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으로 밥을 먹어야지. 왼손으로 밥을 먹으니 조카하고 부딪치지 세 살짜리 조카도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데 무슨 여섯살이나 먹은 이모가 왼손으로 밥을 먹냐. 부끄럽게시리.” 아버지의 말씀이셨다. 밥상 앞에서 나는 심술보를 풍선처럼 터질듯 부풀려 놓고 입을 댓 자나 내밀고는 울상으로 앉아 있었다. 그럴때면 옆자리에 어머니의 손이 슬그머니 내 엉덩이를 토닥이셨다.
이모인 나는 여섯 살이었다. 일곱 형제의 막둥이로 아버지와 할머니와 어머니의 사랑은 물론이고 오빠와 언니들의 관심으로 밥 잘 먹고 잘 뛰어놀아 통통하면서 걱정거리가 없던 계집아이였다.그 당시에는 먹을것이 충분한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마른편이었다. 막내라는 특권으로 어머니의 젖가슴을 더듬으며 잠을 청했으며, 습관적인 오줌싸개였지만 어머니는 별로 닦달하지 않으셨다.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라고 마냥 나를 보듬어 주셨다.
막내인 나와 열여덟 살 차이가 나는 큰언니가 일찍 결혼을 하고 조카를 낳으면서 내 자리는 존재감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큰언니가 둘째 아이를 낳았고, 언니 혼자서 아이 둘을 건사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므로 큰 조카가 외할머니 댁인 우리 집에 머물게 되면서였다. 어머니야 농사일로 바빠서 조카를 돌볼 틈이 없었지만, 할머니도 계셨고 특히 둘째 언니와 셋째 언니와 넷째 언니까지 있었으니 틈틈이 나누어 돌봐줄 수가 있었다.
밥 숟갈이 어른만했으며 먹는데 욕심이 많아 놀림을 받을 만큼 뚱뚱했던 나에 비하면 세 살짜리 조카는 말랐으며 여릿여릿했다. 밥은 겨우 서너 숟갈 먹을까 말까였으며 칭얼거리는 소리조차도 어미 잃은 새끼 울음소리였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말할 수 없이 가여웠으며 안아주고 얼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했다. 거기다가 둥글 넙적한 내 외모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조카는 갸름하고 희고 예쁜 얼굴을 지녔다. 완전 서울내기와 완전 촌뜨기라는 말이 안성맞춤이다.
당연히 온 집안 식구들의 관심이 조카에게 쏠렸다. 그동안 내게로 향했던 눈길들은 썰물처럼 밀려가 버렸다. 내 나이 겨우 여섯 살이었다. 딸아이가 아동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덩달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이가 동생이 생기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남편이 둘째 부인을 얻었을 때 본 부인이 받는 스트레스 만큼이란다. 동생을 본 아이들이 동생처럼 젖병으로 우유를 먹으려 하거나 말을 아가처럼 어눌하게 하는 등 퇴행현상을 보이기도 하고, 부모님이 안 계신 틈을 이용하여 동생을 꼬집거나 울리기도 하지 않던가. 그게 다 스트레스의 결과물이다. 그사실을 알게 된 요즈음에서야 나는 아우를 보았던 세 살짜리 조카와, 어린 조카와 함께 생활해야 했던 여섯 살짜리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조카뿐만 아니라 내 가슴에도 그만큼의 스트레스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조카와 나는 비슷한 처지였던 것이다.
어느 해였던가. 조카가 마당을 뒤뚱거리며 걸어다니다가 누렁이 개가 달려드는 바람에 놀라 넘어져서 팔을 다쳤던 적이 있었다. 허약한 조카는 더욱 징징거렸으며 먹는거 잠자는거 노는거 모든게 시원찮았다. 할머니와 어머니와 언니들은 조카 앞에서 좌불안석이었다. 안마당으로 바깥마당으로 언덕으로 조카를 업고 언니들이 동네를 몇 바퀴씩 돌아왔다. 나를 돌봐주던 눈동자와 손길이 더욱 더 조카에게로 향하였다. 나도 조카처럼 비쩍 마르고 싶었고 팔이라도 분질러졌으면 좋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 밥상은 크지 않았으며 여러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나는 왼손잡이였다. 대부분 조카와 나란히 앉았는데 숟갈질을 하면 팔이나 손이 부딪치는 것은 당연했다. 속으로 은근히 조카를 질투하던 나는 이때다 싶었던지 심하게 짜증을 내거나 심술을 부렸던 것 같다. 조카를 향해 너 때문이야 라고 눈을 흘겼을 것이다. 조카는 모기만한 소리로 칭얼거렸다. 어른들은 ‘너 때문이잖아. 오른손으로 밥을 먹어야지’ 결국 내게로 화살이 돌아오고는 했다.그 덕분에 마음을 굳게 먹고 오른손을 사용하는 습관을 들이기는 했다.
놀랍게도 그 당시의 사진 한 장이 남아있다. 저렇게 어릴때도 있구나 싶기도 하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여 슬며시 웃음을 짓게 하는 사진이다. 가장 왼쪽에 젊고 화사한 큰언니가 둘째 조카를 끌어안고 앉아계시고 그 옆으로 큰조카를 사랑한만큼 있는 힘을 다해 끌어안고있는 세째 언니 그 앞에 네째언니 그리고 내가 맨 앞쪽에 떡하니 고집불통처럼 다리를 벌리고 서 있다. 둘째언니가 오른편에 활짝 피어난 해바라기처럼 늘씬하게 서 있다. 세째언니와 네째언니와 나의 똑같은 단발머리는 둘째언니의 작품이다. 뒤쪽 꽃밭에는 해바라기와 다알리를 비롯하여 꽃들이 가득하고 오른쪽으로 감나무와 앵두나무와 돼지 죽을 담던 바께쓰도 보인다. 더 오른쪽으로는 찐빵이나 개떡이나 고구마를 찌던 가마솥이 있을 것이다. 안봐도 훤히 보이는 풍경들이다.
또 한장의 사진이 있다. 창경원에서 찍은 듯 한데 큰조카가 네 명의 동생들과 나란히 서서 찍었다. 중학교 교복차림인 것을 보면 열네살로 보인다. 두살 차이로 태어났으니 둘째조카가 열두살 세째가 열살 네째가 여덟살 그리고 유일한 사내아이였던 막내가 여섯살 정도로 보인다. 큰조카는 야무진 표정으로 세째여동생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 그 모습은 나머지 네동생의 어깨를 잡고있는 듯 탄탄해보이고 울타리인듯 든든한 모습이기도 하다. 네 명의 동생을 진두지휘하는 대장의 면모가 눈가와 입가에도 당당하게 나타나 있다. 분명 사진을 찍어주시던 형부와 언니가 그 앞쪽에서 흐믓한 표정으로 서 계셨을 것이다.
밥상머리를 제외하고는 그래도 이모랍시고 이모 노릇을 해보려고 애를 썼던 듯 하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일곱 형제의 막내로 졸병이었으며 조카는 다섯 남매 중 맏딸로 대장이었다. 대장과 졸병. 절대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는 언니 오빠들 뒤만 졸졸졸 따라다녔으며 사랑이건 맛난 것이든 받기만 했다. 조카는 앞장서서 제 동생 넷을 진두 지휘를 하며 자랐다. 몸은 약했으나 정신력은 대나무처럼 곧았으며 네 동생을 통솔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마음 씀씀이는 냉정한 듯 공정하면서 따스했다. 반대로 나는 항상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으며 나를 제일 먼저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였다.
세 살 차이 이모라지만 그래도 나는 윗사람이 아닌가. 윗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면서 살고 싶었다. ‘윗 사람 노릇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건지 아냐. 어머님은 매번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했다. ’사랑은 아래로 흐른다‘ 라는 말처럼 사랑도 조카에게로 흐르게 하고 싶었지만 매사에 한 수 위였던 조카에게 내가 해 줄 것은 없었다. 야무진 살림꾼이었으며 자식들 교육에도 성공적이었다. 나는 도시에서 20대부터 살았음에도 여전히 시골스러움을 벗어나지 못했고 도시인들처럼 발 빠르게 대처할 줄 모르는 어벙벙한 자세로 살아왔다. 조카는 3년에 한번꼴로 신랑 직장을 따라 외국을 드나들며 살았는데 외국에서 돌아올 때마다 이모인 내게까지 선물을 내밀고는 했다. 조카는 막내이모막내이모 얼마나 다정하고 상냥하게 나를 불렀던가. 이래저래 이모로써 조카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석연치않은 마음으로 세월은 지나갔으며 이제 나는 육십을 넘었고 조카는 오십대 후반이다.
가뭄에도 불구하고 텃밭에 봄 농사가 풍년이었다. 물론 주말마다 열심히 물을 준 남편 덕분이었다. 상추건 쑥갓이건 부드럽게 쑥쑥 잘도 자라났다. 야채를 좋아하는 여러 사람을 떠올렸는데, 그 중 여전히 비실비실하면서도 육식을 싫어했으며 채식주의자였던 조카도 생각이 났다. 이슬이 채 마르기 전 새벽 일찍 일어나 가장 보드라운 것들을 골라 한 상자 마련했다. 아욱 근대 상추 쑥갓 치커리 오이 호박 부추 고추를 가지런히 채워 넣었다.
그 날 오후 조카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모! 야채종합선물세트 세상에서 최고! 사진 한 장도 날아왔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부추 전이었다. 어린시절 꼬마 조카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팔짝팔짝 뛰어오르는 세 살짜리 조카를 보았다. 과자종합선물 세트를 받아든 어린 내 웃음소리인 듯도 하였다. 어린 조카의 손을 잡고 깔깔거리며 고향집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뛰어노는 기분이었다.
이제사 이모 노릇 한 번 제대로 해 본 거였다. 신이나고 기뻤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어여쁜 조카를 위하여 내가 해 줄 수 있는게 하나 더 있었다. 조카를 향한 이모의 마음을 쓰는 일이었다. 잠시 질투를 하였던 적도 있지만 나는 이모다운 이모가 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음과 같이 썼다.
조카야 화정
내가 수수한 호박꽃이라면
너는 애잔한 분꽃이어서
내가 왼손잡이로 꾸중 삼키는 동안
너는 오른손잡이로 칭찬 듬뿍 받아 먹어서
나는 너를 시샘하였다
내가 일곱 남매중 막내딸로 졸병이라면
너는 다섯 남매중 첫딸로 대장이어서
중심이 단단한 대장이어서
나는 너를 우러러보았다
여섯 살 이모와 세 살 조카였던 시절처럼
예순한 살 이모와 쉰 여덟 조카인 지금에도
이모이모라 부르는 네 음성과 웃음소리는
벚꽃잎 춤추게 하는 간지러운 봄바람이어서
이슬에 젖은 풀잎 스쳐온 작은 새 노래여서
나는 너를
사랑하였다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