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곱이레 회복기간 |
62이레 그리스도의 초림(교회 시대) |
성도들을 데려가기 위한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마지막 한 이레) |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 재림 천년왕국 |
이 계시가 다니엘에게 임하게 된 경위
바벨론이 망하고 매데 사람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의 왕이 되었을 때 다니엘은 그의 선배인 예레미야의 예언서를 연구하고 있었다. 예레미야 25:11-12에 보면 "... 이 나라들은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70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 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라고 예언되었다. 만일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간 연대를 주전 605년이라고 한다면 그가 이 글을 읽을 때는 70년이 거의 끝날 시기였을 것이다, 아마도 포로생활 69년이 지나간 때인 듯 하다.
이 때에 다니엘은 이미 예레미야의 예언의 일부가 성취된 것을 깨달았다.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서 중심되는 예언 제목의 하나는 바벨론 멸망(25장과 29장)이었다. 다니엘은 "갈대아 나라의 왕이 된" 메대 사람 다리오 왕 원년에라는 이 예언 의 한 두 구절을 읽었을 그는 이미 바벨론이 멸망하고 베대파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단계로 이스라엘이 해방되리라는 예언의 성취를 깨달았고 그 자유가 이미 형존하는 환경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했다, 그는 자신과 유대 나라와 성전과 예루살렘을 대신하여 중재하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기도는 죄와 사악함을 고백하는 기도였다, 요컨대 유대인들이 포로가 된 이유는 그들의 사악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니엘은 이 겸손한 죄의 고백으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아는 준비가 되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관하여 기도하는 중에 다니엘의 마음 속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곧 예례미야가 예언한 70년의 포로생활이 끝난 뒤에는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구원의 오지 않을까? 미래의 이 구원은 유대 민족에게만 올 것인가? 이 구원은 또한 하나님의 공의 죄를 미워하시는 새로운 계시를 가지고 올 것인가? 이 구원은 언제 올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응답은 왔다, 그것은 천사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알려 준 70이레에 대한 예언이었다, 성경에 가브리엘은 계시의 전달자로서 하늘에서 결정된 사실을 다니엘에게 알려주도록 파견되었다, 그것은 유대민족과 성읍과 성전이 완전히 핍박받는 70년이 지나면 새로운 생활의 놀라운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그 시대는 전에 있었던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그 시대는 70년이 아니고 70의 7배가되는 기간이며 그 시대의 끝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고갈되지 않고 충만한 은혜가 모든 것 위에 임한다는 것이다, 그 때에는 선지자들로 약속하신 사죄의 은혜가 임하여 영원한 의와 구원의 축복이 온다는 것이며 마침내 참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단지 유대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 제일 먼저 성읍을 개건하리라는 의미의 회복을 말하는 정도였으나 다니엘은 예루살렘이 이전의 영광과 넓이로 회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다니엘은 가브리엘을 통하여 기름부음 받은 자로 말미암아 임할 계약의 축복을 예언했다. 다시 말하면 기름부음 받은 왕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은혜 계약이 실시된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자신과 그의 민족을 대신하여 사죄의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축복에서 끊어짐을 받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완전히 훼파할 이방왕과 군대의 전리품이 되었던 것이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24절은 70이레에 대한 일종의 개괄적인 진술이다, 본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박에서 회복시키는데 필요한 모든 성취를 위하여 일정한 기간이 작정되었다는 계시이다, 포로생활 70년은 끝나고 이제 또 하나의 70이란 말로 표시된 놀라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다니엘이 상상하였던 것 보다 더 놀라운 것이다, 바로 이 시대에 하나님은 그의 메시아를 통하여 구속을 가져올 것이며 하나님은 그의 신적 구속적 프로그램을 전개시킬 것이다. 여기에서 당면하는 문제는 우리말로 "칠십이레"로 번역된 히브리 용어의 정확한 의미이다. 이 말은 보통 영어 성경이나 한국 성경에서 "칠십 주간 (Seventy weeks-KJV) "으로 번역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실제적 의미는 문자 그대로 "칠십의 일곱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보통 "주간들"이라고 번역 된 "일곱들"이란 말은 히브리 원문에서 강조를 나타내기 위하여 70이란 말보다 앞에 기록했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사상을 석의(釋意)한다면 "사실상 일곱들과..... 일곱들의 칠십은 ..... 작정되었다" 라고 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 위대한 주제는 칠십들이 아니고 일곱들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원문에서는 "칠십"이라는 숫자를 형용사처럼 "일곱"이라는 명사 뒤에 배열했다, 히브리어 관용법에서는 항상 수사가 명사보다 앞선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순서가 바뀌어졌다. 즉 강조점을 70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7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몬트고메리는( ) 이라는 말을 보통 7일, 즉 일 주간 혹은 사물의 일곱으로 나누는 기간에 대한 언급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단위라고 해석한다, 이 말은 창 29:27, 출 34:22, 신 16:9에 이러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이 항상 이와 같이 의미를 가질 필요는 없다, 이 말은 항상 여성 복수인 (샤브오트)의 형태를 취하지만, 여기 다니엘서 9:24에서는 남성 복수인 (샤부임)으로 되었다. 다니엘이 여기에서 통상적인 여성 복수 대신에 남성 복수를 사용한 것은 아마도 이 말이 "주간들" 이라는 통상적인 관념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인 것 같다, 여기에 사용된 이 형태는 실제로 "일곱되는"혹은 "일곱되는 기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분사이다, 그러므로 이 말 자체가 단순히 일곱으로 구분된 기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곱이란 얼마나 긴 기간인가? 오늘날에 와서는 보통 이 질문에 관한 두 가지 해석을 받아들이고 잇다. 그 하나는 여기에서 "일곱"이라고 번역된 그 말은 단순히 7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일주일 중의 하루가 1년이라는 의미이다, 각 이레는 7년과 동등한 기간이라는 의미이고 70이레는 490년이라는 것이다. 칼빈과 헹스텐버그같은 사람이 이 견해를 취했다. 세대주의학파도 일반적으로 이 견해를 따르며 영역(Revised Standard Version)도 이 구절을 동일한 방법으로 번역하였다, 즉 "연수에 따르면 70이레"로 번역하였다.
이 해석을 정당시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이라는 관설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헹스텐버그는 인용하기를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하는 것이 명확하다고 지적했다. 즉 2절 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만에 마치리라는 언급과는 반대되는 또 다른 70년을 말한다. 즉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기간이 70번씩 일곱해들"이라고 했다.
2. 이 해석을 지지하는 둘째 논거는 희년이 암시해 준다는 것이다 ( 레 25장-26장 33절 이하). 희년이란 7년씩 7번 지나서 임하는 해 (제 50년)이다. 그때에는 모든 부채를 탕감시키고 종을 해방시키며 모두 속량하는 해이다, 70이레의 마지막 해는 모든 것에 걸쳐서 가장 최대의 안식일이요 모든 종류의 부채를 속량해 주고 탕감해 주는 기간이었다, 희년에 이루어지는 일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시는 메시아적 구속보다 더 좋은 것일 수 있겠는가?
3. 이 해석이 뚜렷하게 우세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셋째 이유는 490년이라는 기간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린 때부터 계산하여 거의 그리스도의 초림 시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해석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며 둘째 해석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둘째 해석은 에드워드영, 푸폴드 등과 같은 사람들이 취하는 해석이다. 70의 일곱들이란 부정확한 기간이라는 것이다. 즉, 일곱이라는 숫자는 또 다른 근거에서 결정되는 연대기적 존속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 특정한 기간은 메시아적 구속을 하기로 작정된 기간이지만 그 기간은 불확정하고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이다.
이 학설을 지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의 70년 예언과 다니엘의 70이레 사이에는 명백한 대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연수를 염두에 두고 대조시킨 것이 아니고 예레미아의 심판에 관한 예언과 다니엘의 구속에 관한 축복을 나타내는 예언을 대조시킨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연대기적인 대조가 아니라 영적인 대조이다. 이것은 수학적인 대조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사건의 대조이다.
2. 만일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정확한 연대기적인 대조라고 주장한다면 이 대조는 의미가 없어진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다니엘의 예언은 70이라는 숫자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7이라는 숫자에 강조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본문에 7이라는 숫자가 어순상 앞에 놓여 있다. 만일 예레미야의 예언이 연대기적인 강조가 있다면 강조점을 70에 두어야 할 것이다. 만일 연대기적인 대조에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대조가 아니다. 이 대조는 70과 70의 대조에 있는 것이 아니고 70과 7의 대조에 있다.
3. 다니엘이 이 예언에서 희년을 생각했을지 모르나 연대기적인 대조를 한 것은 아니다. 연대기적이란 것은 영적인 일차적 강조를 반대하는 단순한 증거들이나 배경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서 다니엘 9:24에 사용된 히브리말은 결코 희년과 연결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희년 제도에서 말하는 문자적 7년에 사용된 말은 (샤바트)이고 여기에 사용된 말은 (샤부임)이라는 전혀 어근이 다른 말이다.
4. (샤부임)이라는 표현 자체에는 전혀 시간적인 의미가 없다. 다니엘 10:2-3에는 "일곱"이라는 히브리어가 첨가되어 있다. 그래서 다니엘 10장은 통상적인 일곱날들을 가르치는 주간들로 이해하게 된다. 또한 다니엘 8:14 에서도 문자적으로 일정한 기간을 의미하기 위하여 "주야"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렇게 첨가된 말이 전혀 없다. 다니엘 8:14과 10:2-3에서 정확한 시간을 지시하는 첨가된 말이 있지만 확실히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일곱"이라는 말에는 시간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정확한 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첨가하는 말을 부친 구절이 지시하는 바와 같이 부가어가 없는 다니엘 9:24은 부정확한 시간을 지시하는 요소이다.
5. 연수를 주간으로 계산하는 사상은 구약의 다른 속에는 없다.
6. 이 특별한 예언은 "일곱들"이 7년을 의미한다는 암시가 없고 이러한 해석상의 요구를 지지하는 내증(內證)도 없다.
최근에 와서 루폴드는 이 말씀을 해석하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주간 이후로 일곱은 항상 신적 활동, 혹은 신적 사역을 의미하는 상징수이다. 70은 일곱을 10으로 곱한 것인데 완전과 완성을 의미하는 완전수이다. 그러므로 70의 일곱들은 가장 중요한 신적 사역을 완성하는 기간이다"라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이 숫자들은 기간을 나타내기 때문에 시간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숫자들이 상징적이기 때문에 일곱들이라는 정확한 길이를 안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면 또 알수도 없는 것이다. 이 칠십의 일곱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을 위하여 정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적인 결정 사상이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그의 구속적인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작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70의 일곱들을 정해 놓으신 것은 그의 완전한 지혜로우신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의 백성을 위한 그의 구속목적에 소요되는 기간은 하나님만 알고 계신다. 이 신적 작정은 그의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한"것이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70의 일곱들이 포로생활 70년과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말은 단순히 그 기간이 거룩한 성과 이스라엘을 위하여 계획된 기간이라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다니엘이 그 백성과 도시를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성이라고 부른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심지어는 멸망한 예루살렘까지도 예루살렘의 과거와 미래의 역사의 힘에 의하여 거룩한 성이라고 불리웠다. 게이블라인과 다른 세대주의 주석가들은 이 언급이 오직 육체를 따라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정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사건들은 다니엘 당시의 백성들에 관한 사건이지 이방인에 관한 사건은 아니다"라고 한다. 이것이 일차적으로는 육체적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역사적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인 것이 사실이지만 바로 이 구절에 메시아적 사역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사죄함과 깨끗함을 받은 하나님의 참 백서에 고나한 언급이다.(갈 6:16) 본절은 6가지 진술로 끝을 맺고 있는데 이것은 70의 일곱들 동안에 이루어질 6가지의 결과를 표시한다. "허물이 마치며 죄를 끝내기 위하여 70의 일곱들이라는 기간을 작정해 놓으셨다"고 석의(釋意)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가리우는 것은 70의 일곱들이라는 기간이 지난 후에 되어지는 일이 아니고 바로 그 기간에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결과는 그 기간이 끝난 후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그 기산의 끝이 오기 이전에 이루어진다. 허물을 마치는 데에 바로 70이레를 작정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24절의 내용은 이 일들이 70이레가 끝나기 전에 성취된다는 것이다. 다니엘 9:24에대한 이 주장은 세대주의 해석과는 굉장히 반대된다. 세대주의 는 이 6가지가 모두 70이레 후에 오는 천년왕국 시기에 관한 언급이라고 한결같이 해석한다. 그러나 이 문맥은 이 6가지 목적들이 70이레기간에 성취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70의 일곱들이라는 기간은 실제적으로 이 축복들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작정된 것이다, 그래서 이 축복들이 이 기간에 소개된 것이며 세대주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기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다.
이 6가지 결과들은 대단히 재미있는 대구법(對句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두 개의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그룹은 3개의 항목으로 되어있다. 처음 3가지 진술은 죄를 제거하키는 소극적 방면이고 나중 3가지 진술은 영원한 의(義)가 들어나는 적극적 방면이다, 이 6가지 결과들은 또 다른 대구법을 이루고 있다, 즉 넷째 진술은 첫째 진술과, 다섯째 진술은 둘째 진술과, 여섯째 진술은 셋째 진술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둘째 진술과 셋째 진술은 원문에 동일한 동사로 사용되었다.
이상의 것들은 간단하게 개요하면 다음과 같다.
소극적 방면 적극적 방면
1. 허물이 마치는 것 4.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것
2. 죄가 끝나는 것 5. 이상과 예언이 응하는 것
3. 죄악이 숨기우는 것 6.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 받는 것
A. 성취될 소극적 결과들
1. 허물이 마치며(To finish the trasgression-KJV)
여기에서"마치며"하는 동사는 히브리 원어로 (칼라)인데 참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마친다"는 말로 번역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억제한다"라고 번역한다. 우리 한역은 전자를 택한 것이고 칼빈과 같이 대분분의 복음주의 해석가들은 "언제한다"는 번역을 택한다. 이 말은 "숨기다, 가두다. 체포하다. 감옥에 가두다. 가두어 넣다, 못 들어오게 한다."하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위의 목록 가운데서 소극적 방면의 둘째 번 진술인 "죄가 끝나며"와 같은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환하게 들어 나는 죄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가리워질 수 있고 또 숨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죄사함이라는 단순한 성격적 표현은 "죄로부터 얼굴을 감추다" 혹은 "죄를 멀리 보내다"라는 비슷한 구절도 있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만 용서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허물"이라는 말은 매우 강한 말이다. 인간의 불의(不義)를 묘사하는 세 가지 말들 중에서 제일 강한 말이다. 그래서 루폴는 이 처음 결과는 소극적인 결과들을 요약한 것이고 의가 드러난다는 넷째 결과는 70의 일곱들의 적극적인 결과들을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결과에 사용된 이 말에는 변절과 반역이라는 사상이 결합되어 잇다, 이 말은 "반역하다"하는 어근에서 왔다. 그래서 죄라는 강한 말이 되었다, 소극적 방면의 세 말들 가운데서 이 말에만 관사가 잇다, 그러므로 이 말은 모든 형태의 죄를 총망라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언제 이 허물이 제거되었는가? 죄를 제거시키는 일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역이다, 이것은 위대한 구속자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즉 기름부음 받은 자인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허물이 제거되었다, 이
것은 말씀이 의미하는 그대로이다, 즉 그리스도가 제거시킨 허물은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천년 왕국 시대에 살고 있는 유대인의 허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허물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허물이란 말이 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사람들의 허물만이 아니고 일반적인 허물을 총칭하기 때문이다.
2. 죄가 끝나며(To make end of sins- KJV)
70의 일곱들의 둘째 목적에서 사용한 동사는 우리 한역에는 "끝나며"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원본의 재미있는 대구법을 잘못 번역한 것이다. 여기세 사용된 동사는 24절의 다섯째 목적으로 사용된 동사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밀폐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이것은 죄를 제거하다, 혹은 죄를 시야 밖으로 옮기다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야 밖으로 완전히 옮겨 버렸고 완전히 제거 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를 가두어 두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죄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죄악스러운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죄의 종말을 작정하셨다.
3. 죄악이 영속되며 (To make reconciliation for inipuity-KJV)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카파르)는 문제 그대로 "덮는다"는 뜻인데 우리 한역에는 "영속하다"라고 대단히 어색하게 번역되었다. (편집자주-킹제임스 성경에는 "죄악과 화목되며, 화해가 이루어지며"라고 되어 잇다) 드라이버는 이 동사의 사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만일 그 덮어 주는 자가 제사장인 경우에는 희생을 드려서 죄인을 덮어 준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속죄 혹은 화목시켜 준다는 뜻이다, 또 만일 덮어 주는 자가 하나님인 경우에는 "용서한다" 즉 "도말한다"는 의미이다(렘 18:23, 시 65:3 참조) 이 본문에서는 어느 경우를 가리키는지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말이 죄에 대한 언급이든지 죄인에 관한 언급이든지 간에 신약에서는 "속죄" 혹은 "화해"라고 불러서 항상 효과적으로 덮어 주는 것을 암시한다. 만일 사람의 죄를 덮어줄 때는 그 모든 죄가 정죄함을 받지 않고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이 성립된다. 다니엘이 죄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죄를 덮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적인 자비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죄" 개념을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덮어줌,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죄가 제거된 다는 강조이다. 여기에 사용된 세가지 용어는 인간의 부패됨을 잘 묘사해 주는 말이다. 곧 "허물", "죄", "죄악"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당한 저주의 성격을 충분하게 보여준다. 칠십 이레의 기간을 작정하신 첫째 목적은 죄의 저주를 제거하는 것이다. 저주는 끝나고 더 이상 저주에 속박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인하여 가리워졌기 때문에 저주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일이 성취되었는가? 그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나타나셨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히 9"26)
B 성취될 적극적인 결과들
1.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To bring in everlasting righteousness-KJV)
가브리엘은 위에 설명된 세가지 소극적 결과들과 대조되는 세가지 적극적 결과들을 알려준다, 죄는 완전히 제거되고 영원한 의가 소개되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강력한 말이다, 그것은 의가 인간의 주관적인 의가 아니고 자기 밖에서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하여 주신 것임을 강조한다. 원문에 사용된 "의" 라는 말은 (트세덱)인데 속죄와 밀접하게 관계된 말이다. 그러므로 문맥상 매주 적합한 말이다, 이것은 첫째 결과를 진술하는 적극적인 보충어이다. 죄가 완전히 제거된 자리에 완전한 의를 채워둔다는 뜻이다, 이 의는 단순한 풍성함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시 85:11-13, 사 51:5-8)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태양과 같이 떠 오르는 것이며 (말 4:2)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누리는 축복 받은 상태이다, 본문에 "영원한 의"라고 하였는데 헹스텐버그는 두가지 이유에서 영원하다고 말한다, 즉 그 의의 출처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서 왔으니 영원하고 그 의의 존속 기간으로 볼 때에 모든 피조물과 대조적으로 썩지 않는 것이니 영원하다, (사 51:5, 45:17) 의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은 완전히 메시아 시대 (은혜시대)의 특징이다, 의는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서 주시는 것이다, 예레미야 33:16에는 예루살렘을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렀고 예레미아 23:6에는 주님의 이름을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함으로써 메시아의 날을 예언했다, 이사야 61:3에는 하나님의 나라 성도들을 "의의 나무"라고 하였고 이사야 53:11에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리라고 예언하심으로 의를 결정하는 원인을 지적했다. 위의 모든 말씀을 신약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가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은혜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더 이상 죄인으로 취급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취급하신다.
2.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To seal up vision and prophecy-KJV)
우리 한역의 이 부분 번역은 대단히 부정확하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소극적 방면의 둘째 결과와 확실히 병행하는 동일한 동사이다, 그러나 한역은 전혀 동일한 관용법적 표현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이 동사를 "봉인하다 (seal up)"라고 번역한다, 이 번역이 적합하다. 이 동사는 자주 확인하는 의미로 "날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이상과 예언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봉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상은 하나님의 인정하는 표로 도장을 찍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은 이러한 의미를 지지하지 않는다. 구약에서는 결코 이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더욱이 동일한 동사로 사용된 같은 절에 있는 병행된 말과도 그 의미가 다르다, 칠십 이레의 둘째 결과인 "죄가 마치며"에서는 이 말이 "끝나다". 혹은 "마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끝내다" 혹은 "정지하다"는 뜻으로 결국 성취된 사건의 범주에서 취급한 것이다, 예언과 이상은 끝났다. 즉 "이상과 예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이상과 예언을 하는 시기는 지나갔다"는 의미이다. 예언의 직무는 끝났으며 이 후로는 예언이 필요 없다는 의미이다.
기독교회의 해석을 지지하는 카일과 클리포드는 예언과 이상이 "미래에 끝난다"고 주장한다, 카일은 예언이 폐지되는 때가 그리스도의 초림이 아니고 재림때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예언이 그리스도의 초림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고 재림에까지 관계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예언의 말씀들이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고 초림 후에도 넓은 의미에서는 예언이 계속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특별히 여기에서 말하는 이상과 예언은 분명히 구약시대의 것을 가리킨다. 이상이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한 계시를 의미하는 특유한 명칭이다(사 1:1, 암 1:1) 한역에 부적절하게 번역된 다른 말은 히브리어로 "예언자"라는 말이다, 예언자란 이상을 받은 사람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이상과 예언자라는 두 말은 구약의 예언적 계시와 구약 계시의 매개체를 의미한다. 이 계시는 일시적, 예비적, 모형적이었다, 이 계시는 앞으로 위대한 예언자인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고(신 18:15) 그리스도가 오신 다음에는 구약적 의미의 예언적인 계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 목적이 완성되었으므로 예비적으로 모형적인 기간은 끝났다, 바꾸어 말하면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예비적인 방법으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로 완성된 말씀이다. (히 1:1-2)
3.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To anoint the Most Holy-KJV)
여기에 있는 "지극히 거룩한 자"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거룩한 것들의 거룩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이 구절이 안티어커스 이피라네스의 시대를 가리킨다고 한다, 즉 그들은 이것이 안티어커스가 더러운 제물을 태워서 신성을 더럽힌 제단을 다시 신성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해석의 가장 중시되는 난점은 본절에 있는 모든 다른 부분들이 다 메시아의 사역을, 특별히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구속 사역을 가리켰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전 청결에 대한 요세프스(Josephus)의 기록에도 이 기간의 고대 유대인의 역사에도 기름부음에 관한 언급은 없다, 카일과 클리포드는 이 말씀이 그들의 학설에 맞추어서 재림과 거룩한 성, 하늘의 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 학설을 받아 들일 수 없다. 루터와 칼빈, 헹스텐버그와 영과 같이 우리는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의 기름부음 받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구약에서 관유는 성령을 상징했다.(슥4장) 그래서 사무엘상 10:1 이하에서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라고 이사야61:1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메시아가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고 하시는 것음 메시아의 사역과 메시아의 독특한 성격에 대한 구약적 표현이다(사 11:1,61:1).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이 성령이 독특하게 주어졌다, 즉 사도행전 10:38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라고 말해 준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거룩한 것들의 거룩한 것"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때때로 문제가 되어 내려왔다. 그러나 역대상 23:13을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가장 거룩한 것들 (the most holy things-KJV)로 성별했다, 이 구절을 보아서 이 표현은 사람에게도 적용된 것이 분명하다. 누가복음 1:35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거룩한 것 (holy thing-KJV)" 이라고 묘사했다, 신약에서는 자주 그리스도를 "거룩한 자"라고 불렀다. (행 3:14, 4:30, 요일 2:20, 계 3:7)
여기에는 26절과 27절에 언급된 지극히 거룩한 자의 기름부음 받음과 성소의 훼파됨 사이에 대조가 나타나 있다고 생각된다. 이전 성전은 훼파되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은 알맹이 없는 껍질만의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성전에 주님이 임재하셨으나 유대인들의 죄와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떠나셨다, 지금은 새로운 지극히 거룩한 자가 그 자리에 기름부음을 받아서 임하셨다, 지극히 거룩하신 자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젠 성전의 완전한 성취자로서 임하셨다, 그가 오셔서 낡은 성전 대신에 참되고 의미 있는 성전이 되어 주셨다, 그의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사람들과 교통하신다. 본절에 있는 6가지 항목도 모두 메시아를 가리킨다. 이 사실은 이 예언의 종결점을 결정한다, 칠십의 일곱들이 끝나는 것은 안티어커스 시대와 관계없고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천년왕국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계된 일이다, 다니엘은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잊어버리시지 않는다는 계시를 받았다. 사실상 칠십 이레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이며 메시야의 구속 사업의 완성을 목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모으시고 그들이 그때까지 맛보지 못한 보다 큰 신적 구속의 프로그램을 실시해 주신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다니엘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도 더욱 풍성하고 훌륭하게 성취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난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것이며(단 9:25)
다니엘은 여기에서 잘 깨달아 알라고 하는 명령을 받았다.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에는 특별히 같은 뜻을 가진 두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 아래에 나오는 예언이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잘 훈련된 영적 마음을 요청한다, 예수님께서도 가끔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셨다. 곧 "읽는 자는 깨달은진저"라고 하셨으며 또한 "귀 있는 자는 들어라"고도 하셨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칠십 이레의 출발점을 알게 되었다, 그 출발점은 곧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말씀의 공포이다." 우리 한역에는 "영(令)"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으나 원래 (다발)이라는 히브리 용어는 단순히 말씀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의 창시자는 바로 하나님이다, 그것은 단순히 바사 왕을 작정했다는 말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것과 동일한 말이 23절에도 나온다, 이 말씀의 내용은 예루살렘의 복구와 건축이다, 여기에서 중심 되는 문제는 언제 이 말씀이 공포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칠십 이레의 출발점을 어디서부터 잡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있다.
1. 몬트고메리의 견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 문제에 대한 비평가들의 전형적인 견해이다, 몬트고메리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신적 명령을 발표하는 말씀과 다니렝 9:2에 언급된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는 말씀을 동일시 한다, 그러나 그는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두가지 다른 주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하나는 이 예언이 포로 귀환이 성취된 기간인 49년 동안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예언의 성취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해석이다, 이 둘째 해석은 주전 586년을 이 말씀이 시작된 해로 생각한다.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반대를 받고 있다.
(a)예레미야의 예언을 예루살렘을 중건하기 위하여 귀환하라는 이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예레미야는 포로생활 기간이 70년이라고 선포했으니 포로 생활을 끝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고 예루살렘을 중건하는 사역에 관한 말씀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하지 않았다.
(b)주전 586년을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공포된 연대로 생각할 수 없다, 주전 586년은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그 주민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연대이다, 따라서 주전 586년에는 예루살렘이 중건된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고 다만 예루사렘을 위한 애가 (Lamentation)가 있었을 뿐이다,
(c)이 견해는 다니엘서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다니엘서가 몬트고메리, 프린스등과 같은 여러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실제적으로 심각한 역사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니엘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다니엘서가 말하는 역사적 문제에 관한 시기를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다니엘서가 말하는 메시아 나라가 임하는 시기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2. 헹스텐버그와 새대주의 학파의 해석은 주전 445년을 이 말씀을 공포한 연대로 주장한다, 이것은 느혜미야2:7-8에 공포된 아닥사스다 왕 20년이라고 한다, 느헤미야 2:7-8에 보면 아닥사스다 왕은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 (느헤미야)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라는 느헤미야의 청원에 허락을 했으며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조서를 주었다. 그래서 헹스텐버그는 사실상 예루살렘의 복구는 이전에는 시작하지 않았고 느헤미야가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학설은 몇몇 성경 말씀에 위반된다.
첫째 선지자 학개는 이 때보다 70년 전에 이미 예루살렘 백성들이 판벽한 집에 거했다고 말했다(학 1:2-4) 이사야도 또한 바벨론 왕인 고레스 왕 때에 예루살렘 성이 건설될 것이라고 예언했다.(사45:1, 13장44:26-28). 에스라서에서도 역시 느헤미야의 귀환전에 이미 중건되엇다고 기록하고 있다(tm 4:12, 9:9)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모든 말씀들을 예루살렘성이 주전 445년 이전에 재건되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3. 우리가 받아들이는 학설은 요한 칼빈, 클리포드, 카일, 루폴드, 영 등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말씀이 공포된 해를 포로생활이 끝나고 본국으로 귀환하도록 명령을 내린 고레스 왕 원년 (주전 538년)이라고 간주한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해는 고레스 왕 원년이다, 다니엘 1:21에 있는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고 하는 말씀은 이상한 말이다, 다니엘 10:1에 "바사왕 고레스 삼 년에 한 일이 다니엘에게 계시되었는데..."라는 말씀을 볼 때 사실상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이후에도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다니엘서 1장에서는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 라고 말했는가?
이것은 고레스 왕 원년이 포로 생활이 끝난 해이고, 포로들이 귀환하도록 허락 받은 해이기 때문이다, 고레스 왕 원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운을 받은 유명한 전환의 해이며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 해이다, 그것은 주전 538년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출발점은 고레스 왕이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환하도록 허락한 중대한 사건이요 유대 민족 역사의 새로운 사건에 있다는 것이다. "말씀이 공포된 것"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바로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성취되었다, (스 1:1-4). 이 작정이 이렇게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성령의 영감으로 된 성경에 두 번씩이나 축어적(逐語的)으로 기록되었다 (대하 36:22,23, 스 1:1-4)
더욱이 그 위에도 이 칙령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는 시작이었다. 그 칙령은 너희가 가서 예루살렘 중건 가운데 첫째 단계며, 가장 중요한 단계인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고 분명히 말했다. 이것에 관해서는 이사야도 이렇게 예언했다. 이사야 44:28에서 고레스 왕을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고 묘사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 45:13절에서도 고레스 왕에 관하여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놓으리라"라고 분명히 명시했다. 한 세대주의 주석가는 "고레스 왕의 칙령이 특별하게 성전 중건에만 국한 된 것이고 다니엘서는 예루살렘 중건 즉 도시 중건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서 위의 견해를 반대한다,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의 중심이 성전 건축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전 건축은 도시 건설의 첫 단계임에 틀림없다, 도시 건설과 성전 건축사이에 지나치게 날카로운 선을 긋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만일 유대인들이 성전을 중건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라는 허락을 받았다면 그들은 또한 그들 자신의 집을 짓는 것도 허락 받은 것이다,
루폴드는 질문하기를 "약 4,300명이나 되는 포로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단순히 성전만 건축하고 그들의 집을 건축하거나 그들의 집을 건축할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장소에 43,000명의 포로들이 살기 위한 집을 짓고... 그들 대부분이 한 장소에 정착했다... 이것은 곧 하나의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백성은 학개 1:2-4에 지적된 바로 그 일을 이룩한 것이다, 여기에서 학개는 성전이 황무하였거늘 이 백성이 판벽한 집에 거하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다.
이와 동일한 강조를 이사야의 예언서에도 볼 수 있는데 이 강조는 단순히 성전 중건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파괴된 도시 중건도 말하고 있다, 이사야 44:28에 고레스가 "예루살렘을 중건하리라"고 예언했으며 이사야 45:13에는 "고레스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라고 했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을 고찰해 볼 때 칠십 이레의 출발점을 고레스 왕 원년 즉 실제적으로 포로생활이 끝난 해인 주전 538년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성격적 증거로 보인다, 본 절은 또한 처음 69이레가 지나면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왕자"가 올 것이라고 했다. 처음 69이레의 최고점은 기름 부음 받은 왕자가 오시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왕자라는 말은 한역에 번역된 것처럼 왕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기름부음 받은 왕자는 누구인가? 보수적인 다니엘 해석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즉 그는 메시아시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은 세대주의 학파이다. 그들은 이것이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헹스텐버그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필자의 견해도 이 견해와 일치한다. 어쨌든 위의 모든 학자들은 주님의 초림에 관한 일부분 혹은 십지가 이외의 모든 부분을 의미한다는 데에 일치한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것은 기름부음 받은 왕자나"왕자가 기름부음 받은 때까지"가 아니라 "기름부음 받은 자"가 동시에 "왕자"라는 의미이다, 구약에서는 왕과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제사장(기름부음 받은자)뿐만 아니고 왕 (왕자)도 생각하는 것이다, 드라이버는 고레스가 기름부음 받은 왕자라고 제시했다, 이사야 45:1에서 고레스를 가리켜"나의 기름부음 받은자"라고 부른 곳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마땅치 않으니"기름부음 받은자"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학설이 가장 믿을만 하다.
1. 다니엘 9:24은 명백하게 메시아적 성격을 가졌다, 24절에 약속된 축복은 원칙적으로 구주요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것으로 생각된다, 고레스는 사죄와 영원한 의를 사람들에게 줄 수 없다.
2. 24절의 축복과 25절의 기름부음 받은 자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24절 끝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그리스도를 가리킨 말씀인 만큼 거기에 직속하는 본 절의 "기름부음 받은 왕자"란 말씀 도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기름부음에 관한 이 예언 전체는 약속된 구주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3. 기름부음 받은 왕자는 신정국의 왕이고 고레스와 같은 이방 왕이 아니다, 25절의 기름부음 받은 이 거룩한 왕은 26절의 "한 왕의 백성이 와서"라는 문구에 들어있는 왕과 명백히 대조된다, "한 왕은 영원한 축복을 가져올 것이나, 다른 한 왕은 파괴와 핍박과 학살을 자져올 것이다, 한 왕은 신정국의 왕이요 다른 한 왕은 이방인의 왕이다, 고레스를 신정국의 왕이라고 부를 수 없다.
기름부음 받은 왕자의 일을 행한 자는 역사상에 한 분뿐이다, 그 분만이 죄를 용서하시며 영원한 의를 가져오신다, 그 분은 곧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를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서 실현시키시는 분이다(사 55:3-4, 61:1-3) 이 말씀의 선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아기까지는 일곱의 일곱들과 62의 일곱들이 지날 것이라고 말씀했다. 이 기간을 둘로 나눈 이유를 이해 하기는 조금 어렵다, 도합 69의 일곱들이라는 기간을 왜 길이가 다른 두 간 즉 7의 일곱들과 62의 일곱들로 나누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한역에는 "그 때"라는 용어가 덧붙여져서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마치 69이레의 끝에 될 일을 말한 것처럼 잘못 번역되었다, 사실상 모든 학파의 보수주의 주석가들은-세대주의 혹은 전통적 -25절의 마지막 부분이 7의 일곱들에 관한 언급이라고 주장한다,
69의 일곱들을 두 기간으로 나누는 것은 이 두 기간이 각기 특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 이레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하에서 이루어지는 회복기간이라는 특생이 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영, 헹스텐버그. 게이블라인과 세대주의 학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고레스 왕원년부터 에스라, 느헤미야의 지도하에서 이루워진 성전과 예루살렘 중건이 완성될 때까지이다, 이 기간 후에 62의 일곱들이 오게 되는데 62의 일곱들은 성전과 예루사레렘의 중건을 완성한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신(초림)까지이다, 이 견해를 통하여 25절 끝에 있는 일곱의 일곱들에 관한 특색을 알수 잇다. 62의 일곱들이 끝난 후에 될 일, 즉 기름부음 받은 자 끊어질 것은 26절에서 알 수 있다. 일곱 이레의 기간을 예루살렘과 성전 중건 시대로 보는 해석이 당연하다는 이유로서 헹스켄버거는 하나님이 일곱의 일곱들을 사용한 의도는 아마도 이와 연결되는 멋진 대구법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희년을 주목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희년은 매 49년 끝에 혹은 칠 년이 일곱 번 지나서 임하는 것인데 (fp 25:8, 10,13) 이때에는 모든 비참했던 일들이 회복되는 기간이었다, 일곱의 일곱들을 사용한 것은 희년제도의 완전한 회복과 병행하는 신적 상징을 의도한 것이 아닐가? 일곱의 일곱들의 해석과 조화하여 우리는 25절의 끝 부분이 예루살렘의 광범위한 복구 사업에 관한 언급임을 이해할 수 잇다, 심지어 전통적이 메시아적 해석을 전혀 즐겨하지 않는 몬트고메리까지도 이 부분이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제공한 훌륭한 예증이라고 한다, 본문을 보년 이 건축이 "곤난한 동안에"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은 확실히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자들이 당한 반대와 억압에 관한 언급이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읽어보면 고레스의 지도하에 유대인들이 시작한 이 성역에 대한 반대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느4:1, 이하 6:1 이하, 9:36-37참조) 도시의 완전한 복구를 "거리와 해자"라는 말을 사용하여 강조했다, 거리란 넓은 장소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성문 안의 지역을 가리키고 도시 생활의 중심지다.
일반적인 관용법에서 거리라는 용어는 가끔 도시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해자"란 말은 참호를 의하는데 도시의 외변 방위선을 가리킨다. 즉 거리는 도시의 내부를 가리키고 "해자"는 외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완전한 복구를 의미한다. 본절의 내용은 다니엘의 기도의 응답이다, 성전은 황무하거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어려운 때일지라도 중건될 것이며 칠십년 포로생활은 끝나고 예루살렘성은 결국 완전히 복구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계시를 받던 그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귀환할 것이라는 전망은 전혀 없었고 더욱이 이전과 같은 예루살렘을 중건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의 회복은 많은 시일이 지난 후에 될 희미한 기대 속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때에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즉 그의 백성이 돌아갈 것이며 도시가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완전히 중건될 것이며 도시가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완전히 중건될 것이며 공격과 곤난 속에서 그 도시가 건설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희년에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과 꼭 같이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이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것이다, 25절의 내용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말씀의 공포 (일곱의 일곱들) |
(62의 일곱들) |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남 |
예수살렘 중건 69의 일곱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단 9:26)
본절에서는 일곱의 둘째 기간 곧 62의 일곱들의 특색을 보여준다, 이 기간은 예루살렘 성이 중건된 때와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진 때의 기간이다, 일곱들 이후에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1) 기름부음 받은 왕자의 끊어짐.
(2) 예루살렘의 멸망,
그런데 이 두 가지 사건이 62의 일곱들의 얼마 후에 될는지 우리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27절의 내용을 보면 기름부음 받은자가 끊어질 사간은 제 70의 일곱들 중에 될 일로 알려졌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지리니" 본절에 있는 기름부음 받은 자가 25절의 "기름부음 받은 왕자"와 같은 인물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특정한 관사를 생략했다. 여기에서 끊어질 기름부음 받은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기에 기록된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사야 53:8에 기록된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졌다"는 말씀을 회상하게 된다. "끊어진다"는 말은 죽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레위기 7:20에서 죽음의 형벌에 관하여 사용되었으며 비명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가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의 종국에 대하여서도 사용되었다.(시 37:9, 잠2:22)여기에서 이 말이 사용된 것은 기름부음 받은 왕자의 죽음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 기름부음 받은 자가 죽음으로 끊어질 뿐만 아니라 또한 없어진다고 한다. 이 말의 배후에 숨어있는 사상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메시아로서 당연히 받을 모든 대우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전적으로 배척 당할 것을 알리는 강력한 표현이다. 그의 동족들도 그를 부인하면서 하는 말이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 고 하였고 심지어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세상 죄를 지고 가도록 그를 버리셨기 때문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그가 죽으시는 때에 그가 대신한 모든 자들의 죄 짐 외에는 그에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버림을 당하여 끊어졌다. 62의 일곱들이 끝난 후에 일어날 둘째 사건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은 한 왕의 백성이 와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멸망시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메시아가 끊어진 뒤에 따라 일어날 것이다. 이 말씀을 석의 하면 "메시아가 죽으심으로 끊어진 후에 성읍과 성소가 무너지리라"는 것이다, 그 성읍과 성소가 파괴되는 시기는 본문에 언급되지 않았다, 즉 62의 일곱들 이후 얼마 후에 될 일인지 본문에 말하지 않았다. 27절도시기에 관한 이 질문에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성읍과 성소"란 말을 강조하기 위하여 히브리 원문에는 문자의 초두에 놓았다, 이 말을 석의하면 "성읍과 성소를 파괴하기 위하여 한 왕의 백성이 올 것이다." 는 뜻이다, 다니엘의 기도가 여기에서도 응답된 것이다. 즉 예루살렘과 성전의 장래에 관한 그의 기도에 관하여 그들이 회복될 것이지만, 영원히 존속하지 못하고 장차 오는 한 백성의 손에 멸망한다고 응답해 주었다. 파괴의 도구가 바로 장차 올 한 왕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장차 올 이 백성은 확실히 누구이며 그들의 왕은 누구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1. 몬트고메리, 프린스, 로리 등과 같은 자유의 고등 비평가들은 여기 "한 왕"이란 말이 안티어커스 에피파네스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해석은 성립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역사상으로 보아서 안티어커스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티어커스가 파괴 사역을 했다는 것은 우리 본문의 표현과는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
2. 카일과 루폴드는 "장차 올 한 왕"을 적그리스도라고 믿는다. 적그리스도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교회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하는 일은 지상 교회의 영향을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견해의 난점은 성읍과 성소의 파괴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인데 이 해석은 원문과 상징 사이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취급하지 않는다. 오직 상징적인 뜻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3. 세대주의 학파는 한 왕의 백성이 주후 70년에 팔레스틴에 와서 예루살렘을 훼파한 로마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 왕은 주후 70년에 군대를 지휘하고 쳐들어 온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Vespasianus)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장차 올 그 왕"은 "장차 올 백성들"을 지휘하는 티투스가 아니고 그 왕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왕이며 재생 로마 제국에서 일어날 왕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 왕은 마지막 날의 폭군 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재생 로마 제국의 왕이며 결국 그 왕은 적그리스도를 표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게이블라인의 말을 인용하여 다시 말하면 "이 예언이 주후 70년에 티투스 베시파시아누스가 지도하던 로마 민족에 의해서 우리가 역사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성취되었다. 그러나 티투스는 '장차 올 한 왕'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난관을 가지고 있다.
(A) 주후 70년에 공격한 로마 군대를 이런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2,000년이 거의 지났다고 할지라도 이 군대를 아직 나타나지 않은 왕에 속한 군대하고 할 수 없다. 어떻게 주후 70년의 로마가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왕에게 속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마치 아이젠하워(Eisenhower)장군을 죠지 워싱톤(George Washington) 군대의 사령관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B)속격을 사용한 것은 분명하게도 왕과 백성이 같은 시대에 속하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왕의 백성"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번역은 이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한 왕에게 소속된 그 백성은 왕과 같은 시대의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그 백성은 그들의 머리요 지도자인 왕에게 소속되어 있고 이 천년 혹은 이천년 이상 후에 올 인물에게 소속된 것이 아니다. 26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한 왕에게 근거를 둔 백성이 아니라 백성에 근거를 둔 백성의 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왕은 이 백성을 통치하는 왕의 백성이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왕은 백성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왕이어야 한다.
(C)라킨(Larkin)과 기타 세대주의 학자들은 본문에 있는 "장차 올 왕"이라는 말에 강조점을 둔다. 예를 들면 라킨은 "장차 온다는 말은 미래, 즉 티투스의 시대와 예루살렘이 멸망한 시대와는 멀리 떠나서 올 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여 그들의 이론을 성립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 "장차 올" 이란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이 말은 두 가지 방법 중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단순히 미래 실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주전 6세기에 살고 있던 다니엘의 입장에서 볼 때 미래이지 주후 70년에 살았던 티투스의 입장에서 본 미래가 아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미래의 어느 날에 올 백성과 왕의 양자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는 티투스 이후가 아니라 69의 일곱들이 끝난 후라고 이해했었을 것이다, 이 논쟁을 그만두고라도 이 용어는 또한 전혀 미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을 지적하고 있으며 그 왕은 적대감을 가지고 역사상에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이 적대감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니엘서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단 1:1, 11:10, 13,15을 주의하여 살펴보라.
4. 우리는 칼빈과 영의 해석을 택한다. 칼빈과 영은 그 백성이 주후 70년에 팔레스틴에 와서 성읍과 성소를 훼파시켰던 것은 로마고 그 왕은 로마 군대의 지도자였던 티투수 베사파시아누스를 가리킨다고 믿는다. 이 해석이 옳다고 하는 이유는 26절 하반절에 기록된 성읍과 성소의 멸망에 관한 묘사와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말씀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전체가 황무한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낸 준 말씀이라는 것이다. 천사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라고 알려 주었는데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말은 홍수로 뒤덮이는 것을 제시하는 말이다, 이와 동일한 말씀이 나훔 1:8에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사용되었다. 외국 왕의 침입은 홍수와 같고 그 파괴는 매우 극심하여 성읍과 성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파괴가 끝날 때까지 황폐함이 계속할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안티어커스 아피파네스의 시대와 같이 일시 지나갈 적대적인 침입이 아니고 성읍과 성소를 완전히 파괴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예정과 목적의 부분이다, 이 전쟁과 황폐함은 "작정된 것 "이었다. 이 말은 신적인 작정과 예정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적 작정이라는 이 말은 가끔 형벌의 괴로움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단 9:27,11:36, 사 10:23, 28:22 참조)
멸망의 이유는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전능자의 결정이요 침범할 수 없는 그의 작정하심에 있다, 현재 황폐한 성읍을 중건시키실 것이 하나님의 돌이킬 수 없는 작정인 것처럼 동시에 그 성읍이 다시 황폐될 것도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작정하심이다. 이 예언의 능력과 정확성은 역사적인 성취를 통하여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주후 70년에 로마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황폐된 사실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여 가장 분명하게 기술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 역사가였다, 그는 예루살렘이 포위되기 전에 갈릴리에서 로마 군대와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후에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티투스는 이 전쟁의 후반기에 가서 가끔 그를 유대인과 자신 사이에 중재인으로 사용했다, 그는 예루살렘이 포위 당할 때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때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의 장기간에 걸친 격렬한 항전에 대단히 분노하여 "유대인들을 아끼지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괴롭혔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자포자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갈릴리에서는 예루살렘이 포위되기 전에 수천명이 피살되었고 3만명 이상이 노예로 팔려갔다, 로마 군대는 일년 이상 갈릴리와 유다를 점령하였고 또 파괴시켰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하자 그 비운의 도시는 이미 무질서하게 되었다, 그 도시 내부에서 내란이 일어나 항전파와 평화파 사이에 슬픈 투쟁을 하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대제사장직이 아주 치욕을 당하고 파멸되었다고 말했다.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던 대부분의 항전파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 로마인에게 맹렬히 반항한 유대인의 일파였다. 그들은 암살대를 도와서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평화파 전부를 노소를 막론하고 학살했다. 요세푸스는 이 일을 "성전 바깥뜰에는 피가 넘쳐흘렀으며 그 날에 8,500명의 시체가 거기에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이렇게 내란으로 인하여 12,000명의 주민들이 괴로움과 학살을 당했으며 로마 군대의 지지자로 간주될까봐 두려워서 아무도 그 시체들을 매장하지도 않고 버려 두었다.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장기간의 싸움을 계속하는 동안에 110만명이 죽었고 97,000명이 노예로 팔렸고 성전과 성읍은 여지없이 파괴되었다. 기근을 당한 유대인들은 밤중에 식량을 구하려 계곡으로 돌아다니다가 잡혀서 괴로움을 당했고 시민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죽은 자가 매일 500명씩이나 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죽일 십자가가 부족하여 십자가 하나에 여러 사람을 못박아 죽였다. 포위를 당하고 있는 동안에 성안에서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성안에 매장할 수 없게 되자 시체를 골짜기에 내려 굴렸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티투스가 계곡에 가득 찬 시체들과 썩어서 고름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안에는 시체를 둘 곳이 없을 만큼 기간과 내란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시체들로 온통 덮여 있었다"라고 했다. 어떤 도망자들은 금붙이를 감추기 위하여 입안에 넣어 삼키고 성을 떠났다. 이 속임수의 결과에 대하여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계략이 탄로가 나면 그들의 몸을 수색하고 탄원자라고 고문을 당한다. 이 탈주자들은 2,000번씩이나 이런 고문을 당했다."
신체적, 도덕적, 종교적인 면에서 볼 때 예루살렘이 포위 당했을 때 받는 고난처럼 심한 고난의 위험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일은 다른 어느 도시의 멸망에서도 없었다. 우리는 가끔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탄을 생각한다. 그러나 히로시마에서 원자탄 때문에 죽은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멸망 시에 죽은 사람들의 10분의 1에 불과할 뿐이다, 다니엘 9:26의 이 말씀은 주 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그 완전한 성취를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장치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 9:27) 본절은 남아있는 "한 일곱들"의 성격과 내용을 개요해 준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하는 말씀이 그 한가지 성격이다, 대답을 요청하는 그 첫째 문제는 누가 이 언약을 정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 해석 학파들이 제시하는 몇 가지 해답이 있다.
1. 몬트고메리와 드라이버는 이 사람은 안티어커스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몬트고메리는 안티어커스가 능란한 외교로 많은 예루살렘 사람들과 더불어 언약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견해가 가지고 있는 난점은 역사상으로 안티어커스가 유대인들과 언약한 일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다만 어떤 유대인들이 그에게 주위에 있는 다른 이방 나라들과 더불어 언약하도록 해달라는 제안을 했던 사실은 있었다. 그 목적은 그들이 이방의 풍속을 수입하려는 것이었다, 안티어커스는 이 청원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안티어커스 자신이 언약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다른 이방 나라들과 더불어 맺은 것이다.
2. 게이블라인과 세대주의 학자들은 여기 언약한 자가 재생 로마 제국의 로마 왕이라고 주장한다. 이 로마 왕은 26절의 왕자이며 다니엘 7장의 작은 뿔이며 제 70이레(한 이레)의 초기에 유대인들과 언약할 왕자라고 한다. 이 왕자는 한 이레의 중간기 즉 삼 년 반에 가서는 그 언약을 파기하고 유대인을 핍박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 사상을 석의하여 다시 말하면"한 왕자의 백성이 올 것이며 그들은 성읍과 성소를 훼파할 것이며 언약을 굳게 정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견해도 역시 다음과 같은 난점을 가지고 있다. (a)27절의 주어를 왕자로 해석하는 것은 본문을 읽는데 자연스럽지 않다. 주어는 왕자가 아니고 백성이며 왕자는 성행사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왕자"란 말은 참으로 26절에서 종속적인 입장에 놓여있다. 심지어는 26절에서까지도 왕자는 문장의 주어가 아니다. 만일 가장 가까운 명사를 "굳게 정하다"라는 동사의 주어로 생각한다면 그 명사는 "왕자"가 아니고"백성"이다. 26절에서는 성읍과 성소를 파괴하는 자는 분명히 그 "왕자"가 아니고 그 "백성"이다. 왕자라는 말을 "그가 언약을 굳게 정할 것이다"라는 문자의 주어로 많은 사람들은 선행사로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b)이 해석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27절에 사용된 동사 때문이다, 본절의 저자는 여기에서 그가 언약을 맺는다는 말을 하려고 의도하지 않는다. 이 말은 "언약을 맺는다.( )"하는 재래의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다. 본문27절은 영과 루폴드가 번역한 것처럼 그가 언약을 이행할 것이라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말은 주권적인 언약 체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체결되어 있는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대주의 학자들의 해석은 이것을 모라 왕이 유대인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고 한다, 그러나 성결 본문을 이 언약이 이미 맺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의 주어는 다만 언약을 이행하는 근거에 있을 뿐이다.
3. 우리는 이 문장의 주어가 메시아라고 주장한다,(메시아가 이 언약의 이행자(실시자)일 것이다). 이 장절들은 모두 메시아의 특성과 메시아의 지도적 성격을 말하고 있다. 24절에서는 메시아가 모든 신적 활동의 중심이요 모든 영적 축복의 집행자로서 나타나신다고 했으며 25절에서는 메시아의 출현이 69의 일곱들의 끝에 혹은 69의 일곱들의 결론이라고 했으며 26절에서는 메시아께서 모든 백성에게 거절을 당해서 죽으시고 거기에 따라 성소와 성읍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했다. 이 문맥들 전체는 메시아 중심 성격을 나타내는 드라마이다. 본절의 다른 말씀도 또한 이 해석을 강조한다. 그 언약을 실시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따른다면 메시아가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언약을 실시하셨는가? 우리는 다니엘 9:2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계약은 처음에 아담에게 주셨던 것을 후에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계약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이 은혜 계약을 성취시켰다, 웨스터 민스트 신앙고백은 이 예언에 관하여 잘 설명해 준다. (7장 3절). 즉 사람이 타락하여 스스로 언약(행위 계약)에 의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주님은 둘째 언약을 맺으시기를 기뻐하셨다. 이것은 보통 은혜언약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하나님은 죄인에게도 예수를 통한 생명과 구원을 자유롭게 제공하신다, 단지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라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생명을 얻도록 작정된 모든 사람에게 믿을 것을 요구하고 또한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은혜 언약을 성취시키셨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역에 근거하여 죄인들에게 자유로이 생명과 구원이 주어졌다, 그래서 그는 이 언약이 유효하도록 만들었다. 제70번째 이레에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제개된다, 제 70이레의 사건들은 언제 일어날 사건들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소위 "괄호 시대설"을 말하는 세대주의 학설을 주위 깊게 고찰해야 한다. 이 학설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26절과 27절 사이에는 결정되지 않은 불확정한 기간이 가로놓여 있다고 한다. 이 불확정한 기간은 커다란 괄호와 같은 것이며 교회 시대 전체를 포함하는 기간이다, 이 커다란 괄호 시대에는 하나님이 유대인과 교통하심이 끝났으며 이때부터 한 이레가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다니엘서에 관한 세대주의 학자들의 견해는 대단히 독특하다.
이 견해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초림 하신 것은 이 세상에 다윗 왕국을 설립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그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이 왕국을 주려고 왔으나 유대인들이 그를 배척했기 때문에 다니엘 69이레는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 왕국을 세우는 대신에 구약에 계시되지 않은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세웠는데 이것이 곧 교회의 설립이라고 한다. 세대주의자들에 의하면 그 교회는 유대인이 예수님을 배척했을 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두 번째 방편으로 주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시기를 교회시대 혹은 괄호 시대라고 하며 이 시대는 예수님이 그의 성도들을 데리고 공중 재림할 때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중에서 지상에 있는 교회를 취하여 결국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돌아가는 것은 다니엘의 제 70이레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 한 이레가 시작할 때에 재생 로마 제국이 일어나고 그 로마 왕이 그 때까지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한다. 정치적인 충성과 원조에 대한 답례로 로마 왕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건축과 제사 드리는 것을 허락할 것이지만 후 삼 년 반에 가서는 그가 그의 언약을 파기하고 유대인들을 극도로 핍박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제 70이레"는 그리스도가 그의 성도들을 데리고 팔레스틴에 천년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재림하심으로 끝난다고 한다. 이 해석에 관한 신학적인 난점은 그만 두고라도 해석학적 난점을 언급하면 아래와 같다.
(a) 이 견해는 제 69이레와 제 70이레 사이에 공백기가 있으며 그 공백기는 70이레 전체보다 4배나 길다고 주장한다. 괄호 시대를 주장하는 자들은 70이레 전체의 길이가 490년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 공백기는 이미 지나간 길이보다 4배나 길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 해석이 성경 기록에 부합하지 못하고 이상하고 특정한 사상을 첨가하는 것이다.
(b) 처음 일곱이레와 그 다음의 62이레 사이에 공백기가 전혀 없었던 것과 같이 제 69이레와 제 70이레 사이에도 이러한 장기간의 공백기는 없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반드시 이 이론의 반증이 되는 것은 아니나 중요한 고찰임에는 틀림없다.
(c)26절의 두 사건이 62의 일곱들 후에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나 27절의 사건들이 26절에 있는 사건들 이후에 일어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가정에 불과하다, 26절에 보면 메시아가 죽으심을 끊어진다고 선포했는데 메시아가 죽기 전에 혹은 적어도 죽음과 동시에 언약을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언약을 실시하는 행위 즉 제 70의 일곱들의 행위는 메시아의 죽으심(26절)과 동시대의 일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제 70의 일곱들이 62의 일곱들이 지난 후에 곧 따라오지 않는다는 가정은 이유가 될 수 없다.
(d) 그리스도께서 멸망의 가증한 것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그는 다니엘서의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그가 가증한 것을 염두에 둔 것은 미래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제 70의 일곱들에 일어날 가증한 것도 미래에 될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칼빈이 말한 것과 같이 마태복음 24:15-16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할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이 이 예언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에 의해서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성읍도 파괴되었고 주민은 포로로 잡혀간 때에 성취되었다, 이것은 여기에 예언된 사건들을 충분히 설명해 주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제 70번째 이레에 관한 세대주의 해석을 부인한다. 우리는 제 70번째 이레와 메시야의 사역 기간을 동등한 것으로 취급한다. 이 기간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모든 기간, 즉 신이요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그 때를 포함한다, 그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은 그 언약을 효과 있게 성취시키는 수단이다, 그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은 믿음을 조건으로 하여 죄인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주셨다, 그러나 이 생명과 구원은 값을 주고 지불했던 것이며 그리스도의 유효한 사역을 통하여 산 것이다.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이 동사의 주어는 앞의 문장과 똑같다, 주어는 성전 의식을 폐지시킨 안티어커스도 아니며 재생 로마 제국의 왕도 아니다, 그 주어는 그의 죽으심으로 제사와 예물을 폐지시키는 "메시아"이시다. "제사와 예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전부 제사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말은 피 흘리는 제사와 피 안 흘리는 제사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제사의 정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또 다시 구주로 인한 놀라운 성취를 의미한다. 제사 제도가 예수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페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서가 말하는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체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히 10:6-8, 히7:11, 8:13, 9:25-26을 참조하라). 레위기의 의식이 약하며 무익하므로 페하고 (히 7:8)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사죄와 영원한 의가 부여되었다. 이 제도의 실제적 폐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이미 이행되었다는 작정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데 불과하다.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로 인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미 일어났던 사실의 외부적인 표명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때부터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읍이 될 수 없고 성전도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없으며 한 낱 가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모든 결과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던 그 순간에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 상징되었다. 칼빈이 말한 것 같이 "휘장이 찢어진 것은 율법의 의식을 폐지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늘이 열려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초청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게 하는 것이다." 다니엘 9장 27절의 바로 다음 구절인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라는 말은 해석하기가 극히 어렵다, 이 해석의 열쇠는 "날개"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 가에 달려 있다, 우리 한역에는 "날개"라는 말로 번역되었으나, 영. 헹스텐버그, 몬트고메리는 이 말은 신성을 잃어 버려서 임 주님의 성전 예배를 말하는 것이다, 영은 말하기를 "이 말은 휘장이 둘로 찢어진 후에 성전 예배를 비유적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다."라고 한다. 이 견해를 바꾸어 말하면 여기에서 가증한 것으로 언급된 것은 바로 성전 그 자체라는 것이다, 갈보리의 참된 제사가 한번 있는 후에 성전은 이미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며 단지 가증한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증한 것의 날개는 성전의 중심에서 가장 가장자리 꼭대기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본문의 뜻은 황폐케 하는 자가 성전을 완전히 정복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영은 말하기를 이것은 주후 70년에 성전과 성읍을 완전히 정복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영은 말하기를 이것은 주후 70년에 성전과 성읍을 완전히 황폐시킨 티투스를 가리킨다고 한다. 27절 후반절에서는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다고 말했다. 즉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종말까지 이 모든 것이 황폐케 하는 장소에 쏟아지리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가증한 것의 날개"란 개념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이 있다, 카일과 클리포드는 이 말이 성전 꼭대기를 의미한다는 헹스켄버그의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카일과 클리포드는 이 말이 성경에서는 주로 새의 날개를 시종 일관하게 의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신 32:11, 출 19:4, 시 18:11을 참조하라)
이상의 구절들에서 날개는 힘과 목적을 실행하는 권력의 상징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다니엘 9:27은 가증한 것들에게 우상 숭배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가증한 것"이라는 용어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특별히 파괴자와 황폐케하는 자를 떠받들고 조종하고 이 세상을 황폐케하는 권세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정국의 하나님이 구름의 날개나 하나님의 종인 천사가 관계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용되는 말들에 고나하여 완전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영의 견해를 취하여 이 마을 성전이라고 생각하던지 카일의 견해를 취하여 이교도의 우상 숭배로 해석하든지 간에 이것은 주후 70년에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파괴시킨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 즉 어느 해석을 취하든지 이 말씀은 티투스에 의해 성전이 훼파 된 역사적 사건을 의미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영의 해석은 특별히 성전이 훼파 된 이유, 즉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성전 예배를 하는 유대인의 곡해를 강조한 것이다, 카일의 해석은 특히 성전이 훼파된 방법으로는 티투스의 이교군대를 강조한 것이다.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라는 27절의
마지막 말씀은 앞에 있는 문구, 즉 황폐케 하는 것의 결과이다, 26절과 27절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잇다, 두절 모두 하나님의 작정하신 목적에 관한 언급이다, 27절의 "종말까지"( )란 말은 26절의 "끝까지( )"라는 말과 부합한다. 이 유사절들이 주후 70년의 성전 훼파를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해석을 더 강화 해준다. "정한 종말까지"( )란 말은 이사야 10:23, 28:22을 생각하게 하는데 이 말은 완필 곧 변동할 수 없이 정해진 완전한 멸망의 심판을 의미한다. 멸망이 불가피하게 그 성읍과 성전에 쏟아질 것이다. 우리 본문에 "종말"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심판의 이러한 성격을 한 층 더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본동사 (쏟아지다)도 역시 이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다니엘 9:11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불을 물같이 쏟으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이사야 11:6과 에스겔 38:22에도 사용되었는데 이 구절들에서는 분명히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언급한 것이다. 여기 다니엘9:27에서도 동일한 언급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본문에 사용된 "황페케 하다"라는 동사는 한역에서는 정확하게 번역되지 못했다. 이 동사는 항상 자동사이다. 그러므로 목적어를 취할 수 없다, 그런데 한역에는 "자에가 "라는 말을 써서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이 되어 있다. 천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성읍을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진다는 것이 아니라 황폐케 된 것에 쏟아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인격적인 것으로 황폐된 성전과 성읍을 가리킨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이 성전을 파괴시킨 이교도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친 백성에게 임한다고 말한다. 정한 종말은 황폐케 하는 자에게가 아니라 황폐된 것 위에 임할 것이다. 이 사상에 대하여 세대주의 학자들은 이 마지막 구절을 마지막 심판에다가 적용시킨다. 이 마지막 심판은 배교가 일어나게 만들고 이스라엘 사람을 대환란으로 이끌어 들인 로마 왕 위에 쏟을 심판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 말을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도들과 함께 오셔서 적 그리스도를 심판하는 그 날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사상에 대해서 우리가 느끼는 해석학적인 최대의 난점은 이 말이 유대인을 멸망시킨 자들을 심판하는 것이지 황폐된 것 즉 성전과 성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다, 그것은 곧 여기에 사용된 동사의 비인격적 성격과 자동사의 성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점이다.
제 70번째 이레의 끝을 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에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없다. 69의 일곱들의 끝은 분명히 언급되었다. 즉 기름부음을 받은자, 곧 왕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70번째 이레의 끝은 언급되지 않았다, 우리는 70이레의 기간이 끝나는 시간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그 끝남이 특별한 중요성이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또 끝남을 표시하는 중요한 사건도 없다. 70의 일곱들의 끝나는 때는 알 수가 없다. 이와 같은 관계에서 볼 때 이 구절은 또한 이 기간의 시작에 관해서도 모호하다는 것을 주목하게 한다. 70이레의 시작도 단순히 말씀의 공포에 관해서만 말할 뿐이다. 이 예언 자체는 특별히 어떤 왕의 시대에 그 말씀이 공포되었다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석가들은 그 연대를 맞추러 보려고 노력하지만 본문 자체는 모호한 것이다, 으뜸 되는 강조점은 이 놀라운 시간의 시작이나 종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고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나는 전능한 사건들, 즉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사건들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27절에서 나오는 70의 일곱들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있다. 우리도 이 본문을 해석할 때에는 그 날짜나 수학적인 계산을 강조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을 때 예수께서 성취하려고 오신 그 전능한 구원이 실제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가 강조해야 할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본서 (다니엘서)의 중심이요 핵심이다. 다니엘의 초기 예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다 일반적으로 강조했다, 바벨론에 살고 있던 다니엘에게 그가 살고 있는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계시해 주었다, 하나님 자신께서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그 때까지는 세상 나라가 계속 해서 일어날 것이다, 화려하고도 광법한 개요로 약속하신 구원을 묘사하셨다.
다니엘서 9장에 와서는 일찍이 나온 세상 나라들은 자취를 감추고 인격자이신 메시아가 하실 일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구원 사역이 강조되어 성취된다는 것이다, 인자의 나라가 영원하고 우주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성취되기 위하여 메시아가 죽으심으로 끊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9장에 와서는 일찍이 나온 세상 나라들은 자취를 감추고 인격자이신 메시아가 하실 일을 강조한다, 이 성취되기 위하여 메시아가 죽으심으로 끊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9장에서 우리는 갈보리의 십자가를 대면한다, 여기에 그의 백성을 위로하는 다니엘의 중심이 있다. 즉 그리스도가 끊어짐을 당하여 메시아의 속죄의 죽음이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셨다.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유일한 의이신 그리스도 자신의 영원한 의를 성취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