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열전 19-4
제19대 숙종(이순)의 여자들
장희빈과 넘 진하게 대화를 하고 나니
좀 허한 마음이 든다.
왜 그럴까~?
측은지심이 들어서?
장희빈 귀신에게 반했나?
그건 아닌 것 같다.
어찌 감히 왕후를...^^♡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
숙종의 세번째 왕비다.
숙종 13년(1687년) 9월
경주 김씨 김주신과 어머니
임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종 28년 나이 16살에
44세인 숙종과 혼인했다.
26살 차이로...
참 거시기하다.
좀 부럽기도 하고 이러다 뼈도
못추리는 수도 있으니 조심!
왕비 간택은 당시에 필요 충분
조건이 자녀를 낳을 수 있냐는 것이고
조혼풍습으로 처녀가 나이를
20살 넘기기 힘든 시대였다.
그리고 왕이 뭐 때문에
나이든 여자를 좋아했겠는가~?
나이차가 최고로 난 왕은 영조다.
66살에 15살의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이 했으니 말이다.
66 - 15 = 51...
흠~ 흠~
갑자기 말이 안 나온다.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
앞의 인경왕후나 인현왕후처럼 자녀가 없었다.
영조 33년에 71세까지 사시다가 가셨다.
인원왕후 시호는 혜순자경헌렬광선현익강성정
덕수창영복융화휘정정운정의장목인원왕후
(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
福隆化徽靖正運定懿章穆仁元王后)이다.
읽다가 숨넘어 가겠다.
1701년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곧바로 간택되어 다음해인 1702년
(숙종 28년) 16세 때 왕비에 책봉되었다.
아버지는 경주 김씨 경은부원군 김주신,
친척들은 소론이었으나 자신은 당파가 없었다.
당파에 염증이 난 숙종이
무당파(?) 집의 딸을 선택한 것이다.
무당파(無黨派)?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무림방파가 아니고,
무피아 앞에 있는 무당들의 파도 아니다.
무당파는 '당파가 없다'는 것이다.
* 無彼我는 '피아(너와 나)가 없다'는
의미이지 '마피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너도 없고 나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와서 자연스럽게 지내라는 뜻이다.
누구는 'self house'라고 빈정(?)대기도 한다.
누구나 무피아에 오면,
주인이 손님을 위해서 뭘 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 스스로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원왕후의 간택은
당시에도 약간의 논란을 일으켰다.
아직 노년이 되지 않은 숙종의 나이와
국모(國母)의 자리를 비워 두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유교적 명분 때문이다.
숙종이 언젠가 새 왕비를 맞는 것
그 자체는 별 논란없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일렀다는게 문제였다.
사가에서도 정실 부인이 죽으면 도의상
3년상은 치르고 새장가를 드는 게 관례였고,
숙종의 조상인 선조와 인조도
각각 계비를 들이면서 이 원칙은 지켰다.
그런데 숙종은 어떤가~?
인현왕후가 죽은 지 1년도 안됐는데도
왕비 간택을 서둘렀던 것이다.
좀 급했겠지!
성질도 급한 분이시니...^^
결국 판윤 이인엽이
"간택을 나중에 하든가 정 지금 간택을
해야겠으면 처자를 별궁에 모셔 두었다가
즉위시키시던가 하여튼 인간된 도리로
마누라 상 정도는 제대로 치르고 장가가시죠?"
하고 돌직구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자 역시나 성질대로 발칵 뒤집힌 숙종은
그 자리에서 이인엽을 파직시켜 버리고 만다.
또한 간택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사실 숙종이 제일 마음에
들어했던 규수는 맹만택의 딸이었다고 한다.
인현왕후, 장희빈, 숙빈 최씨의 캣파이트에
질려 있었던 숙종은 규수의 도덕성과 순종을
특히 강조했는데, 맹만택의 딸은 그런
숙종의 구미에 딱 맞는 규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규수의 외할아버지이자 덕흥대원군의
5대손이었던 이홍일이 평소 사치스러운
생활 습관과 거만한 언행으로 사람들에게
미움받던게 결정적인 결함 사유가 되어
결국 맹만택의 딸은 탈락하였다.
외할아버지 때문에 왕비 안 된 것을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그리고 대신 간택된 것이 당시 순안 현감이었던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였다는 것이다.
왕비는 아무나 되나~? ㅎ ㅎ
조선시대에도 인사검증 시스템이
지금보다 더 치밀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급하게 결혼한 것 치고는 숙종이 어린
인원왕후를 특별히 총애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인원왕후는 엄격한 궁중생활,
장난 아니게 까탈스런 나이 많은 남편,
나이 차이 별로 안 나는 의붓 아들들 사이에서
마음 고생이 무척 심했던 것 같다.
입궁하자마자 1년 만에 쓰러진 것을 시작으로
숙종이 사망할 때까지 종기, 피부병, 전염병 등
이런 저런 수많은 병을 달고 살았다.
그런 탓에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왕비 시절 인원왕후에 대한 기록은
"중궁(中宮)이 무슨 무슨 병을 앓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내가 몹시 기쁘다" 라는
숙종의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발언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피부병을 핑계로 입궁한지 7년 만에
소박 맞고 경덕궁으로 쫓겨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와 비교하면 그렇다고 딱히 숙종과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고 그냥 존재감 없는
왕비로 무난히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과의 사이에 후사는 없었다.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세자 윤이
경종으로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당시 왕실에는 인원왕후보다 윗대의 대비들이
없었기에 34살 나이에 왕실 최고 서열이 된 것.
이때까지만 해도 왕비 시절과 다름없이
그냥 조용히 살아갈 줄 알았으나..
바로 다음해인 1721년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과
뒤 이은 신임옥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론과 소론의 아귀다툼이 시작되면서
인원왕후 역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입장상 이 암투를 피할 수 없게 된다.
1721년 신왕(新王) 경종은 후사가 없었지만
아직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경종과 사이에서 후사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17세의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
숙종의 총애와 노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세자 시절 경종의 지위를 흔들었던 밉살스러운
시동생 연잉군 대신 소현세자의 현손이자
밀풍군의 장남이며 경종의 9촌 조카인 관석을
경종의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올릴 계획을 세웠다.
이를 듣고 몹시 놀란 노론은 선의왕후의 계획이
더 구체화되기 전에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선빵을 치기로 결정했다.
당시는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의 제당파,
세자 균(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남이 일부의 형당파가 있었다.
정언 이정소의 상소를 시작으로 대계(大計) 즉
후사를 정할 것을 경종에게 강하게 요구를 한다.
더군다나 새벽 2시에 김창집, 이건명, 민진원 등
거물급 노론 대신 13명이 창덕궁 시민당으로 몰려와
어서 빨리 국본을 정하자며 왕을 반 윽박지른 것이다.
이쯤 되면 명색이 왕조국가인
나라가 맞나 참 의심스럽다.
저 어떤 분처럼,
"이거 막가자는 거죠?" 이다.
연잉군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노론 대신들이 요구하는 국본은 물론 연잉군이었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그 모든 것을
말 없이 묵묵히 듣고 있던 경종이 결국 굴복했다.
김창집 이하는 더 나아가 대비인 인원왕후에게까지
그 증거로서 직접 손으로 쓴
수필을 받아내자며 경종을 들볶았다
이 때 청을 받은 인원왕후는 경종에게 수필 2장을 내주었는데 1장은 한문 해서체로 "연잉군",
다른 1장은 한글로 "효종 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뿐이니,
어찌 딴 뜻이 있겠소" 라고 씌여진 것이었다.
어찌 대안이 있을 수 있는가~?
날이 밝은 뒤에야 소론은 노론 대신들이 벌인
엄청난 짓을 알고 광분하여 뒤늦게 떼거지로
몰려와 왕을 협박한 노론 대신들을 처벌하라 한다.
하지만 되려 총대를 메고 상소를 올린 소론 유봉휘,
그런 유봉휘를 지원사격한 조태구만 탄핵을 받는다.
연잉군으로서는 태종 이후 조선왕조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세제(王世弟)가 된 것이며 연잉군을 후사로 삼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경종 대신 연잉군이 왕세제로 즉위하는 데 쐐기를
박는 역할을 담당한 게 인원왕후였던 셈이다.
영조가 왕세제가 되었는데
인원왕후는 영조를 보호하였다.
박상검 사건이 일어나 경종과 왕세제 이금이
불화가 생겼는데 이를 안 대비 인원왕후는 자교를
내려 처벌을 감행해 위기에 몰린 영조를 구했다.
영조의 등극 이전에 인원왕후는
대비로서 권력을 경종에게 넘기고,
병약한 경종의 후계로 영조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언문교지를 내려
영조를 양자를 삼고 왕세제를 책봉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영조 등극 이후
후한 대접을 받으며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71세까지 장수하면서...
인원왕후는 왕실의 법도를 엄하게 가르쳤다.
일례로 대천록에 따르면 영조 후궁인 숙의 문씨가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함부로 대들었다.
당시 궁중 예법상으로 세자의
어머니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인원왕후는 이를 알고 노발대발하여, 세자와
영빈 앞에서 숙의 문씨의 종아리를 때렸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다.
요즘 같으면 재깍 요양원으로 보내질 것이다.
치매라고...^^
혜경궁 홍씨도 한중록에서 인원왕후를
"궁중예법을 잘 지킨 사람"이라고 적었고
궁중의 예법을 통해서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게 단도리를 잘 하셨다.
인원왕후님, 줏대가 있으셨다.
죽기 전에 아버지 김주신과 어머니
가림부부인 조씨에 대해 회고하고 그리워하는 <선군유사(先君遺事)>와 <선비유사(先妣遺事)>
를 남겼다.
아버지 김주신,
"궐에 드나드실 때마다 신은 신발 코끝만
보고 다니며 곁눈질 하시는 법이 없어 10년이나
모셨던 나인조차 얼굴을 못 알아보시더라"거나,
왕비인 딸이 불러서 만나러 와서도 높은 사람을
대하듯 어려워하며 조금 드시라고 다과를 내놓아도 "궁에서 만든 귀한 음식인데 내가 어떻게 함부로
입에 댈 수 있겠는가"라며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어머니 역시 딸을 만나러 궁에 들어 왔다가
궁 안에서 하루 자게 될 때도 딸보다 먼저 일어나서
침전 밖에서 기다리거나 이야기 할 때도
궁 밖에서 들은 이야기를 딸에게 꺼내지 않았다.
딸을 모시는 상궁이 들어 와서 뭔가를
이야기하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바깥으로 나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등 궁 안에서
극도로 몸을 사리고 딸 앞에서도 군신의 예를 차리며 처신에 조심했던 모습을 보면 짠하기 그지없다.
참~ 훌륭한 인원왕후님!
그리고 참~ 훌륭하신 친정부모님이셨다.
경주 김씨는 참 양반 김씨다.
경주 최씨와 경주 이씨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친형제지간처럼...
인원왕후님이 저렇게 현명하게 하신 것은
친정부모님 덕이 아닐까~?
그분들을 위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짝~ 짝~ 짝~"
내일 또 계속 됩니다.. *♡*