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흠의 뉴질랜드 꽁트(221회). 뉴질랜드타임즈. 13/09/2019. 금.
e 별난 조우(遭遇)
신입 여성 운전자
-앤디, 오늘 운전은 여기 신입사원에게 노스쇼어
트립 트레이닝하며 해요.
앤디가 이른 아침, 공항 데포에서 버스를 운전하려 할 때였다. 매니저 레오가 앤디를 불렀다. 옆에는 처음 보는 여성 운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입 사원을 인사시켜줬다. 짙은 갈색 안경테 안으로
보이는 선한 눈매, 깊게 눌러쓴 검은 야구모자를 한 다부진 모습. 키는
아담했다. 쥬디라고 했다. 신입 여성 운전자에게 공항에서
노스쇼방향 코스 운전을 시키라고 했다. 세 번 트립 중 두 번은 앤디가 운전하며 알려주고, 마지막 트립은 쥬디에게 직접 하게 하고 옆에서 도와주라고 했다. 앤디가
신입사원을 데리고 운행할 버스로 향했다.
형이라니?
-저기요~ 혹시 앤디 형 아녜요? 왜 옛날 대학 시절 MRA 서클 활동했을 때~
-???
앤디는 적잖은 충격에 몸이 휘청거렸다. 앤디 형이라니? 얼마 만에 들어보는 호칭인가. 대학 시절 여학생 후배들이 불러주던
이름, 형!
-저, 마리예요. 왜, 끝순이라서 말희로 지었는데.
서클에서 마리로 불러줬잖아요.
-?? 마리(말희), MRA 서클 활동에서
Sing Out 했던?
-맞아요. 형은 그때 복학생이었고 전 신입생이었잖아요.
-원~ 세상에. 그때가 언젠데. 근 40여
년 만 아닌가. 새침하고 발랄했던 마리가~
e 별난 조우(遭遇)
오래 살다 보면 별별 인연을 다 만난다더니 딱 지금이 그랬다. 정말로 반가웠다. e 별난 조우(遭遇)를 어떻게 봐야 하나. 20대 초반 은어처럼
팔팔하고 빛났던 고국 대학 시절. 뉴질랜드에 이민 와 60대
초반을 맞아 고등어처럼 묵묵히 지내는 지금. 그 시절, 발랄하고 경쾌한 Sing Out 공연이 뇌리에 떠올랐다. 도덕 재무장 운동. 지금도 그 기운이 몸에 남아있어, 맑고 흥겹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몰랐다.
-차차 말씀드릴게요. 어쨌든 참 인연이 묘해요. 그때는 서클 선배로, 지금은 회사 선배로 도움을~
-세상에, 살다 보니 이렇게도 만나네. 공항버스까지 진출한 여성 운전자, 원더우먼, 파워우먼이네. 두툼하고 진한 갈색 안경테로 확 바뀌어서 처음엔 몰랐지.”
-전 지금 남쪽 마누카우지역에 살아요. 이번
모든 지역 코스 훈련 끝나면 마누카우 지역 노선을 운전할 거래요. 쎈트럴 시티 쪽, 웨스트 시티 쪽은 다 끝냈고요. 오늘 마지막 노스쇼어 시티 코스를
운전하게 됐어요. 오늘 금요일 마치면 월요일부턴 마누카우 노선을 운전하래요.”
대지진의 직격탄을
쥬디는 20여 년 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이민을 왔다. 아들딸 남편 넷이서 정착을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세월은 모질었다.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크라이스트 대지진의 직격탄을 맞고 쓰러졌다. 남편 허리 부상은 심각했다. 평소 밝고 맑던 쥬디의 눈에 피눈물이
응어리졌다. 국가의 지원 속에 간신히 지탱해오다, 결국 크라이스트처치를
떠났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오클랜드 남쪽 마누카우지역에
보금자리를 찾았다. 남편은 푸드타운 청과물 코너에서 일했다. 쥬디는
머피 버스에서 오랫동안 스쿨버스운전 일에 푹 빠졌다. 클래스4 초대형면허를
따서 2층버스도 운전했다. 그 경력으로 공항버스에 들어오게
되었다.
공항에서 알바니 스테이션 종점까지 첫 번째 운행을 마쳤을 때. 쉬는 시간 30분 내내 앤디는 주요 운전 노하우를 쥬디에게 알려줬다. 빈 노트에
그림과 약도 그리고 유용한 영어 표현까지 적어주었다. 안내방송 마이크 사용법. 홉 카드나 티켓 또는 현금을 사용할 때 대응 방법. 모터 웨이에서는
되도록 80킬로 내로 운전하기. 무엇보다 안전운행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 주어진 하루가 촘촘했다.
New & Now
마지막 트립은 쥬디가 공항버스를 운전했다. 알바니에서 공항까지. 공항 가는 손님은 여닐곱 정도였다. 다섯 스테이션을 거쳐 하버 브리지를
건넜다. 대학 시절, 한강 건너는 추억을 소환해냈다. 대학 시절 서클멤버들과 버스를 타고 한강대교를 지나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뒤에
앉아있던 앤디가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때는 20대 청춘이었는데. 지금은 60대 장년이다. 저마다의
때가 있는걸. 그때는 그때대로 빛났다. 지금은 원숙한 인생
맛을 느낀다. 노스웨스턴 모터 웨이로 빠져 워터뷰 터널로 진입했다. 이제
곧 공항에 도착할 참이다.
알바니에서 하버 브리지를 건너 터널을 통과하고 공항까지 가는 것만 했다. 인생은….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오클랜드로, 오클랜드 북쪽에서 남쪽으로, 땅 위에서 바다 위를 건너, 새벽 여명에서 저녁노을로. New & Now. 쥬디는 앞만
보고 달리고, 앤디는 쥬디 뒷모습에서 추억을 따르고~
서쪽으로 간 까닭
앤디는 뒷좌석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검은색 야구모자를 쓴 쥬디. 뒤 머리칼이 돋보였다. 야구모자 뒤로 말총머리가 빼곡하게 나왔다. 접동새 꽁지깃처럼 단아했다. 공항버스는 저녁노을 물 들어오는 서쪽으로
기수를 바꿨다. 큰 운전대를 두 손으로 감싸 잡고 세상의 온갖 풍파를 뚫고 달리는 파워 우먼이 궁금해졌다. 달마가 서쪽으로 간 까닭, 쥬디가 구도자처럼 보였다.
사실, 앤디는 오늘로 공항버스 근무를 마치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꿈꾸었던 인터 시티버스 입사가 확정된 상태였다. 웰링턴부터
왕가레이까지 대륙 횡단 고속버스. 다음 주부터는 또 각자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헤어짐과 만남은 연(緣)이었다.
딱 하루만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이는 타락하지 않는다고. 또 하나 더, 부자라고 했다. 대학 시절, MRA 공연할 때 외쳤던 생기발랄하고 천진무구했던 에너지와
젊음이 Sing Out 노래로
울려 퍼졌다. ‘걱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서 스마일~ 스마일~ 스마일~ 젊은이답게 활짝 웃어요 세상 밝으리 걱정하면 무엇 해 즐겁게
노래하자 걱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서 스마일~ 스마일~ 스마일~!’
청년시절 돈키호테식 감정이 중장 년을 맞아 장자의 나비로 날고 있었다. 헤어질
것을 전제로 한 만남.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연이려니.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저녁노을이 찬란한 아쉬움을 발했다. e 별난 조우(遭遇), 딱 하루만으로 끝인가. 응축된 시어(詩語) 속에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