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무한도전
민재가 마리아와 마리아 아빠를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오후에 택시 일을 잠깐 접었지만, 꿈나무 골퍼와 프로 골퍼를 접견시켰다. 보람이 컸다.
줄탁동시(啐啄同時)처럼 알에서 깨어나려는 병아리와 그 병아리를 도와주는 어미닭이 만난자리였다. 함께라면 무엇을 못 하겠는가 싶었다.
택시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마리아와 마리아 아빠가 하버브리지 아래 바다에 눈을 두고 있었다. 룸미러로 보이는 부녀(父女)가 평화 그 자체였다.
바다건너 노스코트에 들어섰다. 마리아가 사는 집 앞에 도착하자, 고기 굽는 냄새가 동네에 진동했다.
“어. 민재. 어서 와. 그렇잖아도 기다렸네. 우리 이사 온 기념으로 저녁 바비큐 파티를 준비했어. 잘 됐어. 우선 함께 먹고 보자고. 식기 전에.”
마리아 세 식구가 렌트(셋방살이)들어 사는 집. 바로 그 집을 사서 이사 온 루나 아빠가 뒤뜰에서 바비큐 틀에 고기를 굽고 있었다.
뉴질랜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스카치 필렛 스테이크였다. 바비큐 틀 한쪽에는 감자와 옥수수도 익어갔다. 소금과 후추 올리브유도 탁자위에 놓여있었다.
“민재 오빠! 아이 반가워라. 나, 내일 더니든 기숙사로 내려간다고. 이렇게 소고기 파티를 열어주시네. 오빠랑 함께라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아서 좋아.”
이층에서 내려오던 루나가 민재를 보며 반갑다고 입이 헤 벌어졌다. 손에 든 쟁반이 춤을 췄다. 각종 야채와 반찬이 살짝궁 널뛰다가 멈췄다.
“루나야. 그리도 좋니? 그래. 이사도 하고 방 정리도 마쳤고. 더니든 대학 내려가도 편하겠지. 시험도 다 끝났으니. 오늘은 실컷 소고기 먹는 날이네.”
민재의 응원에 루나가 힘 받아 달뜬 얼굴로 야외 탁자에 쟁반을 올렸다. 이어서 루나 엄마가 접시와 포크 나이프 소스통 얹은 쟁반을 내려놓았다.
“푸른 초원에서 풀 먹고 자란 소라서 고기가 다르네. 스카치 필렛은 우리말로 꽃 등심 아닌가? 입안에서 살살 녹네. 어서들 둘러앉아 들자고.”
루나 아빠가 푸짐하게 구워낸 스카치 필렛을 각 접시마다 올려놓았다. 루나 아빠와 엄마 그리고 루나. 합석한 마리아와 마리아 아빠 그리고 민재.
여섯명이 야외 탁자에 빙 둘러 앉았다. 루나 아빠가 이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뒤 레드와인 한 박스를 들고 내려왔다. 3리터 종이 박스용 와인이었다.
뉴질랜드 인들이 즐겨 찾는 Velluto Rosso였다. 민재가 통가리로 크로싱 갔을 때, 저스틴이 가지고 나왔던 그 레드 와인이었다. Soft & Smooth 맛.
눈치 빠른 루나가 얼른 올라가 와인잔 세트를 들고 나왔다. 여덟 개였다. 두 개 가 남았다. 각 잔에 불타는 석양을 채웠다.
“누군가 함께라면 여덟 개가 맞을 텐데. 아, 한 개는 마리아 엄마 거네. 일마치고 한 시간 후면 온다고 했어.
그럼 남는 한 잔은 누구 거지? 특별 손님이 와서 채워주려나.”
인심 좋은 얼굴에 여유로운 덕담까지. 하여튼 루나 아빠는! 없는 사람 자리까지 챙기신다. 오지랖 루나 아빠가 건배사를 풀어 댔다.
“무한도전. 알지? 무조건 도와주고, 한없이 도와주고. 도와 달라고 하기 전에 도와주고. 전화 걸기 전에 도와주자. 무한도전!
여긴 뉴질랜드 이민사회야. 외롭잖아. 고국 친척도 친구도 없고. 우리가 바로 친척이고 식구야. 누가 도와주겠어?
우리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지. 자. 무한도전!“
“무한도전!”
“팅!”
한 자리에 들러 앉아 먹고 마시며 환담하는 자리. 함께라면 뭐가 부럽겠나. 석양 노을도 와인 잔에 넘나들었다. 함께 붉은 기운으로 물들어갔다.
스카치 필렛 스테이크에 구운 감자와 옥수수. 뉴질랜드 인들이 즐겨먹는 식단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한 모금에도 홍조가 된 마리아는 곧 제 얼굴을 찾았다. 역시 순환이 빨랐다. 나중에 프로 골퍼가 되면 우승 후 와인잔을 팅팅 할 거다. 오늘은 전초전.
어른 들 속에 마리아의 눈빛이 빛났다. 옆에서 루나가 마리아 접시에 고기와 소스를 챙겨주었다. 식탁 아래, 마리아 손이 루나 손을 살그머니 잡았다.
루나도 마리아 손을 꼭 쥐어주었다. 무한도전! 무한도전을 새겼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라. 물어본다 생각해 놓고도 고기 굽느라 잊어 버렸네.
마리아 아빠. 마리아 어떻게 됐어요? 프로 골퍼한테 찾아간 일요.”
“네. 민재 선생 덕분에 아주 일이 잘됐어요. 골프 테스트 인터뷰도 잘 끝났고요. 마리아에게 맞는 새 골프 클럽도 구했어요. 잘 챙겨 주셨어요.”
그때, 민재가 일어나 마리아 손을 끌었다. 택시로 가서 꺼내지 않은 짐을 꺼냈다. 마리아는 민재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옷가지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짠하고 민재와 마리아가 바비큐 탁자 옆으로 다가왔다. 모두 휘둥그레 놀란 얼굴이었다.
새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마리아. 새 골프 클럽을 든 민재. 선수와 스폰서.
훤칠한 키에 날렵한 체형. 하얀 골프화에 챙이 긴 야구 모자. 모자 뒤에 나온 꽁지머리. 까만 선글라스. 면장갑까지. 거기에 5번 우드까지.
“아니? 우리 꿈나무 골퍼 등장하셨네. 세계 프로 골프 신동. 마리아 우승자!”
루나가 열렬한 팬이 되어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다른 사람도 일어나 열렬히 환호했다. 마리아가 공손하게 답례 인사를 했다.
민재가 텐트형 골프 망 세트를 뒤뜰 구석에 갖다가 임시로 설치했다. 야외 텐트 치듯. 마리아 앞에는 샷 연습용 매트를 깔았다.
마리아가 연습용 매트위에 볼을 놓고 응시했다. 이어서 드라이브 샷하는 자세를 취했다. 뉴톤 골프 웨어 하우스에서 시범을 보인 대로 했다.
장소만 바뀌었다. 옆에서 보는 이들도 달랐다. 긴장이 줄고 더 자연스러웠다.
먼저 어드레스 자세를 취하고 백스윙, 테이크어웨이를 시작했다. 클럽을 살살 뒤로 끌어갔다. 클럽이 지면과 평행을 이루면서.
백스윙 탑도 유연하게 그려갔다. 몸을 최대로 회전하고 탑에서 다운스윙으로 내려왔다. 순간 임팩트를 하며 골프공을 그물망으로 날렸다.
“딱!”
마리아가 날아가는 공을 바라보며 2~3초 정도 피니쉬 자세를 유지했다. 어드레스부터 탑 스윙, 다운스윙, 임팩트 그리고 피니쉬까지 완벽한 샷이었다.
힘 있고 통쾌했다. 유쾌, 상쾌, 통쾌란 말이 여기에서 나온 말인가. 순간이었지만, 보는 이들이 전율을 느꼈다.
세상에 얼마나 힘이 컸는지 그물망이 넘어졌다. 모두 일어나 열광했다.
“우~와!”
“짝짝짝!”
환호하는 가족에게 마리아가 우드 채를 하늘 높이 가로로 든 채 답례했다. 꿈나무 천재 소녀의 기운이 넘쳤다. 마리아가 외쳤다.
“무한도전!”
동네에서 골프를 치면서 보기 플레이 정도는 하는 루나 아빠와 루나 엄마가 입을 다물지 못하며 칭찬했다.
“골프 신동이네. 임팩트가 정확하고 파워가 장난이 아냐!”
“저 흐트러지지 않은 피니쉬 자세는 예술이야. 예술!”
루나가 마리아에게 다가가 어깨를 꼭 안아주며 외쳤다.
“무한도전!”
마리아 아빠가 골프망 있는 곳으로 가서 넘어진 것을 다시 세웠다. 루나 아빠가 망치를 들고 나왔다. 골프망 텐트 고정용 팩을 야무지게 때려 박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민재가 휴대폰을 꺼내들어 받아보니 제니였다.
“응. 제니. 웬일이야?”
“민재야. 나 좀 도와줘.”
“무슨 일이야? 나 여기 노스 쇼어. 노스 코트인데.”
“어. 그래 잘 됐네. 여긴 그 옆 힐크레스트야.”
민재가 루나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얼마지 않아 택시 한 대가 집 앞에 도착했다. 마침 마리아 엄마도 퇴근하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제니와 마리아 엄마가 들어오자, 루나 엄마가 반갑게 맞이했다. 우선 자리에 앉아 남은 음식부터 들라고 접시에 차려주었다.
둘 다 배가 고팠는지, 좌우 안 가리고 스카치 필렛부터 먹었다. 뉴질랜드에서도 비싼 고기라 자주 못 드는 소고기, 꽃등심의 맛이 어련할까.
루나 엄마가 빈 와인 잔을 제니와 마리아 엄마 앞에 내밀었다. 마리아 엄마에게 우선 한잔 따라 주었다. 멈칫하는 제니한테도 조금 따라주었다.
“마리아 엄마 애쓰네요. 이 레드 와인을 우리 부부는 자주 마셔요. 농장 일 마치고 저녁 식사 때 한잔씩 했어요. 우선 피로 회복에 좋아요.
심장 건강과 피부 건강에도 좋대서 가끔 마셔요. 마리아가 골프 천재 소녀 같은데. 오늘 프로 골퍼를 만나 장래가 촉망된다고 인정받고.
골프 레슨으로 도움을 주기로 했다는 소식이 내 일처럼 기쁘네. 민재 선생이 제자를 잘 봤어. 아무렴. 좋은 사람을 만나야 삶이 펴지지.
마리아는 복도 많지. 마리아 엄마. 조그만 더 참아요. 마리아가 신동 골퍼로 곧 등극할 테니까.“
제니 옆에 앉아 듣던 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루나 엄마 옆에 앉은 루나가 민재와 제니를 힐끗 바라봤다. 무슨 사이지? 나이도 비슷한 것 같고.
민재가 눈치 채고 루나 엄마와 루나에게 제니 이야기를 곁들였다.
“우선 먹어야 하니까 제니는 그대로 들고. 제니는 같은 택시 회사 동료예요. 같은 한국 사람이라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에요.”
제니가 얼추 배고픈 요기는 마친 듯, 웃으며 제대로 인사했다.
“죄송해요. 민재와 상의할 일이 있어 전화했더니, 이곳에 있다 해서 들렀어요. 마침 근처에 손님을 내려놓고서요. 배고픈 터에 정말 잘 먹었어요.
배고픈 나머지 염체 불구하고 우선 배부터 채웠네요. 스카치 필렛 요리.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그제야. 루나가 긴장을 풀고 제니를 제대로 대했다. 골프 스윙 연습을 마친 마리아가 엄마 옆으로 와 앉았다.
“어머나. 우리 마리아. 멋진 선수 됐네. 유니폼을 갖춰 입으니 한 인물 나네. 이런 걸 모르고 제대로 옷도 못 사주고. 엄마가 미안하다.”
“엄마는?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뭐가 미안하다고 그래? 조금만 더 기다려. 이젠 뭐가 좀 이뤄지는 것 같아.
오늘 좋은 분 만나 얼마나 기뻤는데. 민재 선생님께 정말로 감사드려요. 골프 숍에서 저를 지도할 프로 선생님을 소개해 만났는데.
감동적인 일이 많아 아빠가 거기서 그만 울었다니까. 그 우는 모습을 보고 내가 더 복받쳤는데.
엄마와 아빠 그리고 민재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정말 잘 할 거야.“
마리아 엄마가 민재한테 고개를 숙였다.
“민재 선생님. 우리 마리아를 이렇게 돌봐주고 신경 써 주시니, 제가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리아 엄마. 이제껏 잘 해오셨어요. 고된 생활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마리아는 기필코 세계적 선수가 될 거라 믿어요. 힘 내셔요.”
루나 엄마가 마리아 엄마 잔에 와인을 더 따라 주었다. 침묵하던 루나가 조심스레 한 마디 했다.
“마리아 엄마. 저도 마리아를 동생처럼 여겨요. 내일 더니든에 내려가요. 곧 인턴 생활할 거예요. 민재 오빠, 고마워. 항상 든든해 좋아.
근무 희망지는 노스 쇼어 병원과 오클랜드 병원으로 지원해놨어요. 이곳에 오면 저도 한국학교 유치원 교사로 봉사하려고요. 제 전공이 소아 정신과라서요.”
제니가 상황을 읽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 루나라는 딸이 여 의사라고? 민재더러 오빠라고 하고. 그럼 나는 뭐지? 민재는 모든 사람이 다 챙겨주네.
마리아는 꿈나무 신동이고. 촉망받고. 도대체 내가 설 자리는 어딘가? 민재한테 물어보고 정작 상의할 이야기가 쑥 들어가 버리네. 제니가 가만히 일어섰다.
“루나 엄마. 갑자기 와서 저녁 맛있게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루나씨. 마리아 잘 부탁해요. 마리아 엄마. 저도 힘 닫는 대로 마리아 도울게요.
마리아. 힘내자. 빛이 보여. 천재 신동 소녀 골퍼. 한국 학교에서 곧 볼 거야. 민재야. 나 이만 가 볼게. 할 일이 또 생겼어. 다음에 이야기 하자.“
화들짝 놀란 민재가 총총 사라지는 제니를 따라 가며, 제니 팔을 잡았다.
“제니야. 무슨 일 인데? 오늘 왜 이래?”
제니가 민재 팔을 풀어놓고, 입구에 세워둔 택시로 갔다. 곧 시동을 걸었다.
“부릉. 부릉!”
민재도 재빨리 택시 시동을 켰다. 바로 제니를 쫓아갈 태세였다. *
38화 끝(5,814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