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면 산이 생각보다 위험합니다. 위험한 요소들이 참 많은데 쌍살
벌이라는 게 있어요. 이게 제일 많이 만나는 벌이고 이거보다 위험한 게 말벌이에요.
또 더 위험한 거는 독사들이죠.
모사라든지 유혈목이라든지 칠점사라든지 여러 가지 이제 독사들이 있고요.
또 이거 못지않게 치명적인 게 살인 진드기예요. 살인 진드기에 물려서 감염이 되면 치사율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그다음에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게 멧돼지입니다.
이 멧돼지는 이렇게 맞부딪혀서 싸우게 되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멧돼지 아주 천하 장사이기 때문에
이만기이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해요. 그래서 이런 여러 가지 위험과 마주치게 됩니다.
근데 산만 그런 게 아니죠. 우리가 사는 도시에도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를 비롯해가지고 예상치 못한 땅 꺼짐 같은 것도 막 발생하잖아요.
베레벨 일들이 다 일어난다고요. 여러 가지 위험들이 존재를 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에도 여러 가지 영적인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어요.
그것은 질병이나 고통사고나 천재지변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런 것들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것들인 것입니다.
더 무서운 위험이죠. 잘못하면 자기 영혼을 잃어버릴 수 있어요.
잘못하면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고 지옥에서 영혼을 보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감옥도 아니고 북한도 아니고 그죠 깡패 소굴에 인신매매해서 갇혀 있는 것도 아니고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야 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가장 무서운 위험이에요.
그런데 본문에 보면 우리에게 그중에 몇 가지 위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 형태의 위험한 신앙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굉장히 위험한 신앙이 있다. 굉장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위험스럽게 신앙생활하는 그 세 가지 형태의 신앙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로는 지적으로 위험한 신앙입니다.
지적으로 위험한 신앙 유대교가 단체로 그랬잖아요.
이 백성이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다.
첫째로는 지적으로 위험한 신앙 둘째로는 감정적으로 위험한 신앙이 마음이 완화하고 강퍅한 거예요.
둔하고 감정적으로 위험한 신앙 셋째로는 의지적으로 위험한 신앙 기도도 열심히 하고 말씀도 잘 알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결국 말씀대로 순종을 안 하는 거 이 세 가지 형태의 위험한 신앙이 있어요.
그래 교회 안에를 보게 되면 이런 위험을 외면하고 위험천만하게 신앙생활하는 목회자들, 또 위험천만하게 신앙생활하는 신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굉장히 많아요.
약 80% 정도가 그렇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말했을 정도로 굉장히 많아요.
하나님 은혜로 우리 교회는 상대적으로 그런 숫자가 적지만 우리 교회도 없는 곳이 아니죠.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우리 교회에도 제법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깨워서 위험한 신앙을 버리고 안전한 신앙으로 옮겨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전한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 소원은 아주 간단해요.
저와 가족이 천국에 가는 거 나하고 가족들이 천국에 가는 거 또 우리 교회 모든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저 무서운 지옥을 피하고 피하고 천국에 가는 거 그다음에 우리나라와 전 세계에 수많은 영혼들이 할 수 있는 한 한 사람이라도 더 저 무서운 지옥 배를 피하고 천국에 가는 거 저의 소원은 이것입니다.
제가 사는 이유도 이것이고 여러분 저의 소원을 말하면 이렇게 정리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 가지 위험에 대해서 경고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오늘은 시간 관계상 첫 번째 위험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릴 건데요.
첫째로 한번 따라 해 보겠습니다. 지적인 위험 교리를 진리로 착각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신앙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지는 게 교리를 진리로 착각할 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여러분 교리를 진리로 착각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신앙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다르게 알아야 될 가장 중요한 진리가 있어요.
가장 중요한 진리가 있는데 그게 바로 여러분 구원론이죠.
여러분 잘 아시죠?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보면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제일 먼저 알아야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에요.
그냥 교훈이나 받는 게 아니에요. 책망이나 받는 게 아니에요.
의로 교육받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제일 먼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정확하게 알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어렸을 때부터 초등학생 때부터 이 구원론에 꽂혔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평생을 지금까지 수십 년이 넘도록 구원론에 꽂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데 구원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한번 따라 해볼까요?
구원받았다고 다가 아니다. 구원받은 거로 끝난 게 아니다.
구원받았다고 다가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다 천국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버림을 받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구원받는 사람이 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저는 그것을 수십 년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세 가지로 깨달았습니다.
세세한 깨달음들은 많이 있지만 큰 흐름을 볼 때 단계적으로는 세 가지로 깨달았는데 첫째로 저는 신학교 1학년 때 세 가지 시제의 구원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하게 됐어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주목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과거 시제로는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 받으면 난 구원받았어. 의롭다 함 받았어. 거듭났어.
여러분 이 과거에 이루어진 거로만 다 여러분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니까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그래서 과거 시제죠.
구원을 받았으니 빌립보서 2장 12절 본문이죠.
너희 구원을 이루라 현재 시제죠. 디모데후서 4장 18절에 보면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이건 미래의 시대죠.
구원을 과거 시절에만 사용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과거에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거로 모든 것이 끝나고 완성된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시대를 다 동원해야만 구원 전체를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보다 구원은 더 광범위한 것이고 여러분 구원은 여러분 훨씬 더 큰 것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신학교 1학년 때 제가 여기에 이 세 가지 시제에 이제 관심이 꽂혔어요.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인 수 년 전에 제가 읽은 것인데요.
에페프 브루스는 몇몇 세계적인 쟁쟁한 신학자들과 함께 ivp 성경 난제 주석이라는 두꺼운 책을 썼어요.
거기 읽어보니까는 이런 내용이 기록돼 있더라고요.
어떻게 기록돼 있냐면 사실 신약 성경은 때때로 구원을 과거 시대로 이야기한다.
때때로 그래서 우리는 그게 많은 사람들이 전부인지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구원을 과거 시대로 때때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구원을 현재의 과정, 현재의 과정이나 미래의 사건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흔하다.
훨씬 더 많다.
여러분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에요. 또한 여러분 김세윤 박사님은 고린도전서를 강의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사랑하는 우리는 구원의 첫 열매를 받고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신약 성경에는 구원과 관련해서 세 가지 시제를 사용합니다.
과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미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구원을 받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구원을 받아가고 있다.
이미 받은 구원은 첫 열매로서 장차 받을 완성된 구원에 대한 보증금입니다.
그러나 이 보증금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구원의 관계에 서 있을 때만 효력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 받은 데서 서 있어야 돼요. 실족 그러잖아요.
넘어지면 안 돼요. 실종하면 안 되면 넘어지면 안 돼.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넘어지면 안 돼 거기 서 있어야 돼요.
이거를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참포도나무의 비유에 좀 이렇게 대입을 시켜보면 주 안에 거하라.
이거 내가 예수님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어요.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어요. 근데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고 다 된 게 아니라 계속 거기 거해야 돼.
주 안에 거해야 돼. 그러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렇지 않으면 찍어서 불에 던지운다 그러면 지옥에 던져진다는 얘기죠.
이게 굉장히 그래서 중요한 지적입니다. 이것이 신학교 1학년 때 제가 구원의 세 가지 시제에 대해서 특별히 주목하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던 이유였던 것이에요.
참고로 ivp 성경 단재 주석에 나오는 구원을 현재의 과정으로 표현한 성경 구절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린도전서 1장 18절인데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구원을 받으니 아니에요.
구원을 받을 일도 아니에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우리는 지금도 구원을 받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거예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또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 보니까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이래서 여기서도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이렇게 말했죠.
정말로 구원을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 시대로 표현을 했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구원을 세 가지 시대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죠. 과거가 없는데 어떻게 현재가 있어요?
현재가 없으면 미래가 없죠. 여러분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거 중생이 없으면 성화가 없는 거예요. 중생이 없으면 성화가 없고 성화가 없으면 영화가 없는 거예요.
영화는 궁극적인 구원 천국에 들어가는 거 말하잖아요.
여러분 성화가 없으면 영화가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히브리서 제자가 뭐라고 말했느냐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보니까 여러분 잘 아는 구절인데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래서 구원의 서정으로 불리우는 칭의 성화 영화 혹은 중생 성화 영화 구원의 서정이라고 그랬는데 이 구원의 서정으로 불리는 이 세 가지는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같은 거예요.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천국에 가려고 그러면 첫 번째 것만 필요한 게 아니라는 얘기죠.
천국에 가려고 그러면 세 가지가 다 필요하다는 거예요.
이게 다 필요한 거예요. 구원받는 데 천국 들어가는 데 그래서 다 구원이라고 부르는 거 칭의만 구원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성화와 영화까지 다 구원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가 돼야 천국에 가는 거 이거는 온전한 사람만 천국 간다는 게 아니에요.
수준이 높은 사람만 천국 간다는 게 아니에요. 어린 갓난 아이로 태어났는데 거듭남으로써 자라가야 된다는 거예요.
성도가 성도라는 게 뭐냐 거룩한 물이라는 거거든요.
그럼 거룩하다는 게 뭐냐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과 구별됐다는 거예요. 거듭난 사람도 완전 성화되고 예수님 같고 천사 같지는 않아도 세상 사람과 구별이 됩니다.
믿습니까? 이제 신령한 젖을 맞으면서 구원에 이르도록 계속 자라갑니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완전하지 않지만 세상 사람과 분명히 다른 거예요.
세상은 어둠인데 이 사람들은 분명히 빛인 것이에요.
이 사람들은 분명히 부족해도 소금인 것이에요.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거예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 여러분 그 의미가 뭔지 분명히 아시겠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거룩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근데 그것은 완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거야.
정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드리고 여러분 불완전하지만 주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실제로 여러분 주의 말씀대로 일정 수준 이상 살아가는 것이 쉽게 말하는 대로 습관적인 자가 없는 상태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서 있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실족한 것이에요.
넘어지는 것이에요. 여러분 자신이 지금 서 있는지 자신이 지금 넘어져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서 있는 자만 천국에 가는 거예요.
그 믿음에 굳게 서 있는 사람 그 서 있는 자리가 뭐예요?
예수님 아니에요? 예수님 안 내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 거해?
예수님을 인공 가구조로 모셔드릴 때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거야.
예수님의 권위에 내가 복종할 때 예수님의 말씀에 내가 순종할 때 믿습니까?
부족해도 순종하고 잘못하면 자백하고 회개하고 다시 오뚜기처럼 순종하고 이 순종하는 기조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 순종하는 기조를 잃어버리면 안 돼요. 예수님 안에 서 있어야 돼요.
예수님 안에 서 있는 사람만 천국에 가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들은 과연 예수님 안에 지금 서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교회에 다니지만 실족해 있는 건 아닌지 사역을 하고 혹은 목회자지만 실족해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봐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저는 목회를 하면서 신학자들을 통해서 칭의의 임의의 칭의와 아직의 칭의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설명해 드린 구원과 마찬가지로 칭의에 대해서 임의의 칭의만 생각해요.
그러나 학자들을 통해서 밝혀 드러나는 것처럼 칭의에는 과거에 받은 임의의 칭의와 미래에 받아야 될 아직의 칭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걸 뜻하죠.
여러분 저는 그것을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를 설교할 때 의에 대한 세 가지 성경 구절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드렸어요.
그거를 다시 요약해서 나눌 필요를 느끼는데 첫째로 따라 해볼까요?
의의 열매 로마서 5장 17절에 보니까는 다 시간 관계상 의 의 의의 선물이죠.
제가 조금 전에 열매라고 그랬나요? 나이가 들면요.
생각도 하고 말도 안 하 방언 같아요. 생각 들어 그게 이제 노인들의 방언이다.
다시 따라가겠습니다. 의의 선물 예 로마서 5장 17절에 보면 의의 선물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의의 선물이 뭐냐?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법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거예요.
법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거 믿습니까? 우리는 의롭지 않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 거 이게 의의 선물이에요.
두 번째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의의 열매.
빌립보서 1장 11절에 보면 의의 열매라는 말이 나오는데 층인은 의의 선물을 받은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에요.
그 뒤 칭의가 된 사람들은 의의 열매를 맺어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 의의 열매라는 것은 칭의의 현재적인 측면이 칭의 현재적인 측면 이것은 이미 얻은 칭의의 은혜 가운데 계속 서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의의 열매를 그다음에 완전 성화는 아니라도 많게든 적게든 습관적인 자가 없이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예수님 안에 있는 거야.
내가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여러분 실족하지 않고 서 있는 거예요.
여러분 믿습니까? 그래야 여러분 천국에 갈 수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에서 전부 유월절 어린 양으로 다 의롭다 함을 받았어요.
다 구원을 받았어요. 근데 광야에서 다수가 멸망했어요.
왜냐하면 악을 즐겨했기 때문에 멸망했어요. 우상숭배하다가 음행하다가 주를 시험하다가 원망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 엎드려져서 멸망했어요.
서 있지를 못했던 거예요.
구원받은 그 안에 그 안에 거하지를 못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제로 우리의 거울로 기록이 되었다 그랬어요.
이게 구약 얘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근데 많은 칼빈주의 목사들이 이걸 남의 일로 생각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다.
그럼 그게 남의 일이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만 우리는 아나 안 그래 이건 성경을 완전히 제대로 못 보는 거예요.
교리 때문에 성경을 보는 눈이 먼 맹인들인 거예요.
남의 일이 아니라 그것이 여러분 교회의 일인 것이에요.
그것이 여러분 우리 신자들이 우리의 일인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의의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교회 왔다 갔다 거리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천국 가게 지 천만해요.
너희는 그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그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심지어 선지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님이 직접 반복해서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삶에서 의의 열매를 구체적으로 맺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 따라가겠습니다. 의의 소망 갈라디아서 5장 5절에 나오는 얘기인데요.
의의 소망은 우리가 미래의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믿을 때 말고 심판석에서 죽고 난 다음에 의롭다 함을 받는 거 이것은 칭의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임의의 증인을 받은 자가 자동적으로 심판석에서 아직의 증인을 받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서 있는 사람만 믿음에 서 있는 사람,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만 의의 열매를 맺는 사람만 여러분 이런 궁극적인 칭의를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이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목표가 분명해야 돼요. 이 궁극적인 구원을 받는 것이 우리 목표가 돼야 돼요.
믿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목표가 뭐예요? 합격하는 거예요.
원하는 상대하고 결혼하는 거예요.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거예요.
승진입니까? 아니면 성공입니까? 윤기를 얻는 것입니까?
무엇입니까? 다 헛것입니다. 성공해도 실패해요.
성공해도 늙어 성공해도 죽어 죽을 때는 우리에게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다 내놓고 가요. 여러분 부자들이 신기루지 그 사람들이 진짜 부자가 아닙니다.
남의 돈을 40년, 50년 동안 보관하고 있다가 땡전 한 벌 없이 가서 지옥불에 떨어지는 게 부자들이에요.
그게 재벌이에요. 그게 재벌 재벌 총수 부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아프리카 성교 언급하려면 몰라도 여러분 아프리카 성경 구하려면 몰라도 여러분 재벌 총수 부르고 갈 거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목적이 다른 것이 되면 안 되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뭐예요?
아직의 칭의를 받는 거, 궁극적인 구원을 받는 거 버림받아 지옥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는 거 바울의 목표는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것을 목표로 해서 평생을 달려갔다고 여러분 이런 다름질을 하는 사람이 신자인 것이에요.
이런 다름질을 하는 것이 신앙인 것이에요. 여러분 여러분들 이런 다람질을 하고 있느냐고요.
아니 목표 자체가 다른 목표면 다람질은커녕 빠꾸하고 있는 거야.
이건 바꾸고 빠꾸 알죠 이거 빠꾸하고 있는 거 여러분 바울처럼 평생 변함없이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위해서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죽고 나면 남는 것이 그거밖에 없어요. 죽고 나면 남는 것이 믿음밖에 없습니다.
참된 믿음.
죽고 나면 남는 것이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죽고 나면 남는 것이 천국밖에 없습니다.
죽고 나면 남는 것이 천국의 상극밖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거를 추구해야 된다는 거예요.
인생은 잠깐인데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이거를 추구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도들도 마찬가지고 목회자들도 마찬가지고 여러분 이거를 추구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거를 추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빨리 끝났나 보다. 그런데 세 번째
좀 길어요.
마지막 세 번째로 저는 야고보서 2장 심층 연구를 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와 아직의 지기뿐만 아니라 현재적인 치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권영경 교수님이 쓴 행위 없는 구원 물음표, 행위 없는 구원 그러니까 행위랑 상관없는 구원은 없다 이런 뜻입니다.
행위 없는 구원 물음표라는 책이 있어요. 아주 탁월한 책인데 그 책에서 권영경 교수님이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을 했는데 제가 한번 읽겠습니다.
기독교 복음에서 현재의 의미는 아직 선명히 해명되지 못한 회색 지대로 남아 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교회가 드러내고 있는 가장 큰 역설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현재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인데도 우리가 믿는 복음은 이 현재를 똑부러지게 해명하지 못한다.
십자가라는 과거가 우리의 삶의 기초라 믿고, 하늘나라라는 미래가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이라고 믿지만, 그 과거에서 자라나는 자라나온 우리의 현재, 그리고 그 희망으로 이어져야 할 우리의 현재는 마치 다른 그림에서 잘못 끼어든 퍼즐 조각처럼 설 자리를 찾지 못한다.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현재와 큰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우리의 복음은 과연 얼마나 말이 되는 복음일까 이게 진짜 복음일까 그런 말이 되는 복음일까?
현재의 삶을 해명하지 못하는 복음이 과연 복음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인가?
이거 진짜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많은 교회들 안에서 복음이라고 전해지는 게 이게 정말 복음인가?
이걸 정말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감사한 것은 야고보서 2장 심층 연구를 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은 현재적인 칭의가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을 했어요.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을 했습니다.
오래도록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칭의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칭의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어려서 칭이 그러면 그건 그게 그게 층인 줄 알았어요.
목회를 하면서도 상당 기간 동안 칭의하면 그런 건 줄 알았어요.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 덕에 임의의 칭의와 아직의 칭의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칭의 두 가지만 있느냐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사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세 가지 칭의가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세 가지 칭의 세 가지 종류의 칭의가 있어요. 첫 번째로는 과거적 칭입니다.
일미의 층이죠. 두 번째로는 미래적 층입니다. 아직의 층이죠.
세 번째로는 현재적 층입니다. 이 현재적 층이라는 것이 있어요.
여기서 우리는 성경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거예요 제 말을 듣고 성경에 현재적 층이라는 것이 어디 나오냐 듣도 못하는 말 내가 예수님 믿은 지 벤처인데 듣도 보도 못한 그런 말이다.
세상에 성경에 현재적 칭이라는 말이 어디냐 이렇게 강하게 반론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냐 그러면 여러분 그것이 야고보서 2장 21절이야 25절에 분명히 성경의 현재적인 칭의에 대해서 기록이 돼 있어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재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루 보건데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기 보니까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이게 거의 그죠 99세 때인가요?
아브라함의 그 아들 아니죠. 제가 착각을 했나 아무튼 더 늙었을 테니 내가 늙어서 그래서 여러분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거 나중에 편집해 주세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 돈에 바칠 때 이게 여러분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믿은 지 굉장히 여러 해가 지난 후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때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러거든요.
이게 과거입니까? 이게 미래입니까? 이게 이입니까?
이게 아직입니까? 현재입니다. 또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 행함으로 롭다운 받은 것이 아니냐 기생 라합도 소문을 듣고 그때 믿었어요.
믿음이 없었으면 이런 행동을 안 해요. 이건 믿음에 따르는 행함이에요.
그런데 소문을 듣고 믿었을 때 의롭다 안 받은 것이 아니라 이때 의롭다 안 받은 것이 아니냐 이게 뭐죠?
임의도 아니고 아직도 아니고 현재의 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도대체 현재의 층이라는 게 어디 있냐 여러분 성경에 있어요.
그런 게 성경에 있어요. 여기에 이것은 여러분 그것이 나타나 있는 것이에요.
물론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을 연구해 본 분들이라면 이 말에 모두가 동의를 할 거예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데 모든 주석이 이 구절을 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람들이 현재의 칭의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뿐이에요.
여러분 야고보는 이 구절에서 현재의 칭의를 설명했습니다.
그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것을 우리가 알려면 이 구절들을 바르게 해석해야 돼요.
근데 성경 해석이 굉장히 어렵다고 그랬죠. 그럼 왜 이 구절은 그렇게 해석하기가 어려운가?
이 구절이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가 세 가지인데요.
야곱은 이 구절에서 칭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신칭의에 반하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 받은 것이 아니냐 이렇게 말해서 어려운 거 증인의 이의신청에 믿음으로 받는 건데 칭의를 설명하면서 행함으로 받은 거 아니냐 그러니까 어려워지죠.
이해가 안 가죠. 이게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어요.
그다음에 또 그때라는 말 때문에 이제 어려운 게 아니라 멘붕이 오는 거야.
왜 그때가 예수 믿을 때가 아니기 때문에 처음 믿을 때가 아니기 때문에 아니 왜 갑자기 이삭을 제단에 들릴 때 아니 왜 왜 그때 칭의를 받는다는 거야?
이게 멘붕이 온다고요. 또한 여러분 그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 때문에 더 헷갈리는 거예요.
역시 그 시기는 임의의 층이나 아직의 층이 갈 때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 의롭다 받는다는 말 자체가 굉장히 여러분 헷갈릴 수밖에 없죠.
우리가 이 구절들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이 세 가지를 해명해야 되는 거예요.
이 세 가지를 뛰어넘어야 되는 거예요.
이 세 가지에 대한 답이 없이 설명하는 것은 그건 여러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석들이 이 세 가지에 대한 답을 못해요. 여러분 이 세 가지에 대한 답이 없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참 해석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 가지의 답이 있는 참된 해석을 해야 되는데 그게 하나님 은혜로 이미 이루어졌죠.
그것이 여러분 제가 칭의에 대해서 쓴 개신교의 아킬레스 건이 된 칭의의 교리 그 책에 아주 상세하게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듣고 여러분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그 책을 한번 정독해 보시면 굉장히 유익할 줄로 믿습니다.
아무튼 오늘은 좀 요약을 해가지고 간략하게 또 제가 정교하게 더 정교하게 다듬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 부분을 한번 해석해 보고자 하는데요. 첫째로 한번 따라 해볼까요?
첫 번째 난제 행함으로 첫 번째 난제를 행함으로 해요.
칭의를 왜 행함으로 받는다고 하지?
이것 때문에 어려운 거야 칭의를 왜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받는다고 하지 그래야 행함으로가 첫 번째 난제인데요.
우리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우직하게 오로지 성경의 문맥만 봐야 됩니다.
우직하게 오직 성경의 문맥만 봐야 돼요. 문맥에 의하면 이 단락은 야고보서 2장 14절 26절 이 전체 단락은 현재의 믿음을 다루고 있는 거예요.
증거가 뭐예요? 14절에 이렇게 기록되네. 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지금 전도하고 있나요?
그거 아니죠? 내 형제들아 이미 믿는 사람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이미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그렇죠 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믿음이 있노라 하고 불신자면 믿음이 있다는 얘기 안 하겠죠.
형제들이니까 구원받았으니까 믿는다. 믿음이 있노라 그 믿음이 있노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처럼 교회 다니고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듣고 기도도 신앙생활.
근데 행함이 없으면 예배는 참석하는데 행함이 없으면 봉사는 하는데 행함이 없으면 기도는 하는데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이 무엇이 일가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14절 말씀을 보면 이게 문맥인 거죠.
문맥을 통해서 우리는 21절에서 25절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는 거지만 14절을 보게 되면 여러분 이 단락은 현재의 믿음을 다루고 있다는 거예요.
믿습니까? 현재의 믿음 그래서 왜 행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처음 믿을 때가 아니라 그 후에 신앙생활을 할 때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 중에 누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가 누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가 누구를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나 이미 신앙생활하는 사람 중에 누구를 하나님이 지금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사람인가 이걸 다룬 것이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한 의롭다 하심은 이미나 아직이 아니라 그 사이에 현재의 체계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각각의 층위에 요구하시는 조건은 같아요.
조건은 같은데 약간 다릅니다. 조건은 같은데 약간 달라요.
먼저 사람이 임의의 칭의를 바를 때 처음 예수 믿고 구원받을 때 칭의를 바를 때 임의의 칭의를 바를 때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죠 우리가 너무 많이 배워서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렇죠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 안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 즉 바울이 로마서 6장 17절에서 마음으로 순종해서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말한 그 마음으로 순종하는 의지가 이 믿음 안에 포함이 돼 있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구주로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안에는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이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도 그래서 그걸 바울이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 그렇게 표현되는데 이거를 믿음에서 분리를 안 시켰어요.
바울의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이걸 포함해서 믿음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것이에요. 처음부터 여러분 순종하고 내가 의지하고 관계없는 구원이라는 거는 기독교 안에 존재한 적이 없다.
왜 예수님은 단순히 구원자가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임금이시기 때문에 믿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바울이 뭐라고 불렀어요?
믿음이라고 부른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는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다 받는 거야. 바로 여러분 순종할 의지를 가진 이런 믿음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라 믿습니까?
이런 믿음으로 처음부터 의롭다 함 받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임의의 칭의를 어떻게 받느냐 간단합니다.
믿음으로 받는 거예요. 그게 참 믿음이에요. 순종할 의지를 갖고 있는 십자가 보일 공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순종할 의지를 갖고 있는 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다음으로 아직의 층이 때 마지막 심판 때 받게 될 궁극적인 층이 때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습니까?
심판 날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켰는가를 보십니다.
처음엔 믿었어요. 그 믿음이 순종의 의지를 갖고 있는 참된 믿음이에요.
그래도 그 후에 믿음을 지키지 못할 수 있어요.
한 번 믿음이 영원한 믿음이면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일 거예요.
한 번 믿음이 영원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경에 보니까는 믿는 자가 배교할 수 있다고 분명히 나오죠.
1뿌리는 비에도 그렇고 믿는 자가 배교할 수 있다고 나와요.
가짜만 배교하는 거 아니에요 믿는 자도 배교할 수 있다고 나오고 배교하면 주님도 그를 부인하고 지옥에 간 다음에 분명히 나와요.
버림 받으셨다는 게 분명히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다음에 여러분 배교를 안 하더라 할지라도 평상시에 이런 생활에 신앙생활을 해도 양심을 져버려요.
믿음과 양심은 같이 가는 건데 양심을 저버리고 비양심적이 되면 그러면 여러분 그 믿음이 파손한다고 그랬어요.
이게 무서운 거예요.
한국교회의 정치 목사들과 이단 사령부들과 교단들이 너무 부정직하다 입만 열면 거짓말하고 거짓을 매고 이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모든 목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주동 세력들을 말하는 거 그 일을 하는 이건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이건 마귀의 자식들이에요. 이건 목사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거는 여러분 마귀 역사하고 있는 겁니다.
통합에서 고신에서 백석에서 예성에서 이게 마귀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이 다 마귀의 세력이라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러면 믿음은 양심하고 같이 가는 거예요.
그런데 왜 같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같이 복음 전하는 목사와 교회들을 거짓말로 이단이라고 때립니까?
왜 왜곡에서 내가 한 말이 아닌데 왜곡에서 지네 멋대로 거짓말을 지어내서 이건 마귀의 역사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이들이 천국 가겠어요 절대 천국 못 갑니다.
회개하지 않는 한 절대로 천국 갈 수 없어요.
여랑저란 말고 초신자들에 흔들리지 말고 그냥 거기서 하는 말하고 우리 설교하고 우리 책하고 비교해 누가 거짓말하고 있나 거기서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백서 사면이 통합, 사면이 백서 거기에도 그 모든 것이 객관적으로 다 드러나고 그것이 바로 여러분 그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여러분 양심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신앙생활하는 데 양심이 중요하다.
말씀을 잘 알고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 열심히 하고 그런데 비양심적이다.
하나님 자리 아닙니다. 신자 아닙니다. 목사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 아닙니다. 천국 갈 사람 아닙니다.
여러분 양심이 살아 있어야 돼요. 여러분 거짓말하지 마세요.
양심을 저버리지 마세요. 믿습니까? 바울이 내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왜 왜 부활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실 때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궁극적인 구원을 받기 위해서 범사의 양심을 따라하며 섬겼다.
목사들이 양심을 없애니까 한국 교회가 얼마나 싸가부드러지고 세상 정치인보다도 얼마나 한기총회장, 한교총회장, 총회장, 큰 교회 목사들이 냄새 똥내가 나는지를 보십시오.
여러분 신자들이 양심이 없으니까 장로나 권세라는 자들 때문에 얼마나 불신자들 앞에 서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짓밟히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비양심적인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믿습니까?
양심이 없는 사람은 목사가 아닙니다. 양심이 없는 신자도 신자가 아닙니다.
여러분 반드시 양심을 지켜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양심을 끝까지 지키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여러분 배교할 수도 있어요. 양심을 저버리므로 믿음이 파손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처음에 믿고 참된 믿음으로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심판 날 뭘 보느냐 니가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켰느냐 그걸 보신다는 거야 니가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켰느냐 너는 배교하지 않았느냐 너는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느냐 너는 처음에 가진 그 믿음을 끝까지 지금 지키고 있느냐?
바울이 내가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해서 의의 면관이 있다.
근데 나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지라 바울에게 주는 특별한 상급을 말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구원받은 자에게 주는 의의 면류관 그 의가 뭐예요?
의의 면류관 그 의가 뭐예요? 여러분 아직의 칭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받는 거 주의 나타내는 사망, 궁극적인 구원을 받는 것 그건 믿음을 지켜야 받는 겁니다.
바울이 디모데후서 4장 7절 8절에서만 인용할 시간이 없어서 말을 못해요.
여러분 믿음을 지켜야 받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여러분 여러분들을 위해서 의의 면류관이 반드시 예비가 되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버지가 여러분 임의의 증인하고 아직의 증인가 조건이 달라요.
그죠 살펴봤잖아요. 조건이 다르죠. 마찬가지로 현재의 층위에 대해 요구되는 조건도 다르다는 것이 그러면 그 조건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야고보서 1장 14절에 보이듯이 믿음이 있노라 할 뿐 아니라 행함이 있어야 되는 거야.
즉 믿음과 행함이라는 거 이해가 되십니까? 믿음이 노래할 뿐 행함이 없어야 돼.
믿음과 행함이에요. 신앙생활을 하지만 믿음이 노래하고 행함이 없으면 거짓 믿음이죠.
행함이 있어야 참된 믿음인 것이 때문에 하나님이 현재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뭘 요구하시는가 뭘 보시는가 믿음과 행함 둘 다를 요구하시고 여러분 둘 다를 보신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믿음만 보고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믿음과 믿음에서 나온 행함을 보고 의롭다 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야고보가 야고보서 2장 21절 25절에서 바로 그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야고보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고 말씀한 이유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왜 행함으로라는 말을 했는지는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죠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로 따라 해 보겠습니다.
두 번째 난제 재단에 바칠 때
야곱어은 칭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제단에 바칠 때 이것 때문에 멘붕이 온다고 그랬잖아요.
층인 데에 재단에 바칠 때 왜 그때야 믿고 한참 훈데 처음 믿을 때가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직하게 성경의 문맥만 보면 제단에 바칠 때나 그 뒤에 법은 라에 대해서 다른 길로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이 때에 대한 의문이 완전히 해결이 돼요.
이거는 너무나 분명해서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앞에서 설명해 드린 대로 방금 설명해 드린 대로 야고보는 지금 이미나 아직의 증위가 아니라 그 사이에 현재의 칭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거 살펴봤죠. 현재의 칭의를 다루고 있어요. 그래서 그 사이에 현재에 대한 예증이 필요했습니다.
현재 지위를 다루고 있는데 처음 있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안 돼 마지막에 죽고 난 다음에 심판석에서 의롭다함 받은 이 사람도 예외가 안 돼.
그건 지금 신앙생활하는 사람을 예로 들어야 돼요.
그런 예정이 필요했죠.
때문에 야고보가 어떻게 했느냐 믿고 구원받은 후 신앙생활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예로 든 거예요.
아브라함 부름 받을 때가 아니라 한참 신앙생활하고 있는 아브라함 제단에 들릴 때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 그때를 예로 든 거예요.
또 여러분 그래서 신앙 이미 믿음을 갖고 있는 랍을 예로 든 것이에요.
그러니까 재단에 드릴 때와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라는 시기가 당연한 표현이라는 거야.
조금도 이상한 것이 없다는 거예요. 책이 하면 이 미의 측이 아직겠지 여기에 사람들이 갇혀 있는 거예요.
생각이 현재의 칭의를 지금 설명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현재의 층이 도 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 앞에 게 이해가 되면 이거는 자동적으로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따라 해보겠습니다. 세 번째, 난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러분 문제는 의롭다 하심이에요. 문맥을 우직하게 해 봐도 의롭다 하심을 이해하는 거는 쉽지가 않습니다.
모두가 이것에 걸려서 넘어져요. 의롭다 하심은 처음 믿을 때 받는 것인데 왜 이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하지?
이런 의문이 들기 때문이에요.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지금 설명을 들었으니까 이제 말을 할 수 있지만 앞에 지금 말한 설명을 못 들은 사람들은 이게 도저히 답이 안 나와요.
답을 할 수가 없어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해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뭐냐?
문맥이라는 것이에요. 말이 되든 안 되든 결정적으로 중요한 거는 문맥입니다.
그러므로 문맥이 그렇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야 돼요.
그러면서 왜 이때 의롭다 하시마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고민을 하고 풀어나가는 것이 정도고 순례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문맥을 따라가야 됩니다. 성경 해석할 때 문맥을 기준으로 삼아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학자들이 단체로 그렇게 하지를 못했어요.
의롭다 하심을 라는 말에 너무 꽂혀버린 거야. 신이라는 말에 너무 꽂혀버린 거야.
그래서 문명을 무시하고 거기서 벗어났습니다. 이것이 21절이야.
25절을 바르고 정확하게 해석하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것이에요.
우리는 여러분 그 전철을 밟으면 안 되겠죠. 그러므로 다른 것은 다 이제는 잊어버리고 다른 것은 다 무시하고 문맥이 보여준 것을 그대로 우리가 밀고 나가 보면 여기서 이해가 안 되는 의롭다 하심이 도대체 뭘 말하는 것인가 그거를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알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주의 예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에 현재를 달았습니다.
맞죠? 설명 들어서 다 이해가 되시죠? 이미 아직 사이의 현재를 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칭의 역시 임의의 칭의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죠.
아직의 증인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죠. 현재적인 증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거야.
근데 임의의 증인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니까 이해가 안 되죠.
아직의 직위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세계적인 학자들이라도 이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이거를 여러분 현재의 칭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간 덥네요. 제가 틀어줄까요? 그러나 현재의 층이라니 난생 처음 듣는 말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제 설교를 들어서 그렇지 다른 교회에 가서 말해보세요.
목회자들한테 가서 신학 난생 처음 듣는 말이에요.
뭐 현재의 층이 그런 게 있어 이 난생 처음 듣는 말이에요.
그래서 당혹스럽죠. 그래서 이게 정말 맞나 의문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처음과 마지막 순간에만 신자들을 의롭다 하실까요?
처음과 마지막 순간에만 신자들은 의롭다 하실까요?
아닙니다. 그 중간에도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지 않는 신자와 의롭다 하시는 신자가 있습니다.
처음 믿을 때 의롭다 하셨다고 무조건 계속 의롭다 하심이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니죠.
그가 배교하거나 범죄하여 믿음이 파손되면 더 이상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할 수가 없어요.
때문에 때문에 참으로 처음과 마지막 때뿐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 현재에도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는 신자가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런 현재적인 의롭다 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시죠?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바로 그것을 다룬 것이에요.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한 의롭다 하심은 실제로 이미나 아직이 아니라 그 사이에 현재의 증인인 것입니다.
저는 이미와 아직뿐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년 전에 처음으로 그것을 제가 깨달았어요.
그것이 야고보서 2장 21절에 25절에 대한 저의 첫 견해였어요.
저는 그것을 토대로 해서 많은 연구를 했고 굉장히 많은 분량의 설교 원고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해석이 쉽지 않죠. 아쉽게도 그 견해가 한 번 뒤집혔어요.
그래서 아닌가 보다 그러고 원고를 다 보냈어요. 근데 나중에 더 연구하다 보니까 그게 더 뒤집혔어요.
그래서 아 그거였구나 그게 맞는 거였구나 했는데 원고가 없어요.
엄청 연구해서 엄청 싸놨는데 다 날아갔어요.
그냥 수많은 이제 기록들을 남겨놓은 것들 중에 여기저기 다 샅샅이 뒤져보니까 여러분 요약한 것만 조금 남아 있더라고.
그때 내가 깨달았던 것을 진짜 자세히 설명하거든 다 내가 지워버리고 없고 요약한 것만 이렇게 남아 있더라고요.
여러분 그 내용은 이러한데 이게 참 기가 막힌 내용이에요.
여러분들이 이걸 듣는 것만으로라도 아주 이해가 확실하게 되실 거예요.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처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15장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아브라함은 12장에서 회심했는데 왜 15장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쓰여 있지?
이 의문과 함께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항상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보시되 현재의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처음 믿을 때뿐 아니라 그 후로도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의롭다함을 받았는데, 모세는 15장 6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처럼 썼기 때문입니다.
다음 구절도 이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로마서 4장 21절로 22절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이것은 창세기 15장이 아니라 21장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햇수로 불어 햇수로 무려 14 15년 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믿음을 다루면서 그것이 의로 여겨졌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처음 믿을 때뿐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언제든 의롭다 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이것이 사실이라면 야고보서 2장 21절이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깔끔하게 풀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독창적이고 새로운 주장입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많은 증거가 있는 믿을 수 있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이미 설명해 드린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서로 다른 시기에 대한 구절들이 모두 저의 견해를 뒷받침해 줍니다.
또한 라은 정탐꾼을 다른 길로 가게 하기 전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믿었고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렇게 썼습니다. 야고보서 2장 25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역시 처음 믿을 때가 아니라 그 후인데 그때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뿐 아니라 다윗의 해외 계시를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훨씬 전에 믿고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또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구절에 의인은 처음 믿는 자가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믿고 있는 신실한 신앙인입니다.
때문에 저는 하나님이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현재의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처음 믿을 때나 마지막 심판 때뿐 아니라 언제든 믿음으로 살고 행하면 그때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면을 보다 보니까 이렇게 빨리 가는 줄 몰랐어요.
여러분 이게 얼마나 이해를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나중에 한번 들어보세요.
설명들이 기가 막힌 설명이거든요. 이게 5번, 6번, 7번 이미나 아직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의롭다 하심이라는 믿음과 행함이 따르는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증거를 한 7가지 이상을 성경에서 분명한 증거들을 막 들이댄 거거든요.
이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것이 이 외에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을 이미와 아직뿐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 현재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이거를 보여주는 더 많은 증거들이 있어요. 그 중에 몇 가지를 설명해 드리고 제가 말씀을 마치고자 하는데요.
첫째로 한번 따라해 볼까요? 처음뿐 아니라 마지막에도 의롭다 함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처음 믿을 때 어렵다 며 받았어요. 그런데도 마지막 때 아직의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처럼 의롭다 함을 처음뿐만이 아니라 마지막에도 사용할 수 있다면 여러분 그 중간은 왜 사용을 못하겠어요?
그죠? 그거 사용할 수 있다고 봐야 된다는 거예요.
두 번째로 따라가보겠습니다. 믿음은 의로 여기신 것이 곧 의롭다 함이다.
여러분 의롭다 함 의롭다 함 그게 뭐죠? 심판석에서 유죄가 아니라 무죄라고 선언해 주시는 거예요.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라고 선언해 주신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더 근본적으로 이 문자적인 의미를 파헤쳐 보면 의롭다 함이라는 게 뭐냐 성경에 보면 이 칭의에 대해서 믿음을 으로 여기셨다 기억나시죠?
믿음을 으로 여기셨다 이런 말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두 가지 표현이 있어요.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았다 두 가지 표현이 나오죠.
또 여러분 의롭다 함이 뭐예요?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이 의롭다 함이요.
그래서 믿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 거 이해되십니까?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이 의롭다 함이 그러니까 믿음을 의로 여긴다는 거하고 믿음으로 의롭다며 받았다는 거하고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같은 의미라는 것이에요.
로마서 4장 2절과 3절이 그걸 보여주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기록이 돼 있죠.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이 여기 나와 있어요.
그 뒷부분에 보면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에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하고 믿음을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거 하고 여기 겹쳐지는 거예요.
이게 동의어로 사용이 된 거예요.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여러분 중요한 점이에요. 또 같은 장에 창세기 같은 장인 창세기 같은 장에 보면 창세기 15장 6절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100세 때의 믿음도 의로 여기셨다고 쓰고 있어요.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처음 믿을 때뿐 아니라 다른 때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를 알고 있는 거예요.
알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요약을 해서 앞에 설명은 지금 보니까 설명을 하다가 이게 좀 멈춰진 것 같아요.
요약을 많이 하다 보니까 그러니까 믿음을 으로 여기셨다 믿음으로 으로 다 받았다 이게 같은 뜻이라는 거잖아요.
그 믿음을 의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 믿음일 때에도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고 마지막 때도 그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거고 그 중간에도 내가 참된 믿음을 갖고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파산하지 않고 행함이 따르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으면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이 현재에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이 가능하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해하시죠?
그 얘기를 해야 되는데 그 설명은 안 하고 요약을 많이 해서 그래 그러니까 여러분 이미나 아직뿐만 아니라 현재를 상대로 야고보서 2장이 자꾸 현재를 상대로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거 아니냐 행함으로 의롭다 말하지 않느니라 믿음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부터 함을 받았느니라 이런 말을 자꾸 쓰잖아요.
이것이 성경적으로 실제로 가능하다는 거죠. 세 번째로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현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여러분 하나님은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걸 살펴봤어요.
하나님은 믿음을 의로 여기세요 근데 언제 믿음을 믿음을 으로 여기시나요?
과거의 믿음이 아니고 미래의 믿음이 아니고 항상 현재의 믿음을 으로 여기십니다.
그러니까 현재 가중해야 되는 거야. 하나님은 항상 현재의 믿음을 보시고 그걸 의로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에요.
여러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의롭다 함을 받을 때도 전에는 안 믿었는데 그 순간 믿었기 때문에 그 현재의 믿음을 보고 의롭다 함 받은 거 아니에요?
처음 믿음이 내 경험이기 때문에 나라는 입장 현재 입장에서 봤을 때는 과거지만 과거에 의롭다 함 받는 그 순간 하나님이 실제로 보신 거는 그 현재의 믿음이었다는 거예요.
그 현재의 믿음을 보고 의롭다 하신 것이고 그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에요.
심판 날도 아니면 한 번 구원의 영원한 구원이 되겠죠.
전에 의롭다 하며 받았지만 현재 니가 그 믿음을 지켰느냐 현재 그 믿음을 니가 가지고 있느냐 여러분이 심판당해도 미래니까 미래가 아니라 여러분 그때도 사실상 현재의 믿음을 보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모두 현재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십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처음에는 믿느냐를 보시고 처음에는 믿느냐를 보시고 여러분 처음에는 믿느냐를 보시고 마지막에는 그 믿음을 지켰느냐를 보시고 또 현재는 그 믿음으로 살고 있느냐를 보세요.
결국은 다 믿음이에요. 다 믿음인데 처음에는 그냥 믿는 거로 믿음이 나타나는 거고 그 사이에는 그냥 믿음으로 행하는 걸로 그 믿음이 나타나는 거고 마지막에는 그 믿음을 지킨 것으로 짓고 갖고 있는 거로 믿음이 나타나는 거 아니에요?
전부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보시는데 약간 다르다.
약간 다르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는데 현재의 믿음을 보신다.
현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는 것이 그것이 칭이다 그 얘기입니다.
여러분 현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는 것이 그것이 의롭다 합니다.
그런데 왜 처음 믿을 때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 말을 사용하고 마지막 때에도 심판 날 우리가 의롭다 하며 팔았다 이 말을 사용하시는데 왜 현재를 상대로는 그 말씀을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편견이다 그런 얘기예요.
그건 무지고 편견이다. 기독교의 오래된 편견일 뿐이다.
야고보서 2장에 분명히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을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그런 여러분 편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아직뿐만 아니라 그 사이 현재에도 여러분 그 믿음과 행함을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마지막 네 번째 이제 거의 끝납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한번 따라 해볼까요? 성경이 이미와 아직 사이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성경이 이미와 아직 사이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누가 그런 표현을 사용했죠? 누가 그런 표현을 사용했죠?
저는 아니에요. 이런 거 여러분 누가 그런 표현을 사용했죠?
야고보죠.
이 답이 그렇게 늦게 나올 답이 아닌데 여러분 누가 그런 표현을 사용했냐면 야고보가 그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표현을 사용했죠? 그런 표현이 가능하니까 그런 표현이 정당하니까 그런 표현이 성경적으로 하자가 없고 맞는 것이니까 믿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에요. 저는 아직의 증인에 대한 간접적인 구절은 덜어 있지만 직접적인 구절은 로마서 2장 13절뿐이라고 알고 있어요.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이 아직의 증인에 대한 성경 구절을 찾아봤지만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어요.
제자를 찾을 수가 없어서요. 그런데도 모든 학자가 아직의 징위를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증인은 바꿔 말해서 구원이고 분명히 구원이 아까 그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 모든 학자들이 아직의 증인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미와 아직 사이에 믿음과 행함을 보고 의롭다 하신다는 현재의 칭의에 대한 것은 야고보서 2장에만 무려 세 번이나 나와요.
못 읽어요. 시간 때문에 21절, 24절, 25절 세 군데나 나옵니다.
또한 여러분 로마서 4장에 나오는 서로 다른 시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도 포함을 하면 그것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포함을 하면 무려 여러분 다섯 번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을 이미와 아직뿐 아니라 그 사이에 현재도 사용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여러분 지극히 성경적인 것이라는 거. 그것은 여러분 참된 아무리 생소해도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짜 진리이고 참된 진리라는 것을 믿으시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제가 설명해 드린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21절 이하 24절, 25절을 읽어보십시오.
그 세 가지 다 잊어버렸을 거예요. 그래서 오늘 제가 용감하게 설교할 수 있었어요.
믿음이 오더라고 다 잊어버렸을 거야. 야고보서 2장에 대해서 설명한 거 지금 기억을 못할 거야.
나도 다 기억을 못하거든. 설교학에서 찾아보고 이랬죠.
첫째는 이 단락은 이미 믿는 신자들에 관한 것이고,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된다.
그래서 야고보가 행함을 칭의의 조건으로 말한 것이 조금 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둘째로는 역시 이미 믿는 자들이 믿는 신자들을 다룬 것이므로 재단에 드릴 때와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라는 시기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와 아직 사이에 현재의 순종을 예로 들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이미가 아직뿐만이 아니라 그 사이 현재에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하나님은 믿음을 으로 여기시는 것이고, 그것은 처음과 마지막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현을 야고보가 사용한 것처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이건데요. 이거를 여러분 종합해 보면 한마디로 21절이에요.
25절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신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누구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여전히 의롭다고 여기시는 거, 여전히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여전히 그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가 아브라함이나 라합처럼 믿음이 있노라 할 뿐만 아니라 행함이 있는 신자들이다.
그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가 야고보서 2장 14절 이하 26절에서 하는 말이 그것이 이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야고보서 2장 21절, 25절을 읽어보면 못은 투성이고 난해했고 뒤죽박죽이었는데 신기하게 술술술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고 모순이 전혀 없어요.
무엇보다도 성경 저자가 사용한 표현을 억지로 바꿔야 될 필요가 없어요.
주석들을 보면 이해가 안 돼요. 성경을 그대로 나누고 이해가 안 되니까 이거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거 자꾸 성경 본문을 바꾼다고 우리는 성경 본문을 그대로 내놓고 이것이 여러분 자연스럽게 완전하게 이해가 되기 때문에 여러분 이것이 이 구절을 바르게 해석한 참된 해석이라는 것이 그것이 그 증거고 이것이 여러분 참된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하는데요. 구원에 대한 세 구절.
첫 번째, 이미와 아직의 증의 그다음에 제가 깨달은 은혜로 깨달은 현재의 칭의 이 세 가지가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게 뭔지 아세요?
이 세 가지가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게 있어요. 그거는 뭐냐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이겁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칼빈이 틀렸다 장로교가 틀렸다.
이해하십니까? 여러분 이 세 가지가 외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에요.
이미 신학계에서는 이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어요.
그래서 심지어 예장 합동 교단 장로교단 중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단이죠.
통합이 아니라 합동이 더 큽니다. 여러분 합동 교단의 신학교 총신대 이한수 교수님도 고린도전서 9장 27절을 주의할 때 담대하게 장로교 신학자지만 이렇게 말했어요.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은 남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스스로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시간 관계상 자세히 설명할 수 없어서 좀 아쉬운데 아무튼 본문에서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버리실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 장로교 신학자들도 이젠 상당수가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또한 여러분 한국이 나온 세계적인 신학자로 평가되고 있는 김세훈 박사님은 칭의와 성어라는 탁월한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시작 이걸 권사님이 읽을까요?
그렇다면 믿음의 시작점에 칭이 된 모든 사람들은 결국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들 중 구원에서 탈락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결론적으로 한마디로 답한다면 칭의의 현재 즉 구원의 서정의 언어로 말하자면 성화 단계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성령의 도움으로 순종하려는 기본 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은 설사 그가 예전에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칭의 즉 구원을 받았다.
한들 종말의 칭의 즉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의 탈락의 가능성을 언급하면 많은 성도들은 교회에서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고 한 번 칭이 되면 최후 심판에서 그 칭의가 자동적으로 확인된다고 믿는 것은 실은 구원파적 신앙입니다.
어이없는 일이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그게 이단적인 가르침이 그게 구원파의 가르침하고 맥이 같은 거야.
그게 구원파의 가르침하고 맥이 같은 거.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제는 장로교 신학자들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까 이한수 교수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분 장로교 신학자들도 실력 있는 신학자들은 대다수가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거.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근데 많은 교단들이 특히 장로교단들이 나서가지고 우리 교회에 대해서 무슨 짓을 저질렀어요 구원받는 사람도 버림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하니까 이단이다.
이거 자체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거야. 기독교가 장로교가 전부입니까?
감리교도 있어요. 성결교도 있어요. 구세군도 있어요.
포스케오 교단도 있어요. 순복음도 있어요. 이 교단 내 교리가 전부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오만한 결정을 통합이 내릴 수가 있습니까?
백성이 내릴 수가 있습니까? 합신이 된 오만하기 짝이 없는 거 방지하기 짝이 없는 거.
이단성은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칼빈의 가르침에는 분명히 이단성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과 다른 것이고 영혼들에게 너무 위험한 것입니다.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장로교 목사들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독이 가득한 교회입니다.
수많은 장로교 신자들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독이 가득한 여러분 그런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단들이 뭐라 그러든, 기독교 언론이 뭐라 그러든 여러분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세요.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 거를 보세요?
성경이 어느 측의 가르침이 옳다고 말하나 그거면 끝나는 거예요.
교단이 우리를 심판하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는 겁니다.
내 말이 너희를 심판할 거라고 주님의 말씀했어요.
말씀에 의해서 심판받는 겁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말씀 따라 신앙생활 해야 되고, 여러분 말씀 따라 준비해야 되는 거예요.
목사들이 괜찮다고 괜찮은 게 아니에요. 우리는 말씀이 안 괜찮으면 안 괜찮은 거고, 말씀이 위험하다면 위험한 것이고, 말씀이 잘못됐다면 잘못된 것이고 여러분 믿습니까?
말씀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거울로 교리가 아니라 설교가 아니라 각 유행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여러분 말씀을 거울로 삼아서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살펴봐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허다한 사람들이 어거스틴과 칼빈에게 속아서 한 번 구원은 영혼이라고 영원한 구원이라고 여전히 철석같이 믿고 있어요.
아니 이렇게 잘못 믿으니까 일부 진실한 사람들 빼놓고 상당수가 제 멋대로 살아갑니다.
목사도 제 멋대로 살아가고, 장로 권사 신자들이 제 멋대로 살아갑니다.
소름 끼치는 끔찍한 일이에요. 얼마나 위험한 신앙인지 몰라요.
여러분 그들이 어디에 가계세요?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영혼을 보내겠어요?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영혼을 보낼 것입니다.
7년간 많은 목사님들이 기도하고 지옥에 가서 목사들이 수두룩하게 있더라.
장로 권사들이 수두룩하게 있다다. 이게 여러분 현실이고 진실입니다.
성경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진짜이기 때문이에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닌데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고 교회에는 크게 했을지 몰라도 유명할지는 몰라도 설교는 그래서 하게 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은 목사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명한 장로와 권사와 기독교인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진짜라면 여러분 지옥에는 목사들이 수두로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성경이 진짜라면 지옥에는 신학자들이 수두룩 갈 수밖에 없고, 장로 권사 집사들이 수두룩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기독교인들이 수두룩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20년 전에 지옥에 가는 크리천이라는 책을 목자들과 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서 책을 쓰게 하고 서울의 이 교회를 세우고 지금까지 여러분 이 진리를 그 숱한 박해를 받아가면서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전해 온 것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익숙하다고 이거를 작은 거로 생각하지 마세요.
이거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거는 영생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빛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우리 앞길을 인도하는 빛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제가 경고하고 들어 첫 번째 유형의 위험한 신앙이에요.
효리를 맹신하지 말고 성경을 시금석으로 분별해서 구원받은 자도 버림 받으신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믿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위험한 신앙이 아니라 여러분의 신앙이 안전한 신앙이 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에 여러분만 안전한 신앙에서 머무르는 이기적인 자가 아니라 만나는 목사들에게 브리스다가 아굴라가 목회자인 아볼로를 가르쳤던 것처럼 만나는 목사들에게 가르치십시오.
만나는 전도사들에게 신학생들에게 만나는 장로와 권사들에게 만나는 타교회 신자들에게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지를 가르치십시오.
오늘 들은 배우 이것을 소화해서 가르치십시오. 명백히 성경적인데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명백히 성경적이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초교파적으로 목회자들이 수천 명씩 모여도 99%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동의하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 교회 수없이 몰려오지 않습니까? 몇 주 오면 200 교회가 들어옵니다.
또 몇 주 오면 또 200교회가 들어옵니다. 또 몇 주 오면 200 교회가 들어옵니다.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600 교회가 늘어납니다.
누가 하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왜 하시는 일입니까? 영혼들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영혼들을 살리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지옥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천국 가는 것을 천국 갈 수 있도록 해서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기억하고 여러분 우리는 말씀으로도 더 충만해져야 되고 치유로도 더 강력해져야 되고 중보 기도도 더 강력해져야 되고 여러분들이 복도 받아야 돼요.
믿습니까? 자기만 잘 살려고 복 받는 거 말고 여러분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서 복도 받아야 돼요.
여러분 우리 모두가 각자의 부르심대로 성령 충만하고 은사 받고 또 우리들 각자가 변화되어서 주님이 쓰시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여러분 주님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그런 소원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주여 삼창하고 풍성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아 아버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죄인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우리를 참된 진리를 들을 수 있는 참된 가르침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리고 찬양드립니다.
하나님 이 믿음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가 순종할 의지를 가지고 주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고 하나님 사랑하고 영혼 사랑하고 살기로 결단했던 그 믿음 하나님 이 믿음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주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버지 나는 지금 현재적인 믿음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 지압을 받을 수 있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 나는 지금 살고 있음 나 자신을 은밀하게 자세히 살펴보며 엄격한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에 그 거울에 비추어 나의 믿음은 참 믿음인가 나의 믿음은 참으로 성경적인 믿음 위에 섰는가 아버지 나를 살피고 돌이키며 하나님 앞에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 사랑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자비하고 극렬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 우리를 이미 의롭다 하신 그 주님께서 우리의 지금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칭하시고 영원한 그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오늘도 우리 마음을 권면하시고 다독거려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리며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다시 새롭게 하고 주님 앞에 우리가 엎드리며 나아갑니다.
아버지 주 안에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실종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좌절하지 아니하고 그 믿음에 굳게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아버지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삶에, 우리의 모든 삶의 중심에 하나님 아버지의 한평함과 거룩함을 전 며 참된 구원을 얻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앞에 행함으로 의롭다 아브라함이 믿을 때 그것을 의로 여기시 고 나이 아버지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정말 의롭게 여김을 받은 것처럼 나의 모든 언니 십자가 주님 앞에 어음과 지원을 받을 주님은 지금 나의 현재적인 믿음이 참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행함이 있는 살아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이 노라 즉시 고백하지만 참으로 그 믿음이 행함이 없다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무엇이 유익 나의 믿음이 참으로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도 나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듣게 하소서 내 안에 구하라 나도 너희 안에 구하리라.
아버지 많은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를 통하여서 하나님 얼마나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시는지, 나와 우리 가족들이 구원받기를 하나님이 얼마나 원하시는지, 우리의 삶의 목적이 분명한 궁극적인 구원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 것 내려놓고 세상의 번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된 궁극적인 구원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인자와 어미의 그 정중앙을 가르며 좁은 길 걸어가며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감사드리며 찬양 드립니다. 아버 아버지요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올라오신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드리고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아버 아버지의 원을 수 있을 때로부터 잘못된 교리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이여 우리가 참되고 바른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그 천천을 향하여 날마다 달려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이 은혜는 아버 아버지 우리가 날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고 또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아버 아버지 우리의 신앙이 바르지 과 하나님이야 바른 진리에 기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신앙들과 모든 갈비, 주의 비 진리들이 우리 안에서 완전히 제거되게 하시고 날마다 바른 믿음 속에서 현재적인 우리의 신앙을 날마다 점검하고 뒤돌아보며 하나님 성령 안에서 우리의 삶을 부자과 딸이 바로 하나님,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날마다 주님께 의롭다 하는 주님께 칭찬받고 주님께 기판을 드리는 하나님 믿음의 삶, 참된 신앙인의 삶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을 우리가 소화하게 하시고 아버 아버지의 그의 진리로 인하여 하나님이여 지금도 지옥에 끌려가고 있는 수많은 여우들에게 반드시 이 진리를 선포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으로 보여지게 하시고 하나님이 있는 자의 그 참된 신앙의 삶을 아버지 이 지혜를 통하여 주님 전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어리를 구원하시고 아버지와 날마다 믿음을 통하게 하소서 날마다 믿음이 더욱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사랑하는 믿음과 신앙으로 하나님은 나를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아버지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어 주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고 계신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우리가 끝까지 이 믿음 위에 서서 우리의 믿음을 주 앞에 이르기까지 지켜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예수 안에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말씀과 진리에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리의 인도함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내가 그 말씀과 진리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 내 마음에 경고등이 켜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돌이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회개하고 다시금 주님을 향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고 행하며 사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나를 인도하십시오. 이것이 얼마나 안전한 길인지, 이것이 얼마나 은혜의 길인지.
하나님 우리가 참으로 감사함으로 이 길을 따르고 순종하는 삶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것을 경히 여기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참으로 귀한 말씀에 대하여 경의감을 가지고 순종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열 믿는 삶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구원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내 아버지의 마음을 갖게 하셨을 지 하나님의 진리를 영혼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준비되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신 하나님, 우리가 의사 받은 대로 준비되고 성령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의사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날마다 주님의 그 성령의 삶으로 은사의 삶으로 하나님 영혼을 사랑하는 삶으로 하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들로 하나님 성장시켜 주시옵소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감사합니다.
이 내일 동행하시는 내 아버지를 감사, 하나님 사랑하느라 하나님 사랑하느라 아버지 찬양하며 감사드리며 사랑하느라 말뿐 아닌 참된 사랑을 나의 행함으로 이루어 드리는 주님 기쁘시게 하시는 하나님 그와 같은 삶을 살
아버지 진심으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한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기에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교리에 속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 진심으로 우리가 생명 되신 우리의 그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말씀만 온전히 믿을 수 있도록 주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 성령으로만 충만케 될 수 있도록 주 성령 하나님 우리에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가족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우리의 친척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대한민국의 열망에 있는 모든 영혼들은 어떠합니까?
날마다 부활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깨어날 수 있도록 주 하나님 아버지 역사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할 수 있도록 주 하나님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 앞서 깨어 있을 수 있도록 주 하나님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으로 하나님 순종으로 깨어서 아버지, 하나님이 행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를 칠 수 있도록 하나님 역사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사랑하는 가족들을 이 시간 올려드립니다.
아직 늦지 않은 우리의 가족들을 올려드립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친척들을 올려드립니다.
수많은 대한민국의 열 영혼들, 아버지 하나님의 열광이 죽어가는 영혼들, 그 영혼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명이라고 깨어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이며 그 사랑하는 영혼들을 주님 앞에 올려드리며 충부하며 나아갑니다.
깨어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한 지옥이 있고 영원한 천국이 있는 것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이상을 위하여 살아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난한 마음들 하나님 아버지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그 가난한 심령을 부어주시옵소서.
진리를 들을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길을 하나님 아버지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수 있는 그 아버지 하나님의 그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 반드시 깨어나게 하시고 지옥이 아니라 반드시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주 하나님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반드시 구원을 이루고 반드시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주 하나님 아버지 은혜 위의 은혜로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프리카 땅 가운데 하나님 그들이 교리에 물들기 전에 하나님 이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아버 아버지 계속해서 전파되게 하소서 바른 진리가 전파되게 하소서 하나님 아프리카 선교팀 가운데 함께하시고 하나는 더 진리로 무장되게 하시고 계속해서 놀라운 기적으로
하나님 능력으로 그 땅 가운데 하나님의 진리가 진짜임을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그들,
살 수 있는 방법임을 하나님 알 수 있도록 아브라함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복을 더하소서 아프리카 선교를 계속해서 감당해 낼 수 있도록 사랑하는 교회 성도들에게 복을 더하시고 아버지와 한마음으로 이 일들을 이루어 가게 하소서 선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아버지께로 나올 수 있도록 하기를 원하시는 그 뜻을, 그 소원을 우리가 품고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 은혜 위의 은혜로 복의 복으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이 참된 복음 이 리가 더 퍼져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 일하시고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허다한 머리들, 수많은 신자들이 지옥을 향하여 죽어가고 있는 이때에 이 말씀 선포됨으로 말미암아 안일한 신앙, 위험한 신앙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깨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안전한 신앙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주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거짓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지옥을 향하여 죽어가고 있어 나도 이 진리를 알지 못하였다며 얼마나 안일한 신앙에서 살고 참된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아버지의 영혼들을 살려야 되겠어.
아버지의 영혼들을 깨우게 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수많은 교회들이 깨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번 구원한 영원한 구원이 아님을 알고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게 하시고 거짓된 가르침에서 깨어나 참된 성경적인 진리 위에 그 믿음 위에 방석에 설 수 있는 신자들로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 한국 교회를 축복하시고 수많은 전 세계의 영혼들 하나님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주님이 역사하여 주옵소서 아프리카 땅의 주님이 나고 계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성경님을 더욱더 강건하게 붙잡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꿈과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즐겁의 은혜를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더 강력하게 주님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아프리카 목회자들은 성경적인 반석에 세워질 수 있도록 그들에게 참된 믿음을 주시옵소서 행함이면 사 믿음을 가지고 성도들을 바른 진리로 이끌 있는 참된 목회자들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아프리카 목회자들에게 기름 부으시고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 계속되는 아프리카 케냐 지교회 목회자 세미나들 가운데 하나님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강력하게 운행하여 주옵소서.
목회자들이 완전히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들로 아버지 일어날 수 있는 강력한 세미나가 될 있도록 성령이 그곳 가운데 일하시고 주님 준비하여 주시고 예비하여 주시고 그 집회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반드시 수많은 영혼들이 슬기로운 다시 처녀와 같이 주님의 때를 준비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 될 수 있도록 주님 은혜 사랑하는 교회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아 아버지의 강력한 부흥을 주시옵소서
서 아버지 사랑하는 교회 가운데 강력한 보응을 주시옵소서.
아프리카의 교회들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대한민국과 전 세계 열방의 힘을 사랑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소망의 영혼들이 몰려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진리가 반드시 전파될 수 있도록 아버 아버지의 은혜의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먼저 이 기를 듣고 은혜받은 우리가 아버 아버지 사랑하는 그의 기둥들이 되게 하시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다 일어날 수 있도록 아버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힘을 먼저 부어주셔서 반드시 이 진리가 열광에 퍼져가게 하시고 수많은 영혼들을 사랑하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교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시거나 온라인 등록 후 참석하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예배 후 방송 안내를 따라 오른쪽 스크린 앞으로 나오시면 환영과 함께 교회 생활에 대해 친절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출석 성도 35만 명 돌파 소식입니다. 할렐루야 지난주 전체 사랑하는 교회 35만 636명이 출석하여 출석성도 35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새 가족 양육반 36기 수료하신 분들을 모두 축하드립니다.
성도님들께서도 함께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교회 소식을 마칩니다.
이제 담임 목사님께서 나오셔서 드려진 예물 위해 축복해 주시고 축도로 주일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저도 삼위일체 설교 때문에 고민을 참 많이 했는데 지난주에 김순규 장로님이 전화를 주셨다고 그러더라고요.
이번 주 왜 안 올라오냐고 그래서 이혼자는 안 올릴 거라고 그랬더니 본인도 삼일체에 대해서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그랬었는데 이번 설교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이미 한 설교만 해도 충분하다고 뭐 그랬다고 그러는데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제가 뭐 허풍 떠는 사람은 아니고 이동기 목사님이나 다른 목사님들이 다 동의하는 것처럼 이게 정말 전혀 유례가 없는 어마어마한 내용들인데 하나님에 대한 것에 대해서 제가 심리적으로 이게 있던 얘기면은 괜찮은데 처음 있는 얘기라서 원고를 다듬거나 할 때는 전혀 비성경적인 게 없으니까 괜찮은데 설교할 때에는 이게 굉장히 또 이렇게 심리적인 부담이 크더라고요.
그래서 말씀드린 대로 이게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설교라는 걸 말한 것처럼 그래서 어떤 하나님이 성령의 사인을 내적 증거로 주시는 걸 수도 있지만 목회자들하고 토론도 많이 해봤는데 우리 목회자들 대부분의 의견은 목사님이 지금까지 철두철미하게 성경적인 설교를 지향해 왔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 이게 하나님에 대한 거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럽고 자기네들이 들어볼 때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그래서 심리적인 아무래도 심리적인 것 같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굉장히 부담감을 느끼고 그러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정확하게 어떤 건지는 아직도 저도 보류 중이고 계속 기도하고 또 조금은 이제 시간을 좀 가져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지난주에도 제가 한 기도를 하는데 두 번 이해석에 대해서 굉장히 어떤 긍정적인 감동을 두 번이라 나 지금 설교도 안 하는데 긍정적인 감동을 주시고 어젯밤에도 기도하는데 또 한 새벽 2시쯤 잤어요.
또 어떤 보완할 수 있는 더 어떤 보충적인 깨달음도 주고 그래서 좀 더 지켜봐야 되겠다.
좀 더 지켜보고 조심스럽게 이렇게 판단을 해서 하고 뭐 이건 어차피 이거고 방향은 이제 성경으로 확실히 증명되는 쪽의 설교에 주로 집중을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요 정도 할 얘기는 많은데 이 정도 얘기는 그냥 이왕 말 나온 김에 좀 해드리는 게 좋지 않나 그래서 이 정도만 좀 얘기를 해 드리고 여러분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드리고 찬송드리고 찬양드리며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찬송합니다. 찬양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어도 자기 목숨 잃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버지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린 자라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바르게 알아야 됩니다.
구원론을 바르게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른 구원론을 정립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아버지 그 바른 구원론에 입각해서 회개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거룩을 추구하고 신앙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드리고 찬송드리고 찬양드리며 영광 돌립니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열심히 있어도 지식을 쫓는 것이 아니면 아버지 유대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수가 지옥에 갈 수 있고, 기독교 안에서도 칼빈 교류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 발에 등이요 빛이 되는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거 감사드리고 찬송드리고 찬양드리며 영광을 돌립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찬양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경배합니다.
진리의 성령님 사모합니다. 진리의 성령님을 더욱 의지합니다.
우리를 더 철저하게 온전한 진리 가운데로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더 철저하게 완벽하게 진리를 분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성도들을 푸른 초장과 맑은 신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버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해서 오늘도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렸습니다.
주일 은근 11조 감사 헌금 각종 예물을 주 앞에 올려드렸습니다.
바르시고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높임 받아 주시옵소서 이 예배를 통해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가 힘 있게 확장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성껏 예배드린 성도님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양손에 재물을 얻을 능력을 부어주시옵소서, 심은 대로 풍성하게 거두게 해 주시옵소서 손대는 일마다 잘 되게 하시고 번영하고 창대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 형통하게 하신 하나님, 번영케 하신 하나님 우리 성도님들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번영하고 형통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열방을 위한 복의 근원, 사명, 능히 감당하는 성도들 될 수 있도록 하늘 보고를 열시고 쌓을 것이 없도록 복을 부어 주시옵소서.
아버지 우리들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옵소서.
사람 몸속에서 영이 빠져나가면 죽은 것이고, 아버지 또한 우리의 영 속에서 성령이 빠져나가면 죽은 것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성령을 사모하고 구합니다.
성령을 부어주시옵소서 성령 충만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 주시옵소서 성령의 권능으로 옷 입혀 주시옵소서 성령의 권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옷 입혀 주시옵소서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부르심을 따라 은사를 주셨는데 그 은사가 불릴 듯 일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그 은사들이 활성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말 예수님의 사역을 방불케 하는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사역을 방불케 하는 삼중 사역이 우리 교회 안에서 강력하게 일어나게 하시고, 아프리카에서 강력하게 일어나게 하시고, 목회자와 성도를 통해서 강력하게 일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계신 주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아픈 사람들을 만져주시옵소서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통은 떠나갈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질병은 떠나갈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정상은 정상이 될지어다. 모든 암은 예수의 이름으로 깨끗이 사라질지어다.
깨끗이 치유될지어다. 혈압도 정상이 될지어다.
당뇨도 치유될지어다. 중풍도 치유될지어다. 관절들도 치유될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혈액도 치유될지어다. 피부도 치유될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될지어다. 예수님의 권세 이름으로 치유될지어다.
예수님의 권세 이름으로 지금 치유될지어다.
예수님의 권세 이름으로 지금 치유될지어다. 예수님의 권세 이름으로 악하고 더러운 영들 모두 영적인 눌림 속박,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갈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갈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파쇄될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결박은 끊어질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눌림에서 자유케 될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중독에서 자유케 될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자살, 충독에서 자유케 될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정신 질환에서 자유케 될지어다.
예수의 권세 이름으로 자유케 될지어다. 양신 역사에서도 자유케 될지어다.
양신 역사에서도 자유케 될지어다. 주님 만져주시고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거룩한 죄를 맞아 주님을 예배하고 돌아가는 사랑하는 성도들의 심령 위에 가족과 자녀와 사업 위에 몸된 교회와 서울 시민과 북녘 땅에 굶주린 동포들이 이스라엘과 아프리카와 열방들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안내 방송 드립니다. 출입구가 혼잡하오니 뒤쪽에 앉으신 성도님부터 천천히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계단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뛰시거나 급히 이동하시면 위험하오니 천천히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새로 등록하신 성도님과 등록하기 원하시는 성도님께서는 본당 우측 스크린 앞 새 가족 여러분 환영합니다라는 푯말 앞으로 오시면 친절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오금역 셔틀버스는 예배 후 30분간 운행됩니다.
오금역 셔틀버스는 예배 후 30분간 운행됩니다.
clovanot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