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상록수
초등학생 시절
그 무렵에 읽었던 책 속 아주 먼 옛날 그 기억들을 떠올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는 곧
기록해야 기억되는 일기장 속 기록들에 근거한 부분적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몇몇 책들은 성인이 되어 다시 한 번 읽었던 만보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2편 이광수 흙에 파묻혀 지낸 여름방학을 보내고 ~ 그해 겨울방학 때 큰집에 또 내려가 계절적 요인과 맞물린 따뜻한 구들장에 배를 깔고 ‘무아지경’ 책 속에 점점 빠져들었다.
역시 계속 된 이광수 대표작
유정 + 무정을 한아름 마음에 담은 후 ~ 심훈의 상록수를 읽게 됐다.
상록수 또한
흙에서 그려진 시대적 배경의 농촌계몽사업의 줄거리로 배워서 알아야 살 수 있다는 농촌계몽운동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에 온 힘을 기울이는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의 젊은 동지적 사랑이야기가 지금도 가슴 깊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소설 속 죽음을 맞는
주인공 채영신 그녀의 삶은 기독교적 휴머니즘 정신에 바탕을 둔 희생정신으로 죽음 그것은 곧 고귀한 사랑이었다.
당시 책 속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에
고개를 갸우뚱했으며,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가 없듯이 내 마음속엔 오직 당신뿐….” 이라는 문장을 접하고 그냥 멍했던….
어쩜 저렇게 아름답게 쓸 수 있을까? 이건 밑줄 쫙 ~ 한동안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 부 록 ▼
상록수(常綠樹)이 작품은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한 축으로 삼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 지식인들의 모습과 당시 농촌의 실상을 그리고 있다.
심훈의 「상록수」는
1930년대 발표된 다른 작품들 ~
이광수의 「흙」 (1932)
김유정의 「봄봄」 (1935)
이태준의 「농군」 (1939)
등과 함께 농민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심훈 선생의 필경사 ▼
만보가 수차례 찾아간
심훈 선생의 당진 필경사(唐津 筆耕舍)는 충남 당진군 송악읍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이다. 1997년 12월 23일 충남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동백이와 함께 찾았던
필경사 심훈 기념관
필경사는
심훈(1901~1936) 선생이
1932년 서울에서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당진 부곡리로 내려와 작품활동을 하던 중 1934년에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다.
'필경'은
심훈 선생의 1930년 7월 작품으로 조선인들의 마음을 붓으로 논~밭을 일구듯 표현하고자 하는 심훈의 의지와 함께 자신의 집을 필경사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필경사 내부에는 심훈 선생이 읽었던 책들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고 등불과 옷가지, 부엌의 아궁이, 화장실까지 당시의 모습을 재연해 놓았다.
심훈 선생은
민족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지닌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필경사에서 1635년 농촌 계몽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상록수」를 집필하였다.
▼ 안산 상록수역의 유래 ▼
만보가 직접 찾아간
상록수역
심훈의 소설 상록수(常綠樹)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최용신(崔容信) 선생의 얼이 살아 쉼쉬는 곳이다.
최용신(1909-1935) 선생은
협성여자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 후 농촌운동에 뜻을 두고 1931년 10월 수원군 반월면 천곡리 샘골마을(現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천곡강습소를 세우고 야학을 하며 농촌사람들의 문맹을 퇴치하는데 앞장을 섰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상황에도 불구하고 최용신은 이에 굴하지 않는 의지로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교육에 힘썼으며, 이러한 선생의 농촌계몽운동에 샘골예배당(現 샘골교회)은 훌륭한 거점이 되어주었다.
최용신은
항일운동과 농촌계몽운동에 청춘을 바쳐 헌신하였으며 불과 26세의 나이로 불꽃 같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최용신의 묘는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었으며 당시의 강습소가 있었던 현 본오동 879-4 번지에 선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7년 10월에 <최용신기념관>이 건립되어 1995년 8월에 추서된 건국훈장 애족장을 비롯한 최용신의 얼이 서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3편 -끝-
다음에 이어집니다
만보(漫步)
석(昔)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