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21구간(늘재-밀재(대야산))
1. 산이름 : 청화산(970m), 조항산(951m)
2. 소재지 : 경북 문경시 · 상주시, 충북 괴산군
3. 산행 코스 : 늘재 → 2.49km → 청화산(00:30) → 3.5km → 갓바위재(02:30) → 1.07km → 조항산(03:30)
→ 1.28km → 고모치(03:50)고모령, → 2.74km → 밀재(04:50) → 1.95km → 월영대(05:50)
→ 2.34km → 대야산주차장(06:30)
4.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15.37km(6시간 30분)
5. 산행 인증 : 늘재, 청화산, 조항산, 밀재 인증
6.산행 안내 : 상주-입석버스(07:00)-늘재-산행-대야산주차장-택시-점촌-서울경부고속도착.
0.점촌숙박 : 대야주차장-문경버스 17:30 점촌-대야주차장버스 07:20.. 대야산장 : 054-572-0033
늘재-밀재 구간
늘재
늘재는 예부터 경상도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던 상주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넘던 고개였다. 인근의 우뚝 솟아오른 새재 보다 날카롭지 않고, 추풍령이나 김천의 궤방령처럼 치우치지도 않아 편하게 서울로 걸어가던 길. 늘티(재)라는 이름에는 낮고 평평하여 편하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
인근 한농복구회공동체 청화산농원 조삼수 회장이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해놓았다고 한다.
비의 뒷면은 텅 비어 있다.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수식이 없다. 다만 어지러운 나라를 태평하게 한다는 좋은 뜻만 담겼을 뿐이란다.
조선시대의 훌륭한 인문지리 학자였던 이중환(李重煥)이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금강산 남쪽에서는 으뜸가는 산수'라고 말했다고 하니 청화산과 이 일대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청화산은 빼어난 경관 뿐 아니라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복된 땅(福地)을 품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란(戰亂), 질병(疾病), 기근(飢饉) 등의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땅이다.
이른 바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하나인 땅이다. 바로 청화산 아래 마을인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가 그곳이다. 실제 그 마을은 소의 배속(牛腹洞)처럼 안온한 형상을 하고 있다.
시루봉, 청화산, 문장대, 천왕봉, 형제봉, 갈령, 도장산으로 이어지는 둥근 산줄기 안의 분지에서 바깥세상으로 트인 곳은 시루봉과 도장산 사이 용유리의 병천 뿐이다. 참으로 우복동의 형세라 아니할 수 없다.
청화산(靑華山) /충청북도 괴산군,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북도 문경시
충청북도 괴산군의 청천면 삼송리와 경북 상주시 화북면, 문경시 농암면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고도:988m). 동북쪽으로 조항산과 이어져 있다.
화양구곡으로 유명한 화양천이 이곳에서 발원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청화산에 대해 "뒤에 내외의 선유동을 두고 앞에는 용유동에 임해 있다.
앞뒷면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구한말지형도』에는 이 산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지형도』에서는 청화산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괴산군에서 꼽은 괴산 명산 35에 속한다.
이 청화산과 북쪽의 조항산 사이에 갓바위재라고 불리는 가파른 재가 있는데, 청천면 삼송리에서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조항산(鳥項山)/ 정상에 오르면 남쪽으로 속리산 일대와 청화산, 북쪽으로 둔덕산, 희양산, 대야산이 보인다.
충청북도 괴산군의 청천면 삼송리와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의 경계가 되는 산이다(고도:951m). 소백산맥 줄기에 속하는 산으로 북으로 대야산과 남으로 청화산과 이어져 있다.
이 조항산과 청화산 사이에 난 남쪽의 가파른 고개가 갓바위재로서, 청천면 삼송리에서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괴산의 명산 35곳 중의 하나이다.
조항산(鳥項山)이란 이름은, 봉우리가 새의 목처럼 생겨서 붙여졌다고 한다. 『구한말지형도』에는 이 산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지형도』에서는 현재와 같은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마을
비로 인해 초록에 묻힌 궁기리는 그 옛날 견훤을 품었던 곳이다.
문경의 가은은 후백제 견훤의 고향이다. 견훤은 본래 성은 이씨로서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임.
궁기리는 견훤이 활을 쏘며 무예를 닦던 곳이고 아차마을에는 견훤유적지가 있다.
견훤왕의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로 농민출신 장군이었다. 892년(신라 진성여왕 6)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견훤왕은 광주(光州) 등 여러 성을 공격하고, 900년(효공왕 4) 전주에 도읍을 정해 후백제를 세웠다.
문경시는 가은읍 갈전리 금하굴에 전해오는 전설에 근거해 2002년 숭위전(崇威殿)을 짓고 매년 4월10일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또한 시는 농암면 궁기리의 조항산 궁터, 연천리의 말바우, 상주시 화북면의 견훤산성 등 견훤왕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단순한 전설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끌어져서 상처를 입은 바위산.....
상주에서 입석가는 버스를 타고 늘재에 내려서 유난스럽게도 더웠던 올 여름의 기온은 한풀 꺾이고, 마루금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미 가을을 담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 무더웠던 긴긴 날들의 아픔을 기억의 저편에 남겨두고 한적한 늘재에서 출발한다. . 어제 문장대~늘재까지 기분 좋게 산행을 끝내고 소주까지 한 잔을 했으니 행복한 피로감에 어떻게 잠이든지 몰랐다.
백두대간의 표지석에서 성황당유래비를 지나 산으로 들어간다.
늘재에서 청화산까지는 계속되는 오름길을 가는 중에 정국기원단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해놓았다고 하니 탓할 일은 아니나 왠지 모르게 생뚱맞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국기원단에서 보면 발아래엔 평화로운 화북마을과 운무에 휩싸인 문장대와 관음봉이 춤을 추듯 이리저리 흘러간다.
아마도 이런 모습으로 인해 조선시대의 훌륭한 인문지리 학자였던 이중환(李重煥)이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금강산 남쪽에서는 으뜸가는 산수'라고 말했다고 하니 청화산과 이 일대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정국기원단에서 고도를 높이는 중에 험한 곳에는 어김없이 로프를 설치하여 산행을 쉽게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청화산으로 가는 길은 계속되는 된비알이라 힘든 것도 있지만 더욱 힘든 것은 나무에서 풀숲에서 머금고 있던 이슬을 맞으며 정상에 가까워지자 길은 순해진다.
나무 곁에는 돌탑이 차곡차곡 정성스레 쌓여 있고, 이제 가을로 가까이 가는지 점차 나뭇잎들은 가을의 색을 띠기 시작한다.
어제의 세찬 바람으로 견디지 못한 나무들은 자신의 분신들을 산길에 버려 나뭇잎이 수북하여 나의 발에 밟힌다. 뜨거운 열정으로 살아왔을 나무들도 점차 제 살기에 바쁜가 보다.
그렇게 불같은 뜨거움을 견디며 열정적으로 살아왔던 대간을 지켰던 나무의 삶을 뒤로 하고 잠시 후에 청화산에 올랐다.
커다란 바위 위에 서있는 정상석은 단정한 모습으로, 오목하게 파인 청화산이라는 글씨도 파란색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다. 맑고 푸른 산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청화산을 지나 조항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불같은 더위로 숨쉬기조차도 힘들게 하더니 이제 가을로 들어가는 계절의 윤회성 앞에 선 청화산도 고개를 숙인다. 시린 듯 맑은 모습을 한 청화산을 떠나 시루봉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급하게 고도를 내리면서 산행을 진행한다.
잠시 시야가 열린 바위에 오르면 신록으로 물든 산을 너울거리는 구름이 괴산 쪽에서 뭉게뭉게 하늘 높이 피어올라 병풍처럼 산을 둘러친다. 여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드려 더욱 커진 참나무 잎파리가 비구름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린다.
지금 내가 걷는 대간이 바로 충북과 경북의 경계지점이라 충북 괴산은 안개로 인해 조망이 없으나 반대로 경북 문경은 비로 인해 초록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특히, 능선 아래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마을이 잘 조망된다.
그 옛날견훤이 큰 꿈을 품었던 곳이라 더욱 신비롭게 보인다. 잠시 후에 청천면 삼송리에서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갓바위재를 지나니 안개 속에 조항산의 모습이 실루엣처럼 보인다.
새벽에 일기예보는 경북은 비, 충북은 흐림이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지 갬→는개→이슬비가 순환하듯 계속된다. 조항산이 가까워지면서 암봉들이 나타난다.
바위는 무지 미끄럽고 등산화 역시나 접지력(接地力)이 떨어지니 바위만 만나면 조심하느라산행속도는 갑자기 떨어진다. 둘이 걷는 대간길이라 다치면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길이 없기에 조심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니 조심해서 조항산 정상에 올랐다.
조항산에서 대간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은 산그리메를 그리며 희양산으로 달려가고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 지대가 바로 조항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내려보면 아쉬운 것은 마귀할멈통시바위갈림봉인 동쪽의 문경 둔덕산과 갈라지는 해발 889m 무명봉 좌우로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석재(石材)를 캐내던 광산이 산을 마구 허물다가 중단이 된 고모치 광산이 보인다.
건축시장에서 ‘문경석’이라 불리며 중국산 석재에 비해 비싸게 거래되었던 대리석을 채굴하던 현장이다. 지금은 모두 폐광이 되었지만 한번 허물어진 산은 복원이 되지 못한 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을 참으로 아픈 상처다. 지나온 금산이나 산 전체가 사라져 버린 자병산과 함께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훼손지로 알려져 있다.
조항산에서 고모치로 내려서는 길은 내림길이라 큰 어려움이 없으나 큰 바위산의 내림길에 뒷쪽은 밧줄이 있고 앞쪽은 어려움이 없을 듯하여 앞쪽 바위길을 택하여 마지막 바위위에서 머뭇거리다가 발이 미끄러져서 그만 엉덩 방아를 찧으며 미끄러졌다. 아차 하는 순간에 미끌어지면서 오른팔이 나무에 걸리면서 옆으로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팔과 다리에 문제가 없음을 알고 일어섰으나 팔 겨드랑이에 상처와 무릎에 상처를 입었다.
일어서서 걸어보니 산행에는 큰 문제는 없으나 도저히 계속 산행이 어려울듯하여 고통을 참으며 고도를 계속하여 높인 끝에 둔덕산갈림봉인 889m봉에 닿았다. 889m봉에서 하늘을 보니 가슴 시리도록 맑고 산줄기는 청청했다.
푸르른 산은 깊어지고 깊은 산줄기는 뚜렷했다. 모든 것이 분명하게 제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맑은 산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조항산과 청화산은 벌써 저 멀리에 있고, 숲 사이로 언뜻언뜻 대야산이 보이는가 싶더니 밀재에 도착했다.힘든 몸을 추수리고 억지로 대야산 주차장으로 향했다.
계곡에는 많은 물은 없으나 설악산 선녀탕과 비슷한 바위 웅덩이가 연이어 있어 월영대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겨우 계곡을 내려와 수련원쪽에서 가은택시를 타고 점촌으로 와서 급히 서울로 올라와서 아내에게 볼 면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