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섬(:대마도)은 조선 지방이니, 마땅히 조선 일에 힘을 써야 한다."
― 에도 막부 장군의 측근이 대마도 고위관리에게 한 말.
서기 1617년 통신사 이경직이 자신들(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던 대마도의 고위관리에게 이 말을 듣고 적어 놓았다.
대마도는 … 대대로 우리 조정의 은혜를 받아 조선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요,땅으로 말하자면 조선에 부속된 작은 섬이다.
― 서기 1590년,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 부사로서 일본을 다녀온 김성일이 조선에 돌아온 뒤 낸 보고서에서
우리 대마도에게
조선 영토 안의 주 군(州 郡)의 예에 따라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 : 도장)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 서기 1419년 대마도 정벌 뒤에 대마도주가 보낸 서신에서.
(전략) … 이곳은 일본 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서 망령되게 자존하면서 포악하오나,
이들 모두 도서(圖書)를 받고 우리 조정에 귀순하기를 바라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데 이 섬의 두목들에게 예전처럼 오고 가게 하고,이따금 양식이나 주고 도서를 주어 뜻밖의 우환에 대비하게 하소서.
― 서기 1444년 대마도에 보내졌던 초무관 강권선이 세종에게 보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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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후반(1000년경)부터 13세기 후반(1200년경)까지 200여 해 동안 대마도의 고려에 대한 진봉관계가 연구로 밝혀지고 있습니다.(대마도는 고려 때에도 우리의 영토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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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요약기(山家要略記)』(:12세기 말 일본 천태종의 승려가 쓴 책)에 말하기를 "대마도는 고려국의 목(牧 : 목장)이다.
옛날에는 신라 사람들이 살았는데, 개화천황(開化天皇)대에 이 섬(대마도)으로부터 (일본본주로) 습래(襲來)해 왔다.
중애천황이 풍포궁에서 대마도를 거쳐 신라를 정벌함으로써 마침내 이 섬을 얻었다."고 하였다.
- 1723년 대마도인 등정방(藤定房)이 쓴 대마도의 역사서인『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에서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없다.
― 13세기 말의 일본 책인『진대(塵袋)』 제 2권에서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는 선종 2년(1085) 이래 대마도주를 '대마도구당관(對馬島勾當官)'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흥미롭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제주도의 성주(星主)를 '탐라구당사'(耽羅勾當使)로,일기도(대마도와 구슈 섬사이에 있는 이키 섬) 도주(島主)를
일기도구당관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당관은 고려시대 변방 지역 내지 수상(水上)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 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이다.
이를 보면 탐라,대마도, 일기도의 지배자에게 고려가 구당사 혹은 구당관이란 명칭을 붙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앞의 세 섬을 고려의 속령(: 영토로 속한 땅)으로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고려 정부가 대마도와 제주도를 고려 고유의 지배 질서 속에서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하우봉의 논문『한국인의 대마도인식』에서
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어놀기 시작하였다.
― 태상왕이었던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교유문에서
대마(:대마도)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 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 : 서적, 기록)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던 것이다.
― 대마도를 정벌한 뒤 대마도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 :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大內殿)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 (:조선)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 대마도 정벌 이후
일기도로 파견된 조선 관리인 강권선에게 일기도 영주 대내전(大內殿)의 관반(館伴)인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한 말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팔도 전도』에는,
독도 뿐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myhome.naver.com/sw016/f-00.htm ]
[“‘총각’이 한국말이라고요?” “아니 ‘지게’도 한국말이에요 ]
‘쓰총’(쓰시마 총각) ‘삿총’(삿포로 총각)이란 줄임말을 쓰는 쓰시마의 택시 운전사에게 ‘총각’이 한국말이라고 알려주자
깜짝 놀란다. 한국의 지게 역시 쓰시마에서도 ‘지게’로 불린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선 이런 말을 들을 수 없다.
쓰시마에서만 통용되는 한국산 단어는 지금도 300개가 넘는다.
일제시대 한국인 2만여명 살아
섬 전체의 92%가 척박한 산악지형이고 농토는 3%도 안 되는 대마도의 생존과 성쇠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의 교류에 크게 좌우되어왔다.
대마도향토연구회 회장인 나가토메 히사에는 “한반도와 대마도의 관계는 밝았던 시대와 어두웠던 시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좋았던 시기로 기원전 3세기∼2세기의 500년과 조선 초기를 들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대마도는 인구가 9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융성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인구가 해마다 줄어 지금은 4만여명에 불과하다.
한국인도 일제강점기에는 2만여명이나 살았지만 지금은 60명에지나지 않는다.
1999년 부산∼대마도간 정기여객선이 취항한 이후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엔 1만5300명의 한국인이 대마도를 찾았다.
파도가 높아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뜨지 않으면 대마도의 주요 호텔과 음식점들이 텅비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