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비달마순정리론 제28권
변연기품 ⑧
3.7. 무명(無明)에 대하여
1) 무명의 명의(名義)에 대한 이설 비판
바야흐로 이러한 [연기에 대한] 논의는 이 정도에서 그치고 이제 다시 무명ㆍ명색ㆍ촉ㆍ수의 네 가지 지분에 대해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행ㆍ유와 애ㆍ취에 대해서는 「변업품(辯業品)」과 「변수면품(辯隨眠品)」에서 마땅히 널리 해석할 것이며, 식과 6처에 대해서는 「변본사품」에서 이미 널리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무명의 뜻과 그 상(相)은 어떠한가? 이는 바로 ‘명(明)이 존재하지 않는 것[明無]’라고 해야 할 것인가, ‘명이 아닌 것[非明]’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앞의 뜻을 취한다면, 무명은 마땅히 비존재[無]라고 해야 할 것이며, 만약 뒤의 뜻을 취한다면, 마땅히 안(眼) 등을 본질[體]로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으로,35) 이와 같은 두 종류의 해석은 이치상 모두 옳지 않다.
(1) 무명의 명의에 관한 상좌(上座)설 비판
먼저 상좌(上座)는 말하기를 “이것(무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명’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이것을 바로 무명이라 하니, 원인 없이 이러한 일(‘명’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설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만약 이것이 존재하여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명’이 현행하지 않는 것으로 ‘명’을 획득하지 못한 혹(惑,번뇌)을 무명이라 말한다면, 일체의 번뇌를 다 무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둘(무명과 번뇌) 중 어느 하나가 존재할 때 두 가지는 함께 성취되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무명은 명의 비존재에 대해 능히 원인이 된다’고 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니, 계경에서는 존재하는 것[有]이 존재하지 않는 것[無]에 대해 ‘능히 원인이 된다’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마땅히 결과라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원인 없이 이러한 일(‘명’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나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無物]에 대해 ‘존재한다’는 말을 설할 수 없으니, 그의 종의에서는 오로지 현재[법]만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종의가 비록 ‘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일지라도 혹 어느 때 ‘명’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이라고 인정하므로 결정코 ‘무명이 명을 장애한다’고 설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36) 만약 ‘그것(무명)은 무명의 수계(隨界,종자의 異名)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무명의 수계는 무명]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혹 수계 자체도 역시 무명이라고 인정할지라도 이러한 [수계] 자체는 혹 어느 때 ‘명’도 역시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능히 명을 장애한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명’이 막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正生位]에 이를 때, 무명의 수계는 막 소멸하려고 하는 때에 이르기 때문에 ‘무명은 능히 명을 장애한다’고 설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학도(學道)에 머물러 마땅히 무명에서 벗어났다고 해야 하거나, 혹은 또한 ‘명’은 필경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무명의 수계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득(得)의 경우처럼 수계도 마땅히 그러하다고 말한다면, 다시 말해 “그대(유부)의 종의에서도 무명의 ‘득’은 무명 자체가 아니지만, 혹 어느 때 무명이 비록 소멸하였을지라도 무명의 ‘득’의 세력에 의해 장애되어 ‘명’은 생겨날 수 없으며, 혹은 다시 어떤 때에는 이것의 ‘득’이 존재할지라도 가행력에 의해 ‘명’은 생겨날 수 있다고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상좌)의 종의에서도 무명의 수계는 무명 자체가 아니지만 혹 어느 때 무명이 비록 소멸하였을지라도 수계가 장애함으로 말미암아 ‘명’은 생겨날 수 없으며, 혹 어느 때에는 생겨날 수 있다고 한 것인데,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해명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자신의 설에 위배되기 때문이며, 크나큰 과실을 [범한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명’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이것을 바로 무명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여기서 다시 말하기를 “무명의 수계는 무명 자체가 아니지만 능히 ‘명’을 장애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뒤의 말이 앞서 스스로 한 말에 위배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또한 무명 자체는 소멸하고서 다수의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면, 무명에서 벗어난 자도 역시 마땅히 그 후에 무명을 다시 일으켜야 할 것이니, 수계 자체는 무명이 아니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으로, 다같이 무명을 떠난 것으로서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무명의 ‘득’의 세력에 의해 장애되어 ‘명’이 생겨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법종(對法宗)에서는, 그 밖의 다른 법을 장애하여 일어날 수 없게 하는 것을 바로 이러한 ‘득’의 작용이라고는 설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득’은 그 작용이 어떠한가?
이를테면 이것(무명의 ‘득’)을 원인으로 하여 무명이 상실되지 않는 것[不失]을 말한다.
[여기서] ‘상실되지 않는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역시 [‘득’과는] 다른 별도의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득’의 작용에 의해 획득되어야 할 법[所得法]으로 하여금 자꾸만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을 ‘상실되지 않는다’는 말로 설정한 것이다.
과거의 무명이 어찌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과거의 무명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득’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비록 획득되어야 할 법으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없을지라도 아직 대치도를 일으키기 이전이라면, [무명은] 이로 말미암아 항상 따라 상속하여 끊어짐이 없다.
어찌 이것(‘득’)이 무명과 함께 소멸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비록 [무명과] 함께 소멸할지라도 그 뒤에 다시 속생(續生)한다. 이를테면 그것(무명)이 멸할 때 원인이 되는 어떤 힘이 그 밖의 다른 자신의 종류[自類]를 인기하여 무간에 생겨나게 하며, 그 밖의 다른 [자신의 종류]는 다시 또 다른 [자신의 종류]를 인기하다가 마침내 [대치]도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혹은 획득된 무명으로 하여금 결과를 낳게[與]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득’의 작용으로, 말하자면 ‘득’이 끊어지고 나면 이러한 무명의 결과는 다시 생겨날 수 없다. 만약 무명의 ‘득’이 무명에 능히 결과를 부여[與果]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명’이 생겨나고 나서도 무명은 다시 생겨나야 할 것이니, 과거의 무명은 그 자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득’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 무명의 결과는 생겨나지만, ‘득’이 이미 끊어졌을 때 그것의 결과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따라서 이러한 차별은 ‘득’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말은 앞서 [언급한 ‘상실되지 않는다’는 사실의] 특상[相]에 위배되지 않으니, 이를테면 획득되어야 할 법[所得法]으로 하여금 자꾸만 다시 일어나게 하여 상실되지 않게 하는 근거[不失因]를 설하여 ‘득’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어찌 [본]법(本法)이 존재하여야 ‘득’도 존재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본법이]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득’을] 법의 생인(生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획득되어야 할 법은 ‘득’을 떠나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법의 생인을 설하여 ‘득’이라 이름한 것으로, 눈에 근거하는 식(즉 眼識)이 눈을 떠나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으며, 역시 또한 그대 종의에서 [말하는] 무명의 수계(隨界)와 같다. 즉 그대는 수계가 비록 항상 존재할지라도 무명이라는 결과가 항상 생겨난다고는 인정하지 않듯이, 우리의 ‘득’ 역시 그러하므로 마땅히 책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대법종에서는 비록 무명의 ‘득’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무명은 일어날 수 있지만, 우리의 종의에 의하는 한 수계를 떠나 무명은 필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수계는 그것(무명)의 ‘득’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상좌의 해명)
이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바야흐로 그의 종의(수계를 떠나 무명은 필시 생겨나지 않는다는 종의)를 인용하여 논증할지라도 ‘득’이 [생]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지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유부의 경우도] 요컨대 ‘득’이 존재해야 획득되어야 할 법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득’이 생인이 된다고 하는 이치는 지극히 잘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37) 또한 수계론 역시 ‘득’의 경우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수계를 떠나서도 법은 역시 생겨날 수 있으니, 이를테면 모든 이생(異生)은 성법(聖法)의 수계를 갖지 않았지만 가행을 올바로 닦음으로써 성법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38)
또한 앞에서 이미 차별의 말을 논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득’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획득되어야 할 법으로 하여금 자꾸만 다시 일어나게 하여 상실되지 않게 하는 근거를 설하여 ‘득’이라 말하였다”고 하였던 것인데, 어찌 이미 상실한 ‘득’과 본래부터 획득하지 않았던 ‘득’에 대해 힐난하는 것인가?
또한 구(舊) 수계(隨界)는 이치상 존재할 수 없음을 이미 나타내었다.39) 곧 그의 종의에서는 무명이 현전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무명을 이미 영원히 떠난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인데,40) 어떻게 무명이 후시(後時)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설혹 성도의 가행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명’이 바로 생겨나야 할 것인데] 어떠한 법이 장애하였기에 ‘명’이 생겨나지 않게 되는 것인가? 바로 이러한 근거에 따라 모든 아라한의 경우도 ‘명’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바로 ‘명’을 상실한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명’이 후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설혹 제멋대로 함부로 하지 않을지라도 ‘명’ 자체는 끝내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다시 말해 무명이 바로 일어날 것인데), 어떠한 법이 대치하였기에 무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41)
그렇기 때문에 그가 설한 “이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명’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이것을 바로 무명이라 한다”는 말은 다만 허언(虛言)일 뿐 아무런 참다운 뜻도 없다. 오로지 대법자(對法者)들만이 이 같이 “법을 파괴하는 것[壞法]과 가까이하는 종의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설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상좌는 다시 말하기를 “혹은 이와 같은 종류(즉 ‘명’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의 심(心)과 심소를 총칭하여 무명이라 한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명은 마땅히 실유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마음 등에 근거하여 일시 건립한 것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은 이치상 역시 이루어질 수 없으니, 일체의 심ㆍ심소법을 다 무명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무명은 자성으로서 머무는[自性住] 마음 등을 본질[體]로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마음 등과] 차별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자성으로서 머무는 [마음 등]이라고 한다면, 선 등 일체 품류의 마음 등도 다 무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온갖 무명 역시 비리작의(非理作意)를 원인으로 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이것(선 등의 마음)도 그것(비리작의)을 원인으로 삼는다고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에 불염오가 아닌 심ㆍ심소법도 비리작의를 원인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마음 등과] 차별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능히 차별 짓는 것[能差別]은 바로 무명이라 할 수 있기에, [그것이 마음 등에 의해] 차별되어지는 것[所差別]은 아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차별상이 아니다.) 또한 그는 마땅히 이러한 [마음 등과] 차별되는 상에 대해 설해야 할 것으로, 심ㆍ심소법에 대해서는 그 체상(體相)이 각기 다른 것이라고 하면서 어찌하여 무명의 상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한 가지라고 하는 것인가?
곧 심ㆍ심소를 총칭하여 무명이라 한 것은, 그의 마음이 여래의 교법 밖에서 노닐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래의 교법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상좌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혹은 전도(顚倒)된 명(明)을 바로 무명이라고 말하니, 박가범께서도 역시 사견(邪見)을 무명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사견에 대해 혹은 익히고[習], 혹은 닦으며[修], 혹은 많이 닦고 익히면 치(癡)가 맹리(猛利)해진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마땅히 두 종류의 무명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첫째는 사지(邪智)이고, 둘째는 흑암(黑闇)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렇다고 할 경우] 견행(見行)과 치행(癡行)의 차별적인 건립(설정)이 마땅히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견과 흑암은 결정코 차별적인 것으로,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차별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두 종류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니, 차별이 없는 것을 두 종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 이미 ‘사견에 대해 혹은 익히고, 혹은 닦으며, 혹은 많이 닦고 익히면 치(癡)가 맹리해진다’고 하였으니, 바로 ‘흑암에 대해서도 혹은 익히고, 혹은 닦으며, 혹은 많이 닦고 익히면 치가 역시 맹리해진다’고 해야 하는 것으로, 계경에서 “‘치’의 원인은 무명이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두 가지 결과에 차별이 없기 때문에 마땅히 두 가지 원인에도 역시 차별이 없다고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42) 그런즉 견행(見行)과 치행(癡行)의 차별적인 상의 건립(설정)은 마땅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견행자(見行者)와 치행자(癡行者)가 감로문(甘露門)에 들어감에 있어서는 각기 차별이 있다. 따라서 저 상좌는 경의 뜻에 미혹하였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경의 뜻은 무엇인가?
어리석은 자[愚者]는 전도된 견행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견은 반드시 무명과 함께 존재한다. 그래서 사견에 대해 혹은 익히고, 혹은 닦으며, 혹은 많이 닦고 익히면 치(癡)가 맹리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견이 바로 무명은 아니다.
어떠한 까닭에서 무명은 사견과 함께 일어나는 것임에도 ‘치’가 맹리해진 것을 사견이 아니라고 말한 것인가?
이것에 의해 밝혀지는 바가 있기에 [그렇게] 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여기서의 뜻은 ‘자주 현행하는 예리한 탐ㆍ진ㆍ치를 번뇌장(煩惱障)이라 한다’는 사실을 설하려는 것이었으니, 이를테면 앞서 어떤 이가 “어떻게 탐 등은 맹리함을 성취하게 되는가?”라고 묻자 뒤에서 바로 답하여 말하기를 “탐욕에 대해 혹은 익히고, 혹은 닦으며, 혹은 많이 닦고 익히면 탐은 바로 맹리해진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설정된 견(見)ㆍ치(癡)의 두 행(行)은 마땅히 잡란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43)
그렇지 않으니, ‘견’에는 세 종류의 차별이 있어 잡란의 과실이 없다. 이를테면 혹 어떤 ‘견’은 오로지 전도되어 일어나며, 혹은 다시 어떤 ‘견’은 모두 증익(增益)하여 일어나며, 혹은 다시 어떤 ‘견’은 일부만 증익하여 일어나지만, 이러한 세 종류 중에서 오로지 전도되어 일어나는 것에만 ‘치(癡)’의 힘이 수승하기 때문에 치행(癡行)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으며, 나머지 두 종류는 ‘견’[의 힘]이 강력하기 때문에 견행(見行)으로 설정하였다.44) 그러므로 두 행을 설정함에 있어 잡란의 과실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탐(貪)ㆍ진(瞋)의 경우도 [‘치’와] 함께 일어나 비록 무명이 존재할지라도 저열하기 때문에 ‘치’가 맹리해진다고 말하지 않은 것으로, 이러한 두 종류 혹은 어떤 구체적인 사물[有事]을 반연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품류 중에서는 ‘치’가 두드러지지 않은 것이다.
혹은 생사에는 시초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번뇌의 생인(生因)으로 동류나 이류를 설한 것이니, 그 경에서 “온갖 탐ㆍ진ㆍ치로서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지 않은 것은 없다”고 설한 바와 같다. 혹은 부정견(不正見)을 꾸짖고 허물기 위해 “사견을 익히면 ‘치’가 바로 증장한다”고 설한 것이니, 그 경에서 “대저 지자(智者)라고 이름함은 능히 무지(無智)를 소멸한 이로서, 이러한 이(사견자)는 치(癡)를 증장시키기 때문에 지자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바와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계경의 진실한 뜻을 부지런히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견’이 바로 무명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본송을 해석하면서 다시 비판 부정하게 될 것이다.
(2) 무명의 명의에 관한 라마 등의 설 비판
[이 점에 대해] 대덕(大德) 라마(邏摩)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견 자체가 바로 무명은 아니다. 그렇지만 온갖 탐욕과 진에와 사견은 다른 종류인 탐ㆍ진ㆍ치 세 가지를 각기 별도의 뿌리[根]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증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어떻게 탐ㆍ진을 탐욕과 진에의 다른 종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치’는 어떠한 까닭에서 다만 사견만의 뿌리가 되고 탐욕과 진에를 증장시키는 뿌리는 되지 않는 것이며, 탐ㆍ진은 어떠한 까닭에서 사견의 뿌리가 되지 않는 것인가? 즉 그(라마)는 능히 이 같은 뜻에 대해 분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설한 바는 경의 뜻을 헤아린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무지(無智)는 오로지 지(智)가 존재하지 않는 것[無,즉 비존재]으로, 그렇기 때문에 무명은 유위성(有爲性)이 아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부처님을 제외한 그 밖의 무학과(無學果,즉 아라한)에게도 마땅히 무명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모든 것을 두루 아는 지[遍智]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계경에서] ‘전제(前際) 등에 대한 무지를 무명이라 한다’고 별도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허물은 없다고 한다면,45) 그렇지 않으니, ‘지(智)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대저 ‘존재하지 않는다[無]’는 말은 성상(性相)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비존재가] 어떻게 여기(예컨대 智)에 속하고 저기(예컨대 책상)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46)
혹은 또한 그는 마땅히 두 가지 지(智)는 별도의 자상[相]을 갖지 않는다고 설해야 한다. 이를테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는데] 무엇을 자상으로 하기에 ‘전제에 대한 지[前際智]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염(念) 무간에 대한 지[念無間智]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또한 무엇을 자상으로 하기에 두 가지는 다 같이 지(智)를 부정하는 것임에도 하나는 바로 무명이고, 하나는 무명이 아닌 것인가? [그러니] 여기에 무슨 이치가 있을 것인가? 따라서 그가 말한 것도 역시 경의 뜻이 아니다.
다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여기에 ‘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무명이라고 하니, 마치 세간에서 무염식(無鹽食) 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럴 경우] 색 등도 마땅히 무명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이다.47)
만약 “일체의 번뇌에 ‘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설하여 무명이라 한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계경에서는]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 등 [온갖 번뇌]의 갈래에서 욕탐 등을 떠나(다시 말해 욕탐 등과는 다른 것으로서) 그 존재를 별도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앞서 논설한 허물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일체의 번뇌를 본질로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무명 자체도 역시 마땅히 ‘견(見,즉 5견)’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무명은] 마땅히 ‘견’과 상응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역시 또한 탐 등과 함께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하니, 무명의 본질이 바로 탐 등[의 번뇌]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즉 탐 등[의 번뇌]가 탐 등과 상응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무명은 일체의 번뇌를 본질로 한다고 주장할 경우] 번뇌는 마땅히 서로 상응할 리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럴 경우] 역시 마땅히 무명을 염심(染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탐욕 자체가 바로 무명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경은 차별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다”고 한다면, 역시 마땅히 차별에 근거하여 [무명은] 능히 혜를 염오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며, 그런즉 마땅히 [‘명’과는 다른] 별도의 무명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한다. 즉 능히 혜를 염오하게 하는 것을 마땅히 전체적[總]으로 [번뇌라고] 말해서는 안 되니, 총명(總名)으로서의 무명은 개별적인 존재[別性]가 아니기 때문이다.48)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명’과는 다른] 별도의 무명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한다.
2) 무명의 명의에 대한 유부의 견해
그렇다면 그러한 [무명의] 뜻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明)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것을 무명이라고 하니
친구 아닌 이[非親]ㆍ비진실[非實] 등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를테면 친구에 대응하는 온갖 원적(怨敵)이나 친구와는 서로 반대되는 이를 ‘친구 아닌 이[非親友]’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그러한 이는 친구와는 다른 그 밖의 일체의 [유정] 중의 평등한 종류를 말하는 것도 아니며, 친구의 비존재[無]라는 말도 아니다.49) 또한 진리의 말씀[諦語]을 ‘진실’이라고 이름할 때, 이것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거짓[虛誑]된 언론(言論)을 일컬어 ‘비진실’이라고 하니, 이는 진실과는 다른 그 밖의 일체의 색ㆍ향 등의 종류를 말하는 것도 아니며, 역시 또한 진실의 비존재라는 말도 아니다.
그리고 [본송에서] ‘등’ 이라고 말한 것은, 비천(非天)ㆍ비백(非白)ㆍ비애(非愛)ㆍ비의(非義) 등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아소낙(阿素洛,asura) 따위처럼 천(天) 등과 서로 반대되는 것을 ‘비천’ 등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천 등과는 다른 [모든] 것을 말하는 것도, 천 등의 비존재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50)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도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니, 바로 명(明)에 대치되는 것으로서, ‘명’과 다른 [모든] 것도 아니며, ‘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명’의 비존재)도 아닌 것이다.
3) 무명의 실유 논증
어떻게 그러함(무명이 개별적으로 실체로서 존재함)을 알게 된 것인가?51)
[계경에서] 식(識)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緣)에 따라 존재하며, 다른 것의 연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진실한 논거[證,경증과 이증]가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결(結) 등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악혜(惡慧)는 [무명이] 아니니, 견(見)이기 때문이며
[무명은] ‘견’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능히 혜를 더럽힌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경에서 무명을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누(漏)ㆍ액(軛)ㆍ폭류(瀑流) 등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52) 즉 그 밖의 다른 안(眼) 등이나 그 자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全無]은 ‘결’이나 ‘박’ 등의 사(事)로 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법[有別法]을 설하여 무명이라 말한 것이다.5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악처자(惡妻子) 즉 아내가 사악할 경우 아내가 없는 것[無妻子]과 같다고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악혜(惡慧)도 마땅히 무명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명은 아니니, 그것은 바로 견(見)을 갖기 때문이다. 즉 온갖 염오혜를 일컬어 악혜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무명이 아니다.54) ‘견’은 바로 추심(推尋, 推度 審慮의 준말)으로, 분명한 예지의 결단[猛叡決斷]이니, 그것(악혜)을 일컬어 우치(愚癡,즉 무명)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명은 마땅히 ‘견’이 아닌 온갖 염오혜(이를테면 5식과 상응하지 않는 不共無明이나 탐ㆍ진ㆍ치와 상응하는 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무명은 ‘견’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혜가 아니다]. 무명이 만약 혜(즉 5견 이외의 악혜)라고 한다면, 마땅히 ‘견’과 상응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두 가지의 혜 자체는 함께 상응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55) [그러나] ‘견’은 무명과 함께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으니, 우치(愚癡)하지 않은 ‘견’은 전도(顚倒)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치하지 않은 ‘견’이 전도되는 것은 무명과 상응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무명은 능히 혜를 오염시킨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계경에서 “탐욕은 마음을 오염시켜 해탈하지 못하게 하며, 무명은 혜를 오염시켜 청정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56) 즉 [무명이 만약 염오혜라고 한다면] 혜가 다시 혜 자체를 오염시킬 수는 없는 것으로, [마음과는] 다른 존재인 ‘탐’이 능히 마음을 오염시키듯이 무명 역시 [혜와는] 다른 존재로서 혜를 능히 오염시킨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역시 또한 ‘무명은 혜와 비록 상응하지 않을지라도 능히 오염시킬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예컨대 탐이 마음을 오염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과 함께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즉 심ㆍ심소법에는 등기염(等起染)이 없으며, 다만 [다른] 자성과의 상응염(相應染)만을 갖기 때문에 [어떤 법] 자체는 그 자체와 상응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은 결정코 악혜가 아닌 것이다.
(1) ‘무명이 혜(慧)를 더럽힌다’는 교증에 대한 경주의 해명 비판
이에 대해 경주(經主)는 거짓[假]되게 [다음과 같이] 해명하여 말하였다.
“온갖 염오혜가 선혜(善慧)와 뒤섞여 청정하지 않게 하는 것을 설하여 ‘능히 오염시킨다’고 해야 함에도 어찌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이는 바로 탐이 마음을 오염시켜(다시 말해 탐이 마음과 뒤섞여) 해탈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어찌 반드시 [개별적으로] 현기(現起)하여 마음과 상응해야만 비로소 ‘능히 오염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탐의 힘에 의해 마음이 손박(損縛)되어 해탈하지 못하게 될지라도 그 후 그러한 탐의 훈습을 전멸(轉滅)할 때 마음은 바로 해탈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은 혜를 오염시켜 청정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혜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무명에 의해 혜가 손탁(損濁)될 뿐이다. 이와 같이 분별할 경우 이치상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57)
여기서 그의 해명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잘된 분별이 아니니, 상응하는 품류[의 법]을 떠나서는 능히 오염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과] 상응하는 탐은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에 능히 마음을 오염시키고,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탐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능히 [마음을] 오염시킨다고 한다면, 아라한이 아닌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불염오심을 갖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탐에 염오한 것과 염오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것은] 일찍이 본 적이 없을뿐더러 또한 [그럴 경우]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실과 탐전(貪纏)이 바로 현전하더라도 마땅히 불염오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성취하기 때문에 [그의 해명은 잘된 분별이 아니다].
또한 [염오혜와 선혜(善慧)가]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을 ‘능히 오염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온갖 무루혜도 역시 마땅히 염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염오함이 없는 혜[無染慧]가 염오함이 있는 혜[有染慧]와 뒤섞여 있을 경우, 마땅히 염오함이 있는 혜가 염오함이 없는 혜로 바뀌어야 할 것이니, 능히 대치하는 것[能治, 즉 염오함이 없는 무루혜]의 힘은 강력하지만, 대치되는 것[所治, 즉 염오함이 있는 혜]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온갖 선혜가 바로 현행할 때 염오혜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온갖 염오혜가 바로 현행할 때 선혜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 무엇이 능히 오염시킨다고 할 것이며, 또한 무엇을 오염시킨다고 말할 것인가? 만약 지금 바로 존재하는 것[有]과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이 능히 서로를 오염시키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58) 필경 해탈을 획득하는 일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훈습(熏習)을 멸할 때 바로 해탈한다’고 하는 경우, 훈습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本無]인데 다시금 무엇을 멸해야 하는 것인가?59) 설혹 훈습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능히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무명 그 자체가 아니라고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기 때문이다.60) 그러니 [훈습이] 멸한 상태든 멸하지 않은 상태든 필경 무슨 차별이 있을 것인가?
따라서 [계경에서] “무명은 능히 혜를 오염시킨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혜를 자성으로 삼는 것이 아니니, 여기에는 이치상 어떠한 경동(傾動)도 없는 것이다.
4) 무명의 자성과 어두움[闇]의 예를 통한 실유 논증
만약 실유의 개별적인 법[別法]을 설하여 무명이라 이름하였다면, 이제 마땅히 이러한 개별적인 법의 자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알지 못하는 것[不了知]’이라는 실유의 법이 존재하니, 이것이 바로 무명이다. 그러니 어찌 번거롭게 달리 추구(推究)할 것인가?
[그렇다면] 마땅히 결정코 어떠한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바야흐로 무명의 자성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오로지 박가범(薄伽梵)만이 일체법에 대해 올바로 알고, 올바로 설할 수 있다. 즉 [일체법의] 성(性) 혹은 상(相)이나 그 밖의 것은 오로지 [박가범만이] 모두 아는 것인데, 어찌 수고스럽게(쓸데없이) 따져 묻는 것인가?61) 그렇지만 나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은 특성[相]을 관찰하였다. 이를테면 어떤 개별적인 법이 있어 능히 혜의 공능을 손상시키니, 이는 바로 전도된 견[倒見]의 원인이다. 이는 관찰하려는 덕성[觀德]을 장애하는 과실로서, 알아야 할 법[所知法]으로 행전(行轉)하려 하지 않는(나아가려 하지 않는) 것이며, 심ㆍ심소를 은폐하는 것이니,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이것이 개별적인 법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결정적으로 알게 된 것인가?
탐욕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떠나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탐욕을 떠났기 때문에 마음이 바로 해탈하게 된 것이며, 무명을 떠났기 때문에 혜가 해탈을 얻게 된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62) 또한 이러한 무명은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니,63)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온갖 잡염(雜染)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명을 원인으로 하였기 때문에 온갖 잡염을 떠나게 되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견(邪見)과 마찬가지로 인근(隣近)의 대치를 갖는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온갖 사견이 끊어진 것은 정견이 생겨났기 때문이며, 온갖 무명으로부터 떠나게 된 것은 명혜(明慧)가 일어났기 때문이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이것을 한 가지 법[一法]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설하기를, “만약 어떤 필추가 있어 능히 한 가지의 법을 끊었다면, 나는 바로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마쳤다’고 기별할 것이니,64) 이러한 [한 가지 법이란] 바로 무명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어두움[闇]과 마찬가지로 대치를 갖는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가타(伽他)에서 설한 바와 같다.
모든 유정이 능히 어리석음을 끊으면
더 이상 어리석은 것에 미혹되지 않으니
그가 어리석음과 미혹함을 전멸(轉滅)하는 것은
마치 태양이 떠올라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과 같다.
만약 ‘어두움 자체는 개별적인 실유의 존재[別實物]가 아니라 다만 밝음[明]의 비존재를 그 본질로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밝음도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65)
만약 ‘밝음은 연이 있어야 생겨날 수 있지만, 어두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수(水) 따위처럼 [어두움과 밝음은] 생연(生緣)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혹 어떤 경우 외적인 적취의 연[聚緣]이 없이 ‘수’가 생겨나기도 하며, 혹 어떤 경우 외적인 적취의 연의 힘에 근거하여 ‘수’가 생겨나기도 하지만, ‘지(地)’ 등은 그렇지 않으니, 그 밖에 달리 상응하는 바에 따르기 때문으로, 법의 생연에는 각기 차별이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밝음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필시 그 밖의 다른 연(예컨대 등불)에 근거해야 하며, 어두움은 다만 [그것과] 상위(相違)하는 연(예컨대 등불의 부재)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동류인(同類因)의 힘이나 구생연(俱生緣)이 있어야 그 자체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들 여기에 무슨 이치에 위배됨이 있을 것인가?
또한 어두움 자체를 관찰해 보건대 품류의 차별이 있기 때문으로, 다만 밝음의 비존재만으로는 품류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66) 만약 ‘이러한 처소에 밝음이 분명하게 있고 없기 때문에 어두움이 성취될 수 있으니, 미세한 것 중에서 거친 것이 [성취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비존재의 법[無法]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어서 품류의 차별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존재하는 것[有,즉 밝음]과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즉 어두움]은 동일한 처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어두움과 그림자는 청색 등과 마찬가지로 안식의 경계대상이기 때문에 그 자체는 실유이니,67) 5식신은 능히 가법(假法)을 반연하는 것이 아니라고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68) 또한 어두움과 그림자는 계(界)에 포섭되기 때문에 실유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연기와 구름처럼 그 밖의 다른 색을 장애하기 때문으로, 어두움 역시 마땅히 그러하므로 그 자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두움 중에서 안식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밝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어두움이 장애하였기 때문이 아니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밝음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어두움의 색[闇色]을 반연하여 안식이 생겨나기 때문이며, 어두움 속에서는 그 밖의 다른 색의 사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두운 곳에 그 밖의 다른 색의 사물이 존재하는 경우,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은] 밝음에 의해 포섭[攝益]되지 않아서이지 어두움이 장애하였기 때문이 아니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것은 가히 의심할 만한 말이기 때문으로, 이에 대한 이취(理趣)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
또한 이는 향(香)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 가히 오랫동안 익히면 친근한 것이기 때문이며, 그 상(相)이 ‘불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며, 눈을 섭익(攝益)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만약 ‘빛[光]은 눈[眼]의 세용(勢用,작용)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이러한 빛조차 어떠한 곳에서도 눈을 증익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빛의 경우] 그 가운데서 오래 머물면서 이를 관찰하면 도리어 능히 눈을 손상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두움 자체는 실유의 법이 아니니, 밝음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며, 색상(色相)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밝음과 섞여있거나 밝음과 떨어져 있을지라도 지금 바로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밝은 곳에는 필시 어두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유대색(有對色)은 다 그러한 것인데, 어떻게 유독 밝음과 어두움만이 [그렇다고 하겠는가]?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흑암(黑闇,캄캄한 어두움)을 연으로 하여 명계(明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어떠한 경우에도 능히 다른 것의 연이 되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어두움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어두움은 해[日]처럼 출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으로, ‘해가 지면 어두움은 바로 출현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이 출현의 뜻을 갖는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나무 그루터기를 반연하여 그림자가 나타났다’고 설하고 있는데, 나무 그루터기가 이미 가유(假有)이니, 그림자도 마땅히 실유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고 한다면,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다. 즉 이는 배[腹]가 비록 가유라고 할지라도 실유의 허기짐[飢]과 목마름[渴]을 낳는 것과 같은 이치로서, 앞에서 이미 성립시켰기 때문이다.69) 또한 [그것의] 촉(觸)을 영납할 수 있으니, 수(受)의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또한 세존께서는 바삽파(婆澁波)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뜻이 어떠한가? 어찌 나무 그루터기를 반연하여 그림자가 나타났다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뿌리[根本]채 끊어졌다면, [더 이상] 이러한 법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는데,70) 존재하지 않는 법에 대해 이 같은 말을 설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밀실에 들어가 어두움이 충만한 것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그 자체 존재하지 않는 것[無體]에 이와 같이 ‘충만한 것을 보았다’고 하는 뜻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여러 광명으로써 모든 어두움을 깨트렸다”고 하였으니, 어두움이 만약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자체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本無]인데, 어찌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다시 깨트릴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계경에서는 “만약 본체를 끊지 않으면 그림자가 반드시 수반되는 것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등의 여러 다양한 이증과 교증에 따라 그림자와 어두움은 그 자체 실유임을 알아야 하니, 여기서 말한바(앞의 본송)에 따를 것 같으면, 무명은 어두움과 마찬가지로 대치를 갖기 때문에 [실유의] 이치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은 결정코 [명과는 다른] 별도의 법으로서, 무지(無知)를 본질로 하는 것이지 다만 ‘명’의 비존재가 아니다.
5) 염오무지와 불염오무지
그런데 이러한 무지에는 간략히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염오무지(染汚無知)와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는 무엇이 다른가?
어떤 이는 설하기를, “만약 능히 지혜[智]를 장애하는 것이면 이는 바로 염오무지이며, 불염오무지란 오로지 지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러한 두 종류의 무지의 차별상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말해 보면 이러하다. 즉 이로 말미암아 어리석음[愚]과 지혜[智]의 차이를 설정하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염오무지의 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로 말미암아 혹 어떤 경계에 대해 지혜에 미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면, 이는 바로 두 번째 무지(즉 불염오무지)의 상이다.
또한 만약 이미 끊어졌다는 점에서 부처와 2승(二乘,성문ㆍ연각)이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첫 번째 무지(염오무지)의 상이다. 그러나 만약 [염오무지는]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부처와 2승에 현행(行)하고 현행하지 않음[의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두 번째 무지의 상이다.71) 또한 만약 어떤 사물[事]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대해 어리석은 것이면, 이를 일컬어 첫 번째 염오무지의 상이라 한다. 그러나 만약 제법의 맛[味]ㆍ세력[勢]ㆍ이숙[熟]ㆍ공덕[德]ㆍ수량(數量)ㆍ처소[處]ㆍ시간[時]ㆍ공통점[同]ㆍ차이점[異] 등의 상에 대해 능히 참답게 깨닫지 못한 것이면, 이는 바로 불염오무지인데, 이러한 불염오무지를 설하여 바로 습기(習氣)라고도 이름한다.
그런데 옛날의 논사[古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습기의 상(相)이라 함은 염오하지 않은 심소의 차별[상]이다. 즉 그것은 염오하거나 염오하지 않은 법을 자주 익힐 때 인기되는 것으로, 일체지(一切智)가 상속 현행할 때에는 인기되지 않는데, 심ㆍ심소가 자재(自在)하게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바로 습기라고 이름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로지 지혜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는 아니니,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이 능히 원인이 된다고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은 종류(‘명’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의 심과 심소를 총칭하여 습기의 불염오무지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니,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기 때문이다.72) 즉 이러한 무지는 자성으로서 머무는[自性住] 마음 등을 본질[體]로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마음 등과는] 차별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자성으로서 머무는 마음 등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부처도 역시 마땅히 불염오무지를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마음 등과는] 차별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능히 차별 짓는 것[能差別]은 바로 무지라고 할 수 있기에, [그것이 마음 등에 의해] 차별되어지는 것[所差別]은 아닌 것이다.
지금 바로 보더라도 선 등의 품류로 차별되는 심ㆍ심소 중에는 반드시 어떤 개별적인 법이 있어 능히 그러한 차별을 도모하는 것으로, 바로 일체의 법이 [능히 차별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선한 품류 중에는 반드시 신(信) 등[의 심소]가 있고, 불선의 품류 중에는 무참(無慚) 등[의 심소]가 있으며, 염오한 품류 중에는 방일(放逸) 등[의 심소]가 있으니, 이와 같은 종류의 심ㆍ심소 중에 반드시 어떤 개별적인 법이 존재하여 능히 차별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도 역시 개별적인 법이 있어 능히 차별을 도모하니, 이것이 바로 불염오무지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그의 말을 살펴보건대 크나큰 과실이 있다. 즉 모든 이생(異生) 등의 심ㆍ심소법은 모두 맛ㆍ세력ㆍ이숙 등의 상을 참답게 깨닫지 못하였지만(다시 말해 불염오무지를 갖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그 밖의 다른 심소를 낳는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각각의 찰나에 그러한 심ㆍ심소법은 차별되어 생겨나니, 마땅히 찰나찰나[念念] 중에 각기 다른 갖가지 무지의 법이 일어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에 다른 상[異相]이 있어 무지로 하여금 차별되게 하니, 이것으로 능히 마음의 품류를 차별 짓기에 충분하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반드시 불염오무지를 별도로 계탁(計度)해야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제법의] 맛ㆍ세력ㆍ이숙 등에 대해 부지런히 추구[勤求]하지 않는 해혜(解慧)와 다른 상의 법이 다 같이 원인이 되어 그 후 동류의 혜를 인기하여 낳으며, 이러한 혜는 해(解)에 대해 또한 부지런히 추구하지 않음으로서 다시 원인이 되어 부지런히 추구하지 않는 해혜를 인기하여 낳게 된다. 이와 같이 계속하여 일어난 무시(無始) 이래 인과가 서로 거듭되어 익힌 것을 자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같은 맛 등의 경계에 대해 자주 익히더라도 해(解)에 대한 감능(堪能)의 지혜가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렇게 인기된 저열한 지혜를 ‘불염오무지’라고 이름하며, 이것과 함께 생겨난 심ㆍ심소법을 총칭하여 ‘습기’라 한 것이니, 이치상 결정코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혹은 모든 유정이 번뇌를 갖는 상태에서 소유한 염오함이 없는 마음[無染心]과 그 상속은 온갖 번뇌와 뒤섞여 훈습되며, 이로 말미암아 능히 번뇌에 따라 생겨난 기분(氣分,기운)이 존재하기 때문에 염오함이 없는 온갖 마음과 권속(眷屬,즉 隨行法)은 그것과 유사한 행상으로 차별되어 생겨난다. 즉 자주 익힌 힘으로 말미암아 서로 이어져 일어나기 때문에 허물을 떠난 소의신[離過身] 중에도 습기가 존재한다고 말한 것으로, 일체지자(一切智者)에게는 영원히 끊어져 현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미 견소단(見所斷)의 번뇌를 끊은 상태에서는 염오하고 염오하지 않은 마음과 통하는 상속 중에 그 밖의 다른 번뇌에 따라 생겨난 습성(習性)이 존재하는데, 이는 바로 ‘견소단의 번뇌의 기분(기운)’이다. 이 중에서 염오한 [마음의 상속에 존재하는] 것이면, 이를 유성(類性)이라 이름하는데, 금강도단(金剛道斷)에서 다 현행하지 않는다.73) 만약 염오하지 않은 [마음의 상속에 존재하는] 것이면, 이를 견소단의 번뇌의 습기라고 이름하는데, 역시 그러한 금강도단에서는 근기의 차별(즉 성문ㆍ연각ㆍ불)에 따라 현행하는 경우도 있고 현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만약 이미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를 끊은 상태라면, 오로지 염오하지 않은 마음의 상속 중에 그 밖의 다른 번뇌에 따라 생겨난 습성(習性)만이 존재하는데, 이는 바로 ‘수소단의 번뇌의 기분(기운)’으로, 수소단의 번뇌의 습기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이는 유루이기 때문에 무학은 이미 끊었지만, 근기의 승열(勝劣)에 따라 현행하는 경우도 있고 현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 세존께서는 이미 법의 자재를 획득하셨기 때문에 번뇌와 같은 것은 필경 현행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만을 유독 ‘선정(善淨)[의 마음]이 상속하는 분’이라 일컬은 것으로,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행(行)에 어떠한 오류나 과실이 없으며, 불공법(不共法)과 삼념주(三念住) 등을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74) 또한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밀의(密意)로서 ‘오로지 부처만이 홀로 무학과를 획득하였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대덕(大德) 라마(邏摩)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염오하지 않은 법이 존재하는 것을 일컬어 습기(習氣)라고 하니, 이는 불선의 원인에 의해 초래된 이숙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옛날 보살의 계위에 있을 적에 3무수겁에 걸쳐 온갖 가행(加行)을 닦았기에 비록 번뇌가 존재하였을지라도 번뇌에 의해 인기된 염오하지 않은 습기를 능히 점진적으로 제거하였으며, 백법(白法, 선법)의 습기를 점진적으로 증장시켰다. 그 후 ‘모든 누(漏,번뇌)의 영원한 끊음[永斷]’을 획득하였을 때에도 이전의 온갖 습기로서 멸한 것도 있고 멸하지 않은 것도 있는데, 오랫동안 가행을 닦았기 때문이다. 즉 위없이 높은 ‘모든 누의 영원한 멸진[永盡]’을 증득하였음에도 부처님께는 오히려 백법의 습기가 남아있으니, [경에서] ‘습기로서 멸한 것도 있고 멸하지 않은 것도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설은 이치상 역시 그럴 수 있을지라도 그는 능히 그것(습기)의 체성(體性)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염오하지 않은 습기라고 하였지만, 그 본질이 무엇인가? 단지 허언(虛言)만으로는 진실한 이해를 낳게 할 수 없다.
경에서는 유성(類性)을 말하고 있는데, 그 본질은 무엇인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아만(我慢)을 본질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경설에 위배되니, 계경 중에서는 아만 이외 유성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와 같이 이미 알고, 이미 관찰하여 존재하는 모든 애(愛), 존재하는 모든 견(見), 존재하는 모든 유성(類性), 모든 아ㆍ아소의 집착[執]과 아만의 집착, 수면(隨眠)을 단변지(斷遍知)하였기 때문에 흔적도 없이 적멸하였다.”75) 따라서 유성은 아만과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 밖의 만(慢)이 바로 유성에 포섭된다”고 하였다.76) 그러나 그의 말도 옳지 않으니, ‘모든[諸]’이라는 말은 아만에 이르기까지 적용되기 때문이다. 즉 ‘아만의 집착’이라는 말은 모든 ‘만’을 다 포섭하는 것으로, 마땅히 각기 남김없이 [모두를] 포섭하는 ‘애’ 등의 경우와 같은 이치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수승한 것으로 ‘아ㆍ아소의 집착’을 별도로 설하였으니, 이(아ㆍ아소견)는 바로 모든 ‘견’의 근본이기 때문에 ‘견’ 가운데 두 종류를 별도로 나타내게 되었다. [또한] 의(疑)와 에(恚)를 포섭하기 위해 ‘수면’이라는 말을 설한 것이며, 수승한 번뇌 중에 무명은 논설되지 않았으니, 그것을 별도로 나타내기 위해 ‘유성(類性)’이라는 말을 설한 것이다. 즉 [무명은] 번뇌[惑]와 두루 함께할뿐더러 온갖 취(趣)로 두루 나아가게 하기 때문에 ‘유성’이라 말한 것이다. ‘유(類)’란 바로 ‘행(行)’의 뜻으로, 이는 바로 ‘유(類)’의 본질[體]이기에 ‘유성’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