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이냐: 2017 문학의 봄 신년회 후기
전새벽
겨우 얻어낸 주말이다.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내던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있으면서 월급 타도되는 건가 싶을 만큼 한가하다 연말정산 징수(이런 씨!) 당하듯이 일이 밀려온 금요일이었다.
오전 회의는 어느 때보다 길었다. 원래는 단순히 일일업무를 보고하는 시간이라 오 분에서 십 분이면 족한데, 오늘은 한 시간이나 걸렸다. 어제 영국의 브로디란 놈이 재미있는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다. 풋옵션이라고 하는, 대학교 재무시간 때 배웠던 개념인 것 같은데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재고 있으면 값을 불러봐, 들어보고 살지 말지 결정할텡게,’ 라는 일반적인 트레이딩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만날 동남아 애들하고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주먹구구식 무역을 하다가 영국 사람한테서 뭔가 있어 보이는 얘기를 들으니 그 이메일 하나를 가지고 해석도 갖가지였다. 회의를 하다 보니 어느새 아홉시 반이었다. 법무법인 미팅이 열시니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회사가 법규를 위반했다. 들고 일어난 쪽은 검찰이었다. 우연찮게 뭔가를 수사하다가 이 바닥의 폐해를 감지했단다. 법을 몰라서 그랬지만, 고의는 아니었지만 우리가 법을 어겼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변호사는 위반사항 자체는 팩트이니 고의가 아니었다고, 선처를 바란다고 읍소하라고 했다. ‘눈물을 흘려도 좋다’고 말하는 박변호사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참에 연기학원을 다녀볼까.......
점심 먹고는 곧장 다음 미팅이었다. 바이어와의 가격협상 마지막 날이다. 숫자의 젬병인 나인데, 목소리가 커서인지 가격협상 담당을 삼년 째 해오고 있다. 협상이 끝나면 대개는 마음이 후련하다. 얘기가 잘 끝나 잘 벌면 잘 벌어서 좋고, 못 벌면 내 돈 아니니 그런대로 ‘끝났다’라는 사실에 만족할 수 있다. 담당이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냐고 매질을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이 정도로 긍정적인 자세가 아니면 회사 같은 곳, 다닐 수가 없어요.......라고 눈물을 흘려가며 읍소라도 하고 싶다.
그 뒤로도 할 일은 태산이었다. 인사행정병이었던 군 시절, 연대 인사 과장이 했던 신년사가 떠오른다. ‘인사 업무는 밀려오는 파도와 같습니다,’라는 정말 맞는 말이었죠, 과장님. 그런데 회사에 와보니 영업업무는 쓰나미예요. 지원병력도 없이 온몸을 방파제화 시켜 쓰나미를 막아내다 보니 퇴근 시간이다. 서둘러 채비를 하고 사당으로 향한다. 오늘은 작가회 신년회가 있는 날이다.
응, 사당역의 파스텔 시티 알아? 모른다고? 역에서 이어지는 종합상가인 것 같은데, 거기에 있는 사리원이라는데서 한대. 여자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약속장소에 도착한다. 어느 이름으로 예약했냐는 주인의 질문에, 문학의 봄 작가회라고 답하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 느껴진다. 우쭐한 기분마저 든다. 네, 작가입니다. 맞아요, 글 쓰는 작가예요, 하하....... 그렇게 신인상 수상이후로 작가회라던가, 등단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 아직도 마음은 롤러코스터를 탄다.
문봄 작가회! 막내 왔다고 어찌나 반겨들 주시는지. 신년회인데다 전임회장님, 신임회장님, 그리고 여러 다른 임원들, 공로패며 임명장이며 꽃다발을 주고받느라 정신없는 통에 도무지 내 손길을 허락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강순덕 시인의 카메라를 보며 한 가지를 결심한다. 아, 다음 모임부터는 내 손에 익은 카메라를 가져와야지.
회장 역할이 끝나고 나니 이제 다리가 안 아프다고 너스레를 떠는 여현옥 시인은 수여한 것들이 마음에 드는지 소녀 같이 들떴다. 꽃이며, 공로패며, 케익이며, 거기 모인 것 중에 여시인의 얼굴이 가장 빛났다. 이제 여시인은 고문이 됐다. 늦게 오면 고문할 것이라는 윤성식 소설가의 농담에 웃음이 터진다. 나는 이런 유머를 정말 좋아한다.
달고 부드러운 불고기 실컷 입에 쑤셔 넣고 강준모 시인과 잔을 몇 번 부딪힌 뒤 이차로 이동한다. 이동하는 길은 유동환 시인과 함께했다. 오늘로 두 번째 뵙는 유시인은 지금까지 보기에 두 가지 비범한 재주를 가지셨는데 하나는 끊임없이 말하는 능력이고 하나는 꾸준히 쓰는 집념이다. 그 중 하나는 내가 무척 동경하는 것이라 유시인과의 만남은 늘 반갑다.
사당역 가르텐 비어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전화가 온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부들부들 떠는데 선배들이 받은 꽃다발과 케익과 공로패를 들고 있는 터라 받을 길이 없다. 이것으로 오늘 개동 시인의 전화를 두 번 놓쳤다. 손 안대고 통화할 수 있는 블루투스 헤드셋을 알아봐야할지도 모른다.
남은 자리에 앉는데 배정록 시인 옆자리다. 고기를 먹을 때 그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보면서 언제 인사드릴 수 있으려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그런데 파 닭 한 조각 먹고,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 한 번 받고, 먼저 일어나시는 선생님들 인사드리고 하느라 말을 많이 못 걸었다. 배시인도 ‘야 그래 네가 새로 온 막내구나,’라고 서슴없이 등을 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다. 다음번에 조금 진득이 이야기를 청할 기회가 있으리라.
꾀꼬리 구정옥 시인을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자리로 돌아온다. 구시인의 목소리는 취임 축하합니다, 라는 짧은 노래를 부를 때조차 황홀했다. 작가회에서 지금까지 만난 선배 중에 구시인의 음색이 단연 으뜸이라면 가장 좋아하는 말투는 윤은진 시인의 그것이다. 윤시인의 말투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모서리가 없는 완벽한 원이 되어야 한다. 그만큼 그녀의 화법은 상대를 편하게 한다. 모나고 각진 데 없이 상대를 끌어안는다. 어린아이 같이 천진한 윤시인과 몇 마디를 나누다가 그러고 보니 노수현 시인은 왜 안 오셨냐고 여쭌다. 노시인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말예요.......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노시인의 빈자리를 채워주러 왔다는 듯 오혜숙 시인이 등장, 열정적으로 반겨준다. 열정적인 오시인과 다가올 대선을 가지고 머리를 맞댄다. 대선이 끝난 뒤 첫 작가회 모임 때는 누구보다 오시인과 강하게 잔을 맞부딪히리라.
그런 얘기를 하면서 나도 간신히 이 풍경에 녹아들기 시작한다. 간신히 내 페이스를 찾아 주행을 시작한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누군가 난데없이 끼어든다. 마티즈가 껴드나, 하고 봤는데 대형트럭이다. 사이채 소설가다. 그는 ‘문학이란 무엇이냐’라는 25톤 진개덤프 트럭 같은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글쎄요 선생님, 문학이란 무엇이죠.
그가 던지는 말들은 내가 그토록 작가회에 오고 싶었던 이유였다. 회장님이 하시는 응당 말은 밝고 깊고 옳고 높으시다고 아부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문학에 애정이 넘치는,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 선배를 오래 찾아 헤맸기 때문이다. 청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민데 밤이 짧다. 신년회인데 너무 싱겁게 끝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화장실 간 틈에 잔이 하나 시원하게 깨진 모양이니 올 한해는 모두에게 경사가 가득할 조짐이다.
모두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길, 마음이 허전했다.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가 갑자기 혼자가 된 탓이다. 그런데 동시에 흐뭇한 기분도 들었다. 허전한 와중에 흐뭇한 기분은 왜 들었을까? 휴대폰을 통해 습관적으로 들어간 문봄 카페를 보다가 그 흐뭇함의 원인을 깨닫는다.
문봄 작가회. 이것은 겨우 얻어낸 울타리다. 회사에 다니면서, 입건이니 벌금형이니 이런 문제들과 싸워가며, 풋옵션이니 콜옵션이니 이런 것들과 씨름해가면서도 놓지 않은 펜, 그것으로 겨우 얻어낸 나의 든든한 울타리다. 그 울타리는 원래부터 거기에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모여서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것을 시작한지 십 년이 됐다고 했다. 와서 놀아보니 좋은 터였다. 욕심나는, 행복해지는, 감개가 무량해지는 그런 터전이었다.
사이채 소설가는 문학이란 ‘언어로, 작가의 사상과 생각을, 상상을 통해서,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앞의 것들 다 갖춰도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일상에 그런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다면 문학적일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선생님, 일의 쓰나미에 파묻히는 4년차 회사원인 저는 아름다움을 어디서 만나야 하죠? 아, 실례했습니다. 여기에 있었네요. 문학의 봄, 제가 찾던 아름다움이요.
첫댓글 경험 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고 합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씨로 마음의 밭에서 뿌리 내리고
비바람 맞아가며 햇살의 은혜로움을 지켜 품은 뜻을 개화시키는 꽃 한 송이
그 향기를 어찌 가벼이 하리^^♡
어제 일찍 끝나 뭔가 좀 허전했던가?
나도 3차를 못 가서 3% 아쉬었지. 언제 막차 한 번 놓쳐보자고 ^^
'행사기록실' 만남후기(글)로 이동
어제 장면이 생생이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대단합니다.
늦잠 후 방바닥 뒹굴고 있는 제가 반성합니다.^^
중간에 귀가했는데 마지막까지 함께 할수있었네요. 새복작가덕분에~ 문봄의 막내지만 큰아들 노릇 톡톡히 합니다. 어깨가 든든합니다.
후기를 읽다보니 참석하지 못한 저도 함께 술 잔을 기울인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문학의봄에서 찾은 작가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바꾸는 씨앗이길 소원합니다.
전새벽 작가의 글에서는 새벽이 느껴집니다..
서늘한 새벽에 마음과 정신이 깨어납니다..
잘 읽었어요..
이렇게 멋지게 쓴 후기글을 이제 읽고 그날의 감동에 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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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덩이가
이밤 와인 한잔을 마셔야 할듯 전새벽 작가님
문봄의 복덩이가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