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
박갑순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넓게 깔고 어깨에 두를 낡은 수건도 준비했다. 낮에 만났던 친구들의 세련된 머릿결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앞머리에 새치가 많던 친구와 머리 모양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친구의 머릿결은 마치 샴푸모델 같았다. 나란히 미용실에 가서 한 친구는 염색하고 한 친구는 파마를 했다는 것이다. 미용실에 다녀온 지 오래된 내 머리에 자꾸만 손이 갔다. 염색을 미루었던 것도 후회스러웠다.
늘어나는 나이만큼 자연스럽게 생기는 흰 머리카락도 인정해야겠지만, 왠지 아직은 혼자만 간직한 비밀이고 싶었다.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그들 머릿결만은 못하겠지만, 흰 머리만이라도 감출 수 있다면……. 들뜬 내 기분과는 달리 딸은 염색해줄 일이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앉아서 자꾸만 시간을 늦추었다. 티브이 한 프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양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안쪽 머리부터 차근차근 바르라고 했는데 딸은 듬성듬성 거칠게 솔질을 했다. 약이 묻은 솔 끝을 그릇 가장자리에서 한 번쯤 정리하고 사용하면 좋을 텐데. 바닥에 염색약이 뚝뚝 떨어졌다. 신문지에 떨어져 번지는 염색약만큼 나의 화도 스멀스멀 전신으로 번졌다. 잘 바르는지 거울을 보던 눈을 감았다. 윤기 도는 검은 머리카락을 상상했다. “머릿결 참 좋다.”라며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친구들을 생각하며 행복감에 젖어들 때, 딸의 거친 손놀림이 목 부근에서 느껴졌다.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또다시 염색약 그릇을 받쳐 든 내 손에 약이 뭉텅 묻었다.
“에이, 그렇게 하기 싫으면 그만해.”
바닥에 깐 신문지는 돌돌 말아 버리고, 어깨에 걸친 수건은 세탁바구니에 힘껏 던졌다. 염색약까지 쏟아버리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하고 혼자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왼손 오른손을 번갈아가며 솔질을 했다. 뒷머리가 문제였다. 어깨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눈은 돌아가고. “그래 내가 너한테 부탁 안 한다 안 해. 니 엄마가 머리 허옇게 다니면 좋겠지!”라고 불과 5분 전에 큰소리쳐 놓고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참 염치없는 어른이 되었지만 낮에 친구들을 보면서 은근히 부러웠던 마음이 살아나 빗질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어렵게 염색약을 다 바르고 딸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욱 올랐던 화가 아직도 뻣뻣해서 느긋하게 기다릴 수 없었다. 헤어드라이어로 머리에 온기를 주고 시간을 당겨 감아버렸다.
그동안 모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시간이 흘렀다. 말없이 방에 들어갔다. 평소 같으면 잠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눈은 말똥거렸다. 불편한 밤이 깊었다.
다음날 아침. 딸아이의 눈치만 살폈다. 거울 앞에서 외출 준비를 하는 딸의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을 해야겠는데……. 어른답지 못하게 화를 냈던 자신의 부끄러움만 염색된 까만 머리카락처럼 내비쳐졌다.
그 후, 약속이나 한 것처럼 흰 머리가 보기 흉하게 자랄 때까지도 염색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한동안 빗질을 할 때마다 정수리 부분에 쏙쏙 올라와 있는 흰 머리카락이 눈에 거슬렸다. 미용실에 가면 될 일이지만 아직은 나의 흰 머리카락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말했다.
“엄마, 염색해 드릴까요?”
“그래? 미용실에서 염색할 때 지불하는 돈 반절 줄게.”
솔질하는 딸의 손길이 유난히 부드러웠다. 염색 때문에 불편했던 날을 기억하는 것이리라.
내 흰 머리는 불혹을 넘기면서부터 생겼다. 그만큼 마음도 깊어지고 넓어져야 하는데. 어린 딸보다 못한 엄마가 되었다. 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슨 생각이 올라오고 있는지 먼저 들여다보아야 했다. 그리고 좀 더 긴 호흡을 해야 했다. 그러나 혼자 하는 염색처럼 늘 어설픈 감정 조절이다. 보기 흉한 흰 머리를 염색해서 검은 머리로 만들 듯 조절이 안 되는 부끄러운 내면을 좀 더 여유롭고 품위 있게 색칠하는 법은 없는 걸까?
약속한 수고비를 딸의 손에 가만히 쥐어주었다. 어른스럽지 못했던 엄마를 용서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얹었다. 딸은 겸연쩍게 웃으면서 손을 잡았다.
“엄마, 염색 정말 잘됐다!”
“그럼, 누가 해준 염색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