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former
“뿌지직- 퍽!”
냉장고형 트랜스가 숨 넘어가는 굉음을 지른다. 냉장고에 연결된 트랜스에서 불꽃이 튀는 소리다. 아니나 다를까 전원이 뚝 끊어진다. 트랜스에 고장이 난 것이다. 이민 올 때 고국에서 가져온 냉장고가 힘을 잃는다. 이민 와서 세 차례나 이사 다니면서도 묵묵히 십 수 년간 주방 한 자리를 지켜온 냉장고다. 온갖 음식물을 생생하게 제대로 보존해 준 역할이 무너졌다.
오래된 카펫을 걷어내고 마루스타일로 거실 바닥을 바꾸는 공사 중에 일어난 일이다. 전원을 뽑고 냉장고를 움직여 위치를 바꾸게 되었다. 마루 바닥 공사를 하는 동안 냉장고도 몇 시간은 푹 쉬게 했다. 새로 시공한 마루 바닥에 냉장고를 옮기고 다시 전원에 연결한 것인데 그만 트랜스 고장이 나고만 것이다.
이민 올 때 가져온 냉장고이니 오래도 썼지 싶다. 이 번에 바꿔야 하나? 그 동안 별 문제없이 잘 써왔다. 그래도 막상 새것으로 바꾸려니 만만치가 않다. 좋은 줄 알면서도 성큼 안 된다. 이번 마루 공사만해도 몇 년을 미루어 오다 큰 마음먹고 한 것이다. 세탁기와 진공청소기가 자주 말썽을 부려 연말 특별 세일에서 바꾸기는 했지만, 냉장고까지는 아직이다 싶다.
차선책을 찾아야지. 트랜스에서 불꽃이 튀겼으니 일단은 다른 트랜스를 구할 수 있나 알아봐야 한다. 보통 트랜스로 부르는데 고국에선 변압기나 도란스로 더 알려져 있다. 알다시피 트란스는 전자 유도 작용으로 전압이나 전류의 값을 높이거나 낮추는 일을 한다. 고국에서 사온 냉장고를 쓰려니 뉴질랜드와 전원 사양이 달라 중간에서 조정해주는 변압기가 필요했다. 그 동안 참 애 많이 써왔다.
상식적으로 교민업체에서 취급하리라 생각하고 여러 곳에 수소문해 본다. 예상이 어긋나고 만다. 요즘엔 거의 취급을 안 한단다. 추가 이민자도 없고, 기존 이민자는 뉴질랜드 가전제품으로 바꾸니 수요가 없어 서란다. 수요와 공급이 맞아야 들어올 턴데 그러질 못하는 상황이다.
다시 방법을 찾을 수밖에. 교민 상대로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사이트와 교민지를 뒤져 연락해 본다. 트랜스를 사고 싶다는 자는 간혹 있어도, 판다는 이는 드물다. 몇 군데 확인하는데도 기꺼운 회답이 없다.
이때다. 옆에서 혹시나 하고 눈 여겨 지켜보던 아내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한쪽에 가서 한참을 몰입하여 뭘 써서 보낸다. 한참 뒤 “나의 인적 네트워크에 SOS 보내기 끝!” 하며 여유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뭔데 그리 호들갑이신감?” 아내 스마트폰을 보니 아는 지인들에게 트랜스 필요하다고 안 쓰는 것 있으면 알려달라는 메시지다.
“오호라, 그 방법도 있었네.” 나도 한번 보내볼까 하며 뒤 늦게 내 지인들에게도 비슷한 메시지를 보내본다.
마루 시공 일을 하던 분이 이런저런 우리들을 보면서 웃는다. 옆에서 마루일을 거들며 한참이 지나자 아내가 새참을 가져오며 함박웃음이다. “뭐 그리 좋은 일이라도 있남?” “글쎄 여기저기 있다고 연락이 오네. 멜론스 베이, 브라운스 베이. 알바니…” 아내의 주변분들 연락이 계속 이어진다. 까톡까톡…
‘난 뭐지?’ 꽤나 시간이 흐르고서야 내 주변 분들에게서 듬성듬성 연락이 온다. 교민지 알아보세요. 중고부품 사고파는 데 혹시… . 없는데 어쩌지요? 냉장고 새 걸로 사요.
아내한테 한방 얻어맞은 느낌이다. 내가 졌다. 안 사람과 바깥사람의 인적네트워크가 다르다. 달라도 확연히 다르다. 관심의 접근 방법이 실용적인가 지식적인가. 남편 존 심이 살짝 추락한다. 그나마도 다행이다 여긴다. 이민 와서 타국에 살면서 필요한 것 있으면 연락할 곳 있다는 것이 고맙다. 관심 가져주고 관계 맺고 사는 세상이 있어 덜 외로운 것이다. 가전제품 옆에 있는 트랜스를 다시금 들여다본다.
직접 연결과 소통이 안 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도 누군가 필요하다. 트랜스처럼 중간 조정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더 환해진다. 일하며 넘나드는 생각 속에 마무리 지어진 깔끔한 마루세상이 한 여름에 빛을 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