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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반딧불이 작은 불빛과 함께 가는 길
-'자연/국악/시가 어우러지는 시에 문학 한마당’ 참관기
황구하
가을 깊은 지금 은행나무는 진초록을 벗어내고 형광노랑연두 빛, 절체절명으로 물들어갑니다. 지난 9월, 영동 송호 강가 밤하늘에 춤추던 반딧불이 꽁지에 매달린 불빛도 꼭 저런 빛이었지요. 그 귀한 반딧불이를 만난 건 올해로 세 번째가 되는 ‘자연/국악/시가 어우러지는 시에 문학 한마당’ 행사에서였지요.
영동, 그리고 계간 『시에』의 이 행사는 저에게 좀 뭉클한 데가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영동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의 금산이고 지금 사는 곳 역시 영동에서 차로 한 시간가량 걸리는 상주입니다. 금산을 가거나 상주를 오거나 어쨌거나 반드시 영동을 거쳐야하지요.
그렇게 영동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던 교련복시절, 영동 어디쯤에서 가졌던 학도호국단수련회를 아련하게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늘 가물가물했지요. 새벽 물안개 길어 올리던 솔밭과 물결에 참방거리는 저녁노을을 가르며 다슬기를 줍던 그 강은 진저리나는 얼차려까지 온전히 품어주었는데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2년 전이었지요. ‘시에 문학 한마당’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송호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동안 실종되었던 기억의 편린이 2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큰길에서 내려 천천히 곡선을 그리며 접어들었어야 했는데, 마냥 서둘러 직선으로만 다녔으니 그동안 통 찾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영동 송호는 그런 곳입니다. 빠르게 앞만 보고 가는 길엔 보이지 않습니다. 느리게 느리게 경계를 넘나들며 성(聖)과 속(俗)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세상을 넘나들며 길을 따라 가지만, 한곳에 머물다가도 결코 정착함 없이 유랑을 거듭하는 시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요.
그랬지요. 행사준비로 분주한 가운데 따뜻하게 손잡아주던 김지순, 이주언 시인 등 <시에문학회> 식구들의 환한 얼굴과 “시에는 다 좋은데 이쁜여자가 없어.” 우스갯소리로 악수하던 차주일 시인, “형, 살아 있는겨?” 많이 야윈 박운식 시인과의 해후에 덥석 안으며 눈시울을 적시던 김성동 소설가, 강경호, 김은령, 김태수, 김영욱 시인 등 먼 곳에서 가까이에서 모여드는 문인들과 조우하면서 금강 자락 송호에서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강 물결을 두른 솔밭을 거닐며 거기 소나무아래 뼛가루를 묻어 후손들 문학마당까지 덩실덩실 어울리고 싶다는 나문석 시인의 말씀을 한 점 찍고, 세상 불의와 맞서면서도 세상의 모든 생명과 더불어 함께 아픔을 끌어안았던 고 윤중호 시인의 다섯 번째 추모 문학제로 먼저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고 윤중호 시인은 영동사람이지요. 198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본동에 내리는 비』『금강에서』『청산을 부른다』가 있고, 산문집으로『느리게 사는 사람들』, 동화 『감꽃마을 아이들』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2004년 췌장암으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과 공동체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길이라 여긴 뜨거운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유고시집『고향 길』을 펼치고 시 한 편을 낭송하면서 저도 모르게 목이 멨습니다. 그는 가고 “천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듯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詩” 만이 그를 대신하고 있으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래도 유족을 비롯해 평소 그를 아끼던 친구와 문단 선후배가 함께 그의 삶과 시를 생각하는 시간이었지요. 특히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 선생의 ‘윤중호, 아름다운 사람의 길’ 문학 강연은 촌철살인이었습니다.
“짧게…얘기…할게요. 윤중호 시인……참…친…했는데……뜨악했슈.” 끊어지다 이어지다하는 말씀처럼 이미 온몸에 절은 술과 눈물은 서 있기도 버거운 작가를 아슬아슬 지탱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지요. “염불하나 해주세요!” 순간 좌중은 조용했습니다. 그러더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난 중이 아닌디…반 중여. 어, 여기도 중 있잖여?” 때마침 사진을 찍느라 왔다 갔다 하던 고철 시인이 그의 눈에 딱 걸리자 은근슬쩍 빠져나가고 싶었을까요. 그러자 좌중은 더욱 큰 박수를 치고 마침내 그는 정중히 두 손 모으고 염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눈물 그렁그렁 달고 있는 그의 눈은 참으로 깊고도 맑았습니다. “그류…문학 강연 때려…볼까유? 근디…재미없어. 다…가…시방…뭐하는 거여?” 손사래를 치는 그를 향해 좌중은 또 박수, 박수였습니다. 그가 비칠비칠 무대를 내려오려 하자 잽싸게 달려간 고철 시인이 받아내다시피 그를 착 끌어안았습니다. 그러자 그, 한 말씀 때리셨지요. “짐승이 화승과 포옹한규.” 그야말로 온몸으로 소통하고 교감한 한바탕 굿판이었습니다. 내면 깊숙이 침묵하고 있는 어떤 존재로부터 끊임없이 질문을 받고, 응답이 시작된 시간이었으니까요.
국악기 중 가장 낮은 음역에 속하는 아쟁소리로 문학 한마당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개나리나무껍질을 벗겨 만든 활대에 송진을 묻혀 줄을 문질러 소리를 낸다는 아쟁산조는 장엄했습니다. 또 어둡고 둔탁한 거문고와 청아하고 부드러운 가야금이 빚어내는 선율은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었습니다. 수묵화 같은 품격으로 ‘침향무(沈香舞)’가 흐를 때는 눈을 감고 ‘침향 속에서 춤을 추는’ 존재를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노래 부르는 악신(樂神), 술과 고기는 먹지 않고 향만 먹고사는 향신(香神), 예에서 노닐(遊於藝) 줄 아는 풍류인, 예술인을 생각해보았지요. 고구려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받는 박연의 꿈, 나아가 우리 전통예술정신의 맥을 잇는 영동 난계국악단이 참 근사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시에 신인상 시상식, 시인들의 시낭송이 있었지요. 김선미, 김홍조, 이옥, 한문수 씨가 시 부문, 김혜옥 씨가 수필 부문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설렘과 긴장으로 한국문단에 첫발을 내딛는 신인들의 손을 덥석덥석 잡아주던 이재무, 김선태, 이형권 선생님들 표정 또한 참 푸근했습니다.
배한봉, 박응식, 정이향, 성태현, 권순진 시인 등이 자신의 시를 낭송했는데, 김진수 시인은 시낭송을 하는 도중 시 내용과 관련 자신의 뺨을 후려치는 바람에 사람들을 웃음의 물결로 출렁이게 했지요. 그렇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서로가 촘촘히 이어져 있다는 것, 알거나 모르거나 함께하는 문학의 마음자리가 모든 경계를 그렇게 환히 풀어주었지요. 노래패 ‘민들레’의 노래는 그래서 더욱 흥을 더했습니다. ‘차력사 정씨의 썩은 이빨’이라는 윤중호 시인의 시를 노래로 부를 때는 한 사내의 더없이 서글픈 삶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했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박수를 치던 문인들과 엄마아빠 손을 풀고 의자 위에 올라가 손뼉을 치며 소리를 질러대던 꼬마아이는 그 자체로 뜨거운 한편의 시였습니다. 역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어둠살이 살살 내려오자 뒤풀이 자리가 달구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푸짐하게 차려진 술상은 보기만 해도 입맛이 돌았지요. 담백한 돼지고기 수육과 코끝 찡하게 톡 쏘는 홍어가 술맛을 당기는가 싶더니 어느 자리에서 낭창한 뽕짝이 흘러나왔습니다. 한두 곡 부르다 그치겠거니 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정윤천 시인의 걸쭉한 추임새와 임윤 시인의 젓가락 장단 따라 노래가 끝도 없이 흘러 나왔지요. 부산의 고명자 시인이었습니다. 옆자리 누군가의 구성진 노래가 가세를 하자 저마다 젖은 가슴은 노래, 노래로 이어져 주거니 받거니, 이 자리로 저 자리로 넘어가고 또 넘어갔습니다. 알코올 도수보다 훨씬 높아진 감성도수는 순식간에 모두를 하나로 똘똘 뭉쳐놓았지요.
흥성흥성한 자리를 잠시 빠져나와 송호 강가를 거닐던 바로 그때였지요. 불빛이 났다 안 났다하며 반딧불이가 어지럽게 날고 있었습니다. 깜빡깜빡하는 반딧불이 그 작고 여린 불빛을 깜빡깜빡 바라보며 문득 자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발하는 불빛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슴에 얹어보았습니다.
둘레둘레 앉아 거나하게 술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또 간간이 바깥바람을 쐬는 동안 슬슬 숙소로 내빼기도 했고, 새벽까지 자리를 고수하며 민물고기 매운탕 안주까지 바닥을 낸 사람들도 있었지요. 우리 황규리(황구하+조유리. 두 사람을 묶어버린 이름으로 강희안 시인이 지음)도 새벽녘에야 숙소에 들었답니다. 기막힌 것은 아침 먹을 시간이 되니 솔숲에서 퀭한 모습으로 꾸역꾸역 나타나는 사람 참 여럿 계셨다는 거지요. 솔밭을 방구들 삼아 술을 치고 노래하고 각론을 펼쳤을 그들 덕분에 소나무들은 허리를 더 굽혔을 것이고 강물 자락도 기꺼이 잠을 미루고 함께 출렁였을 겁니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천태산에 올랐습니다.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詩祭)를 올리기 위해서지요. 몇 년 전 시인들 몇몇이 천태산 은행나무를 만나러 간 적 있었지요. 그때 한 시인이 그랬습니다. “가만 생각해 봉께 양문규 시인이 영국사고, 은행나무여. 우리가 그 양반 아니면 여기 은행나무랑 영국살 어찌 알았겠어. 난 은행나무 존재자체도 몰랐당께. 영동군에서 그 양반 시비라도 하나 세워 줘야 한당께.” 그러자 한 시인 또 그랬지요. “뭔 소리여. 양 시인이 그 소리 들으면 대뜸 뭔 짓이냐고 할겨. 그 양반이 어디 그런 사람이간디.” 그날 『시에』 편집주간 양문규 시인은 그동안의 행사준비 때문인지 목이 꽉 잠긴 채 더욱 분주한 모습이었지요.
천태산 은행나무는 천 년의 세월을 건너오며 생명을 보듬고 키우는 자연 그대로 천태산의 신령입니다. 천태산 은행나무가 슬피 울면 그것은 곧 국란이나 국상 등 환란과 재난을 예고한다는 전설이 있더군요. 그러나 양문규 시인의 어느 글을 보니 “은행나무가 운다면 그 울음은 어떤 환란이나 재난을 예고하는 소리가 아니라 희망을 노래하는 전령, 생명의 소리”라고 합니다. “나무 등걸 속에 울음을 내장하고, 더 큰 울음을 키우며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미혹의 세계에서 각성의 세계로 오는 생명의 소리”라는 것이지요.
“천태산 은행나무가 누대에 걸쳐 좌절과 절망을 제 울음으로 감싸고 생의 중심을 잃지 않고 서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큰 울음이 배어 있길” 바라는 청주놀이마당 ‘울림’의 비나리는 그래서 더 큰 울림이었습니다. 흥겹다 할지 서럽다 할지 모를 춤사위와 사뭇 처연하면서도 술술 넘어가는 가락은 간절함이 묻어나는 신명이었습니다. 문인들과 마을사람들, 등산객들 그리고 잠자리떼까지 공중을 빙빙 돌며 함께 한 거대한 판굿이었으니까요.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모임’의 상임고문 여종수 선생께서 제주에게서 술을 받아 상에 올려놓은 후 무릎 꿇고 앉아서 고천문을 낭독했습니다. “혼탁한 시대에 천태산 은행나무의 올곧은 마음과 따뜻한 그늘의 정신을 배우고, 아름다운 삶을 가꾸어가고자” 한다고 산천초목과 하늘에 천명했지요. 아울러 시제에 참가한 모든 이의 안녕을 기원하고, 문인들의 문운을 축원했습니다. 나이 지긋하신 동네 한 어르신은 천태산 은행나무 제(祭)가 끊긴지 60년 만에 올리는 것이라며 눈가를 훔쳤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고천문을 낭독한 여종수 선생은 천태산 은행나무 마지막 제를 지낼 때 고천문을 낭독한 어른의 손자라고 하더군요.
선대의 손을 뜨겁게 잡은 고천문 낭독을 마치고 소지를 했지요. 고천문을 태운 재가 하늘로 흩어지는 찰나, 은행나무 둥치로부터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고사상 주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파르르 날개를 떨더니 하늘 끝으로 날아갔지요. 가슴 한쪽 하도 짠해서 흰나비 너울너울 날아간 허공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답니다.
시제를 마치고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마을부녀회에서 마련한 국수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등산객과 방문객들이 물 한 모금 축이고 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절 입구 수돗물이 무슨 연유인지 나오질 않아 여러 사람이 고생을 했습니다. 언덕배기집에서 물을 받아 강경보, 양선규, 윤임수, 김희정, 정연탁 시인 등 남정네들 여럿이서 물통을 날라야 했으니까요. 어려운 여건임에도 너럭바위 옆에 차양을 치고 마을 아주머니들께서 삶아내는 국수는 참 맛났습니다. 때마침 천태산을 오르는 많은 등산객들까지도 줄을 서서 기다리며 국수 한 그릇씩 즐거이 나누었지요. 우리 전통적 삶의 중심에 공동체 정신이 자리 잡고 있던 것처럼 너와 나, 이웃과 이웃이 서로 기대고 나누며 살아가는 정신이 절실히 필요한 현실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원적 가치를 회복하고 인간적 삶을 지켜내기 위한, 바로 문학이 나아갈 길이 아니겠는지요.
영동의 너른 품안에서 그렇게 1박 2일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서로를 염려하고 서로를 다독이고 서로를 끌어안았던 사람들. 그 많은 얼굴들이 지금도 가슴에서 뜨겁습니다. 송호 솔밭, 금강 자락, 천태산 은행나무, 다랑이 논, 작은 연못, 잠자리떼, 흰나비도 저마다의 모습으로 둥지를 틀었습니다. 여린 달빛 타고 반딧불이가 총총 내려앉던 거기 영동, 그 형광노랑연두 빛이 이 가을 골목을 환히 밝혀줍니다. 시에, 반딧불이 작은 불빛과 함께 가는 길입니다.(♣)
―『시에』2009년 겨울호
첫댓글 실실 술술 풀어간 '시에 문학 한 마당'이 새롭습니다. 참관기 속으로 들고 남이 자연스런 구하님이야말로 형광노랑연두빛! 입니다. ^,~*
그날 누구 구두수선하느라 실실~ 풀었지요. 아직까지 실값, 바늘값을 안주네요. 혹시 그분 알아유?
이름 등장하신 분들 술값 일만냥씩 내시기요!!! 내이름 언능 지워야지.
선생님께서 일만냥씩 걷어주세요. ^^
자진 납세자는 세금 혜택을 드립니다/.
저는 구하언니랑 반등분 해 주세요^^
작명비는 언제 줄기요?^^
에고고, 규리 반 떼주고 작명비까지 주자면 도로 술값 내놓아야겠네요.
역쉬 구하는 시에의 무수리이자 시에의 지주목^0^~~
"시방...뭐하는 거여?"ㅋ
그때 그 풍경이 눈에 선하네요.. 세월이 너무 빠르네요..단풍도 지고.. 앙상한 나뭇가지가 가슴을 후드리니
단풍들었던 그날 샘 얼굴 생각나네요.
거짓말 .. 시선은 딴네만 보더만
ㅎㅎ시선은 원래 딴 데 보는 겁니다.
1박 2일의 시에 문학 대장경 기록을 통해 황구하 시인께서 -시에-와 송호를 빛내주셨네요. 국민학교 소풍때 송호를 처음 보았어요 그 후로 1년에 몇번씩은 송호 물안개와 봄 바람에 흩날리는 벗꽃, 송호 단풍, 송호 설경에 젖기도했는데 볼때마다 보는 느낌이 달라 지금도 자주찾아가곤 합니다.
문득 궁금하네요. 양산팔경...
그 때, 그날의 풍경을 다시 한번 스케치 해 보게되는군요....언제 또 들어보나요? 황선생님의 시 낭송을...최명길의 시 낭송보다 더 가슴에 와 닿던 그 목소리였어요
선생님, 잘 지내시죠? 근데 너무 띄워주시네요. ㅎㅎ
시인은 산문이 있어야 시인인데, 산문을 보니, 시인이 맞군요. 수고가 넘 많았지요.
선생님, 후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