기 때문에 느낌과 생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말해야 한다.
또 마음이라고 말하면 말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그대의 주장은 잘못이다.
[문] 이 선정은 무엇 때문에 몸으로 증득한다[身證]고 하는가?
[답] 여덟 가지 해탈은 모두가 몸으로 증득한다고 말해야 한다.
또 이 적멸의 법은 말로써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으로 증득한다고 말한다.
마치 몸이 물에 닿으면 차가운 모습을 알지만 귀로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님과 같이 이 일도 역시 그러하다.
또 이것은 마음이 없는 법[無心法]이기 때문에 당연히 몸으로 증득하여야 한다.
[문] 그대가 “생각 끊는 선정은 마음이 없는 법이다”고 하나, 그 이치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 선정에 드는 사람은 그도 중생인에 세간에는 마음이 없는 중생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옳지 못하다.
또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명(命)과 열(熱)과 식(識)이라는 이 세 가지 법은 항상 서로 여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을 없앰은 없다.
또 온갖 중생은 다 네 가지 먹는 것으로 생존하게 되는데 생각 끊는 선정에 들면 모든 것을 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삼켜 먹지[揣食]도 않고 닿아 먹지[觸食]도 않기 때문에 먹는 것이 없다.
또 마음은 마음으로부터 생긴다. 만일 이 마음이 없어지면 다른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차제연(次第緣)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마음이 다시 어떻게 생기겠는가?
또 마음은 오직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에 들어서 상속을 끊을 때에만 끊어지고, 그 밖의 곳에서는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전 중에서
“형상 세계에서 모든 욕심 세계를 뛰어나고 무형 세계에서 형상 세계를 뛰어나고 적멸로써 모든 기억[念]하고 사유(思惟)하는 것을 뛰어난다”고 함과 같다.
마음이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이 되면 반드시 적멸로써만 뛰어날 수가 잇다.
남음이 있는 열반을 얻을 때에는 때 묻은 마음이 끊어지고 남음이 없는 열반을 얻을 때에는 때 없는 마음이 끊어진다. 이것은 불법의 바른 이치이다.
또 생각 끊는 선정에 든 사람을 죽었다고 하지는 않으며, 마음이 끊어진 것을 죽었다고 한다.
만일 끊어진 마음이 도로 생긴다면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그렇다면 마침내 죽음이란 것이 없으리라.
만일 끊어진 마음이 도로 생겨난다면 열반에 들었던 사람도 살아나게 되나니 그렇다면 마침내 해탈이 없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은 끊어지지 않는다.
[답] 그대는 “마음 없는 중생은 없다”고 말하나 똑같이 마음이 없다손 치더라도 죽음과는 다르다.
경전 중에서 물었다.
“생각을 끊은 선정에 든 사람은 죽음과 어떤 차별이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죽음이라 함은 명과 열과 식의 세 가지 일이 모두 끊어진 것이다.
생각을 끊은 선정에 든 사람은 마음만이 끊어졌을 뿐 명과 열과는 몸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라. 마음 없는 중생은 있어야 된다.
또 이 사람에게는 마음의 득(得)이 항상 존재하며 득의 힘 때문에 또한 마음이 있다고 하리니 나무나 돌과는 같지 아니하다.
그대는 “세 가지 일은 서로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하나
욕심 세계와 형상 세계의 중생 때문에 말한 것이요, 무형 세계 중에서는 명도 있고 식도 있으나 열만 없다.
또 생각 끊는 선정에 든 사람에게는 명과 열은 있으나 식이 없는지라
바로 이 경전 중에서도 “역시 식은 몸을 떠났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일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어느 경우에 따라서 하는 말일 뿐이다.
그대는 “먹지 않고서 어떻게 생존하느냐”고 말하지만
이 사람의 몸은 의사식(意思食)을 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현재에 살며 차가움 따위의 닿임으로써 몸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대는 “마음은 마음으로 인하여 생긴다”고 하나
마음은 다른 마음의 원인이 되어 주고 원인이 되고 나면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다른 마음을 내게 된다.
[문] 어떻게 마음이 사라지면서 다른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 마치 눈이 없어지면 식(識)을 낼 수 없음과 같으리라.
[답] 이미 사라진 업이 과보를 내는 것과 같이 이 일도 또한 그러하다.
또 뜻[意]과 의식과의 두 가지 일은 서로 장애가 되지만 눈과 안식과는 그와 같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인(因)이 되지 아니한다.
그대는 “상속이 끊어질 때에 마음도 끊어진다”고 하나 그 일도 옳지 못하다.
끊어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물질의 끊어짐과 마음의 끊어짐이다.
혹은 물질만 끊어지고 마음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니, 무형 세계 중에서와 같다.
혹은 마음이 끊어지고 물질은 끊어지지 않기도 하는데 생각 끊는 선정에서와 같다.
혹은 물질과 마음이 함께 끊어지기도 하는데 상속을 끊을 때와 같다.
그대는 “생각 끊는 선정에 들어도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하나
그 사람에게는 명과 열이 끊어지지 않았고 죽은 사람에게는 세 가지 일이 모두 끊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곧 다른 것이다.
또 이 사람은 명과 열로 인하여 마음이 다시 생길 수 있으나 죽은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대는 “만일 끊어진 마음이 도로 생긴다면 해탈은 없으리라”고 하나 그 일도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열반에 든 사람은 과거의 업으로 받은 명과 열과 식이 아주 끊어져서 다시는 생겨날 수가 없지만
이 사람은 명과 열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지라 먼저의 마음이 다시 생기게 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생각 끊는 선정의 품중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생각 끊는 선정에 든 사람은 그의 여섯 가지 감관과 신명(身命)으로 인하여 도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다시 생기게 되나 열반에 든 사람은 마음이 다시는 생기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이 선정은 마음이 없다.
[문] 무엇 때문에 이 선정으로부터 일어난 사람에게 보시하면 현전의 과보를 얻게 되는가?
[답] 이 선정으로부터 일어나면 마음은 매우 고요히 사라진다.
경전 중에서
“생각 끊는 선정으로부터 일어난 이의 마음은 열반에 수순한다”고 함과 같다.
또 이 사람의 선정에 대한 힘은 굳세다. 이 선정에 의지하기 때문에 지혜도 또 거룩하다.
지혜가 거룩하기 때문에 보시하는 이에게 훌륭한 과보를 얻게 한다.
마치 사람이 백 명, 천 명의 성문(聲聞)에게 공양하기보다는 한 분의 부처님에게 공양함만 같지 못함과 같다.
이 중에서는 다 지혜로 수승함을 삼고 번뇌를 끊음에는 있지 않은 것이니 이 일도 그렇다.
또 이 선정에 든 이는 많은 착한 법으로 그 마음을 쪼이고 닦았기 때문에 큰 과보를 얻는 것이 마치 잘 가군 밭에서는 수확한 바가 반드시 많음과 같다.
또 세간을 싫어하는 이에게 보시하면 큰 과보를 얻는다. 생각 끊는 선정에서 일어나는 이는 깊이 세간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공양을 하면 수승하다.
또 깨끗한 마음을 가진 이에게 보시하면 큰 과보를 얻되 때 묻은 마음을 가진 이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이 사람은 붙인 이름 때 묻은 마음으로써 하지 않는지라 공양하면 큰 과보를 얻는다.
또 이 사람은 항상 으뜸가는 진리에 있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세간의 진리에서 산다.
또 이 사람은 항상 다툼이 없는 법[無諍法] 가운데서 머무른다. 왜냐하면 함이 있는 법을 반연하는 마음이라야 다툼이 있기 때문이다.
또 경전 중에서
“가래나 피는 나락을 해치고 탐욕은 마음을 해친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탐욕이 없는 사람에게 보시하면 큰 과보를 얻는다. 탐욕의 인연은 붙인 이름의 모습이로되, 이 선정에서 일어난 사람은 열반을 반연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의 모습을 여읜다.
또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만일 사람이 시주의 공양을 받고서 무량한 선정에 들면 그 단월(檀越)은 이 인연으로 무량한 복을 얻는다”고 하였다.
생각 끊는 서정에서 일어나는 이는 열반하는 마음을 반연하므로 이것을 한량없다 하고 이 적멸도 역시 한량이 없으며 한량없는 복을 얻기 때문에 현재의 과보를 얻는다.
또 여덟 가지 공덕으로 이 복전을 장엄한다. 열반을 반연하는 마음이야 말로 참되고 올바른 소견이어서 나머지 것들이 그대로 따른다. 그러므로 현재의 과보를 얻게 된다.
[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생각 끊는 선정은 바로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행이어서 또한 세간의 법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이 일은 어떻게 되는가?
[답]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선정에서 일어난 사람은 깊이 적멸 등의 모든 공덕이 있다. 이 공덕은 세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 생각 끊는 선정을 막는 법[遮法]이라 하며, 이 법 때문에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행이라 하였으리라.
마치 무쇠가 불에 달구었을 때에는 검은 모양이 없다가도 불에서 내놓으면 곧 도로 검어짐과 같이 이 일도 역시 그렇다.
[답] 만일 그렇다면 열반도 역시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행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열반으로 인하여 그 밖의 쌓임[法]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열반이라는 것이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행이 아니라면 이 선정 역시 서로 응하지 않는 행이라고 말하지 못하리라.
다만 모든 수행하는 이는 으레 그러하여 이 선정에 들면 그의 원하는 바에 따르기 때문에 마음은 생기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행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문] 이 선정은 이와 같이 차례로 들면 역시 차례로 일어나야 되는가?
[답] 역시 차례대로 일어나서 점차로 거친 마음에도 들어간다.
[문] 경전 중에서 “처음 생각 끊는 선정에서 일어나는 이는 세 가지의 닿임에 접촉하는 것이니, 이른바 무동(無動)과 무소유(無所有)이다”라고 하였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가?
[답] 함이 없음의 반연하는 마음 안의 모든 닿임을 무동이요, 무상이요 무소유라 한다.
무동이라 함은 곧 이는
“공이다. 함이 있음의 반연하는 마음은 가볍기 때문에 동요가 있는 것이니, 이른바 물질과 느낌 등은 붙잡기 때문이다.
공의 안의 것은 형상이 없으며, 형상이 없는 가운데는 탐욕 등이 있을 수 없다.
이 마음이 없음은 처음에는 열반을 반연하고 뒤에는 함이 있음을 반연하기 때문에 일어날 때에는 세 가지 닿임에 접촉한다”고 말한다.
[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생각 끊는 선정에 드는 마음은 바로 샘이 있는 것이다. 선정에서 일어날 때의 마음은 혹 샘이 있기도 하고, 혹 샘이 없기도 한다고 하는 데 그 일은 어떻게 되는가?”
[답] 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수행하는 이가 이 선정에 들고자 하면 먼저부터 온갖 함이 있음을 파괴하고 파괴하였기 때문에 들어가게 되며 일어날 때에는 열반을 반연하는 마음이 앞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알아라. 모두 다 샘 없는 마음뿐이다.
[문] 경전 중에서
“수행하는 이는 생각 끊는 선정에 들어가면서도 자신은 들어가는 줄을 기억하지 못하며, 일어날 때에도 또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답] 항상 닦아 익히기 때문에 선정의 힘은 견고하므로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들어갈 수 있다.
또 이 수행하는 이는 함이 있는 마음을 끊음으로부터 바로 적멸에 들어간다.
만일 마음을 다스려서 함이 있음에 반연하게 하지 않으면 들어간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이 선정에 드는 이는 먼저 마음을 다스리고 익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문] 만일 특별한 공을 얻을 만한 것이 없으면 함이 없음의 반연하는 마음[無爲緣心]을 닦아서 다시 어떤 이익을 얻는가?
[답] 오랫동안 닦아 익혔기 때문에 선정은 견고하고 지견은 똑똑하여진다.
마치 함이 있음의 반연하는 마음[有爲緣心]의 생각생각에 사라짐을 보는 것 또한 달리 생각 생각에 사라짐이 없고 다만 오래 닦아 익히면 마음이 견고하여짐과 같이 이 일도 역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