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
- 사랑은 내리는 비처럼 -
'꽃'
- 김규정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무식한 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예쁘고 싶고
향기롭고 싶습니다
사랑을 받고
행복해지기 위하여
- 김규정 : 2003년 ‘시사문단’ 등단, 작품집 ‘넋두리(2022)’ 등 다수
「불륜은 모든 문학작품의 거의 유일한 주제이다」
- 레프 톨스토이 -
하늘은 맑고 높았다. 마치 이른 봄비가 내리다 그친 것처럼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날씨는 선선했다. 초여름이 지나고 조금 있으면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 시작될 터인데, 새벽에 추웠는지 201호 단골손님은 아침부터 두꺼운 점퍼를 걸치고 마당을 서성거렸다. 하긴 이곳은 한여름에도 새벽엔 한기가 들린다는 지리산 산골이었다. 낮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에 온 대지가 뜨겁지만, 저녁이 지나 자정이 넘어가면 도시의 웬만한 초겨울 날씨 못지않은 추위가 시작된다는 사실은 이곳 주민들뿐만 아니라 피서객도 다 알고 있었다.
잠시 뒤 해가 마당 끝자락까지 들자, 201호는 만족한 듯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묶던 방으로 들어가면서 안내실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던 내게 뭐라 뭐라 지껄였지만, 나는 그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신경은 온통 어젯밤 늦게 펜션을 찾은 202호 손님에 쏠려있었다.
어젯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낮에 손님을 치르고 오후 내내 펜션 주위의 제초작업을 하다 저녁부터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그 시각에 자동차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안내실 문을 누군가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그만 잠이 깨고 말았다. 통상, 저녁에 찾아오는 손님은 거의 없어, 나는 행여 투숙객 중에 누군가가 술이 떨어지자 안내실로 찾아온 줄 알았다. 이곳은 읍내와는 뚝 떨어진 곳이라 인근에 편의점조차 없는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였다. 하지만 창문을 열어 확인하니 낯선 남자가 불쑥, 카드를 내밀며 방 하나를 요구했다. 남자의 입에선 술 냄새가 심하게 풍겼다. 남자 뒤엔 회색빛 엷은 코트를 입은 여자가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다행히 202호가 비어있어 나는 카드단말기에 결재하고 열쇠를 내주었다.
“어두운데 안내해드릴까요?”
나는 빈말이라도 손님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아뇨. 됐어요. 일 보세요. 주무시든가.”
계산을 마친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서둘러 펜션으로 들어가려다,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내게 물었다.
“여기 술 팔아요?”
그러자 여자가 기겁했다.
“아니에요. 아저씨! 됐어요. 술은 무슨 술.”
여자가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의 팔을 끌다, 그의 힘이 너무 센지 그만 휘청했다. 나는 어찌할 줄 몰라 그냥 안내실에 앉아있었는데, 둘이 어둠 속에서 한참이나 실랑이를 하더니 이번엔 여자가 안내실로 왔다.
“술을 팔기는 하나요? 있다면 소주 한 병만 부탁드려요”
펜션에서 솔직히 술은 팔진 않지만, 가끔 이런 손님들을 위해 몇 병 정도는 항상 준비해둔 것은 있었다. 정황상, 술을 마시고 싶은 남자의 강압에 여자가 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소주 한 병으로 합의 봤으니 다행이라 생각한 나는 냉장고에서 재빨리 술을 꺼내왔다. 그때 여자가 계산한다며 안내실 불빛 쪽으로 다가왔을 때, 하마터면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소주병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분명, 그녀였다.
“얼마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녀는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밤에 밖에서 안내실을 보면 역광으로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아 행여 그녀는 잘못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옛 기억 속의 그녀를 잘못 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냐니까요?”
그녀의 재촉에 가슴이 벌렁거려 제대로 대답을 못 하다 겨우 입이 떨어졌다.
“이천 원만 주세요.”
여자는 돈을 내고 술병을 쥐더니 이내 남자와 펜션 쪽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녀가 사라진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평온했던 일상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일 날이 밝으며 한 번 더 확인하겠지만 아무래도 내 기억이 맞는 것 같았다. 아아, 어쩌자고 그녀는 이런 곳에 찾아와서 내 상처를 드러나게 하는지 인생은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안내실 밖을 몇 번이나 들락거리며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골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일에서 천까지 세어봤지만, 잠은커녕 졸음도 오지 않았다. 거기에다 결정적으로 내가 잠 못 든 이유는 아까 그 남자가 안내실로 한 번 더 찾아와 소주 두 병을 사 갔던 사실이었다. 그는 소주 한 병으론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다고 내게 사정하다, 막판엔 내게 아예 협박했다. 할 수 없이 술을 판 나는 그 뒤 한 차례 더 그의 방문(그때는 소주가 다 떨어져 내가 먹던 맥주 2병을 그냥 주었다)이 있고 난 뒤에야 겨우 새벽에 잠이 들고 말았다.
“뭐야? 고뿔 걸린 병아리처럼.”
눈앞에 201호 남자가 그물과 냄비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내가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한해도 빠지지 않고 여름만 되면 한 달 정도 묵고 가는 남자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라, 언제부터인가 격의 없이 대하다보니 이젠 누가 주인이고 손님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친숙한 사이였다.
“어제 잠을 못 잤어.”
“그래? 나도 그랬는데. 야! 어젯밤 내 옆방에 남녀가 들어왔지? 그 연놈 때문에 나도 한숨도 못 잤어.”
나는 순간적으로 어제 두어 차례나 술을 사서 갔던 남자를 떠올렸다. 201호가 잠을 못 잤다면 남자가 조용히 술만 마신 게 아닌 것 같았다.
“왜? 시끄러웠어?”
“그럼. 술만 처먹었으면 내가 이리 하소연도 하지 않는다. 남자가 얼마나 시끄럽게 구는지, 끝내는 베란다에 나가서 여자가 서럽게 울더구먼. 부부인지, 불륜인지 잘 몰라도 둘이 끝내주게 다투었어. 아마 나 외에 다른 방 손님들도 다 깼을걸?”
“그래?”
어제 남자는 술에 절어있어서 그렇지, 외모상으론 아주 인텔리했고 양복도 깔끔하게 잘 어울렸다. 나는 그녀가 그런 그와 왜, 무슨 사연으로 이 늦은 시각에 그것도 내가 있는 지리산 끝, 산골로 왔는지 점점 궁금해졌다.
“그건 그렇고 빨리 개울로 가서 고기나 잡자. 아직 아침 안 먹었지? 매운탕에 라면이나 끓여 먹자”
그가 내 팔을 억세게 끌어 나는 못 이기는 체하고 그를 따라나섰다. 어차피 아침나절에는 올 손님도, 펜션 안에 있는 손님도 나와 볼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개울에서 나는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고기를 몰아가면 그는 아래쪽에서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았다. 오늘은 재수가 좋은지 피라미와 붕어 새끼 그리고 버들치 몇 마리가 잡혔다.
“와! 오늘 정말 재수 좋은 날이야. 얼른 불 피워. 내가 손질할 테니.”
201호는 기분이 좋은지 연방 콧노래를 부르며 고기의 내장을 바르고 나는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지폈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는 도시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가족은 있는지 내게 말해주진 않아, 우리의 대화는 늘 정치나 날씨 또는 낚시 등 겉도는 편이었지만, 그와 매운탕에 라면 그리고 소주를 먹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한참을 땀을 뻘뻘 흘리며 매운탕을 먹던 그가 갑자기 날 보더니 눈짓을 했다. 뒤를 돌아보라는 신호였다.
“뭔데?”
“한번 돌아봐. 어제 그 손님 맞지?”
그의 말에 소주잔을 든 상태에서 뒤를 돌아보니 멀찌감치, 개울 옆 바위에 여자가 혼자 앉아있었다. 멀리서 봐도 그녀였다. 나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면서 호흡이 가빠왔다.
“어젯밤 얼마나 슬프게 울던지, 내가 다 마음이 아팠어. 봤냐고? 그럼, 하도 시끄럽게 굴기에 내가 새벽에 베란다에 나갔잖아. 그때 옆방 저 여자도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어. 희미한 달빛 아래 울고 있던 여자를 보며 내가 무슨 생각한 줄 알아?”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뭐?”
“고혹적이었어. 아무도 없는 새벽에 코트를 걸치고 쪼그려 앉아 우는 여자. 최근에 본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단 말이야.”
“풋!”
그의 말에 나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다음에 나온 말도 내가 했지만 스스로 우스운 질문이었다.
“왜 울고 있었을까?”
“글쎄요. 남녀 사이를 본인 외에 누가 알 수 있을까? 하지만 다년간 연애의 기술에 대해 연구한 본인이 추측하기로는…….”
그는 마치 자신이 연애학 박사라도 되는 양 약간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바로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헤어지고 싶은 거야.”
“뭐야? 누가? 여자가?”
그러자 그는 헛기침하더니 자신의 의견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잡았다.
“당연하지. 여자는 남자를 떠나고 싶은 거야. 아! 물론 처음에 여자는 남자에게 어떤 매력이 있는지 몰라도 그를 좋아했겠지. 그런데 갈수록 남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유추해보면 남자는 알코올 중독이 틀림없어. 여자는 몇 번이나 그의 병을 고쳐보려고 안달을 했겠지. 하지만 남자는 너무 깊게 알코올에 빠졌어. 분명, 어제도 그 문제 때문에 둘이 심하게 싸웠을 거야. 다툰 후, 남자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고 여자는 그런 자신을 자책하며 울었던 거야. 어때? 내 추리가 맞겠지?”
나는 그의 말이 거의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건 제삼자가 속단할 일은 아니었다. 남녀관계는 그가 말했듯이 그 두 사람만 아는 일이었다.
“그래. 맞는 것 같아.”
그러자 그는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새 종이컵과 나무젓가락을 꺼내더니 내 앞에서 일어서려 했다.
“왜 그래?”
“기다려봐. 내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직접 저 여자를 이 자리로 초대해서 밝혀보자고. 보아하니 아직 아침도 안 먹은 것 같아. 내가 데려올 테니 넌 자리나 정돈해 둬.”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나는 기가 막혔다. 나는 그녀를 확신했지만, 아직 그녀는 날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직 내가 그녀와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지 마!”
내가 단호하게 그의 팔을 잡으며 만류하니 그는 약간 생뚱맞은 표정을 했다.
“왜?”
“그냥……. 초면이고, 남편도 있잖아.”
“남편? 넌 어떻게 같이 온 사람이 남편이라 생각해? 아니, 또 남편이 있으면 어때? 우리가 어디 나쁜 짓을 할 사람이야? 그저 라면 한끼하면서 대화를 나누자는 건데. 저기 봐. 여자도 원하고 있어. 아까부터 우릴 쳐다보고 있잖아. 지금쯤 목도 마르고 배가 몹시 고플 거잖아. 남편이라는 작자는 아직도 방에 널브러져 자고 있을 거야.”
그는 말을 하면서 자기 생각이 맞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마침, 그녀가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저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새 그는 개울가의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는 불현듯 그때의 기억 – 사랑, 상처, 까만 밤, 연민, 자살 등 - 먼지가 되어 떠돌던 온갖 잡동사니 같은 추억으로 숨이 막히면서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의 뒤로 그녀가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첫댓글 이인규 소설가님~~!!
깊고 푸른 박수 보냅니다
네, 곧 한예원 원장이자, 지역을 넘은, 유명한 시낭송가님의 '지리산 연가' 가 삽입되면 폭발적인 조회가 나올 거로 예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