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 땅에서 맞이하는 추석연휴 마음에 이는 객수가 가을바람처럼 서늘하다. 타국에 혼자 나와 있으니 이번 추석은 가족들과 얼굴을 맞대고 밥 한끼를 나눌 수도 없고 부모님 산소에 술 한 잔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럴 때 그냥 죽치고 앉아 있으면, 거대한 도시 상하이는 오히려 좁은 감방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나서게 된 것이 '강남 명루(名楼) 탐방'이라는 주제의 2박3일 기행이다.
황학루(黄鹤楼)가 자리한 언덕배기 아래 숙소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아침 6시가 조금 지나 우창역으로 이동했다. 호텔 복도로 나서니 어제 한낮에 느꼈던 열기가 여전하다. 코로나19의 발원지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이곳 우한(武汉)은 창사, 난징, 중칭과 함께 중국 4대 화로(火爐)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1917년 3월 운행을 시작한 우창역(武昌站)은 상주인구 1,200만이 넘는 후베이성 성도 시민들을 전국 각지로 빠르게 실어나르는 고속열차 발착 기지 역할을 우창남역 등에게 내어주고 대신 느린 열차만 운행한다.
어제 상하이에서 타고 온 고속열차가 1898년 처음 대지문역(大智門站)으로 문을 열었던 한커우역(漢口站)으로 들어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고속열차라면 1시간 이내에 도달할 위에양(岳阳)까지 2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열차 시각 안내판이 광저우행 Z121호 완행열차가 "약 72분 연착(晚点約72分钟)"이라고 알린다. 열차 예약 앱을 열어 07:30발 열차표를 07:57발로 바꾸는데 성공해서 대책없이 허비할 뻔 했던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확보했다고 생각했다. 웬걸, 바꿔 예약한 열차 또한 30분 늦게 도착했는데 그나마 08:30경 출발했으니 다행이다.
호텔 기차 등 숙박과 이동수단 예약과 젠캉마 검사 시스템 등이 지역마다 다르고 변수가 많아서, 여행 내내 HA 테스트의 인바스켙(In-basket) 문제를 푸는 어드벤처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
우창发 침대열차 잉쭤(硬座) 좌석에 앉아 위에양으로 향했다. 앞 좌석에 앉은 40대 초반 남성은 구이린 출신으로 중추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북경에서 난닝을 거쳐 가족이 있는 베이하이로 가는 여정이라고 한다. 어제 21:08 북경 서역에서 출발해서 난닝에는 오늘 오후 8시쯤 도착한다고 한다고 하니 멀고도 고단한 여정이다. 옛 군복무 시절에 강릉역에서 저녁 9시경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에 청량리에 도착하는 비둘기호를 탔던 기억은 아득히 멀기만 한다.
내가 쓰고 있는 K94 마스크를 보더니 좋아 보인다고 한다. 주위에 앉은 중국인들이 쓰고 있는 마스크를 둘러보니 하나같이 두께가 얊아서 살빛이 비쳐나는 것이 품질에 차이가 확연해 보인다. 중국이나 홍콩에서 K94 짝퉁이 나돈다는 뉴스가 떠올랐는데 새삼 '그럴만한 이유가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가 좌우로 가마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듯 봉긋봉긋 작은 봉우리가 숲을 이룬 오첨산(五尖山) 삼림공원을 우측으로 휘돌아 위에양역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서서 정차했다. 앞 좌석 그 친구에게 배낭 속에 든 마스크 하나를 꺼내어 건네주고 무사한 여행을 기원하며 위에양역 플랫폼에 발을 내디뎠다.
10시 반경 위에양역 우익 출구로 빠져나와 광장 쪽으로 가서 독특한 모양새의 역사를 빠르게 눈으로 한 번 스캔하고 5km 남짓 거리의 악양루로 향한다. 택시는 시골스런 골목길을 뒤뚱대며 가로 지르고 아스팔트길을 달려 10여 분만에 우리를 악양루 주차장 도로변에 내려놓았다.
이번 출행에 '강남 명루(名楼) 기행'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지만, 기실 3대 명루 가운데 제일 큰 기대를 갖고 있던 곳은 악양루(岳阳楼)였다.
"예부터 동정호는 들어 왔었지만
이제사 그 악양루에 올라보네."
무심하게 내뱉듯 궁금증을 유발하며 시작되는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의 시 <등악양루(登岳陽樓)>의 첫 구절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먼 옛날 언젠가 한 번 악양루에 올라보리라 벼르던 시성의 마음으로 동정호 가장자리에 자리한 악양루로 발길을 옮긴다.
악양루는 손권이 형주를 놓고 유비와 다투면서 전략 요충지인 동정호(洞庭湖) 부근을 장악하기 위해 성을 축조한 뒤 군사훈련을 감독할 망루를 지은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표를 끊어 장강(长江)과 접하는 동정호 가장자리를 따라 길쭉하게 자리한 한긋진 풍경구 안으로 들어섰다. 시원스레 펼쳐져 있는 드넓은 동정호를 좌측에 끼고 당 송 원 명 청 시대별 양식을 되살려 조성해 놓은 악양루 모형을 훓어보며 악양루 쪽으로 향한다.
그 중간에 자리한 쌍공사(雙公祠)가 자리한다. 1044년 이곳 태수로 좌천하여 악양루를 중수한 등자경(藤子京)과 그 때 초청받아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지은 북송의 정치가요 문장가였던 범중엄(范仲淹, 989-1052)을 기리는 건물로 악양루의 역사와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이곳을 거쳐간 여러 인물들에 관한 소개와 함께 손권의 장수 노숙이 동정호에서 전함을 지휘하며 군사훈련을 하는 대형 그림이 인상적이다.
휘갈겨 쓴 듯한 특유의 글씨체로 모택동이 쓴 두보의 <등악양루>를 시작으로 여러 문인들의 시를 벽에 새긴 회랑을 천천히 지나갔다. 임풍각(临风阁) 옆 돌계단을 오르니 동정호를 바라보며 우뚝 선 악양루의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서둘러 발길을 옮기자 어느새 황금빛 기와를 인 3층 악양루가 눈앞으로 다가서며 천리 길을 기꺼이 달려온 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일층과 이층 날카로운 처마 꼬리가 살짝 하늘로 치켜 올랐다. 둥그스럼하게 위쪽으로 휘어져 원만해 보이는 3층 용마루를 이고 있는 소담한듯 기품있는 모습이 어서 달려가서 안기고픈 마음이 들게 한다. 누각 앞에 서서 넋을 잃은 듯 한참 동안 악양루를 올려다 보다가 안으로 들어서서 일층부터 위층으로 오르며 내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층층 계단 손잡이, 난간, 창틀, 벽면, 처마, 천장 등 세세한 부분까지 인물상, 동물, 도깨비, 사자, 봉황, 문무신, 악사 등 각종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어 한눈에도 장인이 쏟아 부은 지극한 정성을 알아챌 수 있다. 사방 둘레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난간으로 나서니 팔을 치켜 들면 처마 석가래가 손에 닿는 것이 마치 우리나라 옛 정자에 올라온 듯 마음이 편하다. 동정호 쪽을 향해 서자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이 손에 잡힐듯 지척에 다가와 있다.
도심 빌딩숲 틈에서 자신의 이름을 뽐내려는 듯 현대 건축 기술에 의지해서 다시 태어난 난창의 등왕각(滕王阁)과 우한의 황학루(黄鹤楼)는 너무 높고 크고 멀찍이 물러서야 겨우 그 전체 모습을 한 눈에 담을 수 있고 위압적인 느낌 마저 들게 했었다.
그에 반해 악양루(岳阳楼)는 도심 외곽 한적한 곳 드넓고 평온한 동정호을 바라보며 세상을 등진 처사(處士)처럼 조용히 옛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다른 누각에서 받았던 위압감 대신 언제든 찾아가서 기대고 싶은 안식처처럼 친근하고 다감한 느낌이 든다.
강남 3대 명루를 하나씩 찾아다니다 마지막으로 악양루 앞에 서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성서의 말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진정한 위대함이나 숭고함은 허장성세가 아니라 겸손과 배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동정호(洞庭湖) 남쪽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곳은 그 아름다움이 소상팔경(瀟湘八景)으로 알려져 있다. 소상팔경은 중국 남송 때부터 원 명 청대에 이르기까지 시화의 소재와 주제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고려 명종 때 유입된 후 조선 전기를 거쳐 조선 후기부터 판소리, 단가, 잡가 등 대중 문학의 여러 장르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이 '소상팔경'이 우리 땅에서도 옛 관동팔경과 단양팔경을 비롯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기 고장을 자랑하는 단골 메뉴로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팔경'의 시원인 셈이다.
두보와 이백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았던 악양루에서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는 말단 벼슬살이를 버리고 말년에 고향을 찾아 작은 배로 창장(长江) 위를 떠돌았다고 한다. 768년 57세 때 겨울 어느날 이곳에 닿아 기약할 수 없는 귀향과 불우한 시대를 비탄하며 <등악양루>를 읊었을 것이다.
<登岳陽樓>
昔聞洞庭水 今上岳陽樓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
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戎馬關山北 憑軒涕泗流
예부터 동정호는 들어 왔었지만
이제사 그 악양루에 올라보네
오와 초 땅은 동남으로 탁 트이었고,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물에 떠 있구나.
친척과 벗은 편지 한 장 없고,
늙어 병 든 몸 외로운 배로 떠돌다니.
고향 산 북녘은 아직 난리판이라,
난간에 기대어 눈물만 흘리네.
악양루를 내려서서 북측 지척에 있는 소교(小乔)의 무덤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조조의 대군을 창장(长江) 적벽에서 크게 무찌른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의 부인이다. 오우삼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에서 단신으로 적진의 조조를 찾아가서 시간을 버는 대담한 모습의 그녀를 만났었다. 그녀가 실존 인물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지만, 적벽대전 전장이 이곳 위에양과 우한 중간 쯤에 있으니 그녀 무덤이 이곳에 있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에 접한 악양루 축대 아래쪽 넓은 치마폭처럼 완만한 경사를 이룬 공간으로 내려서서 출구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많은 화물선들이 그 옛날 오나라의 군선을 대신하여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동정호 위에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 건데 없다."고 노래한 야은 선생의 싯구가 귓전에 들리는 듯 하다.
악약역 부근 중칭면관 식당에 들러 허기를 채우고 택시를 불러 고속열차가 지나가는 악양 동역으로 향했다. 시속 300km를 넘나들며 달리는 15:30 위에양발 창사행 고속열차 푸싱호(复兴号)는 30여 분이면 창사 남역에 닿을 것이다.
이곳 창사(长沙)가 고향으로 부산에 거주하는 중국인 친구에게 악양루 사진 몇 장을 보냈다. 젊은 시절 위에양 세관에서 14년간 근무했다는 그 친구의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 친구는 추석을 앞두고 둥글게 부푼 달이 휘영청 밝은 부산 앞 바다 사진으로 내게 화답해 왔다.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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