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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난
1) 7ㆍ4 수난사건
협회 창립 이후 만 1년간, 식구들은 평상 사회적 기준과는 현저하게 눈에 뛸 만큼 매우 열기에 찬 나날을 살았다. 남남끼리 모여 한 가족 사이보다도 더욱 농도 있게 서로 위하고 염려하고 돕고 그리워하는 가족적 유대를 갖고 지냈다. 자발적으로 전도하고 강의하고 이상세계 창건이라는 벅찬 목적 구현을 불원한 장래로 실감하면서도 숨가쁘게 서로 밀고 끄는 활동의 나날을 엮어 왔던 것이다.(392)
공산치하 북한에서 겪으신 옥고(獄苦)로써만도 하늘편이 입은 통증(痛症)은 너무 심하고 그 지불의 대가(代價)는 과(過)한 것이었다. 그러하거늘 자유의 땅에서마저 신앙의 자유가 무참히 짓밟히고 하늘의 행진이 폭격을 받지 않으면 안 될 무슨 탕감의 여분(餘分)이 있었던 것인가.(392)
참아버님께서는 1955년 7월 4일 하오 5시경 장충동교회에서 서울 중부서 두 명의 형사들에 의해 치안국 특수정보과로 유치되셨다. 하늘색 남방과 바지에 흰 고무신 차림이었다. 늠름하시면서 인자하신 모습으로 문 밖에 망연히 서서 바라보는 식구들을 돌아보며 안심하고 들어가라고 표시하셨다. 모두가 울음과 기도와 호소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날 유효원, 김영운 씨가 동행했다 자정 무렵 돌아왔다.(384)
다음날인 5일엔 김원필 씨가 구금(拘禁)돼 취조(取調)를 받았고, 유효원 협회장 역시 취조를 받고 돌아왔다. 유효원 협회장은 이날 일기에 “그대여. 그대는 임과 더불어 살 수 있을 것인가. 임과 더불어 죽어야 한다. 그대여 약속한 말씀을 잊지 않을 것인가. 못 믿을 고개를 믿고 넘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비장한 당시 심경을 기록해 남겼다. 6일에는 유효민, 유효영 씨가 구금됐다. 11일에는 유효원 협회장이 최순실 씨와 함께 동대문서로 구금됐다.(393)
사건은 기독교 지도층의 교권주의에 의한 반기와 투서로 야기된 것이었다. 서로 싸우던 교파들이 통일교회 반대를 위해서는 하나 돼 마치 성난 짐승처럼 물고 뜯었다.(394)
이승만 박사가 이대 김활란 총장과 박마리아 부총장, 부인 프란체스카의 위신(威信)을 위해 5대 장관을 동원하고 공금과 권력을 남용해 사주(使嗾)했다. 당시 치안국장은 양윤영 교수 연행 조사 때, 김활란 총장과 수명의 목사들이 80여 통의 투서를 보내왔다고 말했다. 그것은 원리운동의 영향력에 위기감을 느낀 기득권의 야비한 횡포였다. 실제는 잘못이 있어서라기보다 두렵고 무서워서 그토록 반대했던 것이다.(394)
7ㆍ4사건 직후 각 신문은 다음의 제목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여신도들의 정조(貞操)를 유린 통일교회 문교주를 체포’(평화신문, 7월 5일) ‘통일교 주인공 문선명씨 구속’(조선일보, 7월6일) ‘불법감금혐의로 기독교통일교회의 문교주 구속’(동아일보, 7월 6일) ‘능변(能辯) 미끼로 능욕(凌辱) 통일교회 교주 문 구속’(서울신문, 7월 6일) ‘정체 드러날 통일교, 교주 문을 구속, 죄상 속속 정로(呈露)’(한국일보, 7월 6일) ‘불법감금 등의 혐의 통일교회 교주를 구속’(경향신문, 7월 6일)(395)
다음날인 7월 7일자 「동아일보」,「경향신문」보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대부분의 언론은 구속 혐의인 병역법 위반과 불법감금보다는 참아버님의 추문보도(醜聞報道)에 집중하고 있었다. 7월 10일자 「중앙일보」는 ‘위 교주의 말로 통일교회’라는 제목으로 장식했고, 이런 유(類)의 기사를 매일 보도했다. 7월 12일자 「경향신문」은 5월 17일에 이어 ‘사교인정’ 기사를 실었고, 이날 「연합신문」도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394)
이렇듯 언론은 실소를 금치 못할 사실무근의 스토리를 지어 유포(流布)해 비난여론의 불을 지폈다. 흥미와 호기심에 찬 활자의 난비(亂飛)로 인한 풍성한 화제를 양산했다.(396)
새로운 섭리가 늘 감옥 출발이었듯이 2차 7년 신약 탕감시대도 역시 그랬다. 참아버님께서는 세상 나쁜 죄목을 한 몸에 뒤집어쓰고 감옥으로 가셨다. 참아버님 한 분을 어떻게 꺾느냐 하는 복잡한 와중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운명 길과 마찬가지로 최후로는 사탄편에 끌려가는 실상이 벌어졌다.(396)
취조 때의 수욕(受辱), ‘야, 자’하는 천대와 다리를 꼬고 앉은 치안국장의 훈계가 뼛골에 사무쳤다. 별의별 협박 공갈을 다했다. 그러나 자신이 받는 고통과 핍박보다 수천 년 준비된 나라와 민주세계 기틀이 무너지는 것이 슬펐다. 한국 기독교는 섭리와 세계를 대표한 위치에 있으므로 반대한 영향은 전체에 미치기 때문이었다.(396)
입이 있어도 말씀하지 않았다. 민족 앞에 사무친 한이 많아도 참으셨다. 예수님이 30년 생애를 참으신 것과 하나님이 2천 년간 참으시며 뜻 성사를 위한 공고한 터전을 닦고 때를 마련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신 복귀 노정을 알았기에 참으셨다. ‘아무려면 세계의 고난 길을 개척해 나가는 데 이만한 어려움이 없을 것이냐?’하며 오히려 고난을 당연시하셨다.(396)
하나님을 모시고 나오는 데 있어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오히려 동정해야 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셨다. 철장에 갇히는 신세가 됐어도, 생명이 남아 있음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위로해 드렸다. 나라와 기성교회에 대해 망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무지와 죄를 용서하고 대신 탕감 지워 달라면서 복을 간구하셨다.(396)
‘제가 사랑하는 민족과 세계를 저 이상으로 사랑해 주시고 저를 위해서는 동정할 필요 없습니다.’라고 기도하셨다. ‘그 허물을 허물로 보지 않고 덮으시사 나에게 채찍을 가해 세계 인류를 탕감하고 보충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며 싸워 나오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하나님의 심정에 불길로서 빈 가슴을 채워 드릴 수 있는 요건이 됐다. 그렇기에 어디에 가든지, 설혹 망할 자리에 가더라도 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으셨던 것이다.(397)
2) 수난 극복과 단결
교회는 상가 분위기에서 부모 잃은 고아요 주인 잃은 양떼처럼 2천 년 전 예수님을 잃은 제자들의 처지와 같았다. 당면한 사태와 장래에 대해 마음으로나마 책임감을 갖고 결속한 중심식구들은 즉시 비상태세로써 특별기도회를 실시했다. 20여 명이 3시간 간격으로 하루 8회 기도를 계속하며 간곡히 하늘 앞에 매달리는 시간이었다. 당시 교회 재정이나 숙식 여건상 식사는 집에서 해결하고 실질적으로 거의 매일 교회에서 보냈다.(397)
5일부터 청년식구들이 전적으로 교회에 합숙하면서 철야기도를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유경규, 이수경, 황환채, 이기석, 홍종복, 이진태, 윤한용, 유광렬 씨 등이 참가했다. 대구에서 급히 올라온 지승도 씨 등 기도 할머니들과 부인식구들과 청년 여자식구들까지 가세했다. 연속적인 찬송과 기도로써 여자식구들은 대다수 몽시와 계시를 받고 방언을 했다. 또 낯선 도인(道人)들이 내방(來訪)해 위로하고 증거하는 역사도 이어졌다.(397)
“지금은 뜻이 핍박을 받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전파되니 낙심 말고 받들고 나가라.”는 격려역사가 있었다. 또 반대하는 무리의 시체가 광화문 네거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중략) 또 “쭉정이는 땅에 떨어지고 알곡만이 남는다.”는 방언이 터지면서 교회 식구들의 심령상태를 일일이 일러주기도 했다.(398)
대표적 수입원인 브로마이드 사진 판매가 점점 부진했고 헌금도 없었다. 오영춘 씨는 재원마련을 위해 동분서주 애썼는데, 이로 인해 빚 독촉에 시달리고 결국 용산역 군인대기소에서 장사를 해 보충하기도 했다. 돈을 마련하랴 면회도 가랴 잠자고 밥 먹는 시간도 없이 뛰었다.(398)
경찰 수사단계에서 여러 선배식구들이 심문(審問)을 받았다. 그들은 거짓투서의 내용에 초점을 맞춰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유치한 질문들을 서슴없이 해댔다. 간음행위 등 누명을 씌우고 자백을 강요당했으나 식구들은 결백과 진실로 항변했다. 수난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더 함께 겪는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다. 한편으로는 신앙이 아직 어린 식구들의 동요와 조기후퇴도 불가피하게 있었다.(399)
예배 때 돌이 날아와 유리창이 깨지고, 식구들 머리에 유혈이 낭자했으며, 흙 모래를 던지기도 했다. 기관원이나 정탐꾼이나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전기장치가 돼 있어 달라붙으면 못 나간다는 소문의 행위에 대처하려고 지팡이를 들고 오기도 했다. 또 옷을 벗기고 혼음한다는 소문을 듣고 삼복더위를 몇 겹의 옷에 핀 꽂고 온 부인도 있었다.(399)
한번은 헌병총사령부 소령 한 명과 청년 몇 명이 와서 신을 신은 채 교회를 걸어다니며 참아버님 방까지 들어가서 비품을 끌어내고 행패를 부렸다. 청년식구들은 심한 구타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방을 사수하려 하자 그들은 단도로 찌르려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이월성 씨가 ‘젊은이들은 할 일이 많으니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뛰어들어 대신 칼을 맞고 피를 흘리는 불상사가 벌어졌다.(399)
그 무렵 월남해 대구에 살고 있는 평북 철산 성주교의 정석천 장로 가족이 “음란단체라고하면 가보라.”는 모친 김성도 씨의 유언에 따라 이대ㆍ연대 사건보도를 접하고 6월에 자진해 대구교회를 찾아가 원리를 듣고 입교했다. 그 후 서대문 형무소에 계시는 참아버님을 면회하고 수난 상황에서 물심양면으로 큰 힘이 됐다. 지승도 씨는 담판기도 중에, “지금 또 한 고개를 넘어가고 있으니 놀라지 말고 선생님의 뜻대로만 순종하면서 항상 간절한 기도를 올려라.”는 하늘의 말씀을 받고, 주야로 무사 출옥을 위해 기도했다.(400)
3) 서울지검 송치와 서대문형무소 수감
참아버님과 제자들은 7월 13일 전원 기소돼 서울지검으로 송치됐다. 그리고 이날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됐다. 참아버님의 수인번호는 380번, 유효원 협회장은 390번, 김원필 씨는 1520번, 유효민 씨는 1175번, 유효영 씨는 1709번이었다.(400)
한국 감옥 1호인 통칭 ‘서대문 형무소’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6만여 평 부지에 자리했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열어, 1912년에 ‘서대문감옥’... 1950년 ‘서울형무소’로 개칭됐고, 1967년부터는 ‘서울구치소’로 불렸다. 개소(開所) 이래 80년 동안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애국지사와 각종 범법자 35만여 명이 거쳐 간 그 형극의 역사적 현장에서 참아버님과 제자들은 통한의 영어(囹圄)살이를 겪어냈다.(401)
일행을 한 끈으로 포박할 때, 참아버님께서 “영원히 떨어지지 못하게 하누나. 악착같이 싸워야지.” 하시며 유 협회장에게 “효원이 힘들지?”라고 하시니, “저희들 잘못 때문에 선생님까지 고생시킵니다.”라고 사죄를 올렸다. 참아버님께서는 부족함을 한없이 원망하고 흐느끼며 따르는 식구들을 포박된 손으로 악수하며 격려하셨다. 식구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전신의 피가 솟아 굳는 것 같은 기막힌 심정이었다.(401)
형무소 입감 때, 소장이 눈을 부릅뜨고 힐난하자 참아버님께서는 그의 은폐된 비리를 영적으로 간파해 지적하셨다. 교무과장이 조소할 때는, 반드시 그들을 굴복시키고 나가리라 다짐하셨다. 예수님이 로마병정에게 붙잡혀 빌라도 법정에 나가기 전에 간수들에게 희롱 당하신 것과 같은 수욕의 자리였다.(402)
태산이 첩첩히 가로막혔으면 굴을 뚫고 대로를 내서라도 간다는 것이었다. 기력이 다했을 때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면 협조하시고 책임져 주신다고 생각하셨다. 감방에 들어가서도 다리를 펴고 코를 골며 주무셨다. 또 보리밥이든 어떤 밥이든 주는 대로 다 잘 드셨다. ‘너희들이 나를 삼키지 못할 때는 수가 난다.’는 것이었다. 갖가지 고초를 당하실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험한 풍상을 겪어 나오셨는데 내 어이 이만한 풍상을 겪지 않으리오!’라고 생각하셨다. 공적으로 당한 사연이 많을수록 남이 갖지 못한 보화를 창고에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먹고 자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고 무엇이든 무서울 것이 없었다. 단지 하나의 걱정은 자신이 잘못함으로써 탕감길에 마이너스 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403)
4) 서대문 형무소 수형생활
재소자들은 참아버님에 대한 악질적이고 과장된 숱한 보도내용으로 인해 처음에 죄수인 자신들조차 상종할 수 없는 천하대죄를 진 주인공인 양 오인했다. 입감(入監)하신 날 수인들은 “문교주가 들어왔다는데” 하면서 수군거렸다. 이미 알아차리고 있던 옆 사람은 그의 입을 막으며 참아버님께 손가락질하면서 서로 놀라는 시늉을 해보일 정도였다.(404)
한두 주일쯤 지나자 모두 어려워하기 시작했다. 실제 참아버님의 언행을 통해 세상에 보기 드문 인격자로 깨닫게 됐다. 그 인격적 감화력은 마침내 여러 교도관들과 구내에서 잡역을 하는 기결수(旣決囚)들에게까지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404)
아침 일찍 일어나 보면 늘 기도하시는 모습이었다. 먹을 것이 있으면 자신은 안 먹고 먹여 주려 하셨고, 가장 나쁜 자리에서 주무시려 했다. 아침 식사 후 점심때까지 배고프고 지루한 환경에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 주시기 위해 장편소설로 말씀해 주셨다. 위하는 사랑으로 완전히 투입하셨다. 기결수들의 스승이요 부모가 돼 사랑으로 돌봐 주셨다.(404)
제일 문제 재소자가 말씀에 의해 달라졌다. 한 목사는 처음엔 “당신의 교리가 무엇인가?”라며 따지고 대들다가 점점 시간을 정하고 찾아와 친해졌다. 다들 아침이면 인사를 해오게 됐고, 편의제공을 위해 다투어 노력했으며, 자기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다.(404)
교도관들의 인식은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달라졌다. 처음에는 소문에 따라 흉악한 사람인 줄 알았다가 얼마 후에는 전혀 반항하는 빛이 없고 마냥 무던하게만 보이니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느꼈다. 얼마 더 있다가는, 특히 숱한 신사숙녀들이 날마다 빠짐없이 찾아와 최고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자, 무엇인가 저들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어 그렇겠지 하고 생각하게 됐다. 산의 바위와 같이 말이 없으시고 바다의 물과 같이 부드러운 모습이야말로 높은 덕성(德性)의 체화였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이다.(405)
게다가 옥고에 동반한 제자들도 악착같이 따르고 모시니 그 친부모보다 두터운 사랑의 출처가 어디냐고 물어왔다. 유 협회장에게는 젊은 선생과 연상의 제자 사이에 어쩌면 그렇듯 열정적인 연애를 할 수 있느냐고 궁금해 하며 선망(羨望)의 질문을 했다.(405)
참아버님과 김원필 씨는 감방 변기를 딛고 서서 매일 아침 서로 맞은편 옥사 창문을 통해 얼굴인사를 나눴다. 참아버님께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먼저 일어나 창밖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김씨가 가끔 늦게 일어나는 날 급하게 변기를 딛고 내다보면 그때까지 김씨가 얼굴을 내밀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참아버님 얼굴을 보지 않으면 하루를 보내기 힘들어했던 김씨의 마음을 잘 아시고 언제나 밝게 격려해 주셨던 것이다.(406)
참아버님께서는 외형상으로는 차이가 없지만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는 심연의 동기, 천상(天上) 만민(萬民)이 시봉(侍奉)해야할 주체성이 결정돼 있는 분이다. 그래서 침묵하고 있어도 영계의 증거와 협조 역사가 있었다. 선조들이 나타나서 몇 번 문아무개에게 가서 인사하라고 하고, 차입물이 들어오면 다 바치라고 호통을 치면서 영계의 법도로 훈계했다. 밥을 먹어도 정면에 앉아 먹지 말고, 먹게 되면 머리를 숙이고 먹으라고 지도했다.(406)
결국 한 달 이내에 소장이 나와 사과 인사를 하고 간부들도 점심 대접까지 하면서 정중히 존대했다. 더울 때는 수박, 참외, 아이스크림 등 음식을 가져왔고 편의(便宜)를 걱정하며 심부름도 자청했다. 그와 같이 하늘이 가는 길은 아무라도 점령하지 못하는 길이었다. 정의는 아무리 혹독한 핍박의 쇠사슬 가운데서도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하셨다. 힘들지만 하나님이 책임지고 가시는 길이기에 낙심하지 않으셨다.(407)
5) 기록적인 면회
식구들은 면회를 통해 지도받는 한편 참아버님과 같은 마음으로 고난에 동참했다. 면회 순번의 앞을 다투는 열성은 가히 놀랄 만했다. 면회가 허락되는 한 참아버님께서는 매일 면회장에 나오셨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상 최고 면회기록을 세웠다. 면회를 마치고도 돌아가지 않고 뒤의 대기자들 사이에 끼어들어 있다가 일행이 들어갈 때 절을 하고 손을 흔들고 야단하고서야 물러났다. 간수들의 밉살스럽다는 눈총도 개의치 않았다. 들고날 때 면회 법에 금지된 악수를 교도관의 호통도 아랑곳없이 잽싸게 주고받았다. 식구들은 그 시간이야말로 참아버님과 악수를 해볼 수 있는 천부(天賦)의 기회라고 알고 임하는 것인데, 그들이 이런 이면(裏面)사정까지 알 리 없었다.(407)
참아버님께서는 식구들을 미소로 대하시며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다. 조금도 근심 걱정하시는 기색없이 오히려 식구들과 그 가정을 위해 염려하셨다. “앞일은 걱정하지 마라. 하늘이 모든 것을 지켜 주신다.”고 하시며, 희망을 불어넣어 주시고 자신감을 갖도록 말씀해 주셨다. 혹시 보이지 않는 식구가 있으면 일일이 찾아 물어보셨다.(408)
식구들은 서로 면회하려고 경쟁했다. 새벽부터 면회시간을 기다렸다. 참아버님을 면회하고 오는 날이면 온종일 충만한 은혜 속에 살 수 있었다. 혹 꾸지람을 하시더라도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가 다시 찾아뵙곤 했다. 계원이 자주 면회 가는 사람들은 대강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 이름으로 우겨서 면회를 하기도 했다.(408)
형무소 당국자들은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다 들어오고 나갔지만 이렇게 사랑에 넘친 사람들은 도대체 보길 처음이다. 그 사랑의 출처가 어디냐?”고 했다. 면회장 입회교도관은 면회 온 사람 앞에서 “문 선생과 유 선생은 한국 최고의 인격자”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참아버님께서는 그때 면회하던 면회증을 갖고 있다면 그 가정의 보물로 간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409)
남한에 오셔서 새로운 7년노정 가운데 가장 고충은 성진님 생모 최씨의 반대, 그리고 최씨가 기독교와 하나 돼 일으킨 풍파였다. 일찍이 성진님 생모 최씨는 참아버님을 최고의 남자로 여기고 어느 여자 못지않게 호강시켜 섬길 테니 통일교회는 그만두고 가정에서 살자고 애원했었다. 그랬다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아담을 주관한 타락한 해와 입장에서 기성교회와 짝해 천도를 가는 남편을 비난하고 반대했다.(410)
부산 북부서와 대구서에 고소해 경찰력을 통해서 남편을 찾겠다고 온갖 악선전을 다 했으며 서울에서도 고발했다. 뜻을 모르고 남편이 자기 품에 안길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자체가 당초 문제였다.(410)
그 삼촌 최성모(신동아그룹창업자, 최순영 전회장의 부(父), 정권의 탄압으로 1999년 그룹 해체) 씨는 국난의 시기에 섭리 앞에 국가대표로 세움 받았으며, 부인 이득삼 씨와 두 딸 순실, 순화 씨와 둘째 아들을 통한 섭리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남편과 맏아들이 주동돼 내무부장관 등과 더불어 통일교회를 처결하려고 모의했고, 7ㆍ4사건을 배후 주도했다.(410)
7월 4일 당일도 성진님 생모 최씨는 교회로 난입해 참아버님을 고무신으로 구타하는 등 온갖 욕설을 퍼붓고 역사를 했다. 7일에도 찾아와 욕설을 퍼붓고 간판을 뜯어 둘러엎고 대문을 쳐부수며 소동을 벌였다. 어느 날은 아예 교회로 들어와 살려고 이삿짐을 싣고 오기도 했다. 그런 반대역사를 반복하던 중 그의 친정어머니와 두 오빠 등과 함께 몇 번 형무소에 면회를 왔다. 최씨는 참아버님을 보자마자 야단법석을 떨며 소란을 피웠다. 간수가 저지해도 혼자 울다가 웃다가 했다. 차마 얼굴을 들고 바라볼 수 없는 그 참담한 곤욕을 참아버님께서는 변명 한마디 없이 감내하고 계셨다.(410)
그러자 최씨는 “문씨네 종자는 안 받겠다.”며 온갖 협박공갈로써 이혼서에 날인을 요구했다. 참아버님께서는 “3년만 기다려 보라. 그러면 의심하던 것들이 다 지나갈 것이다.”고 권고해 보내셨다. 그러나 출감 후에도 찾아와 종용을 거듭했다. 그 일가의 최소한의 협조가 있었더라면 그녀는 실족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 이상의 통일교회 수난사는 없었을 것이다.(410)
6) 서울지법 법정 공판
1955년 7월 11일 지문식 변호사를 선임하고, 15일에 김사만 변호사를 선임했다. 21일에 적부심사 심리 1회, 26일에 적법심사 심리 2회가 있었다. 불구속으로 입건된 유경규 씨 등 수명은 불기소로 끝났다. 29일에 최순실 씨는 석방되고, 참아버님, 유효원, 유효민, 유효영, 김원필 씨는 병역(兵役)법 위반 및 징발(徵發)특별조치령 위반 혐의로 전원 서울지방법원에 회부됐다.(411)
9월 20일 오전 10시 반에 초심(初審) 공판(公判)이 형사 제1부 재판장 윤학로 판사 주심으로 정동(貞洞)의 서울지법 제4호 법정에서 열렸다. 담당검사는 강서룡, 변호인은 김사만, 지문식 씨였다. 김 변호사는 변론에 있어 논조가 정연하고 표현이 정묘했다. 지 변호사는 잔일처리에 장점을 보였다.(411)
구속 당시 병역법 위반과 불법감금 및 간통혐의는 아무리 조사해도 사실증거가 없자 초심 때 위와 같이 병역법 위반 혐의만 남아 적용됐다. 21일 결심공판에서 참아버님과 유효원 씨에게 징역 2년, 나머지 제자들에겐 각각 징역 1년6개월이 구형(求刑)됐다. 9월 28일에는 유효원 씨가 병보석(病保釋)으로 출감했다. 참아버님 감방으로 찾아가니 벌써 내다보고 계셨다. “어째 저 혼자뿐입니까?”하고 여쭈니, “그런 게지, 어서 가!”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들어가 여쭤도 같은 대답이셨다. 눈물이 나고 발길이 돌아서지 않았다. 다시 들어가면 좋을 심정이었다. 식구들의 환영 가운데 교회로 돌아왔다.(412)
호송버스로 실려와 대기실이나 법정을 들어오고 나갈 때, 양옆에 긴긴 행렬로 갈라서서 침통히 머리 조아려 가슴 깊은 한숨과 목멘 울음을 울었다. 해질 무렵 형무소 출발 때부터 울상이 돼 서성대며 끝까지 뒤를 쫓았다. 재판소의 구두닦이 소년은 “아마 어느 나라 왕이 잡혀 왔는가 보다!”라고 수군거리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았다. 또 법정의 입회서기는 “지금 문 선생은 말이 죄수입장이지, 형무소에 들어왔다고 해서 저렇게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죄수 나도 한번 돼 보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412)
수의 차림에 입정하신 참아버님께서는 기성교인들의 조소와 욕설을 탓하지 않으시고 의인의 의젓함과 늠름함을 보이셨다. 사건 심리 때, 잘못된 말은 서릿발같이 엄중하게 시정해 주셨다. 반대하던 교회와 나라 앞에 몰리고 쫓겨나 수의를 입고 쇠고랑을 차고 가시던 참아버님, 재판정에 섰던 참아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 한을 탕감해 드려야 할 인연 가운데 모인 자들이 바로 통일교회 식구들인 것이다.(413)
참아버님께서는 “교계가 합하고 수많은 가정, 수많은 사람이 합하여 민족적으로 공격해 삼천리 반도에 내가 설 자리가 없었지만, 또 삼천만의 조롱(嘲弄)과 비소(鼻笑)가 땅 위에 충천돼 있고 나는 홀로 서 있었지만, 내가 비바람에 부대끼고 불에 탄 나무같이 그을리더라도 타서 죽는 나무는 될 수 없다. 그을린 그 나무 가지에도 봄이 되면 새싹이 나올 것이다.”는 신념으로 울분의 상황을 극복하셨다.(414)
7) 무죄 판결과 출감
10월 4일 오전 11시에 윤학로 재판장 주심으로 언도(言渡)(=宣告)공판이 개정됐다. 유효원 협회장이 피고석에 서서 실감나지 않은 변론(辯論)에 답답하고 견딜 수 없어 진동역사를 했다. 이를 억제하지 못하자 참아버님께서 “효원이! 효원이!”하고 소리쳐 멈추게 하시기도 했다.(415)
물을 끼얹은 듯한 긴장감이 감도는 엄숙한 공판정, 식구들의 일치된 애절한 기도의 흐느낌만이 역사의 순간을 물들이는 판결의 순간이 왔다. 주심판사의 입으로부터 참아버님께 무죄가 언도됐다. 방청객에 앉은 식구들은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손과 손을 맞잡고 기합을 넣어 무언(無言)의 감사와 환희의 만세를 묵음으로 외쳤다. 유효원 씨에게는 벌금 5천환(1953년 2월~1962년 6월 화폐단위), 다른 제자들에겐 각각 징역 8개월이 언도(言渡)됐다.(416)
본건의 검찰공소로 10월 15일에 서울지검으로 회부(回附)됐고, 22일에는 고검으로 회부된 후 31일에 고법(高法)으로 회부됐다. 11월 14일 초심 후, 11월 21일에는 형사 제1부 이수욱 재판장 주심의 판결공판이 있었다. 이날 참아버님과 유효원 씨에 대한 검찰공소는 기각됐고, 유효민ㆍ유효영 씨에게는 집행유예 1년이 각각 언도됐다.(416)
그리고 12월 25일에 김원필 씨 가석방으로 사건은 최종 종결됐다. 그나마 김원필 씨의 실형(實刑)복역(服役)도 애당초 무모(無謀)한 사건을 주도한 당국의 최소한의 체면을 고려한 대표적 희생이었을 뿐이다.(416)
10월 4일 오후 9시 40분에 참아버님께서는 무고한 옥고 석 달 만에 무죄로 석방되었다. 출감 때 형무소장과 기성교회 원로목사인 교무과장이 특별면접을 요청해 위로를 드렸고, 교도관들이 배웅했다. 그들 중 나중 청파동교회 시절에 교회를 나온 이도 있었다.(417)
출감 당시 이수경 씨가 브로마이드 사진을 팔던 사람에게 사진기를 빌리고 경제사정으로 플래시 알 두 개를 사서 사진을 찍었다. 그중 하나는 불발이고 하나가 성공해 그 역사적 순간을 소중하게 남길 수 있었다.(417)
식구들의 기쁨과 감격은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 이상으로 컸다. 또한 뜻을 위해 변치 않고 결사적으로 싸워 나갈 것을 굳은 결의와 각오로 다졌다.(418)
7ㆍ4수난사건은 두 곡의 성가를 낳았다. 유효원 협회장이 수감 중 차입된 성경 한 모퉁이에 쓰다 남은 연필 그루터기로 적어 뒀다가 출감 후 손질해 곡을 붙인 노래가 「고난과 새생명」이다. 그 혹독한 수난의 생활 속에서 고난 받으시는 참아버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섭리역사와 미래의 소망을 생각하며 더욱 굳어지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또 황환채 씨가 청년식구 합숙 철야기도 시(時) 작사해 곡을 붙여 출감 직후 불러올린 노래가 「내 가오리다」이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나는 가겠다.’는 결의로써 지은 노래이다.(418)
기성교회와 정부가 하나 돼 참아버님을 제거하려고 도모했으나, 공판정에서 무죄 언도를 받고 석방됨으로써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한국 역사에 있어 비운의 사나이로서 사라질 줄 알았던 참아버님께서 거기서 또 출발하실 수 있었다. 무죄석방을 받았기에 기반을 잃지 않고 영육을 중심한 새로운 출발이 가능했다. 물론 잃어버린 것을 전부 찾은 자리는 아니었다.(419)
하나님께서는 참아버님을 치고 고생시키면서도 기독교를 보호 육성하셨다. 참아버님을 협조하시면 기독교를 다시 구해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양쪽을 다 보호하실 수 없기에 방관하셨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개인적으로 승리해야 한다. 부모의 자리에서 개인적으로 국가 십자가 환경을 극복해야 한다. 한편, 참아버님의 감옥생활은 지상지옥에서 하나님의 종적 심정권을 남기기 위한 제일 직단거리이다.(419)
하늘이 가는 길 앞에는 원수가 생겨나지만 반드시 그 길은 개척된다. 따라서 어떠한 수난 길을 가더라도 자기 혼자 간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가장 어렵고 비참하고 슬픈 자리, 죽고자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일체돼 사탄의 참소를 벗어날 때 아벨은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감옥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사탄도 싫어하는 인간 부류들이 모인 세계에서도 그들이 갖는 이상의 희망과 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사탄세계의 참소(讒訴)를 받지 않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새로운 세계까지 연결할 수 있는 새출발의 기원이 벌어진다.(420)
선한 입장에서 맞으면 사방을 대표한 축복의 때가 오는 것이기에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형무소 살이를 했지만 그럴수록 점점 강해지셨고, 크게 무장하고 안목을 키워 나오는 여정이었다. 하나님은 무자비하게 거꾸로 처박아 놓고 가르쳐 주지도 않고 관망하고만 계셨다. 거기서 나와 가지고 웃음을 웃고 기운을 내서 가게 되면 그때서야 어디로 가느냐면서 간섭하셨다.(420)
7ㆍ4사건 전후 무책임한 언론보도의 폐해는 치명적이었다. 신문잡지들은 당대 제일의 화제로 확대시켰다가 갑자기 꼬리를 감추기도 멋쩍은 듯, 한참 동안 심심파적(心心破寂=심심풀이)으로 없는 소리 있는 소리 주워 모아 지면을 얼룩 지웠다. 그러더니 기소(起訴)에 이르러 애당초는 문제도 되지 않았던 병역법 위반이 한 조항 구실로나마 남게 되자 결정적으로 풀이 꺾였다. 3개월 만인 언도공판에서 참아버님에게 무죄가 언도됐을 때는 그 내용 자체를 무시했다. 발표한 경우(조선일보, 경향신문, 10월 5일자)라도 1단 정도에 그쳤다.(420)
그 결과 통일교회는 와해된 줄 알았고 조작된 헛소문만 전국적 인상으로 남게 됐다. 설명을 해도 반대하고, 소문을 업고 법정문제가 되고, 옹호하면 매수했다고 선전했다. 그 타개 불가능한 누명을 쓰고 그것을 벗을 때까지는 말없이 소화하며 세월을 통해 실적을 가져야 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민족이 창자를 쥐고 배밀이(배를 땅에 대고 김)하며 통곡할 수밖에 없는 분하고 원통한 사연을 남긴 역사였다.(421)
한민족은 하나님의 축복과 세계 복지천국을 이룰 광맥(鑛脈)을 다 매몰시켰다. 그래도 참아버님께서는 성명조차 내지 않으셨다. 당시 격분한 협회 간부들은 법적 공세를 취하려 했다. 명령만 하시면 돌이킬 수 없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나 참아버님께서는 “치고 충동해서 빼앗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동시켜서 자연굴복시켜 나오는 것이 법도이다. 이제 개인적 시대이니 가정, 종족, 민족 시대를 거쳐 넘어야 된다. 말보다 사실, 변명보다 실적이 필요하다. 결과는 삼엄하고 냉정한 것이다. 옳고 그름과 승패는 사필귀정이다.”라고 타이르셨다.(422)
들어가실 때는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들어가셨지만, 나오실 때는 힘을 갖춰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웃고 찾아올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셨다. 그런 길을 가는 사람은 언제나 하늘이 보호한다는 것이다.(422)
8) 서대문 형무소 출감의 섭리사적 의의
서대문 형무소 수난 승리는 참아버님 중심한 섭리사적 노정에 있어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협회 창립 직후 기독교와 국가지도층의 반대로 인해 좌절된 기독교 2세권 중심의 섭리 재출발 기대를 다시 찾아 세우신 데 있다. 그것은 곧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 조성을 통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 재탕감복귀인 것이다.(422)
『원리강론』에 의하면, 일찍이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불신으로 인해 그 사명을 대신해 광야에서의 40일 금식과 3대 시험 승리를 통해 믿음의 기대를 세우셨다. 그리고 본래 가인 입장인 유대민족과 아벨 입장인 세례 요한이 세웠어야 할 실체기대를 그를 대신해 제자들을 통해 복귀하려 하셨다. 그런데 그들이 불신함으로써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게 됐던 것이다.(422)
예수님은 다시 40일 부활기간을 통해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신 후 회개하고 따르는 제자들과 가인 아벨의 관계를 설정하셨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실체기대가 복귀돼 비로소 예수님은 영적 메시아의 입장에 서게 되셨다.(423)
오늘의 참아버님 노정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참아버님께서 세례 요한적 입장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시기 위해 사탄과 직접 대립해 분립노정을 걸으셨다. 그리고 기독교를 대신한 입장의 통일교회 제자들을 내적 가인권으로 품고 하나 된 터 위에 옥중의 외적 가인권을 참사랑으로 굴복시켜 실체기대를 복귀하시게 된다.(423)
만약 그때 제자들이 배반했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옥고의 길을 가시는 참아버님과 절대적으로 하나 되고 옥중 가인권을 감동시킴으로써 가인과 아벨이 하나 돼 실체기대가 조성됐다. 그런 승리 기준을 세웠기 때문에 10월 4일 출감은 해방적 의미가 깊은 것이다.(423)
1950년 10월 14일 흥남 감옥 출감과 1955년 10월 4일 서대문 형무소 출감일이 있는 10월은 섭리적인 해방의 달이다. 단순한 출옥의 의미를 넘어서 처절한 고난의 탕감복귀섭리가 결실된 해방이라는 데 뜻이 있다. 그런 의미와 가치를 역사적으로 전승시키고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10월에는 축복을 많이 베푸셨다. 10월 14일 6000가정, 21일 777가정, 30일 6500가정 축복식 등이 그렇다. 또 10월 3일 세계통일국개천일, 4일 천승일, 5일 총영계영인해방선포일, 23일 총천주축복해방선포일 등 섭리적 기념일도 있다.(424)
특히 섭리사 가운데 7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100여 일 기간은 10월 4일과 14일을 기념하며 복역수(服役囚)와 같은 자세로 하나님의 심정적 동지가 될 조건을 세우는 의미기간으로 남아 있다. 민족으로 인해 참아버님 가슴속에 홀로 안고 계시는 그 깊고 한 서린 심정의 상처를 헤아려 위로 해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