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포유류 가축은 작물화한 식물과 두 가지 방법으로 상호작용을 하며,
농작물 생산의 증대와 도움을 주었다.
첫 번째 방법은 오늘날의 원예가와 농부라면 누구나 경험적으로 아는 것
즉 두엄을 비료로 살포하면 농작물 수확량이 크게 증가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화학공장에서 생산한 합성 비료를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지만,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사회에서 주된 농작물 비료는 가축의 배설물이다.
특히 젖소으 배설물이 큰 몫을 차지하고, 야크와 양의 것도 사용한다.
가축으 배설물은 전통 사회에서 불을 지피는 연료로도 사용할 만큼 소중했다.
대형 포유류 가축이 식량 증산을 위해 작물화한 식물과 상호작용을 한 두 번째 방법은
쟁기를 끌어 전에는 농겨에 부적합했던 땅을 개간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쟁기를 끈 가축으로는 소와 말, 물소와 발리소(Bali cattle), 야크와 젖소의 잡종 등이 있었다.
이런 용도로 쓰인 가축의 가치를 잘 보여주는 예를 들어보자.
선사시대에 중부 유롭에 정착한 최초의 농경민, 즉 기원전 5000년 직전에 시작된 이른바 '선형 토기 문화'는
손에 쥐고 땅을 파는막대기로도 충분히 개간할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땅에서만 농사를 지었다.
그로부터 1,000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축이 끄는 쟁기가 등장하며,
그곳 농민들은 흙이 거칠고 차지 ㄴ땅가지 경작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북아메리카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레이트플레인스에 정착한 아메리카 원주민 농부들은 강 유역에서 작물을 재배했지만,
흙이 차진 드놃은 고지대에서의 농경은
19세기에 유럽인이 가축이 끄는 쟁기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식물과 동물을 길들인 결과, 수렵.채집민 보다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고 ,
이는 자연스레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식량 생산에 필요한 종주형 생활 방식도 인구 증가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수렵.채집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이 야생에서 먹을 거리를 찾아 빈번하게 이동하지만,
농경민은 밭과 과수원 근처에 머물러야 한다.
따라서 고정된 거주지가 필요하고, 그 떼문에 아이를 낳는 간격이 줄어들고, 그 효과로 인구밀도가 높아진다.
수렵.채집사회에서는 거주지를 끊임없이 옮겨야 하는데,
이때 어머니가 짊어질 수 있는 것은 어린 자식 하나와 약간의 소지품이다.
어린 자식이 부족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빨리 걸을 때까지는 다음 자식을 낳을 형편이 되지 않는다.
유목생활을 하는 수렵.채집사회에서는 수유기 무월경, 금욕, 유아 살해, 낙태 등의 수단을 통해
자식 간에 4년 정도의 터울을 두었다.
반면 정주 사회에서는 자식을 데리고 이동하는 문제로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먹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많은 자식을 낳아 기를 수 있다.
따라서 농경민의 경우에는 분만 간격이 대체로 2년으로, 수렵.채집사회의 절반에 불과하다.
식량을 인위적으로 생산하는 사회는 출산율도 놓은 데댜 단위면적당 더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기 때문에
수렵.채집사회보다 인구밀도가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
잉여 식량을 저장할 수 있게 된 것도 정착 생활의 또 다른 영향이다.
식량을 가까이에서 머물며 지키지 않으면 저장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유목하는 수렵.채집민에게도 며칠 동안 소비할 수 있는 양보다 많은 식량을
사냥하거나 채집하는 운 좋은 날이 간혹 있겠지만,
먹고 남은 것을 지킬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런 행운이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식량을 직접 생산하지 않는 전문 계급을 위해,
다시말하면 그런 계급에 속한 사람을 부양하려면 저장 식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유목하는 수렵.채집사회에는 전업 기능공이 전혀 없거나 극소수에 불과한 반면,
정주 사회에서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런 전문 계급에 속한 대표적인 두 유형이 왕과 관료이다.
스렵.채집사회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여서 전업 관료와 세습 군장이 없고,
정치조직도 소규모 무리나 부족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 이유는 수렵.채집사회에서 몸이 튼튼한 사람은 모두가 먹을 거리를 구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농경사회에서는 식량을 비축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엘리트 정치조직이 농부가 생산한 식량을 통제하는 권한을 장악하고,
세금을 부과할 군리를 주장하며 , 직접 식량을 생산하는 부담에서 벗어나 전업으로 정치활동에 뛰어든다.
이런 이유로 중간 규모의 농경사회는 주로 군장 사회로, 조직되고
왕국은 대규모 농경사회에만 존재했다. 이렇게 복잡한 정치 단위가
평등한 수렵 무리보다 정복 전쟁을 지속적으로 훨씬 더 유리하게 치를 수 있다.
환경이 유난히 풍요로운 곳, 예컨대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 북서부 지역과
에코도르 해안지대를 차지한 수렵채집민은 식량을 저장하며 정주 사회로 발달해
초기 형태의 군장 사회가지 올라섰지만 왕국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과세를 통해 거두어들인 잉여 식량으로, 왕과 관료 이외에 달느전업 전문 계급도 부양할 수 있다.
정복 전쟁과 가장 직접적인 관련성을 띤 경우를 찾자면, 직업 군인을 먹이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영제국이 뉴질랜드에서 잘 무장한 토착민민 마오리족에 최종 승리를 거두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과세를 통해 비축한 잉여 식량이었다.
마오리족은 간혹 일시적으로 깜짝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야전에서 군대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1만 8,000면의 영국 전업 군인들에게 걲이고 말았다.
저장 식량은 정복 전쟁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성직자, 금속을 다루며 칼과총 등
다양한 기술을 개발하는 직공과 장인,
기억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정확히 보존하는 필경사를 먹이는 데도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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