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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온 것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꽤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그 세월동안은 수많은 우여곡절들이 있었습니다. 어떨 때는 되게 괴로운 일도 있었고. 누군가한테 욕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고. 아주 힘들게, 힘들게 막 버티면서 왔던 적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인생전체가 그렇게 힘들었다는 분도 계시고.
또 어느 순간은 참 즐겁고 행복했다는 순간도 있을 것이고. 온갖 그 사건사고들로 인해서 울고 웃으면서 아마 지금 이 자리까지 오셨을 텐데. 지금, 그 모든 것들은 지금, 이 자리에는 없습니다. 옛날에 있었다, 라는 어떤 기억이, 내 머릿속의 기억으로서만 자리 잡고 있을 뿐이지. 어쨌든 우리는 성공적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왔고 또 지금 이 자리에서 되돌아보면 그것은 하나의 한낮 어떤 기억일 뿐이거든요. 수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어떻게, 어떻게 다 극복해냈습니다. 내고 이 자리까지 왔어요. 현재라는 자리까지 왔어요. 어∼사실은,
사실은 그렇게 엄청난 우여곡절이 있었다보니까 앞으로도 내 인생에 또 수많은,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을까? 얼마나 많은 괴로운 일들이 내 인생에 일어날까? 내 노후는 안정적일까? 뭐 수많은 일들이 이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아주 무거운 무게감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거든요. 그런데 어∼실상, 이 순간이라는 현재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직접적으로 우리가 체험 가능한 유일한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재에는 사실 그렇게 거대한 일이나 커다란 일이나 어떤 빅 이벤트 같은 거나 큰 상처, 아픔 이런 것들이 사실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할 뿐이지. 우리가 머릿속에서 개념으로써 엄청난 아픔과 상처, 또 미래에 대한 불안감, 두려움을 머릿속에 이렇게 안고 살다보니까 그냥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아주 힘든,
힘든 인생을 버티며 산단 말이지요. 그렇게 살게 됐을 때 우리 삶이 무거워지기 시작하고 번잡해지기 시작하고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두려워지기 시작하고. 그런데 명명백백하게 과거나 미래는 실체가 아니고 실존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가 접촉할 수 있는 순간은 지금, 지금밖에 없고. 지금 이 자리가 모든 것이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때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킬 때 미래에 대한 어떤 두려움, 불안감이라는 생각을 일으킬 때 그때, 갑자기 미래에 대한 엄청난 무게감에 불안감이 나를 엄습해오게 되거든요. 내가 이 세상을 생각할 때, 세상이 갑자기 등장을 합니다.
사실은 아무런 생각도 없을 때, 세상도 없거든요. 내 삶이라는 것도 없고, 나라는 것조차 없습니다. 내가 생각을 일으킬 때 온 세상이 등장하고 온 우주가 만들어지고 이 세상전체가 창조되기 시작합니다. 내 한 생각에서 세상은 만들어지고 그 한 생각이 사라질 때 세상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전부다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거든요. 내 의식이 만드는,
꾸며낸 세상인 것이지요. 그 의식이 꾸며낸 세상에 우리는 짓눌려서 내가 만들어낸 의식이 꾸며낸 온갖 세상에 짓눌려서 과거와 미래라는 수많은 어떤 무게감에 짓눌려서 내 스스로 내가 괴롭게 살고 있는 겁니다. 진실은, 삶의 진실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것밖에 없거든요. 지금 이대로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지금 내 앞에 있는 이것은 너무 심심하고 밍밍하고 그냥 평범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 그냥 아무 일이 없는데 그 아무 일이 없는, 생각 없이 멍한 그 자리는 별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늘 뭔가를 추구하고 막 박진감 넘치고 뭔가 육근을 자극하고 뭔가 세상이 나를 좀 통제해주기를 바라기도 하고요. 뭔가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
그런 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냥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는 지금. 이 심심한 이 자리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지요. 지금도 이렇게 새소리가 들려오고 있거든요, 아주 작지만. 음∼이렇게 원광사 올라오는 길이 다른 주에 비해서 이번 주에는 또 뭔가 달라진 걸 느끼셨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서 이렇게 바라보면 연한 초록 잎들이 마∼악 이렇게 일어나고 있고
꽃들도 지금 앞에 망울을 머금고 있고 또 피고 있고 떨어지고 있고. 너무 아름다운 삶이라는, 이 장대한 어떤 아름다움이 피어나고 있고 펼쳐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전혀 마주하지 못하고 두 눈을 멀쩡히 뜨고도 그것을 외면해버리는 것이지요. 생각 속의 삶을 사느라고. 생각 속에 내가 꾸며낸 의식의 삶을 사느라고. 현실에 있는 이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은 외면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미래를 걱정하면서 노후를 준비하느라고 머리를 가지고 막 굴리거나. 뭐 어떻게 하면 내가 성공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고 뭐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머리를 굴리는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 저 들려오는 새소리를 듣는 것이, 온전히 듣는 것이 더 근원적이고.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오래 앉아 있어서 다리가 아픈 느낌? 엉덩이가 방석과 이렇게 접촉되어 있는 느낌? 뭐 지금 이 공기? 이런 것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이렇게 느껴주는 것. 그냥 살아주는 것. 이 현재라는 삶속에 뛰어들어 주는 것. 그것이 가장 근원적인, 그게 바로 수행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굳이 수행이라고 표현을 하려면 굳이 마음공부라고 표현을 하려면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음∼두 가지라고 해 볼까요? 첫 번째는 때때로 법문을 듣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틈나는 대로 지하철을 타고서는 그냥 정신없이 스마트폰을 보거나 정신없이 생각을 굴리고 있는 시간을 평소에는 늘 보내겠지만, 이 마음공부를 하는 이후부터는 지하철을 타고 오고가는 시간에 문득, 이렇게 지하철에 앉아있는 이 존재를 그냥 생각이나 해석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한번 느껴보는 겁니다. 사람들을 되게 낯선 시선으로 한번 이렇게 둘러볼 수도 있고요. 내가 이렇게 앉아서 이렇게 있는 나의 어떤 존재의 느낌, 이렇게 앉아있는 느낌, 뭐 덥거나 추운 느낌? 뭐 이런 것들, 있는 그대로 한번 마주해보는 것이지요. 접촉해보는 것이지요. 있는 이대로의 현재와. 사실은 어∼물론 우리 인생에서는 괴로움인 것처럼 해석되는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인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내 인생에 벌어질 때는, 그것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이기 때문에 등장하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나는 온전히 지금 이 순간 깨어나는 겁니다. 그것을 온전히 흡수하고 온전히 경험해주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진리와 접촉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괴로운 일이 나에게 온다는 것은 그 괴로움을 100% 괴로워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등장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 괴로움을 정면으로 내가 경험해주겠다. 지금까지는 내가 특정한 상황이 일어나면 계속 싫어서 도망치다가 특정한 사람만 보면 도망치거나. 특정한 일들이 싫어서 도망치거나. 하다못해 tv를 보다가도 특정한 사람이 나오면 기분 나쁘다고 휙 돌려버리거나.
이런 특정한 것에 대한 좋고 나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오다가 마음공부를 하기 시작한다면, 그냥 그 모든 것을 한번 경험해주어 보겠다. 좋다 나쁘다, 라고 해석하기 이전에 이 좋다 나쁘다, 라는 해석이 나오는 자리를 한번 지켜보겠다. 그래서 좋은 일이 일어날 때 그 좋은 일과 그냥 하나 되어서 살아주면 됩니다. 또 나쁜 일이 일어날 때
나쁜 일을 외면하려고 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나쁜 일속에 뛰어들어서 그 나쁜 일을, 이것이 나쁜 일이라고 내가 해석한 일이지만 그 일이 무엇인지, 이것이 무엇인지를 그냥 한번 경험해주는 것이지요.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경험되기 위해서 등장합니다. 내 앞에 등장하는 사건 사고, 사람 일들 대상 사물들, 이 모든 것들은
그것이 정확히 등장해야 될 자리에서 매순간 진리로써 등장하고 있고요. 그 속에 나라는 존재가 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 경험, 이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삶을 사는 이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괴로움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또는 즐거움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우울함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그 모든 해석을 잠시 밀어둔 채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게 이제 공부이고, 마음공부이고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랬을 때 해석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보는, 어찌 보면 뭐 연습이라면 연습이고 수행이라면 수행인데요.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 바로 명상이고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재, 지금 주어진 삶을 그대로 살아주는 것.
그렇게 하게 되었을 때 분별이 점차 잦아들게 되면서 분별너머에 실상이 드러나게 되는 순간이 올 거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끊임없이 분별하는 세계만 사니까 집에서 법당까지 오는 내내 온갖 생각 속에서 법당엘 왔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잠시 멈추어서, 지하철에서 이 원광사까지 걸어오는 동안 그냥 생각과 함께 걸어오니까, 그 생각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면서 걸어오게 되는데 잠시,
그냥 걷는 그 자체와 온전히 하나 돼 주어보는 느낌이지요. 그러면 이렇게 걸을 때 굳이 말하자면 뭐 이렇게 표현할 필요도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다리가 이렇게 움직이고 팔이 이렇게 움직일 때 그것을 그대로 느껴보는 거예요. 그대로 느껴보면 그야말로 이 뼈 마디마디, 온 몸에 있는 뼈 마디마디 하나 다 움직이면서 이게 살아있음으로서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들,
그대로 한번 느껴봐 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냥 걷는 평범한 걸음인데도 불구하고 그 걸음 자체가 하나의 명상이 됩니다. 그 걸음이 뭐랄까 이렇게 막 들뜨는 기쁨, 이런 것은 아니지만 그 걸음과 하나 되어 그냥 걷기만 할 때 그 걸음들이 어떤 묘한, 묘한 즐거움이라 할까요? 나를 어떤 근원으로 데려가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좌선하는 것이나, 그렇게 있는 그대로 걷거나,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 똑같다는 것이지요. 어제 우리가 성지순례를 갔다 왔는데, 성지순례를 가서 거기서 와∼아, 하고 하다못해 식당 앞에 피어난 허름해 보이는 꽃 한 송이를 보고도 보살님들 한 7, 8분이 카메라를 가지고가서 와∼와 하면서 보시더라고요. 우리가 여행을 떠나면 그렇게 별거 아닌 것도 크게 감동하고 감탄을 하고, 그걸 느끼고 누려보거든요.
그건데 그것은 이미 있습니다. 우리아파트 화단에도 있고 이 원광사에도 있고 푸르른 파란 하늘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것을 늘 느껴볼 수 있는 것이지요. 늘 접촉하고 늘 마주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삶을 경험하는 것. 삶을 체험하는 것. 지금 이 순간에 해석 없이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고 삶을 그대로 해석해주는 것. 그게 바로 진실과 마주하는 일이고 어찌 보면
그게 바로 신과 만나는 일이고 그게 바로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어떤 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평소에는 중생심이라고 하는 번뇌 망상 오염 생각 수많은 해석,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끊임없이 분별하면서 비교하면서 더 나은 것을 취하려고 삶을 살다가 그 다음, 그 다음 순간을 계속해서 취하려고 하거든요.
더 좋은 걸 취하고 취사간택 하는 마음으로 매순간을 살아요. 법문을 들을 때도 그냥 듣지 못하고 좋은 법문은 내가 딱 취하고 이건 이상하다 싶은 법문은 내가 버리려고 하고 저건 아니야, 저건 저 사람이 잘못됐어. 뭐 이렇게 한다든지. 좋은 거는 막 더 집착하려한다든지. 법문 들을 때 야, 이거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라고 한다든지. 뭐 집에 갈 때 빨리 집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라고 한다든지.
집에 갈 때, 법회 끝나고 집에 갈 때는 집에 도착하는 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냥 그 한발 한발이 목적이에요. 언제나 세계여행을 떠난다할지라도 세계여행을 떠나서 그 자리 도착해서 쉬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한발 한발 걷는 그 자체가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것이지요. 매순간 그 자리 있는 것이. 그렇게 되었을 때 평소에는 계속 중생심을 가지고 살다가
그렇게 생각을 내려놓았을 때 중생심, 번뇌망상 분별심이 내려놓게 되었을 때 분별심이 일어나던 그 본바탕, 분별심을 파도라고 한다면 바다, 바다, 바다. 분별심만 바다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육체, 삼라만상, 이 모든 것이 이 바다위에서 드러나고 되돌아갑니다.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자리에서 나라는 존재, 이 육신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내 느낌 감정 생각 의식도 그 자리에서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이 분별심이, 분별심이라는 오랜 습관이 멈춰지게 되었을 때, 법문이라는 것은 분별심을 멈추게 하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거거든요.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적으로 분별심을 멈추도록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얘기를 듣고, 듣고 계속 듣다 보면 맨 날 똑같은 얘기를 듣지만
이것이 자신에게 점점 이렇게 깊이 있게 다가오기 시작을 하다가, 그러나 여전이 분별을 넘어서는 무분별의 그 본래의 마음. 그 자리에 가닿지 못하니까. 그냥 분별심의 입장에서는 그냥 모르는 것이지요. 모르겠구나. 도저히 내가 알 수가 없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 한마디 한마디가, 말하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다 부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부다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있는 그대로 사실은 이대로 우리는 부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중생심을 가지고 해석을 하며 살다보니까 부처를 부처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거든요. 부처를 내식대로 해석함으로써 내식대로 해석된 대상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거든요. 여러분 제 이 몸이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몸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몸이 말을 할 수 있으면 제가 깊은 잠에 떨어져있을 때도 몸이 말하고 싶으면 말을 해야 되거든요. 제가 지금 갑자기 뭐 어떻게 되어서 죽었다. 그러더라도 몸이 있으니까 말은 해야 돼요. 말을 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때는 말을 듣지 못하거든요. 혹은 딴 데 어느 곳에 정신이 딱 집중해 있을 때는 딴 사람이 막 나를 불러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떨 땐 듣고 어떨 땐 듣지 못하잖아요. 이 몸이 듣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인연 따라 잠깐 생겼다 사라지는, 인연 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것은 생사법이라고 해서 허망한 겁니다. 진짜가 아니에요. 인연 따라 잠깐 생겼다 사라지는 걸 믿으면 안 됩니다. 누가 나한테 욕을 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았다. 이게 내 마음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저 놈이 나를 욕했고 그걸로 인해 난 상처 받았고 저 놈은 나쁜 놈이고, 이런 생각이 일어나는 거지요.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이 욕하는 말로 인해서 잠깐 인연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거거든요.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 따라 사라지는 거예요. 그 말을 내가 의미 깊게 들음으로서 비중 있게 들음으로서 상처받을 수도 있고, 그냥 상처 안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달린 일입니다, 그 상대방에 달린 일이 아니라. 이처럼 모든 것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지요. 본래 몸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 몸이 죽으면 몸은 못 움직이잖아요. 몸이 움직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몸을 이렇게 움직이고 있어요. 몸이 말을 할 수, 입이 말할 수 없습니다. 입 있다고 다 말하는 거 아니잖아요. 입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입만 벌리면 말이 나와요. 입만 벌리면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법당에 걸어오실 때 이 몸뚱이가 걸을 수 없습니다. 몸뚱이는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 몸이 저절로 걸어요. 일단 출발만 하면 어떻게, 어떻게 원광사에 도착을 해요. 운전할 때도 보면 일단 시동만 걸면 알아서 내가 운전을 합니다. 머릿속으로 딴 생각을 해도 운전은 지 혼자 알아서 잘해요.
막 전화를 하면서도 지 혼자 알아서 운전도 잘해요. 걸으면서 왼발을 내디뎌야지 오른 발을 내디뎌야지 막 계산하지 않아도 내가 오만가지 딴 생각을 하고 업무를 막 하고 있어도 다리는 지 혼자 알아서 지 할 일을 합니다. 아침에 밥을 먹을 때도 내가 지금 밥을 위에서 어디로 내리고 어디에서 소화를 시작하고 이렇게 막 애써서 막 소화를 시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지가 알아서 소화를 시켜버립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요. 숨 쉬려고 마∼악 애써야지만 숨 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숨은 저절로 일어나버려요. 숨은 내가 쉬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저절로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지요, 그죠. 이 숨을 쉬도록 만드는 놈이 있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만질 수도 없고 눈귀코혀몸뜻으로 접촉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은 아니지만,
분명히 내가 숨 쉰다, 라는 것이 숨 쉬게 하는 놈이 있다, 라는 증거지요. 내가 길을 걷고 움직이고 있다, 라는 것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어떤 놈이 있다, 라는 증거입니다. 몸이 나를 움직이게 할 수 없으니까. 제가 말을 한다, 라는 이 자체가, 여러분이 제 말을 듣고 있다, 라는 이 자체가, 바로 부처가 듣고 있는 겁니다. 그걸 보게 하는 놈, 듣게 하는 놈, 움직이게 하는 놈,
그게 바로 부처가 하는 거거든요. 말을 한다면 굳이 말을 한다면 표현을 한다면, 부처가 무엇입니까? (죽비를 치며) 이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부처가 무엇입니까? 마른 똥 막대기다. 마른 똥 막대기를 상상해버리면 그건 이미 부처와는 어긋난 것이고, 마른 똥 막대기다. 어떤 사람은 차나 한 잔 해라. 어떤 사람은 뭐 동산이 물위로 간다.
어떤 사람은 뭐 마 삼근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그 말뜻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상관이 없어요. 뭐 세수했느냐? 손이나 씻어라. 뭐 오만가지 말을 해도 상관이 없고. 단어 한마디를 해도 상관이 없고. 안 하고 움직임을 보여줘도 괜찮습니다. (죽비를 치며) 죽비를 한번 쳐도 괜찮고. 왜냐하면 그 모든 움직임을, 하나하나 움직이게 하는 당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자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자리를 말해서 선에서는 마음이라고 이름 합니다, 마음. 그 자리를 마음이라고 이름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이라고 하면 두 가지의 용법으로 쓰입니다. 첫 번째는 중생심의, 중생의 마음. 분별심도 마음이라고 불러요, 중생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중생의 마음이 등장 퇴장하는 그 자리,
당처 바탕 배경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바탕, 그것을 본래마음이라고 또 이름 합니다. 본래마음, 부처의 마음. 진여심이라고 표현을 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 마음, 마음이라고 얘기할 때, 선에서 마음이라고 얘기할 때는 중생심과 진여심을 함께 얘기를 합니다. 어떨 때는 중생심을 얘기하고, 어떨 때는 진여심을 얘기해요.
그런데 주로 선에서는 마음이라고 하면 진여심 불성 본바탕, 그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여러분이 굳이 화두를 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이 숨을 쉬고 매순간 저절로 숨은 끊이지 않고 쉬고 있거든요. 내가 얘 쓰지 않았는데 숨은 쉬어져요. 그런데 여러분이 숨을 쉰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이 의도를 가지고 숨 쉰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숨은 계속 거기서 일어나고 있어요. 이 숨을, 누가 이 숨을 쉬는 거지요. 숨이 어떻게 이렇게 쉬어지고 있지? 하고 문득 돌이킨다면 그게 바로 하나의 화두가 됩니다. 길을 걷고 있을 때 내가 다리를 이렇게 움직이고 걷고 있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움직이게 돼?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하고 문득 돌이킨다면 그게 하나의 화두가 되는 것이지요.
모든 행동 하나하나, 모든 행위 하나하나가, 전부다 하나의 부처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중생심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부처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졌어요. 그 부처를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번뇌즉보리 라고 합니다. 번뇌가 일어나는 그것이 바로 보리를 증명하고 있다. 번뇌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러니까 바다와 물결이 같은 것이듯이, 물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그대로 바다라는 것이지요. 물결자체가 그대로 바다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달마 무심론에서는 마음이 없다, 라는 이제 표현을 쓰는데요. 어∼ 45쪽에 보면,
제자가 화상에게 묻습니다.
“마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한다
“마음은 없다.”
“나에게 마음은 없으나,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며, 느낄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다.”
마음은 없다, 라는 것은 아까 제가 말한 것과 똑같습니다. 마음이라는 걸 본래마음 본래성품 자성, 본래면목을 마음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게 따로 있어서 마음이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라는 얘기를 초기불교에서부터 선에서부터 누누이 하는 얘기입니다. 무아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내가 없다, 라고 하듯이.
아까 건강과 병에 대한 비유를 들었듯이. 병이 있는 사람이 병이 나았을 때 그냥 아무 일이 없어지는 것이지. 병이라는 문제가 없어져 사라져버린 것이지. 또 다른 건강이라는 무엇을 찾을 필요는 없어요. 저절로 병만 나으면 저절로 건강해지는 것이지. 건강은 본래 천연의 성품입니다. 건강을 찾으려고 애쓰는,
그러니까 우리가 병을 치료하는 데는 있어도 건강을 찾는 뭐 이런 데는 따로 있진 않거든요. 이미 건강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뭐 심리 치료하는 데서도 보면,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그 문제를 치유해주기는 해도 또 다른 건강을 뭘 마∼악 찾도록 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물론 이제 사람들은 뭔가 막 찾아야 된다. 행복을 찾아 떠나야 된다. 뭐 이런 얘기를 하지만
본래, 본래 이미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건강이라는 걸 따로 찾을 필요가 없이 건강은 본래 타고난 천연적인 성품이고 병이 있을 때만 병을 해결해야 되는 문제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번뇌망상의 분별심으로 인해서 분별의 병, 일종의 정신병이지요. 분별의 정신적인 어떤 병에 오염되어 있다 보니까, 그 병만 치유하면 그냥 병 없이 그냥 사는 거예요.
그런데 병 없이 산다, 라고 얘기하니까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니까, 분별의 눈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니까, 중생들은.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주기위해서 깨달음이라는 게 있다. 이렇게 방편을 쓴 겁니다. 즉 의사에게 저는 나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묻는단 말이에요. 즉 그게 깨달을 수 있을 까요? 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의사가 분명히 나을 수 있습니다. 저 바깥에서 떠드는 저 사람들과 똑같아 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확신을 심어주잖아요. 그게 열반이 있습니다. 해탈이 있습니다. 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 자리가 있으니 그 자리를 반드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라고 확신을 심어주는 겁니다. 그게 고집멸도 사성제거든요. 멸성제, 괴로움이 소멸된,
완전히 사라진 자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멸성제가 멸이라는 괴로움이 모두 소멸된 근원적인 성스러운 진리의 자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렇게 방편으로 얘기를 하는 것이지. 즉 깨달은 자에게는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습니다, 깨달음의 자리에서는. 그런데 중생이 분별하기 시작하면 분별이 있으니까 무분별도 생겨요.
분별이생기면 분별에 따라 무분별도 생겨요. 분별과 무분별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분별이 있어야지만 무분별도 생기는 거예요. 즉 중생이 있어야지만 부처도 생겨난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어요. 부처에게는 부처나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누가, 나는 깨달은 부처야, 라고 얘기를 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가 아닙니다. 물론 이제 방편으로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방편으로 얘기할 순 있겠지만 부처가 없는 자리가 바로 중생이 없는 자리고. 중생이 생겨나면 부처도 생겨납니다. 그래서 부처라는 것도 하나의 망상입니다. 중생이라는 것도 하나의 망상이듯이. 중생이라는 것에 연기해서 부처가 같이 등장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중생이 사라지면 부처도 같이 사라져버려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텅 비어서, 공해서.
아무것도 남을 게 없습니다. 한 법도 얻을 법이 없다. 부처는 얻고 중생은 버리는 게 아닙니다. 취사간택하는 거지요, 그건. 불교는 취사간택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부처를 취하고 중생을 버리면 말이 되겠습니까? 부처를 취하는 것도 아니고 중생을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방편으로 그렇게 얘기했을 뿐. 결국에는 부처를 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취하지 않는, 그 어떤 한 법도 취하지 않습니다. 확연무성(廓然無聖: 모든 분별이 끊어져 텅 비어있는 상태에서는 성스러운 것이 없다)이라고 해서 이 법이라는 것은 성스러울 것조차도 없다. 확 트여서 그 어떤 것도 내세울 게 없기 때문에.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고 얻을 만한 한 법도 없기 때문에.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지혜도 없고 법도 없다.
깨달음을 얻을 것도 없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음은 없다, 라고 이제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은 없는데 나에게 마음은 없으나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다.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지 않느냐, 라고 여기지만. 그래서 이제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표현을 쓰지요. 진짜로는 공하긴 공한데 묘하게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대로 있는 건 아니다. 묘유(妙有)라는 말은 묘(妙)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대로 있는 건 아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바는 눈귀코혀몸뜻으로 감지되어야지만 있다고 느낍니다. 눈으로 보여야지만 있다고 생각하고 귀로 들려야지만 있다고 생각하고 코로 냄새 맡아야지만 있다고 생각하고 맛보아야지만 있다고 생각하고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대상이어야지만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법은 마음은 그런 방식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없다, 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 중생이 육근으로 감지할 수 있는 무언가로는 없습니다. 그런데 육근의 도구는 이 세간에서만 쓸 수 있는 도구잖아요. 그런데 불법은 세간을 넘어서는 출세간의 가르침입니다.
출세간의 시선으로서는 있다는 것이지요. 깨달음이 있다. 묘유, 묘하게 있다. 그래서 중생이 부처를 깨닫는 게 아니라, 내 중생의 마음이 부처를 깨닫는 게 아니고 내안에 본래 부처가 있다고 했잖아요. 본래 부처를 이 중생이 자꾸 이렇게 가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 깨끗한 수정구슬이 있는데 여의주가 있는데 번뇌티끌로 자꾸 가려져 있는 것이지요. 그 번뇌티끌만 사라져버리면,
이미 있던 수정구슬이, 이미 있던 맑은 거울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번뇌를, 번뇌만 사라지면 그 자리 이미, 이미 본래부처가 드러나 있다. 그래서 마음은 없으나 마음이 없다, 라고 했지만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알고 다합니다. 그걸 하는 어떤 주체가 있어가지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중생심을 가지고 다 이렇게 일으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뭐 보고 듣고 맛보고 이러 것조차 못하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이지요. 반야심경에 보면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눈귀코혀몸뜻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아∼깨달음을 얻으면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가보구나. 귀로 듣지도 못하는가보구나.
내가 바보가 되는 게 아닌가?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그러잖아요. 오온도 없구나. 몸뚱어리도 없고 느낌 감정 생각 의식 의지도 없는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지요. 다 있는데 있으면서도 없다. 있지만 있는 것은 인연 따라 잠깐 생겨났다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있음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래 마음은 없으나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도 있다. (1시간 29분 녹취)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
지금, 그 모든 것들은 지금, 이 자리에는 없습니다. 옛날에 있었다, 라는 어떤 기억이, 내 머릿속의 기억으로서만 자리 잡고 있을 뿐이지. 어쨌든 우리는 성공적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왔고 또 지금 이 자리에서 되돌아보면 그것은 하나의 한낮 어떤 기억일 뿐이거든요.
사실은 아무런 생각도 없을 때, 세상도 없거든요. 내 삶이라는 것도 없고, 나라는 것조차 없습니다. 내가 생각을 일으킬 때 온 세상이 등장하고 온 우주가 만들어지고 이 세상전체가 창조되기 시작합니다. 내 한 생각에서 세상은 만들어지고 그 한 생각이 사라질 때 세상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전부다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거든요.
우리의 관심은 늘 뭔가를 추구하고 막 박진감 넘치고 뭔가 육근을 자극하고 뭔가 세상이 나를 좀 통제해주기를 바라기도 하고요. 뭔가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 그런 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특정한 것에 대한 좋고 나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오다가 마음공부를 하기 시작한다면, 그냥 그 모든 것을 한번 경험해주어 보겠다. 좋다 나쁘다, 라고 해석하기 이전에 이 좋다 나쁘다, 라는 해석이 나오는 자리를 한번 지켜보겠다.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 바로 명상이고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재, 지금 주어진 삶을 그대로 살아주는 것. 그렇게 하게 되었을 때 분별이 점차 잦아들게 되면서
@무멍나 분별너머에 실상이 드러나게 되는 순간이 올 거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이라고 하면 두 가지의 용법으로 쓰입니다.
1. 중생심
2. 진여심
그래서 부처라는 것도 하나의 망상입니다. 중생이라는 것도 하나의 망상이듯이. 중생이라는 것에 연기해서 부처가 같이 등장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중생이 사라지면 부처도 같이 사라져버려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텅 비어서, 공해서. 아무것도 남을 게 없습니다.
묘유(妙有)라는 말은 묘(妙)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대로 있는 건 아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감사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보고 싶은데...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 명상이라는 말씀! 있는 이대로의 현재와 해석 없이 접촉해 보는 것!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