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낭화 사랑 / 정구온
일평생 화분에 금낭화를 애지중지 키우시던 어머니
그 까닭을 여쭈었더니
아버님과 혼인하시던 날 그 집에 금낭화가 피어 있었단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란 꽃말처럼 겸손한 얼굴로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핀 금낭화
애틋한 사랑 조롱조롱 조로롱
금낭화꽃처럼 열두 자식을 낳고서도
행여 그 사랑 가뭇이 잊힐세라
행여 그 사랑 멀어질세라
수줍은 새악시의 모습으로
마당 가득 피어나던 금낭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약속인 듯
아버지 뒤따라 떠나가신 어머니
두 분의 애틋한 사랑이
마당 가득 조로롱 조로롱
봄안개 / 정구온
그대 곁으로 살며시 다가가 악수를 청합니다
호숫가에 삐쭉이 서 있는 서어나무도 건드려 보고
물푸레나무 푸른 줄기도 슬쩍 지나쳐 보고
보드라운 솜털을 감싸고 있는 목련에게 다가가 눈인사도 해봅니다
눈속에 포옥 파묻혀 있는 수선화에게도
쑥부쟁이에게도
그렇게 모두에게 인사를 나누고
마을 어귀로 갑니다
정자나무 밑에 홀로 외롭게 앉아있던
할머니
“당췌 사람 구경을 할 수 읍서
그래서 사람구경이라도 하려구
여기 나와 있능겨.”
딸이라도 되는양 부둥켜 얼싸안아주던
할머니 곁으로 가서
봄향기 가득 전하렵니다
이제 봄이 왔노라고
추운 겨울이 저만치 가고 있노라고
산수유 피는 마을엔 / 정구온
산수유가 피는 마을 끝자락엔
코티분 냄새 남기고 떠난
엄마 그리워
하늘로 창을 내고 사는 이가 있다
쏟아지는 별빛으로
마당에 그리움 심어놓고
무량무량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그리움 달랬었지
시집가기 전
코티분 냄새 풍기며 전해준
고쟁이바지
엄마 생각날 때마다 만지고
엄마 보고플 때마다 볼에 쓰다듬고
코티분 냄새 맡던
고쟁이바지
다 낡아 해질 법도 하련만
엄마 사랑이 깊어
그리움이 깊어
해지지도 않는가 보다
산수유가 피는 마을 끝자락엔
코티분 냄새 남기고 떠난
엄마 그리워
하늘로 창을 내고 사는 이가 있다
날마다 눈뜨고 나면 / 정구온
- 요양원 일기
“오늘은 24일입니다
아드님은 29일에 오신답니다.”
“집에 좀 가야 하는데 문 좀 열어 줄 수 있나요?”
“아드님이 오셔야 갈 수 있어요.”
깜빡깜빡 어르신을 위해 게시판에 써놓는 글씨
오늘도 뚫어져라 바라보며 손가락을 꼽으신다
바람에 그리움이 내달려가듯
허기진 마음 손가락 꼽으며
그 날을 기다리건만
날마다 눈 뜨고 나면 새옷을 갈아입는
오늘 날짜와 아드님 오는 날짜
기다리는 닷새는 자물통을
채운 듯 무심하기만 하고
창밖 저 멀리 기러기 떼도
흐트러진 V자로
애처로운 듯
꺼억 꺽 꺽꺽 맴돌고 있다
그리움은 홍등이 되어
- 요양원일기 / 정구온
그리움이 총총총 하늘 아래로 홍등이 춤을 춥니다
바람의 날개짓인양 살랑거리는 홍등은
어머니가 장독대에 심었던 봉숭아꽃처럼 붉디붉고
흔들리는 물결위의 홍등은 조각난 그리움이듯 아련합니다
세라복에 나비 달린 구두 신고
발레리나 꿈꾸던 모습도 백발이 된 검은 머리처럼 바랜 지 오래
오직 기다림 하나가 버팀목이 되어 오늘을 견디시는 어머니
“잘 지내셨어요?”
“너무 오랜만에 왔구나.”
“뭘 며칠 전에 왔었는데.”
“"아냐, 한 달도 넘었어.”
어제 본 아들도 한 달이 넘은 듯 여겨지고 볼을 부비고
가슴에 포옥 안겨드려도
허기를 채우지 못해
늘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일기장에 쓰시는 어머니
홍등이 그리움으로 춤추는 강변에서 어머니를 불러 봅니다
약력/대한해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