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들면 송장인 내가 밤사이에 잠을 깼다.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곤히 자는 아내에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본 것이다. 밤새워 창밖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근하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장관이었다. 고국의 하늘보다 10배는 더 넓은 하늘은 아직 못다 한 일을 남겨놓은 듯 온통 잿빛이다. 잠깐씩 뿌리는 빗방울에 와이퍼가 애써보지만, 하늘은 그대로다.
내가 출근하는 길에 신호등은 10개 정도, 라운드어바웃은 한 개 있다.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는 주어진 신호에 따라간다. 하지만 라운드어바웃에서는 차가 주는 신호에 따라 운전한다. 라운드어바웃의 신호규칙이 몇 년 전에 변경이 되었다. 수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모두 숙지하고 있을 법도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다. 따라서 상대의 신호만을 보고 출입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라운드어바웃뿐만 아니라 일반 도로에서도 상대 신호만으로 운전하는 사람은 좋은 운전자는 아니라 생각한다. 잘못된 신호등을 켜고 운전하는 운전자들이 제법 있기 때문이다. 나도 운전을 하면서 이런 실수를 심심치 않게 한다. 꼭 필요한 상황에서 신호 넣는 것을 잊는다. 신호를 넣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풀리는 경우도 있다. 이제 신호를 꺼야 하는데 잊는 경우도 있다. 물론 신호를 잘못 넣을 경우도 있다.
그런 이유로 운전을 할 때 나는 자동차의 신호를 전적으로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은 참고 사항일 뿐이다. 다른 차의 속도와 좌우 신호등 그리고 나의 상황에 따라 운전한다. 보이는 바를 믿지 못하고 그때그때 검증해야 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피곤하더라도 사고를 방지하는 것이 더 낫다. 사고 후에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두의 안전을 위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어느정도 운전경력이 있는 자는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당연하고 이미 체화된 것이다.
운전한다는 것은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것이다. 인생도 자동차 운전과 비슷한 면이 참으로 많이 있다. 목적하는 바가 있으며, 함께 살기에 주변과 끊임없이 소통한다. 남의 말을 듣는 과정은 교통상황을 확인하는 것과 같다. 그때마다 주행 중의 현상과 비슷한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 가족, 지인의 말을 포함해서 신문/방송이 전하는 바를 확인한다, 이는 80년대를 겪으면서 나에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위의 그림은 많은 사람에게 이미 익숙한 그림으로 미디어의 속성을 바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카메라의 앵글에 잡힌 부분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진실은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정보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지 않으면 왜곡된 내용으로 현상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전체를 확인하는 과정은 불편한 일이다. 또한, 퀴즈를 푸는 작업이 아니어서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게을리하면 피해자와 가해자라 바뀌는 경우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하는 말을 듣고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자. 전하는 매체가 믿을만할 경우, 우리는 이 과정을 놓치고 만다. 기실 우리는 TV에서 나오는 것은 진실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저널리즘을 이루는 버팀목인 "진실"이라는 것을 믿고 싶은 것이다. TV나 신문에 나오는 광고조차도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힘을 미디어는 가지고 있다. 또한, 주변의 존경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도 같은 경우에 속한다. 그들이 전하는 것이 "진실"이 아닌 경우를 적지 않게 경험했다. 가만히 앉아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을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해당 내용에 대해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앞뒤의 맥락을 살펴보자. 위의 그림의 경우처럼 전체를 보지 않으면 곡해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말이나 글 일부가 발췌되어 전달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전문을 다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인용된 사례의 경우도 점검해봐야 한다. 주장하는 바를 지지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혀 관계없는 것인지.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향한 예수의 일갈을 "예수, 욕하다." 또는 "예수도 욕을!" 등등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의 관점을 살펴보자.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때 반대 혹은 상대편 의견을 살펴보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대부분의 경우 앎이란, 내가 아는 것을 기반으로 주장이 물음이 생겨나며, 그것을 기반으로 지식이 켜켜이 쌓이기 때문이다.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데, 본인은 견고한 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역사적 사건을 예로 들지 않고라도, 최근 고국에서 들려오는 전기 누진제를 논쟁을 보면, 정부나 한전과 민간단체의 의견을 다 접해본 후,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바, 전기사용료는 세금이 아니다. 그래서 전기세라고 말하지 않고 전기사용료라고 해야 한다. 세금이라면 국회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통계는 더욱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자. 언젠가 정당의 지지율을 조사한 내용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를 유선전화로 낮에 조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발표하는 것이었다. 발표와는 맞지 않는 표본의 선택에 문제가 있는 잘못된 조사방법이다. 어느 연령층이 낮에 집에 있었을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추측할 수 있다. 사람들의 선호도를 조사하는 대부분의 결과는 한 번 듣고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구나! 정도로 좁혀서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지속적인 관심은 진실을 밝혀준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잊는다. 잊고 난 후, 누군가 같은 것을 다른 모양으로 제시하면 큰 저항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주요한 담론의 경우, 관련 정보는 더 풍성해진다. 625동란의 경우, 관련 문건이 공개되지 않았을때 북침설이 제기 된 적이 있다. 지금은 소련 등의 공개된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4대강 공사의 경우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리라고 본다. 관련된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얼마 전에 마르크스 자본론을 초등학생용 만화로 읽었다. 마르크스가 쓴 책이 고국에서 초등학생용으로 나올 정도라면 많이 변한 것이다.
모든 과정을 거쳐서 내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결국 변하지 않는 "진실"인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자신이 점유한 공간을 꽉 채우고 있으나 텅 빈 것이다. 존재하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말이 철학적인 말장난만은 아니다. 원자론을 한 번이라도 접한 사람은 과학적으로 무리가 없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항상 옳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은 항상 마음에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출근할 때를 돌이켜본다. 하늘도 땅도 완전히 다르다. 와이퍼는 필요 없었고 눈부신 하늘을 바로 바라볼 수 없어 선글라스를 써야 했다. 자연을 접하면 굳이 진짜인지 확인할 필요는 없다. 보이는 것이 전부다. 그 뒤에 있을 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상상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상상하는 것으로 내가 잘못된다면 그것은 나의 책임이다. 그러나 어디선가 접한 정보의 진위를 파악하지 않고 잘못 판단을 한다면 누구의 잘못일까. 그 경우에도 나의 잘못이 아닐까? 카메라는 전체를 담아 나에게 보내줄 수 없는데 전체를 기대한 것이라면 기대한 사람이 실수이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위아래의 사진도 보여 달라고 요청을 해야 할 것이다. 운전하면서 확인하는 수고로움이 일상이 되어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내 앞에 놓은 이야기들의 진실 여부도 수고롭지만 점검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더더욱 오해와 편견을 없앨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2016.9.10. 평상심)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마침 비슷한 강의가 있어서 소개함
ㅡ자명한가, 아니면 찜찜한가.
참나나 선정의 상태에서 자신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온다.
항상 자명함을 찾아서 행동하라 ㅡ
홍익학당 윤선생/ 유튜브
주위에서 많이 보내는 카톡정보도 틀리거나, 의도적으로 굴절된 게 많죠.
자명, 찜찜
스스로 판단의 기준.
다른 사람에게 말을 전할때 조심스러워집니다.
일단 시작하면 저도 모르게 말이 많아지는 부작용이 생기고 있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