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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광야에서 불 뱀을 만났을 때(2157.2022.10.2.) 민 21:1-9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는 광야 여정의 책입니다. 죽음의 땅 애굽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는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한 기간을 보통 40년으로 잡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40년 광야생활의 막바지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론의 죽음으로 구세대가 마감되고 신세대는 새로운 각오로 가나안 땅을 향하여 호르산을 출발하게 되는데 첫 출발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1절 이하에 나오는 대로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아랏의 왕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첫 전투에서 승리를 맛보았던 이들은 얼마나 자신감이 충만하였겠습니까? 가나안 땅도 점령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로 희망차게 행군을 시작하였던 이들에게 낙심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에돔 왕이 자기 땅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아서 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먼 길을 우회해야 했던 것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자손으로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과는 형제나라입니다. 형제나라는 자기들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알았는데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그래서 먼 길을 돌아가야 했을 때 이들은 마음이 상하여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이들 신세대도 구세대와 마찬가지로 조금만 어려우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평하고 불만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을 흔히 광야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광야생활을 할 때 얼마나 마음 상하고 힘든 일이 많겠습니까? 모든 일들이 내가 생각하고 내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성공적인 직장생활 속에서도 남모르는 고민이 있고, 학교생활을 하는 자녀들에게도 많은 문제들이 있고, 가정을 꾸려가는 주부들에게도 알지 못하는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광야생활 자체가 힘들 듯이 우리의 인생자체가 힘든 하루하루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마저도 원망하였습니다. 이곳에는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먹을 것이 없어서나 마실 물이 없어서 죽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원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불평하였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불평과 불만은 우리의 삶의 갈림길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멸망의 길로 죽음의 길로 저주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욥과 같이 원망하지 아니하고 범죄하지 아니하면 생명의 길로 축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참으로 그 은혜가 놀랍습니까? 감사하고 기쁘게 살아가십니까? 찬송하며 영광스럽게 살아가십니까? 그런데 왜 근심하며 염려하며 불평하며 원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 민수기의 이야기는 바로 나 자신의 자화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를 공부해 가다보면 10장이후 어리석은 백성들의 불평 불만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11장에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행진 후미에 큰 불이 떨어지는 사건입니다. 12장에 미리암이 지도자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이가 되는 얘기입니다. 13-14장 열 점탐꾼의 원망이 나옵니다. 16장에 고라 일당이 반역하다가 지진을 만나 몰사합니다. 20장에 마실 물이 모자란다고 불평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21장 불평하다가 불뱀떼가 나타나 백성들을 물어 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땅에 이르렀을 때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 밟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을 돌아 홍해 쪽으로 가다가 그만 심신이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만 마음이 조급해져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잘사는 사람 애굽에서 끄집어 내 광 야에서 죽게하느냐고. 먹을 것도 모자라고 마실물도 모자란다고. 매일같이 먹는 만나와 메추라기 같은 음식엔 넌더리가 난다고 불평이었습니다. 성경은 불평과 원망 죄를 간단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모세의 말에 순종하고, 주의 종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삽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사람은 그 불순종으로 인해 죄를 짓고, 또한 그 죄 값으로 인해 병들고, 망하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고통과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대로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받고 과거의 축복과 사랑은 다 잊어버린 채, 현실만 보고 원망과 불평에 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원망과 불평은 뱀을 불러들이고 뱀은 결국 우리를 물어 죽게 만듭니다. 불신과 원망과 불평은 우리 몸에 독이 퍼지게 해 건강을 잃고 병들게 만듭니다. 기쁨을 잃고 기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불신앙에 빠져 하나님의 축복의 반열에서 서서히 떠나게 만듭니다. 가난과 저주와 질병으로 멸망하고 죽음을 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 간의 노예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애굽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애굽을 떠나는 날부터 원망을 시작했고 결국은 그 원망 때문에 다치고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다.
1.저들이 왜 원망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길이 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4절‘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을 애굽에서 살았던 탓으로 여행을 해본 일도 없었고 애굽이외의 나라를 가본 적도 없었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횡단하며 겪은 일들은 어렵고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갈 길은 멀고 기후는 나쁘고 길도 없었습니다. 이정표도 없고 방향도 잘 모릅니다. 제멋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가라면 떠나고 서라면 멈춰야 합니다. 거기다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오합지졸입니다. 왜 불평이 안 일어났겠습니까? 그러나 더 문제는 4절 끝의 ‘마음이 상하니라’였습니다. 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길이 험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험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편하면 몸도 편하고 길도 편하고 하는 일도 편합니다. 그리고 결과도 편합니다. 우리 마음상하지 않도록 늘 기도하시고 마음에 항상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민20:2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마시는 물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고 다투었다고 했고, 민21:5을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고 했습니다. 민20:5절‘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며 원망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를 향한 그들의 불평과 원망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다는 점입니다.
출17:2절‘백성이 모세와 다투었다’고 했고,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고 했습니다. 출17:7절‘그 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고 했습니다. 민20:13절‘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라고 했고, 민21:5절‘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간 광야생활을 했지만 단 한 명도 목말라 죽거나 배고파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고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그것말고 정력에 좋은 것들, 스테미너 식, 군것질할 것들이 없다며 원망한 것입니다. 식도락도 혐오식품을 찾아다니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것 먹으러 태국, 필리핀, 중국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데 끼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먹고마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민20:12절‘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고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지도자였던 모세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문제였습니다. 모세에게 대들고 모세에게 덤비고 원망하고 시비를 건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출3:14절‘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했습니다. 그 뜻은 ‘나는 나다’라는 것입니다. 출20:3절‘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라는 뜻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시136:2절‘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고 3절‘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비교할 신이 없으신 하나님, 오직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구원도 무너지고 기도도 무너지고 축복도 무너져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신앙이 무너지는 바람에 다 무너진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6절‘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고 했습니다. 원망, 불신, 배신의 결과는 저주, 재앙, 죽음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결과는 같습니다. 감사하면 살고 원망하면 죽습니다. 믿으면 되고 안 믿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시면서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가야 합니다.
2.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의 불뱀골짜기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는 것입니다. 대개 원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막무가내로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타당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불뱀골짜기란 마음 상하여 치유받지 못한 곳입니다. 4절‘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했다’ 그랬습니다. 마음 상했으나 치유받지 못한 그곳, 속이 상하여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으나 고침 받지 못 한 마음이 바로 불뱀 골짜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빨리 가면 좋겠지만, 매사가 빨리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지름길로 가지 않고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시간이 걸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얼마나 속이 썩고 상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까? 부부간에 살아가다 보면 속상한 일들이 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마음 상한 일들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업 때문에 직장생활 때문에 이 세상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다가 심지어는 신앙생활하는 교우들과 더불어 살아가다가 마음 상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치유되지 않은 마음은 마귀가 사로잡아 불평하게 하는 불뱀 골짜기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마음이 상하여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고침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치료하는 광선으로 성령으로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창조하시고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길을 알고 계시고 계획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길이 못마땅하다는 거지요. 너무 멀다고 불평했습니다. 너무 험하다고 불평했습니다. 그 길을 선택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저들과 동행했습니다. 사랑하는 종인 모세와 아론을 보내서 저들을 양떼처럼 인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향한 거룩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름다운 인생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넓은 길을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좁은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길을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저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달려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길이 못내 못마땅하다는 거지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에 대해 늘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불평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의 인생길이 찬양의 골짜기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불뱀 골짜기가 되어 있습니까?
불뱀골짜기란 원망의 골짜기입니다. 불뱀 골짜기는 원망의 골짜기였습니다. 5절‘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그랬습니다. 무엇을 원망했습니까? 특별히 여기서는 본문 그대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진’ 사실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준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예백성 들을 끄집어내 가나안으로 가게 해 준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옥에서 멸망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인생들을 끄집어내 천국백성 삼아준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땅의 백성들을 하늘 백성 삼아 주신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불평이 체질화되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불평하며 원망하며 살아가더란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원망거리가 왜 없겠습니까? 세상이 다 내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불평거리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원망을 처리하는 기술이 그 사람의 인격이요 신앙의 수준입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을 예정해 놓았다가도 거두어 가십니다. 원망은 곧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왜 원망하는 것입니까?
또 어떤이가 두 앵무새를 각각 다른 새장에 길렀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는 노래를 배우고 한 마리는 욕을 배웠습니다. 주인은 두 마리 앵무새를 함께 두면 노래를 배우리라 생각하고 함께 새장에 두었지요. 얼마후 주인이 문열고 들어갔더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더랍니다. 어떤 노래를 들어보세요. ‘주인새끼 온다’그러더랍니다. 욕을 배우고 말았던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은 자신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는 못된 성질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평하는 사람과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같이 불평하고 같이 망합니다.
불뱀골짜기란 권태의 골짜기입니다. 5반 후반절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하나님의 음식에 대한 권태가 온 것입니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타날 신비한 음식이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나 먹고 살아 가는 만나였습니다. 그것을 먹고서도 ‘이 따위가 뭐냐’고 넌더리를 떨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불만이 11장에 나오지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기를 ‘우리가 애 굽에 있을 때 먹었던 생선과 수박과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난다. 이것들을 못 먹으니 정력이 쇠하여 졌도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고기가 먹고 싶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애굽의 과일, 애굽의 음식을 그리워하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신나던 것들이 아직도 신나게 느껴지십니까? 세상에서 좋아하던 그 일들을 아직도 좋아하며 살아가십니까? 세상의 못된 습관들 아직도 짜르지 못하고 살아가십니까? 바로 거기가 불뱀 골짜기입니다. 이 불뱀 골짜기에서 뱀에 물린 사람은 한 걸음도 신앙의 향상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제는 입맛이 달라져야 합니다. 재미있게 여겨지던 것이 시시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이 신나야 합니다. 찬양하는 시간이 영광스럽게 여겨져야 합니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저주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않는 것이 저주입니다. 교회 생활이 인생생활이 재미가 없는게 저주더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의 말을 삼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상한 상태로만 그냥 있었어도 하나님의 진노는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입술로 원망, 불평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현재 우리는 30년, 50년 전보다도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고 문명과 문화의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욕심 때문에,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불평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지옥에 가서도 감사할 수 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서도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의 마음의 자세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시37:7-9‘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누가 승리합니까? 감사하는 사람이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다 실패합니다. 불평과 원망은 자신의 인생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도 망칩니다. 그러나 감사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앞으로 전진하여 성공하고 승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나와서 은혜 받고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평하며 원망하는 사람은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3.원망과 불평으로 가득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민21:6절‘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원망과 불평은 뱀을 불러들이고, 뱀은 우리를 물어서 몸에 독이 퍼지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원망과 불평은 우리 몸에 치명적인 독이 되는 것입니다. ‘불뱀’은 중동 지역에 많던 독사의 한 종류입니다. 이 뱀은 등에 불타는 듯한 붉은 반점이 있는데다가, 독성이 강해서 사람이 한번 물리면 온몸에 독이 퍼져서 불같이 뜨거운 열을 내다가 죽게 만들기 때문에 ‘불뱀’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니까 불평과 원망은 몸에 열이 펄펄 나게 해서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물과 불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홍수가 나기도 하고, 지진이 터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전쟁이 나기도 하고, 전염병이 돌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민14:29-30절‘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원망하는 자는 약속의 땅,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불평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부르짖고 기도를 해도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지 못하며, 따라서 응답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약5:9절‘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병원에 한 임산부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은 기독교 병원이었기 때문에 복도에도, 병실에도 예수님의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그 임산부는 액자를 보고 이유 없이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 간호사를 불러서 그 액자를 좀 떼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간호사는 ‘저는 그 액자를 떼어 낼 권한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자는 화가 나서 자기 남편이 누군 줄 아느냐며 원장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장 역시 그 액자를 떼어 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그 액자를 떼 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내가 직접 떼지요’이렇게 말하고 나서 임산부는 무거운 몸으로 의자에 올라가서 그 액자를 떼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 아이는 절대로 저 사진을 보지 못하게 할겁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그 여자는 출산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말했던 대로 그 여자의 아이는 영원히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장님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람, 기독교에 대항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저주받고 심판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람, 감사치 못하는 사람, 그래서 가난과 질병,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원망, 불평하는 죄에 빠지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민21:7절‘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뱀에 물려 독이 퍼져 죽게 되자, 비로소 회개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얻어맞아야 회개를 합니다. 오늘날도 병들어 죽어가고, 아주 망해 버려야 회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죄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원망한 것도 죄가 되고, 모세를 원망한 것도 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뱀에 물려 죽어 가면서 모세를 찾아갔고,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뒤늦게나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구원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대하 7:14절‘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질병에서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를 통해서 축복하십니다. 회개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비록 감사치 못한 죄, 원망하고 불평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래서 지금 병들고 어려움을 겪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서 더 깊은 죄악과 저주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요일1:9절‘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죄라도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죄악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저주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옵니다. 주님께서 나를 박대하시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나의 죄,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큰 죄, 작은 죄, 다 주께서 용서하시고 구원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할 때는 기쁨과 평강이 사라지고 잠도 안옵니다. 그러나 감사를 드리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원망·불평하지 마시고, 원망·불평한 죄가 있다면 회개하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4.놋뱀을 만들어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여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회개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만들어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민21:8-9절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놋을 녹여서 불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놋뱀을 쳐다보라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말에 순종해서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해독이 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불순종하며 땅만 쳐다보고 원망, 불평한 사람들은 서서히 독이 퍼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 걸리는 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순종의 병입니다. 이 병은 눈에는 안 보이지만, 병중에서도 아주 심각한 병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불순종하면 불행해집니다. 학교에서 학생이 선생님에게 불순종하면 공부를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의 교만과 완악함이 다 깨어지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여 최상급의 인생을 살게 하시고, 상급 받는 인생을 살게 하시고, 복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장대 높이 매달리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될 죽음의 자리에 주님이 피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바라보고 앙망하는 자는 구원 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했습니다. 여러분 이 확실한 사실을 믿으십니까?
장대위에 달린 놋뱀을 보는 것이 무슨 치유의 효과가 있겠습니까? 독뱀에 물려서 고통과 비명 가운데 죽어가는 사람을 향하여 장대 끝을 쳐다보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었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들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놋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쳐다보면 살리라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재미있는 사실 한 두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장대에 달린 놋뱀이 그 자체에 독소를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불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된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장대에 달린 그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면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성경을 잘 보면 백성을 상하게 만든 뱀은 ‘불뱀들’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을 구원하는 놋뱀 불뱀은 단수로 되었습니다. 죄는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치유의 길은 하나 놋뱀이지 여럿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장대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유사한 뱀을 만들어 곳곳에 세워두었다 해도 그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겝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요14:1절‘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행4:12절‘예수 그리스도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약을 발라도 소용없습니다. 살을 도려내도 소용없습니다. 믿음의 어머니가 그 아이를 가슴에 끌어안고 목놓아 울어도 소용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걸어서 달려와서 그 뱀을 쳐다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달려올 수도 걸어올 수도 없어서 엉금엉금 기어서 왔 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의 등에 업혀서 왔을 겝니다. 어떤 사람은 이놈아 저거 안 보면 죽는데 어머니 손에 질질끌려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장대 높이 매달린 뱀을 쳐 다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었습니다. 가까이에서 그 놋뱀을 쳐다보던지, 까마득히 먼 곳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놋뱀을 쳐다보던지, 시력이 좋아서 뚜렷하게 놋뱀의 꼬리 눈망울까지 쳐다볼 수 있던지, 시력이 나빠서 희미하게 그냥 쳐다보던지 쳐다보는자에게는 구원받는 것은 분명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들이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주님을 의지하는 순간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만이 나를 영접해 주실 분임을 믿습니다. 내 마음에 중심의 문을 엽니다. 이제 찾아 오셔서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시옵소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이 시간 모두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무엇을 상징합니까? 요3:14절‘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이 놋뱀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보면, 이 놋뱀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놋 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 수 있었듯이 오늘날도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죄 사함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3: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했습니다. 17절에서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내 뜻대로 빨리되지 않는다고 조급해 하거나 인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불평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원망은 분명히 범죄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처럼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항상 감사하며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알아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결국 좋으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한 주간도 감사가 넘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놋뱀이 달린 이유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는 짓이 꼭 뱀 같은 짓을 한 것입니다. 혀를 낼름 낼름하면서 한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같으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하고 원망불평에 사로잡히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자나 짐승 같은 무서운 짐승을 동원해 짓밟아 버린 것이 아니고, 뱀같이 무서운 존재를 보내어 백성들을 물어 죽게 하신 것입니다. 범죄의 심판도 밤같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듯, 하나님의 심판도 이와 같이 임하는 것입니다.
눅9:23절‘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바로 나를 십자가에 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주님임을 선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놋뱀은 나를 대신해서 죄인으로 죽으신 예수님도 상징하지만 늘 무서운 독을 내뿜고 남에게 수많은 아픔과 상처를 주었던 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옛사람, 그 못된 자아를 매달고 주님을 향해, 주의 종을 향해 다시는 원망불평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순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를 사랑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십자가가 모든 문제의 열쇠입니다. 그리고 뱀같이 사람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었던 나를, 그 옛 자아가 매달아야만 주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도 봐야 하지만 내 옛 사람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누리게 하는 열쇠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날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온전히 주님을 따라감으로 생명의 삶, 축복의 삶, 은혜의 삶,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리 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찬송가 421장에 보면 ‘내가 예수 믿고서 죄 사함 받아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내가 가는 길 천국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가 씻겼네’ 광야같은 세상이지만 예수 믿고 죄 사함받은 자의 삶은 고통의 삶이 아니라 천국의 삶으로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3절에 ‘내게 성령 임하고 그 크신 사랑 나의 맘에 가득 채우며 모든 공포 내게서 물리치시니 내 맘 항상 주 안에 있겠네’ 모든 공포 내게서 물리치시니-죽음의 공포 질병의 공포를 다 물리치고 항상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자의 믿음으로 이러한 평안과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 믿는 성도는 복 받은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음만 분명하다면 성도가 저주 받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축복의 믿음에 견고히 서서 살아가므로 우리의 삶에 저주는 사라지고 놀라운 축복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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